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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서관 기행 - 오래된 서가에 기대 앉아 시대의 지성과 호흡하다, 개정증보판
유종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세계 도서관 기행」도서관이 비추는 불빛
"천국은 틀림없이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다. 새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물이 없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을 연 20세기 대표적 지성인 보르헤스가 남긴 말이다. 「장미의 이름」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는 그를 향해 "인류에게 장차 1천 년을 먹고 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라고 평하며 본인 소설에 등장하는 눈먼 도서관장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의 삶을 추적하다보면 도서관과의 운명적인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1세 때까지 수천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국립도서관에 자주 갔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한 후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위해 사상과 지식의 보급을 필수적으로 꼽으며 세운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에서 시력을 잃은 상태로 무려 18년 동안이나 관장으로 지냈다.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붉을 밝히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확고부동하고, 고귀한 책들로 무장하고, 쓸모없고, 부식되지 않고, 비밀스런 모습으로."
「바벨의 도서관」중에서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세계 도서관 기행」에는 세계 각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는 도서관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얽힌 흥미로운 인물, 에피소드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링컨, 마오쩌둥, 정조와 같이 도서관이 만들어낸 지도자가 있는가하면 빌 게이츠 같은 도서관이 만들어낸 천재도 있고, 조지 부쉬, 클린턴 등 도서관에서 사랑을 키워 대통령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이야기가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와 결혼할 때 지상 최고의 결혼 선물을 받았다. 안토니우스는 이 절세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로마의 정복지인 오늘날 터키 지역에 있던 페르가몬도서관의 20만 장서를 통째로 배에 싣고 와 바쳤다. 화재로 도서관 장서가 손실되어 상심하던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이곳의 왕국이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잘 말해준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원용하여 말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다.
P. 30
도서관이 나에게서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어딜까. 나는 도서관이 담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신체 건강에는 이롭지 않지만 정신 건강에는 매우 이로운 것. 그것이 공통점이다. 신체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과 정조가 선왕으로부터 '건강을 해치니 책을 그만 읽으라'는 금서령을 받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책을 읽으려면 가만히 자리에 앉아 한곳을 적당히 응시하고 있어야 하니, 근육이나 눈 건강에 이롭지 못한 것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담배와 도서관의 가장 큰 공통점은 한번 맛들이기 시작하면 끊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책에 어지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다니지 않는다. 기껏해야 어렸을 때 엄마 손 잡고 놀러 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험이나, 학창 시절에 심부름이나 과제를 위해 한두 번 들러본 경험밖에 없는 게 대부분이다. 문예창작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 내내 도서관 한번 가본적 없는 동기들도 있었으니 알만한 노릇이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도서관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도서관은 아이들에게 놀이와 재미가 있는 공간이고, 청소년들에겐 이야기와 경험이 있는 공간이며, 그밖의 사람들에겐 이야기와 삶이 있는 곳이다. 마치 지식의 영혼이 아름답고 순수한 시골 처녀처럼 미소짓고 있는 그곳을 잊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도서관이란 공부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박혀 생활과 밀착된 도서관을 경험해본 일이 거의 없다. 나만 하더라도 독서실과 도서관을 혼동하기 일쑤였다. 맥도널드보다 도서관이 많은 나라라고 불리며 지상 최대의 도서관 공화국이라는 미국은 실생활에 접근성 높은 도서관을 잘 구현해놨다.
영화 <투모로>를 기억할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야기한 재앙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집어삼키는 해일과 살인적 강추위가 뉴욕을 엄습할 때 시민들이 피해 들어간 곳이 바로 뉴욕공공도서관이다. 그만큼 이 도서관은 시민 생활과 밀착된, 아니 시민 생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도서관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곳이다.
P. 233
다행히도 국내에도 이런 노력이 보이고 있다. <세계 도서관 기행> 377페이지에 소개된 경기도 용인 수지의 '느티나무 도서관'은 "도서관에서 놀자!" 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5배 이상의 많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숲 한복판에 자리를 잡아 접근성을 높였다고 한다. "도서관에 왜 가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에 "멀어서 가지 않습니다" 라는 답변이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현명하고 용기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세계 도서관 기행>에 소개된 이집트, 영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중국, 일본 등 여러 국가의 도서관을 살펴보면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국내의 도서관의 환경은 상대적으로 열약해보이는 게 사실이다. 국내 도서관에 대한 소개가 가장 후반부에 나오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했었지만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규모나 장서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도서관에 대한 인식과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 중 하나의 빛줄기라도 발견한 것처럼 아주 즐거운 소식이 담긴 지면을 볼 수 있었는데, <세계 도서관 기행>의 저자가 바로 내가 사는 관악구의 구청장이며, 관악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걸어서 10분 거리 작은도서관'운동이 담긴 지면이었다.
내가 20년 넘게 살아오고 있는 구이기 때문에 더 많은 흥미가 생겼지만, '걸어서 10분 거리 작은도서관'운동 자체로서 너무나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에 도서관이 설치되고, 관악통합도서관시스템을 구축했으며, 해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북스타트 운동 등, 내가 평소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는 도서관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힘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니 새삼 감격했다.
그저 하나의 구에서 펼쳐지는 운동이긴 하지만 이 운동이 여러 곳을 밝히는 지식의 등대가 되어 다른 혹시나 놓치고 있을 정신 건강의 이로움을 챙기길 수도 있을 것이다.
2010년 필자는 국회도서관장으로 재직하던 중 관악구청장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지역에서 도서관 운동을 한번 전개해보자는 뜻도 출마 이유 중 하나였다. 어떤 일을 좁은 범위에서 성공시켜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16쪽 분량의 선거공약서를 대부분 도서관과 책 읽기 운동으로 꾸몄다. 주면의 걱정을 물리치고 과감하게 시도한 것인데, 놀랍게도 구민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그동안 경제 제일주의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지식 문화에 목말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따.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다. 경제만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경제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을 풍부하게 누리려면 지식 문화가 필수적 요소이다.
P. 440
선진국에서는 도시를 조성할 때 도서관 위치를 가장 먼저 결정한다고 한다. 그만큼 시민들의 지식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고 그 가치를 알아준다. 그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보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과연 미래를 탄탄히 다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가 미래를 놓치고 있진 않은가 하는 걱정이 든다.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도서관이, 나나 우리의 영혼에도 중심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 도서관 기행>은 여러 국가의 선진 도서관 문화에 물들어 지식에 대한 갈망을 꿈꿀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들이 비추는 지식의 불빛이 우리에게도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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