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빵집
이병진 지음 / 달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수많은 건강서적들이 입을모아 타깃을 삼았던 빵. 즉 다이어트의 적, 건강의 적, 식욕의 적, 을 책으로 모셔온 <맛있는 빵집>을 용감하다고 말할까 합니다. 

기나긴 운반 기간동안 저장성을 높이기 위한 방부처리, 보기만 좋은 표백, 도정으로 인한 영양손실로 인해 밀가루 음식이 공공연히 비난당하는 마당에 맛좋은 빵집 리스트와 맛있는 제품들을 정성들여 소개하는 이 책은 어떤 용도로 쓰여야할까요. 아무리 대단한 식감을 자랑하는 몇 겹의 빵 단면을 클로즈업 사진으로 들이밀어도 전 쉽게 넘어가는 타입은 아닙니다. 

아쉽게도 빵맛을 능가할, 도정한 수입밀의 해악에 대한 책을 훨씬 많이 섭렵한 상태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빵을 안먹거나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가능하면 재료가 간소한 식대용 빵이나 통밀, 호밀, 우리밀 제품을 고르죠. 다만 특별한 날, 달콤하고 화려한 제품으로 위안을 주기에는 빵만큼 안성맞춤인 음식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식지않는 참살이 열풍으로 빵집마다 구비하고 있는 건강빵들이 얼마나 구수하고 담백한지 모릅니다. 자연스레 <폴 앤 폴리나>의 '블랙 올리브빵'이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블랙올리브 조각이 간간히 양념 역할을 하지만, 전체적으로 담백하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느껴지는 빵을 조금씩 뜯어 먹다보니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뱃속이 편안하다.
 
가급적 천연에 까까운 재료를 사용하고, 빵의 발효를 돕는 개량제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폴 앤 폴리나>가 우리집 가까이에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공유합니다. 5년전 제과 제빵기술 자격증을 따면서 내가 해본 생각들이 바로 '빵의 교과서' 같은 것이었어요. 간식이나 과자빵을 최소로 하고, 건강하고 딱딱하게 만들어진 빵을 팔고 싶다는 꿈을 얼핏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동네의 모퉁이에서.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가능성이 남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 날이 온다면 <맛있는 빵집>이 가르쳐준 여러가지 빵맛을 보러 책을 뒤져야 할 거에요. 

견과류나 과일을 속재료로 만든 속편한 식사빵 말고, 호두 파이, 사과파이 같은 프랑스식 파이 전문점을 상상해본 적도 있습니다. 파이의 바닥은 바삭하고 질기지 않게 만들어서 '껍질도 맛있는 파이'를 전문적으로 구워내고 싶었죠. 어른과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케잌보다 건강한 둥근 음식. 게다가 호두와 사과는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열매들입니다. 




만약 정말로 문을 열 작정이라면 <빵빵빵 파리>에 가서 '타르트 라 본느'를 먹어봐야 합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한 느낌, 바닥에 조금만 채워진 아몬드 크림, 뭉툭하게 잘린 껍질을 벗기지 않은 사과, 큼직한 고구마, 황설탕이 녹은 캐러맬 향과 시나몬 향이 어우러진 이 타르트를 우선 맛봐야 할 거에요. 

물론 아무 이유없이 빵집을 찾아가도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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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맨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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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J.M 쿳시의 <추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슬로우 맨>역시 읽게 될 것이다. <슬로우 맨>을 읽는다면 노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물렁한 인간이 강철의 자동차와 부딪혀 한 쪽 다리를 잃은 충격만큼이나, 정통소설이 관념소설과 만나는 이상한 지점을 걷게 될 것이다.
 
'노년은 전투다. 대학살이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에브리맨>과는 공교롭게도 제목마저 유사하다. 매해 노벨 문학상의 후보로 점쳐지면서 영미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필립 로스와 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쿳시, 두 거장이 '노년'에 대한 소설을 차례로 내놓았다.  

<슬로우 맨>의 초반부는 분명히 <에브리맨>을 떠올리게 했다. 노년의 사랑과 욕망을 솔직하고 철학적으로 다루었던 점은 무서울만치 닮았고 신선했다. 충격적이었고, 쓸쓸했다.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밀로의 비너스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받들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에게도 원래 팔이 있었는데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팔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애절한 것으로 만들 따름이다. .. 어째서 여자의 파편적인 이미지는 찬미의 대상이 되지만 파편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잘린 부분을 아무리 말끔하게 봉해놓아도 그렇지 못하는 걸까? 
-<슬로우맨>에서 

이혼남에 자식은 없고, 가족 또한 없이 늙어간 이 남자가, 더 잃을 것이 없음에도 어느날 다리를 한 쪽 잃었을 때, 평온해야만 하는 노년은 여전히 상실 투성이의 전쟁터같지 않았을까. 모든 싸움을 포기한 인간에게도 운명은 일방적인 도전장을 내밀고 죽음의 카드를 음흉하게 숨기고 있는 어두운 도박판을 구경하는 기분. 이것은 <에브리 맨>의 노인이 꾾임없이 올랐던 수술대 위에서 깨어나지 못한, 전혀 장대하지 않았던 죽음과 거의 흡사하다. 

젊고 싱싱한 여인에 대한 나이와 무관한 욕망으로 낯 뜨거운 거래에서 실패했던 <에브리맨>의 노인은, 고루하게도 자신을 돌보는 간호사에게 조건없이 빠져버린 <슬로우 맨>과 별 차이점이 없다. 그들은 열심히 살았던 바보같은 노인들이다. 운명에 끌려다닐지 순응할 지를 두고 죽기 직전까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면, 젊은 날 일부러 무거운 짐을 질 필요는 없을것 같다. 평온한 노년기는 사실 환상이거나, 부자연스럽게 거세된 무엇일거라는 생각이 불현 든다.
 
<에브리맨>은 압축된 문장으로 비대해진 노년의 환각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반면 <슬로운 맨>은 매우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 점은 두 소설이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이유다. 소설의 정통 기법이라면 시간과 묘사, 사유로 쌓아올린 견고한 탑같은 <에브리맨>같아야 할것이다. 하지만 <슬로우 맨>은 도저히 진위를 가릴 수 없는 환상적 장치를 도입한다. 

이미 쿳시의 전작에서 제목으로 쓰였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란 늙은 여작가가 그의 불구의 삶에 무단 침입하면서 노년의 욕망이, 아니 이 소설이 어떻게 읽혀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한다. 옮긴이는 그것을 '예술에 관한'이라고 단정지었지만 지금으로서 나는 그저 내버려 둔다. 해석하는 순간, 내가 만든 틀에 맞지 않을 그 무언가가 슬며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다. '관념'그대로 놔두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 

소설은 더이상 순진한,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색하는 인간을 위한 철학의 장이며, 소설의 범주를 시험하는 교수대이다. 소설 안에서 소설은 죽고, 노인의 이야기에서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노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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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엔젤 - 나는 머리냄새나는 아이예요
조문채 글, 이혜수 글.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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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머리냄새나는 아이예요.

"너는 머리냄새나는 아이다. 꼭 기억해라. 가난하거나, 더럽거나, 다리를 저는 아이를 보거든
아참! 나는 머리냄새나는 아이지! 하고…….
그러면 그 아이들과 네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가재는 이마로 오줌을 눈대요.

<작은 생물의 세계>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가재는 이마에 오줌구멍이 있습니다.
큰일날 뻔했습니다!
사람도 이마에 오줌구멍이 있다면
변기통에 머리르 쑤셔박고 오즘눠야 했겠네요.
아기들은 이마에 기저귀를 차야 할 테고
오줌 자주 싸는 아이는 이마가 마를 날이 업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곤란한 것은 빤스를 머리에 입을 뻔했잖아요!





<너의 자궁을 노래하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이 2010년 볼로냐 국제도서전 일러스트 부분의 상을 받고 새얼굴을 했습니다. 당시 문화부는 '책 제목으로 쓰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경고조치까지 내리는 불합당한 자세를 보였답니다. <100% 엔젤>이라는 다소 모범적이고 착한 제목으로 선보여지긴 했지만 '자궁'을 노래할 수 밖에 없는 충분한 영감이 발휘되는 책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이어졌던 딸과의 일기쓰기. 일명 마빡소녀 조문채(엄마)와 배추벌레 이혜수(딸)가 이 책의 공동 저자입니다. 거기다 현재는 뉴욕 '스쿨 오브 비쥬얼아트'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고 있다는 장성한 배추벌레의 특별한 그림까지 곁들여 집니다. 과거가 현재가 함께 만들어 아름다운 냄새가 납니다.







한글 가르칠 생각은 조금도 못했다던 마빡소녀(엄마)가 길러낸 딸치고는 대단한 문장력을 선보이는 딸입니다. 이름조차 엉터리로 써왔다는 아이의 글자를 잡아주며 시작된 일이었지만, 글자를 못배운 아이가 생각을 못배우는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영재교육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언어로의 이른 입문에 재를 뿌리는 예가 되겠지만, 요새 저도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두 딸을 둔 글쟁이 가족의 귀농생활을 그린 <문호리 지똥구리네>엄마도 문맹의 답답함을 경험하게 하고 스스로의 강력한 '필요'에 의해서 한글교육을 시켰습니다. 뭐가 맞다고 무가르듯 나눌순 없겠지만, 두 권의 책은 확실히 '행복하게' 키우는 방법을 암시해 줍니다. '똑똑하게'가 아니라요.

바로 아이들에게 '지식'말고 '영감'을 주면서,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면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법에 대한 힌트가 되는 책들입니다. <문호리 지똥구리네>는 자연에서, <100% 엔젤>은 소통으로 말이죠. 

똑똑하고 바른 아이의 엄마, 자유롭고 따뜻한 아이의 엄마 중 고르라면, 두고두고 고민할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두 돌이 지난 지금까지, 전 전자이고 싶었던게 확실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똑똑하고 바르면서도 자유롭고 따뜻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모든 걸 목표로 키운다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해서 엄마는 돈 벌러 멀리 가고 아빠는 어딨는지도 몰라 이모네 집에서 사는 짝을 둔 아이에게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려고 너무 나서지 말아라. 그건 네 짝에게 돌아갈 사랑을 가로채는 일이기도 하단다. 남의 사랑을 훔쳐서야 되겠니?"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내 짝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저 '친구에게 잘해줘라'라는 정도겠지요. '너는 머리냄새나는 아이다' 대신 '거봐, 자주 감아야겠지?' 겠죠. 한 수 배웁니다. 영감은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상황에서도 건질 수 있다는 것. 특별한 외출이나 여행이 아니어도, 조금 일찍 한글을 떼고 혼자 책을 줄줄 읽게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할 일은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라고만 가르쳐도 좋은 엄마일 수 있다는 사실. 자유롭고 따뜻한 아이의 엄마가 되려면, 자유롭고 따뜻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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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다르게 사는 사람들
유인경.설원태 외 지음 / 경향신문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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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한 풀밭을 들어 올렸다. 푯말은 <who? 다르게 사는 사람들>.
도서관에 가면 작고 가벼운 책 한 권 쯤은 골라 온다. 어떤 가방에도 손쉽게 들어간다. 공원 벤치에서 아이가 무릎 베개를 하고 잠든 동안 책을 읽어내린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지난 일 년간 인터뷰한 글모음이다. '행복한 삶을 사는 일상의 혁명가들'이란 공통분모 아래 엮인 인터뷰이들. 소설가 김훈, 변산공동체학교, 진행자 송해, 안철수, 르 클레지오, 홍석천 등. 면면이 다채로울뿐 아니라 대단하다. '우리'와 한 눈에도 다르다. 굴지의 사람들이 소수의 희망을 말하기도 했지만 유명인들이 대다수다. 일종의 성공 반열에 오른 이들 말이다. 이 책은 그들의 남과 다른 삶의 방식에 포커스를 맞춘다.
 
제멋으로 살면서 성공한다는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평범한 우리에게 판타지같이 보이는 사람들. 목을 늘어뜨리고 잠든 '아이'의 무게에 그들의 날개가 부럽다못해 경이롭게 느껴진다. 잠시 잠깐인듯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책의 주인공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다. 결국 그들이 '다르게'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 김훈은 원고지에 연필로 소설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로를 기계문명에 낙후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그가 만들어내는 문장에서 잘 드러난다. 주어와 서술어로만 소설을 써내고 싶다는 불가능할 법한 꿈을 지닌 사람. 그래서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싶다는 오로지 김훈다운 사람. 
그를 흉내낼 순 없겠지만 아날로그 속에 숨겨진 근원적 아름다움을 되짚어볼 순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책이 꽤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김훈을 포함한 1부 행복한 아날로그, 2부 생각을 바꾼 일상의 혁명가, 3부 한국은 내 운명. 이렇게 세 가지 소주제로 다시 나뉜다. 각각을 신문에서 떠듬떠듬 만났더라면 하루치 기사쯤으로 여겼을테지만 모아놓고보니 시너지효과가 대단하다. 일테면 숨겨놓은 작은 꿈에도 바람을 일으켜 보는 것이다. 물론 그게 또다시 타협으로 끝날지라도 '번뇌를 없애는 데는 고요만한 것이 없고, 부족함을 채우는 데는 근면함만한 것이 없다'는 백거이의 시처럼 우리는 부지런히 일을 저질러야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깨치는 한국화가 박대성 편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그의 불편당(不便堂)이라는 살림집이다. 천장이 낮아 들어갈땐 허리를 굽혀야 하고, 화장실도 떨어져 있어 번거롭게 오가야 한단다. 하지만 육체를 불편하게 해 정신을 깨우려고 불편을 즐긴다고 했다. 인간은 유목시절 걸으면서 진화했기 때문에 몸을 움직여야 두뇌의 회전이 빨라진단 사실을 귀동냥으로 들은적이있다. 그토록 당연시하면서 외치는 '편리'가 우리를 바보로 만들 괴물이 될 지도 모른다.
 
이 인터뷰이들, 알고보니 뒷짐지고 앞서가는 무서운 사람들이다. 냉장고를 없애고 찬 음식을 멀리하며 환경과 나 모두가 건강해지는 윈윈게임을 하는 사람들. 난 그들 중 누군가의 모방범이 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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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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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 (幻想文學 fantastic literature)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화씨 451>을 읽고 검색한 정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아두고 싶었는데 결국 지금의 판타지나 SF의 할아버지말 인것 같다. '지금은 F. 카프카·E. 카네티·M. 쿤데라, 라틴아메리카 환상소설가 J.L. 보르헤스로부터 G. 마르케스 등의 작품에서 환상문학의 현대성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한 걸 보니, 지금처럼 환상성을 기본으로 하는 예술장르의 선구적 작품들이 이에 속하나보다.
  

확실히 1950년에 <화씨451>의 초고 <방화수>가 씌여졌다는 건 선구적이고 예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2009년, 이 환상문학이 내 손으로 왔을 때는 이미 혁신성을 조금 잃은 뒤였다. 이미 많은 여타의 예술작품들이 그가 그린 세상을 리메이크 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재생되는건 현대에 어떤 의미를 낳기 때문이리라. 그 의미를 찾는 일이 이 번 독서의 중요한 과제다. 

답은 사실 매우 쉽게 드러난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작가의 대부분이 경고와 교훈을 염두하고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에 교훈을 담는 것보다 오히려 명확하고 자연스럽게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 리얼리즘이 설명하는 동안 판타스틱은 상상하면서, 재미와 교훈의 무게가 다른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60년 전의 이 소설이 비교적 현대성을 갖는 이유다.
 

교훈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상상이 아무리 낡아도 우리는 같은 도덕성을 끌어올린다. 과연 레이 브래드버리가 상상한, 책을 불태우는 직업인'방화수'가 지금 어떻게 읽혀질까. 책을 불태우다니? 분서갱유도 아니고 이 뜬금없는 설정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읽기 시작했었다. 현대와 혹은 펼쳐질 미래와 매치했을 때 비유나 상징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책에서도 긴 설교를 통해 잃어가는 책의 의미와 사라지는 사유의 과정들을 직접적으로 통탄한다. 이미 우리는 지식보다 정보력이 앞섰던 걸 자주 경험한다. 깊은 생각의 골은 지루한 강의나 고전의 몫으로 밀어놓고 시간을 죽이기 위한 영상이나 가벼운 책들로 교양을 쌓는다. 진정성을 담은 책을 외면하는 일이 책을 태워없애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없으면 사라지는게 책의 운명이니까.
 

책 말고도 다양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주변의 자연과 사람, 사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이 도리어 반사회적인 장애가 되버리고, 정부의 표적이 되기까지하는 암울한 세상이 펼쳐진다. 결국 '인간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물들은 세상과 싸우거나 사라져야한다.

"나는 열흘이면 아흐레 정도는 아이들을 학교에다 맡겨놓고 살아요. 그러니까 한달이면 사흘 정도는 아이들한테 부대낄 수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요. 그저 거실에다 몰아넣곤 벽면 텔레비젼 스위치만 켜 주면 그만이니까. 세탁기 돌려서 빨래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빨랫감들을 집어넣곤 뚜껑을 닫으면 그만이잖아요?"

저자가 상상한 '인간성'상실의 현장은 화들짝 놀랄만큼 우리 코 앞에 다가와있다. 이런 디스토피아적 환상이 60년 후 리얼리즘이 되었다면 차라리 그가 틀렸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상 유래없이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가 등장한 이 환상 소설이 더 이상은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히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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