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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맨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J.M 쿳시의 <추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슬로우 맨>역시 읽게 될 것이다. <슬로우 맨>을 읽는다면 노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물렁한 인간이 강철의 자동차와 부딪혀 한 쪽 다리를 잃은 충격만큼이나, 정통소설이 관념소설과 만나는 이상한 지점을 걷게 될 것이다.
'노년은 전투다. 대학살이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에브리맨>과는 공교롭게도 제목마저 유사하다. 매해 노벨 문학상의 후보로 점쳐지면서 영미 현대문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필립 로스와 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쿳시, 두 거장이 '노년'에 대한 소설을 차례로 내놓았다.
<슬로우 맨>의 초반부는 분명히 <에브리맨>을 떠올리게 했다. 노년의 사랑과 욕망을 솔직하고 철학적으로 다루었던 점은 무서울만치 닮았고 신선했다. 충격적이었고, 쓸쓸했다.
팔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밀로의 비너스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받들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에게도 원래 팔이 있었는데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팔을 잃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애절한 것으로 만들 따름이다. .. 어째서 여자의 파편적인 이미지는 찬미의 대상이 되지만 파편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잘린 부분을 아무리 말끔하게 봉해놓아도 그렇지 못하는 걸까?
-<슬로우맨>에서
이혼남에 자식은 없고, 가족 또한 없이 늙어간 이 남자가, 더 잃을 것이 없음에도 어느날 다리를 한 쪽 잃었을 때, 평온해야만 하는 노년은 여전히 상실 투성이의 전쟁터같지 않았을까. 모든 싸움을 포기한 인간에게도 운명은 일방적인 도전장을 내밀고 죽음의 카드를 음흉하게 숨기고 있는 어두운 도박판을 구경하는 기분. 이것은 <에브리 맨>의 노인이 꾾임없이 올랐던 수술대 위에서 깨어나지 못한, 전혀 장대하지 않았던 죽음과 거의 흡사하다.
젊고 싱싱한 여인에 대한 나이와 무관한 욕망으로 낯 뜨거운 거래에서 실패했던 <에브리맨>의 노인은, 고루하게도 자신을 돌보는 간호사에게 조건없이 빠져버린 <슬로우 맨>과 별 차이점이 없다. 그들은 열심히 살았던 바보같은 노인들이다. 운명에 끌려다닐지 순응할 지를 두고 죽기 직전까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면, 젊은 날 일부러 무거운 짐을 질 필요는 없을것 같다. 평온한 노년기는 사실 환상이거나, 부자연스럽게 거세된 무엇일거라는 생각이 불현 든다.
<에브리맨>은 압축된 문장으로 비대해진 노년의 환각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반면 <슬로운 맨>은 매우 당혹스러운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 점은 두 소설이 구분되는 가장 분명한 이유다. 소설의 정통 기법이라면 시간과 묘사, 사유로 쌓아올린 견고한 탑같은 <에브리맨>같아야 할것이다. 하지만 <슬로우 맨>은 도저히 진위를 가릴 수 없는 환상적 장치를 도입한다.
이미 쿳시의 전작에서 제목으로 쓰였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란 늙은 여작가가 그의 불구의 삶에 무단 침입하면서 노년의 욕망이, 아니 이 소설이 어떻게 읽혀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한다. 옮긴이는 그것을 '예술에 관한'이라고 단정지었지만 지금으로서 나는 그저 내버려 둔다. 해석하는 순간, 내가 만든 틀에 맞지 않을 그 무언가가 슬며시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이다. '관념'그대로 놔두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
소설은 더이상 순진한,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색하는 인간을 위한 철학의 장이며, 소설의 범주를 시험하는 교수대이다. 소설 안에서 소설은 죽고, 노인의 이야기에서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노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