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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 ㅣ 담쟁이 문고
이순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그건 소가 사람처럼 대접받던 시절의 일이 아니라 나무가 나무로 대접받고 소가 소로 대접받던, 지금으로부터 두 갑자 전 갑신·을유·병술 연간의 일이었다.
'소가 들려주는 그들의 내력'임을 이미 얼핏 듣고 책을 펼쳤다. 난 흙과 풀, 그리고 소에 관심이 많은 황소자리다.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등장한 위의 문장에 완독을 결정한다.(여차하면 덮어버리는게 독서 습관이다) 도리없는 휴머니티나 생태주의쯤으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가 소로, 나무가 나무로 대접받던 그 시절 감성의 근원을 찾고자 한 것이 이번 독서의 표지판과도 같았다. 식탁에서 만나는 소가 가장 소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부정하고 싶진 않다) 소가 제 명을 다하고 죽는 일이 전혀 경제적이지 않지만 갑신·을유 때만해도 소를 키우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들 아다시피 밭 갈고, 짐나르고, 새끼를 배고 하는 것이 인간이 길들인 소의 일이였다. 집안의 잔치 때나 대학 등록금으로 큰 소를 팔기도 했다. 경운기가 없고 신작로도 안나고 자동차도 드문 시절, 소는 인간만큼 제 몫을 다해 밥을 벌어먹는 기특한 동물이었다.
흰별소, 미륵소, 버들소, 화둥불소, 홍걸소, 외뿔소, 콩죽소, 무명소, 검은눈소, 우라리소, 반제기소의 소15대와 차무집 4대가 전하는 <워낭>은 소와 소키우는 집 이야기이기도 하고, 두 갑자 전 갑신·을유·병술년 한국땅의 일이기도 하다. 이런 연대기적 흐름은 '밭이 아니라 산을 통째로 가는 것' 같았다는 무명소의 걸음만큼이나 힘세고 우직한 것이었다.
<워낭>은 그런 소설이다. 역사의 맥을 짚으면서도 절대 앞세우지 않고, 소를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절대 투정하지(여태 못했던) 않고, 인간의 소살림을 전혀 가엾이 여기지 않는 아주 자존심이 센 놈이다. 독자도 눈을 낮출 필요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하는 그런 책이다. 소의 내력이 바코드로 축약되는 지금에 그간 소들은 모두 금우궁으로 멀어져 갔지만 결코 아까워할 이야기가 아니다.
소가 얼마나 인간을 위해 않은 희생을 했고, 인간이 또 소만큼 열심히 흙을 일구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면 소설은 참으로 구태스러웠겠지만 작가의 말을 빌려, 소를 소대로 사람을 사람대로 그리려했던 직관이 빛났다.
크게 하는 일 없이도 늘 쌀밥만 먹고 사는 부자들과 지체 높은 양반들은 농부와 소는 배 속에서부터 일을 배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떤 일도 그런 것은 없었다.
이런 담백한 한 줄만으로도 필요의 울림을 전하는 <워낭>. 소가 화자로 등장할 때의 피할 수 없는 리얼리즘의 손상은 이 소설의 방향과 어긋날 듯 하기도 했지만, 쇼베동굴 속의 큰 뿔들소가 흰별을 찾아와 나눈 이야기는 그야말로 환상적 전복이었다. 그 때의 소는 '갑신·을유·병술 연간의 일'만이 아니라 뗀석기의 소가 지금의 식탁에 올라와 있는 낯선 전말을 보여주었다. 소가 사육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공생이었음을 알려주는 다섯 번째 꼭지는 잊혀지지 않는다.
'온가족이 읽는 소설'이란 상투적인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