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니었다면
김별아 지음, 이장미 그림 / 토토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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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을 쓴 김별아씨의 동화책입니다. 부드럽고 강한 그림입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둘도 없는 선생님이지만, 아이가 엄마의 선생님이기도 하다는 사실, 키워보신 분은 아시죠? 
아이가 엄마에게 가르치는 것은 참 많습니다. 인내, 망각, 구속력, 책임감, 교육열(약간은 농담입니다)-엄마 속에 숨어있던 모든 극한을 바닥부터 끌어올리게끔 만들죠. 다행히 <네가 아니었다면♥>은 상당히 긍정적인 방향을 향합니다. 



한밤중에 깨어나 젖을 먹이고 
칭얼거리는 너를 업고 집 안을 맴돌았지.
네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몰랐을 거야.
혼자 먹고 혼자 잠들 수 없는 너를 위해
엄마는 까만 밤을 하얗게 밝혀야 한다는 것을.

아이야, 네가 엄마의 선생님이야.

(전 속으로 이랬죠. 아이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니)



마지막 구절은 반복됩니다. 반복의 심심함을 넘어서 다분히 소설적 감흥이 생기는 건, 간난아기였던(엄마등에 업혀 있었던) 아이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키가 큰다는 거죠. 다이내믹 합니다. 아이가 숨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듯한 점증적 효과가 기대되는 책입니다. 아이나 엄마가, 다가올 상황들을 예측해보고 혹은 지나간 시간을 추렴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엄마'라고 불렀던 날, 투정이 늘어가는 아이, 달리기 시합에서 2등 도장을 찍어온 아이, 친구와 다투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엄마.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이만큼 처음 엄마행세를 하는 이에게도 모든 것들은 낯섭니다. 26개월 아이에게 엄마경력은 26개월 뿐이죠. 당황하고 아이를 나무라기도 합니다. 좀 살아 봤다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뇔 수 있는 말입니다. 

'아이야, 네가 엄마의 선생님이야'

광고에나 등장할만한 사소한 역발상이지만 아이와 엄마를 동등한 위치에 두었을 때 가능한 말입니다. '엄마를 위한 그림책'으로 보아도 무방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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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사과
송희진 글 그림, 이경혜 옮김 / 뜨인돌어린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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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현대적 우화물. <황금사과>. '욕심'에 관한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 예상된다.

이 책이 기대보다 많은 의미를 담는 법은 '상징'이다. '욕심'(황금)은 경계심(선, 금)을 불러오고 '단절'(벽)을 향해간다.
단절은 '오해'(이유없는 비방)을 낳고 오해는 눈덩이(괴물)처럼 부푼다.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오해를 풀고 벽을 부수는 일.







그걸 수행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호기심 많고, 고정관념이 없는 '아이'(혹은 아이의 성정을 가진)뿐이다. 아이라면 가져야할-어른들의 기대치는 역시 이런 천진함이다. 우화의 기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을 거칠게 잘라낸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우화는 큰 세상의 가장 작은 완성품일지도 모른다. 

욕심과 단절, 오해의 과정이 적나라하긴 하지만 충분히 되돌릴 수 있는 지점도 찾게 되리라는 기대도 해본다. 오해가 불러온 환상이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지 우화가 일러줄 수 있다면, 하고 바란다. 

혹시 어른들이 금긋고 사는 저쪽의 사람들이 정말 '심술궂고 못된,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 해도 '엄마가 말한 끔찍한 괴물'이라 해도 아이들이라면 닫힌 문을 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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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통찰 - 폄하와 찬사로 뒤바뀐 18인의 두 얼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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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대對중국 조공을 통해 고구려 경제를 지킨 장수태왕의 사례는, 다른 역대 왕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 고대 한국의 왕들이 중국에 조공을 했다는 사실관계를 접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한국은 자주성이 없는 나약한 나라'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실을 접할 때, 다른 왕들도 장수태왕처럼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조공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사 인물통찰/김종성/역사의 아침/2010.2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사춘기의 아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는 아버지가 실망스러웠더라도 세월이 좀 흘러 아버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를 이해한다면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될것이라고.

역사 수업이나, 역사 교과서가 선택적으로 제공하는(더 크게는 국가가 제공하는 조국의 역사) 정보를 순진하게 따를 만한 충정은없으므로 '장수태왕이 고구려의 위력을 만천하에 떨친 군주는 아니었고, 중국에 바친 조공이 일년에 1.6회가 넘었다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또 저자의 비유가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역사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므로 장수태왕, 강감찬, 이성계, 연산군, 이황 등의 역사적 위인들에 대한 대단한 폭로전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일테면 한 쪽으로 치우친 시소 게임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정당한 역사놀이의 시도로 보면된다. 영광스런 역사의 순간에 한치의 흠도 남기지 않으려는 국사교과서나 백과사전 상의 예우적 정보만으로 우리의 역사를 판단해 왔다는 사실을 조금 억울하게 여겨야 할 때이기도 하고, 이제 알 건 알아야 한다는 단호함이기도 하다. 

찬란한 고구려 번성기에도 조공을 바치고 사대를 해야했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예상만큼 버겁진 않았다. 오히려 당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사실들을 왜 진즉 가르치고 알려주지 않았는지가 의아할 뿐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대한민국이 열강에게 전혀 좌지우지 되지 않는 완전한 주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따르는데 하물며 그 옛날 이야기에 자존심 상할 일이 남았을까. 

강감찬이라는 무인을 활용하여 국민의 안보의식을 강화하고 국부통치의 정당성을 주지시키려했던 박정희 정권의 '역사 만들기'작업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모두 헛소리다'라는 헨리 포드의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역사가 승리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암묵에 수긍하지 않더라도, 과거를 바라보는 눈이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지극히 사적인 개인사로도 경험할 수 있다. 

오로지 일방적인 찬사나 폄하만으로 도배되었던 고정불변의 한국사는 매번 흔들리면서도 교육적 목적아래 정지해버렸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역사적 안목를 좁히는 불건전한 일이다. 한국역사 속 대표적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은, 두얼굴이 아닌 반쪽 찾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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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인문학 - 시인과 함께하는 물리학 산책
김병호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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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과학이 별의 구조를 분해하여 고유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나 역시도 스산한 밤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감상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물리학자라고 해서 시인보다 느낌이 강하거나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상상력은 드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 우주를 선회하는 회전목마를 탄 채로, 나의 눈은 백만 년 전의 빛을 볼 수도 있다. ..(우주에 대한)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 안다고 해서 우주의 신비함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진리란 과거의 어떤 예술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롭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왜 이런 것을 시의 소재로 삼지 않는가? 

-<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리처드 파인만의 말
과학 인문학/김병호/글항아리/2010.2


학문간의 통섭이 대두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어떤 과학자는 시인이었고, 또 어떤 시인은 현미경같은 눈으로 현상을 해부했다. 통섭이 와닿는 것은 이미 위대한 천재들은 시와 과학이 맞닿아 있다는 것, 인문학과 생물학(<인문학 콘서트>)이 두갈래가 아니라는 것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E=MC² 가, 중력이, 양자역학이, 상수가 얼마나 시적이며, 시인과 과학자가 본래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에 동의할만한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결의에 찬듯 쏟아내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시인이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사실을 써먹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가뜩이나 골치아픈 시에 진저리를 치고 말것이다. 과학용어들이 일종의 금기처럼 시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금기로 삼을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愛詩가로서 변명하자면 '태양 고도의 변화로 겨울을 맞은 우리집 안마당에 프렉탈적 눈송이가 중력의 작용으로 살포시 내려앉았을때', 그 모든 상황을 주시하던 시인은 태양부터 우리집 안마당을 꼬치 하나로 꿰는 직관으로, 과학적 탐구물로써 충분한 눈을 시라는 언어에 녹여내리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물론 관찰력과 직관력이 뛰어난)
 
<과학 인문학>의 저자는 과학이 추구하는 일과 문학이 통찰하는 분야의 동일함을 사랑에서, 무한에서, 시선에서, 상수에서, 양자역학에서 찾아냈다. 그가 인용한 과학적 용어가 불순물처럼 끼어든 시들(시인인 저자의 시를 포함해^^)은, 그의 말대로 툭, 불만스러웠지만 희소성만으로도 아름답고 익살스러웠다. "시인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라는 파인만의 질책성 질문에 대한 한 권의 성실한 답변이었고 유쾌한 시도였다.

현대의 문학은 대중문화와 어렵지 않게 통섭했지만(유하의 <무림일기>,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인 김언의 말대로 자연과학적 감수성이 한국시의 토양에는 부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어로 하나의 세계가 건축되길 꿈꾼다는 김언은 <소설을 쓰자>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시의 경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과학이 과학의 벽을, 시가 시의 벽을 넘는 지점은 '통섭'이 화두로 떠오른 인문학 부흥의 시대에 더이상 가로막이 아닐른지 모른다. 물리학으로 철학하고 물리학으로 시를 쓰고 물리학으로 문학을 바라본 <과학 인문학>은 통째가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다.

질량이라는 것은 에너지가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존재하는 형식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일이다.
 
시인과 과학자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바람을 사유할 것이다. 어쩌다 둘은 서로 다른 재능으로 세계를 탐험하게 되긴 했지만, 뉴턴이 찾아낸 만유인력의 공식(F=GMm/R2) 역시 일종의 언어라고 무심히 내뱉는 순간 과학을 향해 닫혔던 미닫이 문이 소란스럽게 열리곤 했다. 과학과 삶이 만나는 지점은 그보다 훨씬 수월했다.



피터 힉스가 말한 '힉스장'은 비어있다는 것, 곧 진공조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비어있다고 느끼는 것의 전부는 전 우주적인 요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이가 겪은 환멸의 생도 텅 비어버린게 아니라 삶 바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요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문학적 번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사랑' 앞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사랑은 에너지의 순환이다. 이것은 문학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아직 증명하지 못한 과학적 사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물리학도 시인의 말이니 믿어보자. 순수한 사랑이 혹은 욕망이 들끓는 에너지로 되어있고 그 에너지가 다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로 거듭난다는 사실은 문학이 하고 있는 사랑의 탐구와 진배없지 않은가.     

인간 의식의 도약, 도약의 첫발자국은 과학이 찍어도 좋고 문학이 찍어도 좋다는 저자에게 과학과 문학의 통섭은 이런것이었다. 
시와 과학 이 둘의 구동력은 같으며 아인슈타인의 시적 상상력의 언어가 단지 E=MC² 였을 뿐이었다고. 본래 완전한 둘이 아니란 말이다. 수학적 장애로 치른 수학능력시험(<인문학 열전>) 이후로 인연을 끊은 과학이 이제 막 시와의 맞선을 준비한다. 조건 좋고 물오른 결혼 적령기의 두 분야가 비록 쓰디쓴 첫사랑의 맛을 보았다해도, 바로 지금 하나의 문 앞에 원숙한 모습으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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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 담쟁이 문고
이순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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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소가 사람처럼 대접받던 시절의 일이 아니라 나무가 나무로 대접받고 소가 소로 대접받던, 지금으로부터 두 갑자 전 갑신·을유·병술 연간의 일이었다.

'소가 들려주는 그들의 내력'임을 이미 얼핏 듣고 책을 펼쳤다. 난 흙과 풀, 그리고 소에 관심이 많은 황소자리다. 읽은지 얼마되지 않아 등장한 위의 문장에 완독을 결정한다.(여차하면 덮어버리는게 독서 습관이다) 도리없는 휴머니티나 생태주의쯤으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가 소로, 나무가 나무로 대접받던 그 시절 감성의 근원을 찾고자 한 것이 이번 독서의 표지판과도 같았다. 식탁에서 만나는 소가 가장 소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부정하고 싶진 않다) 소가 제 명을 다하고 죽는 일이 전혀 경제적이지 않지만 갑신·을유 때만해도 소를 키우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다들 아다시피 밭 갈고, 짐나르고, 새끼를 배고 하는 것이 인간이 길들인 소의 일이였다. 집안의 잔치 때나 대학 등록금으로 큰 소를 팔기도 했다. 경운기가 없고 신작로도 안나고 자동차도 드문 시절, 소는 인간만큼 제 몫을 다해 밥을 벌어먹는 기특한 동물이었다. 

흰별소, 미륵소, 버들소, 화둥불소, 홍걸소, 외뿔소, 콩죽소, 무명소, 검은눈소, 우라리소, 반제기소의 소15대와 차무집 4대가 전하는 <워낭>은 소와 소키우는 집 이야기이기도 하고, 두 갑자 전 갑신·을유·병술년 한국땅의 일이기도 하다. 이런 연대기적 흐름은 '밭이 아니라 산을 통째로 가는 것' 같았다는 무명소의 걸음만큼이나 힘세고 우직한 것이었다. 

<워낭>은 그런 소설이다. 역사의 맥을 짚으면서도 절대 앞세우지 않고, 소를 화자로 내세우면서도 절대 투정하지(여태 못했던) 않고, 인간의 소살림을 전혀 가엾이 여기지 않는 아주 자존심이 센 놈이다. 독자도 눈을 낮출 필요없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하는 그런 책이다. 소의 내력이 바코드로 축약되는 지금에 그간 소들은 모두 금우궁으로 멀어져 갔지만 결코 아까워할 이야기가 아니다.

소가 얼마나 인간을 위해 않은 희생을 했고, 인간이 또 소만큼 열심히 흙을 일구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면 소설은 참으로 구태스러웠겠지만 작가의 말을 빌려, 소를 소대로 사람을 사람대로 그리려했던 직관이 빛났다. 

크게 하는 일 없이도 늘 쌀밥만 먹고 사는 부자들과 지체 높은 양반들은 농부와 소는 배 속에서부터 일을 배워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떤 일도 그런 것은 없었다.

이런 담백한 한 줄만으로도 필요의 울림을 전하는 <워낭>. 소가 화자로 등장할 때의 피할 수 없는 리얼리즘의 손상은 이 소설의 방향과 어긋날 듯 하기도 했지만, 쇼베동굴 속의 큰 뿔들소가 흰별을 찾아와 나눈 이야기는 그야말로 환상적 전복이었다. 그 때의 소는 '갑신·을유·병술 연간의 일'만이 아니라 뗀석기의 소가 지금의 식탁에 올라와 있는 낯선 전말을 보여주었다. 소가 사육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공생이었음을 알려주는 다섯 번째 꼭지는 잊혀지지 않는다.
 
'온가족이 읽는 소설'이란 상투적인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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