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인문학 - 시인과 함께하는 물리학 산책
김병호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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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과학이 별의 구조를 분해하여 고유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나 역시도 스산한 밤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감상을 떠올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물리학자라고 해서 시인보다 느낌이 강하거나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상상력은 드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다. 우주를 선회하는 회전목마를 탄 채로, 나의 눈은 백만 년 전의 빛을 볼 수도 있다. ..(우주에 대한)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 안다고 해서 우주의 신비함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진리란 과거의 어떤 예술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롭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왜 이런 것을 시의 소재로 삼지 않는가? 

-<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리처드 파인만의 말
과학 인문학/김병호/글항아리/2010.2


학문간의 통섭이 대두된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어떤 과학자는 시인이었고, 또 어떤 시인은 현미경같은 눈으로 현상을 해부했다. 통섭이 와닿는 것은 이미 위대한 천재들은 시와 과학이 맞닿아 있다는 것, 인문학과 생물학(<인문학 콘서트>)이 두갈래가 아니라는 것을 체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E=MC² 가, 중력이, 양자역학이, 상수가 얼마나 시적이며, 시인과 과학자가 본래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에 동의할만한 증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결의에 찬듯 쏟아내는 리처드 파인만의 말처럼 시인이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사실을 써먹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가뜩이나 골치아픈 시에 진저리를 치고 말것이다. 과학용어들이 일종의 금기처럼 시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금기로 삼을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愛詩가로서 변명하자면 '태양 고도의 변화로 겨울을 맞은 우리집 안마당에 프렉탈적 눈송이가 중력의 작용으로 살포시 내려앉았을때', 그 모든 상황을 주시하던 시인은 태양부터 우리집 안마당을 꼬치 하나로 꿰는 직관으로, 과학적 탐구물로써 충분한 눈을 시라는 언어에 녹여내리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물론 관찰력과 직관력이 뛰어난)
 
<과학 인문학>의 저자는 과학이 추구하는 일과 문학이 통찰하는 분야의 동일함을 사랑에서, 무한에서, 시선에서, 상수에서, 양자역학에서 찾아냈다. 그가 인용한 과학적 용어가 불순물처럼 끼어든 시들(시인인 저자의 시를 포함해^^)은, 그의 말대로 툭, 불만스러웠지만 희소성만으로도 아름답고 익살스러웠다. "시인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라는 파인만의 질책성 질문에 대한 한 권의 성실한 답변이었고 유쾌한 시도였다.

현대의 문학은 대중문화와 어렵지 않게 통섭했지만(유하의 <무림일기>,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시인 김언의 말대로 자연과학적 감수성이 한국시의 토양에는 부족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어로 하나의 세계가 건축되길 꿈꾼다는 김언은 <소설을 쓰자>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시의 경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과학이 과학의 벽을, 시가 시의 벽을 넘는 지점은 '통섭'이 화두로 떠오른 인문학 부흥의 시대에 더이상 가로막이 아닐른지 모른다. 물리학으로 철학하고 물리학으로 시를 쓰고 물리학으로 문학을 바라본 <과학 인문학>은 통째가 한 편의 시 같기도 했다.

질량이라는 것은 에너지가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존재하는 형식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일이다.
 
시인과 과학자는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바람을 사유할 것이다. 어쩌다 둘은 서로 다른 재능으로 세계를 탐험하게 되긴 했지만, 뉴턴이 찾아낸 만유인력의 공식(F=GMm/R2) 역시 일종의 언어라고 무심히 내뱉는 순간 과학을 향해 닫혔던 미닫이 문이 소란스럽게 열리곤 했다. 과학과 삶이 만나는 지점은 그보다 훨씬 수월했다.



피터 힉스가 말한 '힉스장'은 비어있다는 것, 곧 진공조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비어있다고 느끼는 것의 전부는 전 우주적인 요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이가 겪은 환멸의 생도 텅 비어버린게 아니라 삶 바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요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문학적 번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사랑' 앞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사랑은 에너지의 순환이다. 이것은 문학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아직 증명하지 못한 과학적 사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물리학도 시인의 말이니 믿어보자. 순수한 사랑이 혹은 욕망이 들끓는 에너지로 되어있고 그 에너지가 다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로 거듭난다는 사실은 문학이 하고 있는 사랑의 탐구와 진배없지 않은가.     

인간 의식의 도약, 도약의 첫발자국은 과학이 찍어도 좋고 문학이 찍어도 좋다는 저자에게 과학과 문학의 통섭은 이런것이었다. 
시와 과학 이 둘의 구동력은 같으며 아인슈타인의 시적 상상력의 언어가 단지 E=MC² 였을 뿐이었다고. 본래 완전한 둘이 아니란 말이다. 수학적 장애로 치른 수학능력시험(<인문학 열전>) 이후로 인연을 끊은 과학이 이제 막 시와의 맞선을 준비한다. 조건 좋고 물오른 결혼 적령기의 두 분야가 비록 쓰디쓴 첫사랑의 맛을 보았다해도, 바로 지금 하나의 문 앞에 원숙한 모습으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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