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과잉 비유의 압박으로 소설 중반부까지 내처 투덜대고 있었는데, 중반 이후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문장은 정상 궤도에 진입한다.  

투덜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알쏭달쏭해져서 '의도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단서를 '옮긴이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게가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하루키 3대 러브 스토리의 완결판이자, 절대 고독 속의 기이한 사랑을 그린 명작이라는 찬사로 시작된다. 스무 살에 읽은 <상실의 시대>가 꽤나 집요하게 몇 년을 따라붙은 건 사실이었지만, 알고 보면 소설보다 극적인 청춘은 이후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번 소설이 하루키에 대한 내 편견을 깨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내게 이상한 실험작이었다. 여기 옮긴이의 말에 실린 하루키의 육성을 빠짐없이 들어보자.


내가 이<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쓰면서 한 가지 확고하게 결심한 것은 내가 종전까지 써온(무기로 사용해온) 어떤 종류의 문체에 결별을 고하려 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결별하려고 한 것은 결국 이 작품의 서두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비유의 범람'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통해서 어디까지나 나의 그러한 문장이 갖는 몇 가지 수사적인 특징을 되도록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의 문체 속에 '돌출한' 부분을 우선 제거하고 버릴 필요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는 자신의 문장을 보다 심플하고, 보다 중립적이고, 보다 많이 반복해 사용할 수 있고,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꿔 말하면 소설의 역동성을 문체의 레벨에서 스토리의 레벨로 점차 이행시켜가야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변신한 문장은 '완벽한 의도'에 의해 계산된 것이었다. 바람이 빠지는 일이다. 지금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제일 잘 나가는 소설가가 대놓고 '무언가'를 인정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종전까지 써온, 비유가 범람하는 문체와 고별하고자 한 것은 내가 반길만한 일이었다. 비유 자체만 보자면 아담하고 산뜻하지만, 수식이 제거된 담백함 만으로도 그가 보유한 하드보일드한 감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결심을 했었다는 것(십여년 전 책의 개정판 이네요)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굳이 소설 '속에서' 결별을 해야 했냐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연애에 옛애인에 대한 추억을 끌고다니는 지긋지긋한 사내처럼 말이다.

스스로의 변화를 납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 유익하게는 소설이 탐구했던 도플갱어처럼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한 사람의 문장'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쥐어 짜낸 어떤 이유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밖에 심오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나는 별로 동화되지 않을 작정이다. 

이 소설은 꽤나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며 각 사건의 귀퉁이와 퍼즐 조각이 솜씨좋게 들어맞은 대작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도가 가지고 있는 센세이션에 대해 그닥 반갑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독을 그리면서도 '전혀 고독하지 않은 작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끝내 절대 고독 속으로 가라앉지 못했던 점이다. 지나치게 강한 자의식으로 범람하는 듯한 비유를 실제로 범람시킨 초반부에 나는 극도로 피로해졌다. 일일히 거론하기에도 힘들만큼 '비유'는 소설의 전반부를 압도했다.

하지만 처음 말했던 데로 소설의 변환 지점(내용과 문장 모두) 이후로는 장식적 비유가 사라지고 비교적 정상적인 문맥의 소설이 남게 된다.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중반 이후 소설은 더욱 기묘한 형태로 나아가는 데도 단지 비유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사실감이 넘친다는 것은, 그의 의도가 어느 정도 점수를 땄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골없이 현란한 드리블만 이어지던 전반부 경기를 지나 후반부, 드리블 없이 던지기만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말도 안되는 농구경기라고 말이다. (아..더 이상의 비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침묵의 시간>


아쉽게도 이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경기는 곧 찾아왔다. 제목도 무거운 <침묵의 시간>. 고독을 말하지 않으면서, 비유를 동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기획(3각의 관계도 라든가, 그들을 상징하는 이상징후 같은)하지 않으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똑같이 선보인 '절대고독'과 '짜릿한 사랑의 음악'을 들려주었기에 더더욱 기뻤다. 

꼭 같이 금기의 사랑을 그리면서도 금기를 열열히 갈망하게 하는, 아니 금기인지 아닌지를 잊게 만드는 흐름이 <침묵의 시간>안에 있었다.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한 문고본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시끄럽게 고독을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침묵으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고독' 중 무엇이 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지를 비교해 볼만했다.                    

굳이 언급하자면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동성애를, <침묵의 시간>은 사제간의 사랑을 그린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 부재를 고독으로 연결하기 위해 하루키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끌어오고, 지크프리트 렌츠는 사랑의 골수를 파헤친다. 어떤 것을 선호할 지는 모두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전적으로 '덧붙여지는 사건'이 아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감정 탐험을 즐긴다. 그것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과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과의 차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미 인간의 삶 속에 그 모든 감정이 따로 존재해 있었다는 듯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은 시간을 아주 잘 요리한 소설이다. 가장 기본적인 현재-과거-현재-과거의 기법이지만 <스프트니크의 연인>이 모조리 작가의 진술에만 의존해야한다는 점에 비한다면 매우 적극적으로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갈 만한 요소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이 늘 시공간처럼 경계를 가를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걸 믿는다. 가르고 분해해서 이해되는 소설은 대체로 개운하지만,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삶과 분리되는 지점이 문학의 한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의 긴장과 시간의 무위를 버무린 <침묵의 시간>이 나에게는 진짜 마술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2010.3
<침묵의 시간>/지크프리트 렌츠/사계절/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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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은 모든 상실이요, 우리에게 없는 것 또한 모든 희망입니다. 논증 없이도 이런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두 동화책이 대견합니다.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한 작가에게서만 맛볼 수 있는 독창적인 작품세계와 마주합니다. 뻣뻣한 진실보다 유연한 거짓말이 선하고, 두꺼운 고찰보다 한줄의 상징이 오랜 잔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동화책에서 만날 수 있는 생각입니다.    
 

두 권의 그림책은 말쑥한 거짓부렁 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는 언제부터 왈가왈부하게 된 걸까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어린이 그림백과 <이야기>에 의한면 이야기는 든든한 동아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묶어주었답니다. 이익을 두고가 아니라면 현실에서 인간들이 한데 묶이기란 그만큼 힘에 겹습니다. 누구는 이야기의 상상력을 추켜세우고, 누구는 그것 또한 잃어버린 교훈이나 도덕을 발견합니다. 누구에게는 순수한 즐거움이겠지요. 두 동화작가는 꾸며낸 이야기로 과연 상실과 희망의 감춰진 옷자락을 어떻게 발견할까요. 

<태양을 향한 탑>은 소원이 결핍을 동반할 때 가장 강력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저 구름 너머 하늘이 아직도 파란지 궁금하구나."

구름을 뚫고 이런 호기심을 풀 수도 없을만큼 지구의 연료가 바닥난 미래의 어느 날이 이 책의 디스토피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는 손자인 소년의 격려에 힘입어 태양을 향한 탑을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불가능해보였지만 문득 '꿈을 이루는데 쓰지 않는다면, 돈을 어디에 쓰지?' 라는 강력한 주문에 걸립니다. 







태양을 볼 수 있는 탑의 꼭대기에 앉았을 때 증손자를 안고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피터르 부뤼헐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갈망은, 인류의 허영심에 대한 상징물과는 달리 소박한 바램이 만들어낸 희망의 탑으로 탈바꿈 됩니다. 태양을 향한 탑을 쌓는 동안 모든 대륙의 건물들이 마음을 모아 블럭이 됩니다. 태양을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홀로 서서 자기에게 생명을 준 빛을 바라보았다'고 콜린 톰슨은 전합니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먼 현대인에게 이런 겸허함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콜린 톰슨은 디스토피아의 절망이 아닌 폐허의 희망을 비춰줍니다. 이 작지 않은 우화가 펼쳐질 동안 음울한 풍경과 복닥거리는 살가움이 교차됩니다. 이 탑 또한 지나친 욕망으로 저울질 할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가 늙고 더 늙고, 소년이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을 만큼의 시간을 희망에 대한 갈구로 보려는 의지가 역력합니다. 

작가 콜린 톰슨의 이력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라면 무얼 제일 먼저 보게 될 지를 확인 시켜줍니다.


1942년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스물다섯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아 세 번이나 정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 우울증은 20대 후반에 사라져서 다시는 재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스코틀랜드아 영국 북부 지방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1992년부터 어린이 책을 쓰고 그리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는데, 어린이 책 일을 한 뒤부터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찰리, 샬럿, 금빛 카나리아>는 비오는 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같습니다. 맑지만은 않은 수채화가 자꾸만 흘러내리고 번지는 듯한 기법은 이 책의 서사를 앞지릅니다. 그림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도시의 새장-아파트로 살러간 샬럿, 그리고 샬럿을 그리워하는 찰리, 그들이 함께 구경한 새장 속의 카나리아는 모두 같은 모티브일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위로란 우산을 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란 신영복 선생님의 말이던가요. -통증을 자각하기 이전부터 서로의 아픔을 제 몸처럼 잘 아는 셋은, 그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감정의 끈으로 단단합니다.  

샬럿을 잃어버린 찰리에게 카나리아는 샬럿이었고, 카나리아는 샬럿과 찰리의 심장이었습니다. 이제 그 간절함을 전하려고 카나리아는 샬럿을 찾아가는 유년의 메신저가 됩니다. 지나치게 동화적인 구상이지만 그들이 어떤 위로로 똘똘 뭉쳐져 있는지를 느낀다면 동심을 미화한 환타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의 마른 꿈도 촉촉히 젖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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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감정을 담아 진심을 전해야하는 게 말의 효용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언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아이의 부정확한 발음과 잘못 쓰인 말에 대해서, 그리고 서툰 옹알이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대부분의 육아서가 금기시 하는 일입니다. '틀렸다'고 지적하고 제대로 알려주는 방법 역시도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의미없는 말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습니다.   

조기교육 분야는 날로 세분화되어서 언어교육에 따로 애쓰는 일이 그닥 특이할만한 현상도 아닙니다. 얼마전 김경화 아나운서가 썼다는 <아이 언어성장 프로젝트>란 거창한 제목의 육아서를 또(아차!) 집어들고 말았습니다. 전문가의 육아서로도 모자라 유명세를 업은 이 책을 펼쳤을 땐 사실 육아서의 끝을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결국 씁쓸이 책을 덮었습니다. 



제일 거슬린 것은 온통 사진으로 뒤덮힌 페이지 였습니다. 육아 과정의 생활 사진이 아닌 옷 만 갈아입은 화보, 즉 연출된 장면들이 잡지를 연상시켰습니다. 내용 역시 잡지의 육아정보란에 어울릴법한 정보들(유용하기도 한)이 사생활과 얽혀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나열됩니다. 대부분 이미 많은 육아서들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언어'관련 교육법들 입니다. 아나운서 김경화만의 특제 소스를 내심 기대했지만 '전집을 사는 건 엄마의 만족감 때문이다''영어 동화책을 구입하는 대신 한글 책에 따로 영어를 메모한다'정도 였습니다.  
 
물론 시인과 소설가, 즉 작가만 책을 내는 시대는 갔습니다. 인디라이터 명로진의 <내 책 쓰는 글쓰기>는 '경영학 전공자가 신문에 칼럼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시골의사는 투자지침서를 내놓는 세상'이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또 '도서관에서 놀아본 사람들은 안다. 아무 데나 가서 아무 쪽이나 펼쳐 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란 걸'이란 정혜윤의 말도 인용했습니다. 상업적 저작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진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언어성장'에 주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추천인사로 두각을 나타내시는 이어령 선생의 '글로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스피치 능력' 때문일까요? 저자가 본문에 앞서 말했던 '사고력, 창의력, 표현력, 학습력'을 키우기 위해설까요?

혹시 뭐든 '잘'하면 나쁠것 없다는 얕은 전제에 대해 모두 묵인하는 건 아닐까요. 육아서가 자기 계발서의 성공가열을 복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대중적인 육아서로 확대 재생산되는 조기교육 열풍에 의문을 가져봅니다. 방송계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손석희 교수가 책의 뒷장에 쓴 추천사에 괜히 제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육아서 전반의 지형도가 얼마나 사치스럽게 범람하는 지에 대해서 짚으실리 만무하겠지만 말이죠.  

언어능력이 중대하긴 하지만 수많은 능력 중 하나라는 사실을, 어떤 아이들은 뒤늦게 언어로 생각을 옮기면서도 무섭게 따라잡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육아 과잉시대의 언어 교육을 고민해 봅니다. 미국 작가 스티븐 핑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습득은 아이를 '통에 넣어'키우지 않는 이상 막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재능의 탄생>) 또 책의 같은 장에는 1개와 2개 2개 이상이라는 수학언어 밖에 없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아이들과 산수교육을 받은 미국 아이들을 놓고 벌인 실험을 보여줍니다. 결과는 두 분류의 아이들이 모두 똑같이 숫자의 정확한 감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에 붙이는 명칭, 말에 붙이는 언어가 확고한 콘셉트의 '부속물'일지도 모른다면 그 개념이나 상징에 대한 주입에 부작용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어 성장 프로젝트'를 실시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담을 언어를 찾게 되지는 않을까요. 저는 결핍이 만들어 내는 필요를 존중하는 편입니다. 장황한 교육적 의도가 아니어도 아이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여력이 된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기부여를 마치고 싶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일상적으로 조기 훈련된 아이들이 '언어'라는 과목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틀에 박힌듯 언어에 대한 코칭법이 규격화 되고 여러 책이 옮겨 적고 있는 이 현실에서 언어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봅니다. 똑똑하게 말 잘하는 아이보다는 깊게 생각하고 의문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면 언어발달에만 치중해야 할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부정확한 발음이나 옹알이를 따라하지말라는 경고와도 같은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저 역시도 분명한 뜻의 확실한 자리에 있는 언어에 흡족해 하긴 하지만 그건 어른이되고 난 후의 제 의지와 관련된 훈련에 더 가까웠습니다. 시는 언어를 낯설게 만들었고, 요즘 읽고 있는<숨김없이 남김없이>같은 소설의 언어는 마치 해부된 내장 같기도 했습니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일종의 금기된 행동을 할 때의 쾌감같은 것들이 생깁니다. 언어가 미숙한 아이들에게 이런 예는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책<까까똥꼬>와 요새 서영이가 푹빠진 <꼬꼬마 꿈동산>을 보니 언어의 전복이 주는 일탈감은 제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기토끼가 시몽이 아니라 '까까똥꼬 였다가 '뿌지직'이 된 결말을 아이는 열번 쯤 반복해서 듣고 싶어했습니다. <꼬꼬마 꿈동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텔레토비의 후속작인만큼 선명한 색채나 기이할만큼 판타지적인 화면이 먼저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했지만 웃음이 터지는 지점은 역시 의미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노래나 해설자 아저씨가 호명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입니다. 


뿌루뿌루 뚜리퐁, 누가 나타날까요, 슈슈 붕붕, 뚜뚜데이지, 누구죠?, 두리뚜뚜 데이지 두, 둘러보아요. 안에 누가 있을까요, 없을 까요? ♬매카패가 아카와카 미카매카 무! 매카패카 아파야카 이카애카 우! 홍홍 아가 퐁 앙 옹 우!♬ 오늘은 뭘 할건가요? 매카패카. 꼬꼬마 꿈동산에 간다구요? 매카패카. (사진출처)

언어를 유용한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언어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꼭 유익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의성어 의태어에 반응이 빠르다는 사실은 이미 어린이 책 전반에 녹아들었고, 언어에 대한 육아서라면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음악보다는 음향을 말보다는 소리를 , 소리보다는 리듬을 좋아하는 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언어'에 중독되어 있을 때 아이들은 언어의 '흥'을 뒤적거리고 있습니다. 의미없는 아이의 말을 간혹 따라해주면 모녀는 뭔가 통했다는 듯히 함께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언어는 아니지만 통합니다.
 
아이들의 언어가 끊임없이 수정되길 요구하는 동안 언어의 즐거움을 뺏을까 걱정입니다. 이런 육아서들은 그런 속내를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음은 물론이고 아얘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중요한 건 인성이나 사랑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부인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는 증거는, 0세 부터 5세까지의 언어발달이 아이의 성공발판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 외국어의 체계를 익히기에 유리한 카드를 쥘 수 있는 나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감각은 배움을 차단한다해도 열릴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유아 조기교육분화가 세분화 될수록 아이들이 정복해야할 능력들을 교과목처럼 늘리는 꼴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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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을 통해 자존감, 자아정체성을 끌어올리겠다는 포부. 상상력과 창의력 다음으로 약발이 잘 받습니다. <강아지 똥> <괜찮아>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가 대표적인 모델이죠. 흔히 하찮은 것, 쓸모없는 것으로 분리되는 존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려는 의도는 누가 뭐래도 온기를 간직합니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네가 얼마나 당당한지' 와 더불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유의미한지' 를 전하는 책들을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아이뿐 아니라 고독한, 삶의 무게에 허리가 꺾인 어른에게도 조준되는 메시지 입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나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동화의 우화로 재탠생 될 때, 보다 강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 편 즉, '우리'에게 '나'를 설득시키는 작업은 사랑, 우정, 연대를 통해 드러납니다. 서구식 사고가 '나'와 '타자'(나 이외의 모든 것)를 분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를 원했습니까. '우리'로 묶일 수 없는 이질감이 우리를 얼마나 갈라놓았습니까. 

<멜랑콜리 미학>에는 저자의 이런 경험담이 등장합니다. 


대학 시절에 낭만적 기질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당시 학생 운동을 하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전투겅찰과 대치하고 화염병을 던져야 했던 그가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며 내게말했다. "저들(독재자, 경찰)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맘 놓고 미워하고 싸울 수 있을 텐데." 그날 친구의 눈에는 자신이 던진 화염병의 타깃이 사람으로 비쳤고, 그는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했다. 얼마 후 그는 학생운동을 그만두었다.

그가 더이상 잔인해질 수 없게 만든데에는 적에게서 '존재감'을 확인했을 때일 겁니다. 그는 적에게도 연민을 베풀 수 있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 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나'의 존재 역시 누군가에게 무의미한 '적'으로 비치길 원치 않는 자기방어로 읽힐 수 있습니다. 가장 소극적이고 본능적인 '자존감'의 표출입니다. 

'나'와 '다른 것'들, 비관적으로 '적'이라 부를 수도 있는 대상을 어떻게 포괄해 나갈 수 있는지는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에 잘 드러납니다. 우연히 거위알을 주운 곰에게 이 아기동물은 골치덩이였습니다. 태어나 처음 만난 곰을 엄마라고 부르며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아기 동물에게 곰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합니다. 아기를 길러본 적도 없고 여우에게 놀림받을 것도 두려운 곰은 아기 동물을 내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낭만적 기질의 친구처럼 아기동물이 아얘 외계인 이었다면 곰에게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을텐데, 이 아기동물은 질긴 생명력을 뽐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입니다. 당연히 곰은 마음이 움직이구요. 곰은 자신의 딱딱한 생각을 조금씩 녹이고, 아기 동물은 연약한 자신을 강화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둘의 관계는 분명해집니다. 곰이 곰이 아닐 때, 거위가 거위가 아닐 때 그들은 따뜻한 관계로 거듭납니다. 
 
최숙희의 <괜찮아>와 같은 계보를 잇는 <대단해 대단해>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반대지점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 더 미묘하고 심오한 '자존감'의 영역을 확보합니다. 


<괜찮아>의 '개미는 너무 작아'의 다음 페이지에는 자기 몸집보다 큰 나뭇잎을 옮기고 있는 개미 그림이 이어집니다.
<대단해 대단해>는 '신발은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무엇이 대단해?'라고 물으면 '매일매일 쿵쿵 걸어 다니니까'라는 힘찬 대답이 기다립니다. 

모든 것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고,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나'만의 장기, 나만의 개성,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은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의 주제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나'를 찾는 일이 '우리'의 조화를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나아가 '타인'이나 '적'을 '나'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임을 떠올려 봅니다.

죄책감 때문에 싸우다 말았다는 그 친구는 사회적으로 이념의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체성'을 포기한 나약한 지식인이라고 흉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이 진정한 건 '나'를 강요하면서 불러올 수 있는 '타자'의 비존재 였습니다. 그것이 '나'를 포기하는 일일까요.


또 한가지 재미난 그림책 <뽀뽀는 이제 그만!>은 '엄마! 오늘밤은 뽀뽀하기 싫어요'라고 선언하는 발칙한 아기 생쥐가 주인공 입니다.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아기 생쥐는 뽀뽀가 '하나같이 별로'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너무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고, 단맛도 나고?, 냄새도 나고, 귀찮고, 시끄럽고, 어지럽고, 간질간질 하고, 온갖 균들을 옮기고...한 마디로 자기는 이제 '다 컸다'는 겁니다. 뭐, 결론은 뽀뽀가 얼마나 좋은 건지 깨달았다는 감각적? 교훈을 전합니다. 

중요한 건 아이의 '컸다'는 자각과 '싫다'는 감정이 '자존감''자아 정체성'의 출발이라는 겁니다. 이 책은 우화를 들려주기 보단 '고백을 속삭이며'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자신과 같거나 다른, 싫거나 좋은 대상을 만났을 때 아이는, 그리고 우리는 '나'를 발견합니다. 무아로, 독존자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지상의 과제가 아닐겁니다. 이미 이야기했던 '우리' 안에서,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아이가 떠나야할 여정임을 믿습니다. 뽀뽀가 싫다, 나는 컸다,고 주장하는 자아도 자신을 철회할 때에, 가치를 공유할 때 '나'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배워봅니다.    

다시 <멜랑콜리 미학>으로 돌아와 이 책의 한구절을 옮겨 적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합니다. 

외계인은 은하계 저편에 없다. 외계인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외계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외계인이다. 더구나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외계인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글은 원래 독일에서 활동중인 예술가 그룹 '그로벌 에이리언'의 도록에 수록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카트아 게르만/은나팔/2010.3
<대단해 대단해>/마스다 유우코/뜨인돌 어린이/2010.3
<뽀뽀는 이제 그만>/마누엘라 모나리/은나팔/2010.4
<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김동규/문학동네/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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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신데렐라에서 빠진 건? 사랑. 백설공주에도 빠진건? 사랑. 생략은 오히려 황홀한 상상력을 부추겼건만 이제와서 불만이다. 사랑해서 잘 살았다는데 사랑이 빠졌다?  


신데렐라의 주제가가 '사랑'이 아니라 '착하게 살자'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데 신데렐라의 성정은 감동적이었지만 수없이 책장을 넘기게 한 주범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던 촉박한 시간과, 키스로 지난 고난을 화답받는 예정된 운명의 순간 이었다. 동화책이 지속적으로 주입하려던건 도덕, 예의, 선, 용기였지만 난 이를테면 '사랑의 육화'(<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90p)에 푹 빠졌다. 그들이 숨겨놓은 '사랑의 육화'에 애가, 애가 탈 거라고 순진한 어른들은 생각이나 했을까. '교육적'이란 미망아래 감춰진 인색한 노출이 끝내 그것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동화책은 남녀간의 사랑, 설레임, 열정, 환희 같은 감정들의 불모지 였다. 동화책을 뗀 후 그리고 성인이 되기 이전, 그 떨리는 영혼들의 공백이, 간혹 칼날같은 첫사랑과, 짜릿한 불륜과, 영원한 사랑과, 육체적 쾌락에 잠식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동화책이 대를 이어 읽히는 현실은 위선같기도 하다. 마치 육체의 사랑이 영혼의 사랑보다 하위에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가 뱀처럼 도사리고 있는 모양으로. 

사회적 금기와도 맞닿은 일일테지만, 금기를 깨부수는 쾌락의 정당한 구실이 되어주는 동화의 교육적 작용에 난데없이 의심이 든 건 <테이킹 우드스탁> 때문이다. 신데렐라를 완벽히 복습하지만 또한 철저한 성인코드의 신데렐라 이야기.   


이런 노래가 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 아이샤바 얼마나 울었을까♪
 
우선 게이이자 우리의 신데렐라인 엘리엇 타이버의 성인동화 속으로 들어가보자. 그가 어려서 어떻게 부모님을 잃었는지. 

..우리는 그저 초콜릿을 '사랑'하고, TV를 '사랑'했을 뿐,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법도 없었고, 가족에게서 진짜 현실적인 사랑을 받아본 구성원 역시 단언컨대 없었다. ..알고 보면 내가 경험한 섹스는 우리 집에서 사랑이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만큼이나 가학적이었다. 

엘리엇 타이버가 경험한 사랑이란 기실 조작과 폭력이었다. 그에게 맨 처음 사랑, 즉 가족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가족들은 계모와 언니들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지독한 돈 밝힘증의 수전노 어머니는 아들에게 "넌 어쩜 그리 뚱뚱하고 멍청하니, 엘리야후."라고 주기적으로 안부를 물었고, 단순하고 수수한 분이었던 아버지 조차도 엄마가 어떤 이유로 아들을 혼내고 싶어할 땐 이미 허리띠를 풀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또 불과 네 살밖에 안된 엘리엇에게 랍비의 운명을 함부로 덮어 씌우기도 했다.(물론 우리의 신데렐라는 고작 다섯 살에 무신론자임을 선언했지만) 


엘리엇 타이버가 얼마나 울었는지에 대한 증거는 회고록의 성격을 띄는 이 책 안에 충분하다. 그의 울음은 이랬다.

내 신사 고객이 일을 끝내고 자리를 뜨면, 나는 몸을 떨며 다시 스스로를 추스를 때까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본능적이었고 자연발생적이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내 앞에 새로운 성적 탐험의 활로가 활짝 열렸다. 즉 영화관에 가학적 아동변태성욕자를 찾아 헤매는 것. 이것은 나의 비밀 세계이자 은밀한 쾌락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마음씨 착하고 여린 신데렐라였음은 분명하다. 타이크버그가의 저주를 받은 모텔 엘 모나코를 살려내기 위해, 그토록 자신의 인생을 자빠뜨리고 시궁창으로 몰아넣었던 부모님을 돕기 위해

주중에는 뉴욕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고 가끔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섹스를 나눴다. 그리고 금요일 밤에는 화이트 레이크로 차를 몰고 가 부모님의 사업을 파산으로부터 구원했다.

화이트 레이크에 있으면 나는 낙오자, 슐레밀(얼간이 패배자), 언제고 탄로날 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는 불안하고 은밀한 게이였다. 하지만 맨해튼에서 나는 잘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미국 인테리러 디자이너 협회의 일류멤버, 그리고 헌터 칼리지의 선생이었다.

신데렐라는 새엄마가 시키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어요.(<디즈니 신데렐라>/삼성출판사/에서) 


내가 모텔 안팎에서 해야 했던 일의 종류는 끝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변기 청소는 물론, 접수계원, 잔디 깎기 담당, 요리사. 수영장 관리인, 하수구 오수 청소원, 접객담당 매니저, 호텔 안전 요원, 뚱뚱한 아들, 멍청하고 쓸모없는 몸 역할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내야 했다. 내 인생은 화장실 청소와 팬케이크 굽기의 무한 반복 사이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완벽히 웃는 얼굴이라고 할 순 없지만 동물들은 가엾은 신데렐라(엘리엇)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맨하탄의 일면식도 없는 동성 섹스 파트너들은 그를 열렬히 원했다. (오직 성적일지언정) 하지만 그가 감정이 거세된 신데렐라는 아니었다. (엘리엇 타이버와 가학적 사랑을 나눈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작품(사진출처))


그토록 지독하게 사회에서 경멸당하는 데 어떻게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내면화된 동성애혐오증이야말로 우리 대다수가 시달리는 병이었다. 

사랑받을 가망이 없다고 느끼게 되면 섹스는 순전히 육체적 경험으로만 남는다. 


그런 그에게 무도회의 기회는 찾아온다. 대형 야외 락 페스티벌이 황폐한 도시 베델, 그리고 엘리엇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두 새언니가 신데렐라의 드레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린것처럼, 동네 주민들은 그의 마지막 희망에 침을 뱉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요술 지팡이를 든 할머니가 있다. 우드스탁의 유능한 연출가 마이크 랭은 베델이라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동네에 불시착해 섹스, 마약, 로큰롤이 한바탕 어우러진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갑자기 엘 모나코에는 생기가 넘치고 3류 모텔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또 하나의 관문 12시. 엘리엇에게도 주민들과의 협상, 가족과의 화해, 자기 혐오에서의 탈출이 시급했다.(이 중대한 과정이 신데렐라에는 빠졌다!) 그리고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는 마지막 여정이 바로 우스스탁 페스티벌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없는 그곳, 그 누구도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을 시험대 위에 놀려놓지 않는 곳, 나를 이해받는 곳, 해시시 초코칩 쿠키를 구워 나눠 먹으며 동성애를 병리증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곳, 바로 그곳이 엘리엇 타이버에게는 돌아온 유리구두 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에필로그에서 그는 정말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이 완벽한 신데렐라 코드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으며 죽는 날까지 반복된다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내 인생은 비슷한 기회라도 온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신데렐라 행세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이 성인버전 신데렐라에서 동화가 애써 가리려했던 열렬한 섹스 코드와 유머로 환상에서 탈출하고 만다. '사랑'에 대한 질문이 고목의 새순처럼 되살아 난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가시화되는 세상에 <테이킹 우드스탁>은 육체를 선동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영혼을 갈망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육체가 고갈될 수록 영혼을, 영혼이 바닥날 수록 육체를 탐하게 되는 순환적인 한 인간의 사랑의 여정을 만난다. 고답적 품성을 복습하면서도 사회적 편견과 질시에 대한 분노는 표출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논의되는 사랑이 동성애적 전우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85p)은 <테이킹 우드스탁>의 사랑의 가능성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다. 또 같은 책에 '사랑은 육체에서 영혼으로만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다시 육체로 하강하면서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동시에 확장시킨다.'를 볼 때 동화에 빠진 사랑의 육화는 절실하기까지 하다. 동화책의 사랑은 늙었다. 나는 유연하고 팽팽한 육화된 사랑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테이킹 우드스탁>/엘리엇 타이버/문학동네/2010.4
<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김동규/문학동네/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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