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감정을 담아 진심을 전해야하는 게 말의 효용임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언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아이의 부정확한 발음과 잘못 쓰인 말에 대해서, 그리고 서툰 옹알이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대부분의 육아서가 금기시 하는 일입니다. '틀렸다'고 지적하고 제대로 알려주는 방법 역시도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의 의미없는 말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습니다.
조기교육 분야는 날로 세분화되어서 언어교육에 따로 애쓰는 일이 그닥 특이할만한 현상도 아닙니다. 얼마전 김경화 아나운서가 썼다는 <아이 언어성장 프로젝트>란 거창한 제목의 육아서를 또(아차!) 집어들고 말았습니다. 전문가의 육아서로도 모자라 유명세를 업은 이 책을 펼쳤을 땐 사실 육아서의 끝을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결국 씁쓸이 책을 덮었습니다.
제일 거슬린 것은 온통 사진으로 뒤덮힌 페이지 였습니다. 육아 과정의 생활 사진이 아닌 옷 만 갈아입은 화보, 즉 연출된 장면들이 잡지를 연상시켰습니다. 내용 역시 잡지의 육아정보란에 어울릴법한 정보들(유용하기도 한)이 사생활과 얽혀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나열됩니다. 대부분 이미 많은 육아서들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언어'관련 교육법들 입니다. 아나운서 김경화만의 특제 소스를 내심 기대했지만 '전집을 사는 건 엄마의 만족감 때문이다''영어 동화책을 구입하는 대신 한글 책에 따로 영어를 메모한다'정도 였습니다.
물론 시인과 소설가, 즉 작가만 책을 내는 시대는 갔습니다. 인디라이터 명로진의 <내 책 쓰는 글쓰기>는 '경영학 전공자가 신문에 칼럼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시골의사는 투자지침서를 내놓는 세상'이라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또 '도서관에서 놀아본 사람들은 안다. 아무 데나 가서 아무 쪽이나 펼쳐 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란 걸'이란 정혜윤의 말도 인용했습니다. 상업적 저작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진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언어성장'에 주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추천인사로 두각을 나타내시는 이어령 선생의 '글로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스피치 능력' 때문일까요? 저자가 본문에 앞서 말했던 '사고력, 창의력, 표현력, 학습력'을 키우기 위해설까요?
혹시 뭐든 '잘'하면 나쁠것 없다는 얕은 전제에 대해 모두 묵인하는 건 아닐까요. 육아서가 자기 계발서의 성공가열을 복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대중적인 육아서로 확대 재생산되는 조기교육 열풍에 의문을 가져봅니다. 방송계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손석희 교수가 책의 뒷장에 쓴 추천사에 괜히 제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육아서 전반의 지형도가 얼마나 사치스럽게 범람하는 지에 대해서 짚으실리 만무하겠지만 말이죠.
언어능력이 중대하긴 하지만 수많은 능력 중 하나라는 사실을, 어떤 아이들은 뒤늦게 언어로 생각을 옮기면서도 무섭게 따라잡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 육아 과잉시대의 언어 교육을 고민해 봅니다. 미국 작가 스티븐 핑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습득은 아이를 '통에 넣어'키우지 않는 이상 막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재능의 탄생>) 또 책의 같은 장에는 1개와 2개 2개 이상이라는 수학언어 밖에 없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아이들과 산수교육을 받은 미국 아이들을 놓고 벌인 실험을 보여줍니다. 결과는 두 분류의 아이들이 모두 똑같이 숫자의 정확한 감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수에 붙이는 명칭, 말에 붙이는 언어가 확고한 콘셉트의 '부속물'일지도 모른다면 그 개념이나 상징에 대한 주입에 부작용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언어 성장 프로젝트'를 실시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아이들 스스로 생각을 담을 언어를 찾게 되지는 않을까요. 저는 결핍이 만들어 내는 필요를 존중하는 편입니다. 장황한 교육적 의도가 아니어도 아이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여력이 된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기부여를 마치고 싶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일상적으로 조기 훈련된 아이들이 '언어'라는 과목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틀에 박힌듯 언어에 대한 코칭법이 규격화 되고 여러 책이 옮겨 적고 있는 이 현실에서 언어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봅니다. 똑똑하게 말 잘하는 아이보다는 깊게 생각하고 의문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는다면 언어발달에만 치중해야 할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부정확한 발음이나 옹알이를 따라하지말라는 경고와도 같은 구절들이 떠오릅니다. 저 역시도 분명한 뜻의 확실한 자리에 있는 언어에 흡족해 하긴 하지만 그건 어른이되고 난 후의 제 의지와 관련된 훈련에 더 가까웠습니다. 시는 언어를 낯설게 만들었고, 요즘 읽고 있는<숨김없이 남김없이>같은 소설의 언어는 마치 해부된 내장 같기도 했습니다. 그 해체의 과정에서 일종의 금기된 행동을 할 때의 쾌감같은 것들이 생깁니다. 언어가 미숙한 아이들에게 이런 예는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책<까까똥꼬>와 요새 서영이가 푹빠진 <꼬꼬마 꿈동산>을 보니 언어의 전복이 주는 일탈감은 제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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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토끼가 시몽이 아니라 '까까똥꼬 였다가 '뿌지직'이 된 결말을 아이는 열번 쯤 반복해서 듣고 싶어했습니다. <꼬꼬마 꿈동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텔레토비의 후속작인만큼 선명한 색채나 기이할만큼 판타지적인 화면이 먼저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기는 했지만 웃음이 터지는 지점은 역시 의미없는 말들이 반복되는 노래나 해설자 아저씨가 호명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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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루뿌루 뚜리퐁, 누가 나타날까요, 슈슈 붕붕, 뚜뚜데이지, 누구죠?, 두리뚜뚜 데이지 두, 둘러보아요. 안에 누가 있을까요, 없을 까요? ♬매카패가 아카와카 미카매카 무! 매카패카 아파야카 이카애카 우! 홍홍 아가 퐁 앙 옹 우!♬ 오늘은 뭘 할건가요? 매카패카. 꼬꼬마 꿈동산에 간다구요? 매카패카. (
사진출처)
언어를 유용한 수단으로 채택한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언어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꼭 유익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이들이 의성어 의태어에 반응이 빠르다는 사실은 이미 어린이 책 전반에 녹아들었고, 언어에 대한 육아서라면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음악보다는 음향을 말보다는 소리를 , 소리보다는 리듬을 좋아하는 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언어'에 중독되어 있을 때 아이들은 언어의 '흥'을 뒤적거리고 있습니다. 의미없는 아이의 말을 간혹 따라해주면 모녀는 뭔가 통했다는 듯히 함께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언어는 아니지만 통합니다.
아이들의 언어가 끊임없이 수정되길 요구하는 동안 언어의 즐거움을 뺏을까 걱정입니다. 이런 육아서들은 그런 속내를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음은 물론이고 아얘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중요한 건 인성이나 사랑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부인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라는 증거는, 0세 부터 5세까지의 언어발달이 아이의 성공발판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 외국어의 체계를 익히기에 유리한 카드를 쥘 수 있는 나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감각은 배움을 차단한다해도 열릴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유아 조기교육분화가 세분화 될수록 아이들이 정복해야할 능력들을 교과목처럼 늘리는 꼴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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