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을 통해 자존감, 자아정체성을 끌어올리겠다는 포부. 상상력과 창의력 다음으로 약발이 잘 받습니다. <강아지 똥> <괜찮아>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새끼>가 대표적인 모델이죠. 흔히 하찮은 것, 쓸모없는 것으로 분리되는 존재에게 숨을 불어넣어주려는 의도는 누가 뭐래도 온기를 간직합니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네가 얼마나 당당한지' 와 더불어 '모든 존재가 얼마나 유의미한지' 를 전하는 책들을 아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아이뿐 아니라 고독한, 삶의 무게에 허리가 꺾인 어른에게도 조준되는 메시지 입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나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동화의 우화로 재탠생 될 때, 보다 강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 편 즉, '우리'에게 '나'를 설득시키는 작업은 사랑, 우정, 연대를 통해 드러납니다. 서구식 사고가 '나'와 '타자'(나 이외의 모든 것)를 분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우리'를 원했습니까. '우리'로 묶일 수 없는 이질감이 우리를 얼마나 갈라놓았습니까. 

<멜랑콜리 미학>에는 저자의 이런 경험담이 등장합니다. 


대학 시절에 낭만적 기질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당시 학생 운동을 하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전투겅찰과 대치하고 화염병을 던져야 했던 그가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며 내게말했다. "저들(독재자, 경찰)이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맘 놓고 미워하고 싸울 수 있을 텐데." 그날 친구의 눈에는 자신이 던진 화염병의 타깃이 사람으로 비쳤고, 그는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했다. 얼마 후 그는 학생운동을 그만두었다.

그가 더이상 잔인해질 수 없게 만든데에는 적에게서 '존재감'을 확인했을 때일 겁니다. 그는 적에게도 연민을 베풀 수 있는 여린 감성의 소유자 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나'의 존재 역시 누군가에게 무의미한 '적'으로 비치길 원치 않는 자기방어로 읽힐 수 있습니다. 가장 소극적이고 본능적인 '자존감'의 표출입니다. 

'나'와 '다른 것'들, 비관적으로 '적'이라 부를 수도 있는 대상을 어떻게 포괄해 나갈 수 있는지는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에 잘 드러납니다. 우연히 거위알을 주운 곰에게 이 아기동물은 골치덩이였습니다. 태어나 처음 만난 곰을 엄마라고 부르며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아기 동물에게 곰은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합니다. 아기를 길러본 적도 없고 여우에게 놀림받을 것도 두려운 곰은 아기 동물을 내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낭만적 기질의 친구처럼 아기동물이 아얘 외계인 이었다면 곰에게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을텐데, 이 아기동물은 질긴 생명력을 뽐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입니다. 당연히 곰은 마음이 움직이구요. 곰은 자신의 딱딱한 생각을 조금씩 녹이고, 아기 동물은 연약한 자신을 강화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정체성이 흐려지면서 둘의 관계는 분명해집니다. 곰이 곰이 아닐 때, 거위가 거위가 아닐 때 그들은 따뜻한 관계로 거듭납니다. 
 
최숙희의 <괜찮아>와 같은 계보를 잇는 <대단해 대단해>의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반대지점에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 더 미묘하고 심오한 '자존감'의 영역을 확보합니다. 


<괜찮아>의 '개미는 너무 작아'의 다음 페이지에는 자기 몸집보다 큰 나뭇잎을 옮기고 있는 개미 그림이 이어집니다.
<대단해 대단해>는 '신발은 대단해. 정말로 대단해. 무엇이 대단해?'라고 물으면 '매일매일 쿵쿵 걸어 다니니까'라는 힘찬 대답이 기다립니다. 

모든 것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고,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속에서 '나'만의 장기, 나만의 개성,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은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의 주제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나'를 찾는 일이 '우리'의 조화를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나아가 '타인'이나 '적'을 '나'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임을 떠올려 봅니다.

죄책감 때문에 싸우다 말았다는 그 친구는 사회적으로 이념의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정체성'을 포기한 나약한 지식인이라고 흉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이 진정한 건 '나'를 강요하면서 불러올 수 있는 '타자'의 비존재 였습니다. 그것이 '나'를 포기하는 일일까요.


또 한가지 재미난 그림책 <뽀뽀는 이제 그만!>은 '엄마! 오늘밤은 뽀뽀하기 싫어요'라고 선언하는 발칙한 아기 생쥐가 주인공 입니다.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아기 생쥐는 뽀뽀가 '하나같이 별로'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너무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고, 단맛도 나고?, 냄새도 나고, 귀찮고, 시끄럽고, 어지럽고, 간질간질 하고, 온갖 균들을 옮기고...한 마디로 자기는 이제 '다 컸다'는 겁니다. 뭐, 결론은 뽀뽀가 얼마나 좋은 건지 깨달았다는 감각적? 교훈을 전합니다. 

중요한 건 아이의 '컸다'는 자각과 '싫다'는 감정이 '자존감''자아 정체성'의 출발이라는 겁니다. 이 책은 우화를 들려주기 보단 '고백을 속삭이며'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자신과 같거나 다른, 싫거나 좋은 대상을 만났을 때 아이는, 그리고 우리는 '나'를 발견합니다. 무아로, 독존자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지상의 과제가 아닐겁니다. 이미 이야기했던 '우리' 안에서,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아이가 떠나야할 여정임을 믿습니다. 뽀뽀가 싫다, 나는 컸다,고 주장하는 자아도 자신을 철회할 때에, 가치를 공유할 때 '나'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배워봅니다.    

다시 <멜랑콜리 미학>으로 돌아와 이 책의 한구절을 옮겨 적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합니다. 

외계인은 은하계 저편에 없다. 외계인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에게 외계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외계인이다. 더구나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외계인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이글은 원래 독일에서 활동중인 예술가 그룹 '그로벌 에이리언'의 도록에 수록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기 거위가 자라면 곰이 되나요?>/카트아 게르만/은나팔/2010.3
<대단해 대단해>/마스다 유우코/뜨인돌 어린이/2010.3
<뽀뽀는 이제 그만>/마누엘라 모나리/은나팔/2010.4
<멜랑콜리 미학-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김동규/문학동네/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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