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과잉 비유의 압박으로 소설 중반부까지 내처 투덜대고 있었는데, 중반 이후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문장은 정상 궤도에 진입한다.  

투덜대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알쏭달쏭해져서 '의도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단서를 '옮긴이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게가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하루키 3대 러브 스토리의 완결판이자, 절대 고독 속의 기이한 사랑을 그린 명작이라는 찬사로 시작된다. 스무 살에 읽은 <상실의 시대>가 꽤나 집요하게 몇 년을 따라붙은 건 사실이었지만, 알고 보면 소설보다 극적인 청춘은 이후로 읽은 하루키의 소설들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번 소설이 하루키에 대한 내 편견을 깨는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내게 이상한 실험작이었다. 여기 옮긴이의 말에 실린 하루키의 육성을 빠짐없이 들어보자.


내가 이<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쓰면서 한 가지 확고하게 결심한 것은 내가 종전까지 써온(무기로 사용해온) 어떤 종류의 문체에 결별을 고하려 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결별하려고 한 것은 결국 이 작품의 서두에서 시도한 것과 같은 '비유의 범람'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통해서 어디까지나 나의 그러한 문장이 갖는 몇 가지 수사적인 특징을 되도록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의 문체 속에 '돌출한' 부분을 우선 제거하고 버릴 필요가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나는 자신의 문장을 보다 심플하고, 보다 중립적이고, 보다 많이 반복해 사용할 수 있고,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꿔 말하면 소설의 역동성을 문체의 레벨에서 스토리의 레벨로 점차 이행시켜가야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변신한 문장은 '완벽한 의도'에 의해 계산된 것이었다. 바람이 빠지는 일이다. 지금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제일 잘 나가는 소설가가 대놓고 '무언가'를 인정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 종전까지 써온, 비유가 범람하는 문체와 고별하고자 한 것은 내가 반길만한 일이었다. 비유 자체만 보자면 아담하고 산뜻하지만, 수식이 제거된 담백함 만으로도 그가 보유한 하드보일드한 감성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결심을 했었다는 것(십여년 전 책의 개정판 이네요)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굳이 소설 '속에서' 결별을 해야 했냐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연애에 옛애인에 대한 추억을 끌고다니는 지긋지긋한 사내처럼 말이다.

스스로의 변화를 납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까. 유익하게는 소설이 탐구했던 도플갱어처럼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한 사람의 문장'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쥐어 짜낸 어떤 이유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밖에 심오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나는 별로 동화되지 않을 작정이다. 

이 소설은 꽤나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며 각 사건의 귀퉁이와 퍼즐 조각이 솜씨좋게 들어맞은 대작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도가 가지고 있는 센세이션에 대해 그닥 반갑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독을 그리면서도 '전혀 고독하지 않은 작가'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끝내 절대 고독 속으로 가라앉지 못했던 점이다. 지나치게 강한 자의식으로 범람하는 듯한 비유를 실제로 범람시킨 초반부에 나는 극도로 피로해졌다. 일일히 거론하기에도 힘들만큼 '비유'는 소설의 전반부를 압도했다.

하지만 처음 말했던 데로 소설의 변환 지점(내용과 문장 모두) 이후로는 장식적 비유가 사라지고 비교적 정상적인 문맥의 소설이 남게 된다. 이건 참 이상한 일이다. 오히려 중반 이후 소설은 더욱 기묘한 형태로 나아가는 데도 단지 비유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사실감이 넘친다는 것은, 그의 의도가 어느 정도 점수를 땄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골없이 현란한 드리블만 이어지던 전반부 경기를 지나 후반부, 드리블 없이 던지기만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말도 안되는 농구경기라고 말이다. (아..더 이상의 비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침묵의 시간>


아쉽게도 이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경기는 곧 찾아왔다. 제목도 무거운 <침묵의 시간>. 고독을 말하지 않으면서, 비유를 동원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기획(3각의 관계도 라든가, 그들을 상징하는 이상징후 같은)하지 않으면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똑같이 선보인 '절대고독'과 '짜릿한 사랑의 음악'을 들려주었기에 더더욱 기뻤다. 

꼭 같이 금기의 사랑을 그리면서도 금기를 열열히 갈망하게 하는, 아니 금기인지 아닌지를 잊게 만드는 흐름이 <침묵의 시간>안에 있었다.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한 문고본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시끄럽게 고독을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침묵으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고독' 중 무엇이 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지를 비교해 볼만했다.                    

굳이 언급하자면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동성애를, <침묵의 시간>은 사제간의 사랑을 그린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 부재를 고독으로 연결하기 위해 하루키는 상징적인 사건들을 끌어오고, 지크프리트 렌츠는 사랑의 골수를 파헤친다. 어떤 것을 선호할 지는 모두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전적으로 '덧붙여지는 사건'이 아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감정 탐험을 즐긴다. 그것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과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과의 차이라고도 생각한다.

이미 인간의 삶 속에 그 모든 감정이 따로 존재해 있었다는 듯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은 시간을 아주 잘 요리한 소설이다. 가장 기본적인 현재-과거-현재-과거의 기법이지만 <스프트니크의 연인>이 모조리 작가의 진술에만 의존해야한다는 점에 비한다면 매우 적극적으로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갈 만한 요소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이 늘 시공간처럼 경계를 가를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걸 믿는다. 가르고 분해해서 이해되는 소설은 대체로 개운하지만,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삶과 분리되는 지점이 문학의 한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의 긴장과 시간의 무위를 버무린 <침묵의 시간>이 나에게는 진짜 마술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2010.3
<침묵의 시간>/지크프리트 렌츠/사계절/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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