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이 '한글날'이었다. 나라의 '국경일'이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2005년 12월, 근 15년 간 각계의 노력으로 '다시' 국경일로 지정 되었지만 '빨간 날'로 기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노는 날이 많으면 나라가 가난해 진다는 것. 한글날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서 빨간 날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대신 그 날을 즈음하여 쏟아진 도서들이 '한글날'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한달 간 쉬엄쉬엄 한글 관련 책들을 읽어내렸다. 홀로 자축한 한글날. 쓸쓸하고 풍성하다. 책을 돌아보기 전에 한글에 얽힌 역사와 국어사전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한글날로 돌아보는 역사

'가갸날'

<훈민정음혜례>를 완성한 날(1446년 음력 9월)로부터 480주년(8회갑)을 맞은 1926년 9월 26일(음력) 조선어연구회는 기념 축하회를 열었다. 그 때 쓰인 이름이 '가갸날'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글은 이미 온 백성이 쓰는 글자가 되었지만 한일합병으로 '한글의 규범화'가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조선어 편찬회가 설립되어 국문연구소의 연구를 토대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제정되었다.

국문연구소의 과업이었던 '조선어사전'은 일제의 탄압(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첫 간행에 실패하고, 해방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한글 사전이 탄생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지 500년이 넘은 해였다. 그마저도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가 일본의 패전 직후 격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의 화물더미 속에서 발견 되었다니, 한글이 걸어온 길이 우리네 역사만큼 기구하다. 
 
'한글날'

현재의 '한글날'(10월 9일)은 1945년에 처음 결정되었다.('한글날'이란 명칭은 1928년부터 쓰였다) 한글을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해례>가 발견되면서 해례에 표기 된 '9월 상한'(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다시 정한다. 한글이 처음 완성되었다고 알려진 1443년이 아닌 <훈민정음해례>(1446년)가 완성된 날이 기준이 되었다. 북한은 반대로 한글이 완성된 날을 기준으로 '훈민정음 창제일'(1월15일)을 기념한다고 하니, 분단의 역사 역시 '한글' 안에 쓰여진다.   

'공휴일'

1946년 훈민정음 반포(<훈미정음해례>가 완성된 날) 500돌을 맞아 처음 공휴일이 되었다가 1949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 '공휴일이 너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1990년 공휴일에서 빠져 '기념일'로 전락한다. 그 이후로 15년 간 각계각층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 운동'을 벌여 2006년 국민의 정부 때 다시 '국경일'이 되긴 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올 해 취업포탈 '잡 코리아'가 '공휴일로 지정했으면 하는 날'을 묻는 설문조사를 벌여 '공휴일이 부족하다'고 답한 직장인들 중 70%가 넘는 응답자가 '한글날'을 꼽기도 했다. (한글날 즈음에 이루어진 설문이었다)

'겨레말큰사전'

최초의 한글 사전 첫 권(을유문화사)이 1947년 10월 힘겹게 태어나고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전 작업이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2005년 2월20일 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과 북의 어학학자들이 금강산에 모여 민족어 공동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하고 그 이름을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했다. 이 사업은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여 남북의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약 7만여 개의 새 어휘를 발굴하여 수록한다. 2009년 본 집필이 시작되 2013년 작업을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월 4일 한글날을 앞두고 고은 시인은 ‘절반의 고개를 넘어온 <겨레말큰사전>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이기도 한 고은 시인은 ‘지난해 국회에서 의결되고 배정받은 기금 중에서 편찬사업비를 지원받지 못했다’며 <겨레말큰사전>사업의 위기를 알렸다. 

이후 통일부가 2억 90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 했으나 북측편찬사업보조비 6억원 등이 빠져 있어 '생색용 지원'에 그쳤다. 고은 시인은 ‘독일은 분단 상황에서도 동서독이 힘을 합쳐 <괴테사전>을 만들었고 중국과 대만은 <양안사전>을 만들어 말의 길을 열어가면서 통일의 순간을 기다렸다’며 ‘남북관계의 긴장과 상관없이 학술적이며 사전학적인 의미로 집필사업이 지속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현 정부 이후로 불편했던 남북관계의 영향이 의미 있는 민족어 공동사전 사업 마저 삐그덕 거리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글날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4권의 책.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뜨인돌/2010.10.5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 여류작가, 한글로 한국을 말하다.


일본작가의 한국어 공부를 담은 책이다. 전후 일본문단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는 시로 국내에서 이미 유명세(?)를 얻었다.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쓰였고, 이 시의 형식을 패러디한 작품이 유형진 시인의 등단작이 되기도 했다. 다만 원작이나 원작자의 모습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거꾸로 그가 '한글'과 '한국문화' '한국인'을 이야기 한다.  

작가의 한글 공부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0세에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사별의 슬픔을 달랜다. 그 즈음 발표한 에세이집이 <한글로의 여행>(1986)이었는데 그 중 '윤동주'라는 수필이 일본 고교 검정 교과서에 실렸고, 1995년 이를 소재로 한 <윤동주 특집> 프로그램이 NHK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번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 이 에세이집의 번역작이자 '아사히 신문'에 연재 되었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신문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라 그런지 쉽고 편안하게 쓰여졌다. 무엇보다 명랑하고 재기발랄 하다. 한글 공부의 동기와 난관, 과정들을 술회하는 첫번 째 장 부터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의 아이러니를 재치있게 보여준다. 왜 하필 한국어냐는 숱한 질문에 작가는 '이웃 나라 말이잖아'라고 눙쳐보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을 아리송해 한다. 작가만큼은 '무난한' 대답임을 강조하지만.(일본 열도에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50세가 넘었던 작가의 나이나, 문학계에서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지식인의 뻣뻣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히려 한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와 같이 빛이 난다. 쉬운 단어와 소박함이 있는 '이웃나라 민요의 멋'을 알았던 소녀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방랑 화가들이 그린 민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만의 애정으로 혹은 이방인의 눈으로 비춰지는 한글과 한국은 새삼스러운 데가 있다. 되려 '우리가 이런가?'라고 되묻게 된다. '한국어의 울림만큼 낭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언어가 없다' 이 같은 낯 간지러운 구절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신선한 이유 중 하나다.

''당신'일까 '선생님'일까'라는 꼭지에서는 우리나라의 호칭문화가 슬쩍 드러난다. 상대방을 칭하는 대명사 '당신'이 부부사이에서는 허락되지만 연상에게는 무례한 칭호다. 성씨 뒤에 붙는'~씨' 역시 풀네임 뒤에는 가능하지만 성 뒤에 붙여 부르면 실례가 된다. 그래서 '저 나라에서는 선생님이 마구 오간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책 서평을 부탁하는 출판사로부터 필자도 왕왕 '선생님'이란 호칭을 듣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한글 표현법과 일본어 사이의 연관점,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격차와 뼈아픈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각 민족마다 발성기관의 고유한 특징이 있음을 역이용 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을 잡아들여 학살한 일, 일본인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낸 민족에 대해 냉담한 현실을 응시한다. 한글을 배워줘서 고마울 정도다. '한글'이라는 외형적 기능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기보다 한글을 쓰는 민족을 이해하려는 마음씀이 뜨겁다.

그녀는 대표작에서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단순한 시구를 반복하며 패전 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냈다. 시대의 아픈 곳에 서 있고자 했다. 시를 사랑하는 만큼, 언어를 대하는 예민함을 작가는 '한글 공부'에서도 발휘한다. 학자나 전문가의 논리는 없지만 직관과 감성이 대신한다. 무엇보다 '이웃 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으면서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결이 곱다. 물고기가 물을 대하듯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 한글 속을 헤엄치게 하는 책이다. 굳이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기보다,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관계' 속에서 언어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이밖에 '일상 속 한국어 염탐기'라는 두번 째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속담, 기발한 일상어들, 세계 유래없는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 준다. 또 네번 째 '여행길에 마주친 풍경'에서는 제목처럼 한국 여행길의 에피소드 들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장의 '역사에 깃든 한국문화의 표상들'에서는 묵직한 주제들을 다룬다. 숫자로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두 기념일인 8.15와 6.25, 일제시대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이야기, '윤동주'라는 수필로 일본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등이 실렸다. 작가는 마지막 꼭지에서 윤동주가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윤동주의 아우 '일주'씨 와의 만남, 시인의 작품세계, 그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덧붙여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와 닮았음을 꼬집기도 한다.



  

(사진은 <다 알지만 잘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에서)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장승욱/하늘연못/2010.10.1

찰진 우리말 뒤엉킨 도사리 장터

글쓴이 장승욱은 알아주는 한글 전문가다.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우리말글작가상' 수상작가로 지난 해 한글날 즈음에서 <우리말은 재미있다>를 펴내기도 했다. 이번 책은 우리말의 '도사리'를 모아 풀어 쓴 사전 형식이다. 책의 절반은 아예 사전처럼 꾸며 '말모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도사리'란 익는 도중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말하는데 이 책을 내면서 '도사리를 한 광주리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아 있는 촌부의 심정'이라고 했다. <우리말은 재미있다>가 집대성된 형태인 듯 하다.   

'사전' 같은 딱딱함은 없다. 우리말 하나하나를 투박한 듯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말 맛이 일품이다. 꾸밈 없고 시원시원한 문장에 속도감이 있다. 생소하면서도 낯익은 우리말들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장터는 흔치 않다. '사전'의 탈을 쓰고 저자가 떠는 '익살'을 즐거이 감상하는 동안 찰진 우리말이 뒤엉킨다. 가령 '총각김치과 홀아비김치'라는 꼭지에서는 '처녀김치가 없으므로 영원히 총각신세를 면할 가망이 없는 총각김치도 있다'고 운을 떼며 '홀아비 김치'를 소개한다. 거기다 '총각이 어떻게 홀아비가 되었는지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고 덧붙이며 ' 써레기김치, 섞박지, 덤불김치, 얼갈이김치, 지레김치, 둥둥이김치 등을 차례로 소개 한다. 마지막에는 수수께끼도 낸다. '김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는 김치는?' 답은 '기무치'다. 이렇게 생활, 세상, 자연, 사람, 언어 속의 우리말들을 175꼭지에 걸쳐 소개한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문장편
김철호/유토피아/2010.10.15

한글을 제대로 쓰기 위한 실용서다. 이미 <국어실력~>시리즈로 '국밥'이라는 별칭을 얻은 책의 '문장편'이다. 20년 동안 글쟁이로, 번역자로, 텍스트 편집자로 살아 온 저자가 낱말편에 이어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자는 책에서 좋은 문장의 세가지 조건으로 '의미의 명확성''표현의 경제성''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맛'을 든다. 또 이 각각의 목표를 실현한 또렷한 문장, 찰진 문장, 맛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
 
'은/는' '이/가'로 대표되는 조사의 사용법, 헷깔리는 조사와 연결어미들의 미세한 차이를 다양한 예문과 연습문제를 통해 설명한다. 내몸처럼 쓰고 있는 한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 문장을 쓸 때 흔히 저지르기 위운 중복과 쓸데없는 표현들을 걸러내는 방법을 비롯해, 꾸밈말, 문장성분의 호응 등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특히 구어체와 문어체에 대한 탐구 편을 통해 '어떻게 쓸 지'에 대한 방향을 잡아 주고, '번역문'에 대한 오류와 실례를 들어 문장 공부의 필요성을 더한다.        



 

<다 알지만 잘 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
배유안/책과함께어린이/2010.10.9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글 이야기

글쓴이 배유안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설로 쓴 <초정리 편지>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작가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이 책을 쓰기에 좋은 조건이다. '한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 그리고 오늘의 한글이 있기까지 험난했던 역사'를 돌아본다. 게다가 한 일본인에게 5년 넘게 한글을 가르쳤다니 이보다 더 한글을 '잘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까?
책은 조카와 조카가 데리고 온 일본인 친구에게 한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썼다. 만화가 정우열씨가 그림을 그려 흥미를 돗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책의 표제처럼 어른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한글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고 크게 반발했던 쪽이 실은 집현적 학자들이었다는 사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100여 개의 언어 중창제자가 밝혀진 문자가 손에 꼽힐 정도이며, 그 중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문자로는 한글이 유일하다는 점. 사라진 옛글자에 대한 발음과 사용 설명 등, 두꺼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실(史實)들이 풍성하다. 모두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반이 튼튼한 이유는 아마도 원저에 있을 것이다. 2008년 한글날 즈음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 함께)이라는 인문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한국사
이문영 지음 / 파란미디어 / 2010년 4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2010년 08월 14일에 저장
절판


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짧은 이바구 하나 들려드립니다.

옛날에 어떤 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해서 자기가 죽은 뒤 어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왕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세 아들을 침대 곁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요즘 깊이 생각한 게 있는데, 지금 너희들한테 그걸 말해주고 싶다. 나는 너희들 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려고 누워 있을 때 비가 와서 제 눈으로 빗방울이 들어가더라도 이미 눈 감은 것 때문에 그냥 잠이 들 정도로 게으르거든요."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 먼저 말하자 둘째 아들이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저는 난롯가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발을 끌어당기는 것이 귀찮아서 차라리 발꿈치를 불에 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게으르거든요."
셋째 아들이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게으르냐 하면 제가 교수형을 당하게 돼서 제 목에 올가미가 씌워져 있는데, 누가 제게 그 밧줄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을 준다고 해도 차라리 교수형을 당하고 말지 귀찮게 제 손을 움직여서 밧줄을 자르지 않을 정도거든요."
왕이 이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네가 제일 게으르니 네가 왕이 되거라."
-<어른들을 위한 그림형제 동화 전집>,231~232쪽(<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에서 재인용.)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이재복/문학동네/2010.6 

 

듣자듣자 하니 게으름이를 찬양하다니요. 이 동화는 참 해롭겠습니다. 권선징악의 공식에 의한다면, 지혜의 씨름장인 동화판에 의한다면, 게으름을 증명하지 못해 어쩔줄 모르는 부지런이가 왕의 간택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게으름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각인하지 않을까요.
 
그치만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의 이재복 선생님에 의하면 말이죠. 뭐 꼭 선생님 말씀이 아니라도 도덕가의 주장이 무색할만큼 유쾌한 허풍들입니다. 마지막 발언권을 가질수록 유리한 경기 입니다. '게으름'이란 주제가 헛갈리게 만들지만 상상력과 기획력이 돋보이는 답입니다. 어른들은 메시지를 보지만 아이들은 유희합니다. 전혀 헤롭지 않을겁니다.


동화 공부장이 이재복은 더 많은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근면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기존의 문화 바탕에서 나오는 고정 관념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려는 대결 의식의 감정이 숨어 있다.''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과도한 경쟁 사회로 몰아가는 지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내면에도 게으름이 영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다''일의 논리, 이성의 본질, 일중독에만 빠진 사람에게 게으름은 밖을 지향하는 일의 논리보다는 내면을 지향하는 감성적인 직감, 사랑의 본질, 애정 방식에서 여성의 원리를 상징하다고 볼 수 있다''게으름이 아이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옛이야기의 시시함을 단번에 깨뜨리는 대목이었습니다. 바보, 마녀(계모), 공주, 괴물이라는 전형도 얼마든지 전복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권선징악'에도, 잔혹한 이야기에도 새 힘을 나눠줍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못박았던 옛이야기 속의 대결 인물들을 '빛이 되는 인간과 그림자가 되는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빛과 그림자를 떼어 설명할 수 없듯이,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인물은 모두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왜 이 당연한 사실을 품지 못했던 걸까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른들은 이런 동화를 이렇게 읽혔을 겁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아.착한 사람이 되야 복을 받는 거야' 이제 아이들에게 다르게 읽어줘야 할껍니다. '너의 마음에도 착한이와 나쁜이가 있지?' 

잔혹한 이야기에도 '에너지가 강한 원형의 꿈'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나 꿈은 귀하게 여겨야 한답니다. 마음속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라지요. 

참으로 조곤조곤, 이야기 하듯이 편하게 들려주는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는 성심껏 글씨를 따라 읽어주거나, 주제가 되는 교훈을 전달하고 마는 '책 읽어주기'의 함정을 깨닫게 합니다. 창의력에 목매 선호하는 창작동화, 좋은 습관에 얽매여 고르는 딱딱한 책들을 돌아보게도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위시하고 말았던 옛이야기의 매력도 되찾습니다. 이야기가 놀이고, 유희고, 하나의 세계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새 잊어버린듯 합니다. 건설적인 독서습관이나 학습태도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이야기 책'들이 재발견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전래동화나 명작동화 전집으로 공급책을 확보해야 할까요? 저는 이부분에 일말의 의심을 죽 품고 있었습니다. 유익함 말고도 책을 읽어주는 순간의 신체적, 감정적 교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귀로 듣고 머릿 속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빠져 못내 아쉬웠습니다. 제아무리 영감으로 가득하고, 아이의 마음을 끄는 그림이래도 '보는'는 행위에 그친다는게 불구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합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매일 밤 할머니가 들려주던 캥거루 이야기처럼 엄마만의 테마도 만들어보자는 제법 당찬 포부를 가졌지요. 책보다는 육성으로, 아이에게 곧 닥칠 분열되고 단절된 세계를 합쳐주고 싶었습니다. '종이'가 아닌 '품'이 앎의 시작이라는 점을 각인하고 싶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읽을 요량으로 짧은 이야기들이 실린 어린이 책 두 권을 보았습니다. 한 권은 이솝이야기, 또 한 권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고 들려주는 일이 여렵지 않아보였습니다. 돌아보니 아이를 업고 다닐 때, 가장 많이 들려준 이야기가 '호랑이와 곶감' 이었네요. 하지만 거기까지. 아이가 말을 시작하자 지루해 하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 여러번 중단하고 나니 저도 힘이 빠져서는 반쯤 포기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위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이어 소개할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숨죽인 열망을 일깨웁니다. 맨 처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을 때 <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이란 흥미로운 책을 봤습니다. 들려주기 좋은 옛이야기의 매력은

지루한 설명 없이, 사건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사건들은 그림을 보듯 이야기의 진행을 상상할 수 있고, 일말의 반복성이 있다.-<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 94쪽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비교한다면 옛이야기의 외형적 유용성을 언급하는 샘이네요. 옛이야기의 원본을 들려주기 좋게 압축하는 실예를 제시하고, 아이들의 경험과 환경에 맞게 지어낸 이야기들도 담습니다. 책은 고개를 주억거릴만 했지만 어쩐지 제 세치 혀는 굳어버렸습니다. 줄줄 꿸 것 같았던 이야기들이 통 입에 붙질 않았습니다. 아이가 지루한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다 이재복 선생님의 책에서 지당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명확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남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24쪽

이 두 문장 안에 제가 저지른 실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만 알고 감동 받은 적은 없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책 읽어주는 부모>가 언급했던 아이의 경험과 환경에 맞는 이야기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베이비 스토리텔링>으로 이정표를 찾았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로니 M.콜/팝콘북스/2010.4


 

  

이 책에는 주변의 부러움을 살만한,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가 등장합니다. 저자이기도 한 로니 M.콜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literary fairy tails'(새로 옷을 입힌 요정이야기-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직접 꾸며낸 환타지죠. 칙폭이(기차), 탁탁이(탭슈즈), 햄순이(햄스터)가 지구와 우주, 집안 곳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서 낯설거나 혹은 익숙한 경험을 하는 내용들입니다. 

별안간 걱정이 앞섭니다. "내가 과연 이야기를 지어낼 능력이 있을까?" 우선 이 중대한 문제는 덮어둡시다. 우선 잠자리 이야기가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잠 최면제라는 사실을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서투른 제가 증명 합니다.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날부터 아이들은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또 하루를 마감하는 그러한 의식이 기대되어 날마다 행복에 겨워 잠자는 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11쪽

홈쇼핑에 미리 섭외된 충실한 사용자 후기 같지만, 지난 주 저희 모녀는 유례없이 평화로운 잠자리 시간을 가졌습니다. 엄마가 어디서 얻어온 이야기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마당에서 시체로 발견된 우리집 암탉 '꼬꼬'가 밤이면 깨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옆집 언니도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 다른 동물들도 마구 등장시킵니다. 황당할 뿐 아니라 더듬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나서서 잠자리 의식을 채근하는 아이에게 강력한 피드백을 받고 있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의 신선한 이야기 창작법들을 조금 만나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디어와 먼저 친해지기 위해서 강력한 시각화의 기술을 사용하십시요. 
#대부분의 이야기에 늘 출현하는 핵심 등장 인물들이 있으면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하세요.
#옛속담을 사용하면서 줄거리를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드세요.


어떤가요? 가능할까요? 그래도 좀 어렵나요? 그렇다면 책이 제안한 한가지 묘수(잠자는 시간이 창의력을 발전시키기 좋다는 교육적 의미였지만)를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기 전 우리의 정신에 답을 제시하라는 긍정적 명령 내릴 수 있습니다.' '뇌야.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해. 멋진 답얻을 수 있게 해줘. 고마워.'라고 말하는 거죠. 자기계발서의 우스꽝스러운 주문 같은가요?

어쨌든 저는 '이야기 들려주는 엄마'라는 명함을 놓칠 수 없습니다. 책값을 줄이려는 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활자가 아닌 목소리로 감정과 온기를 전달하고픈 욕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게 바로 이야기가 가진 밈[각주:1] 유전자 때문일까요? 
           


 



  1.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로 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의 저서《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소개된 용어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본문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갓난아기 - 소아과 의사가 신생아의 눈으로 쓴 행복한 육아서
마쓰다 미치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뜨인돌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육아서의 진지함은 텍스트가 아닌 독서자 때문이다. 타인의 역사에 이만큼 깊숙히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또 어디 있을까. 부모는 짜장면과 짬뽕의 기로에서보다 신중하고, 잘익은 여드름을 골라 거울 앞에 선 사춘기보다 진지하다. 하지만 <나는 갓난아기>, 긴장 풀고 웃었다.(갓난쟁이 시기를 지나서 그랬겠지?) 

장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에밀'이란 아이를 키우며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녹인 가상의 장場을 마련했다. 한 때 유행했던 '마이펫'을 연상시킨다. 일본에선 육아서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는 <나는 갓난아기> 역시 한 명의 아기를 키우는(혹은 자라는) 이야기 속에 육아공식을 풀어낸다. 재밌게도 픽션이 육아,교육서와 만난 것이다.  

<나는 갓난아기>는 '양육자'가 아닌 '피양육자', 즉 아기의 목소리다. 정녕 바라건데 말랑한 머리통이 끄집어내지는 그 순간 나의 아기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누구이며, 여긴 어딘가요?" 

물론 요 영특한 아기는 그런것 쯤은 다 안다. 엄마젖을 과식했다는 것도 알고, 분유에 비타민제를 넣어줘도 귀신처럼 눈치채고, 아파트가 살기에는 별로라는 것도, 기저귀커버가 답답하다는 것도, 옆집 아줌마가 하는 말은 다 헛소리라는 것도, 활동량이 많아 몸무게가 500g정도 미달(망할놈의 평균치에서!) 된다는 것도, 여관이 지낼만한  숙소가 아니란 것도 안다. 게다가 엄마는 내 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도 체득했다.




..엄마가 타 주는 분유는 내겐 너무 진하다. 분유 회사는 분유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팔려고 하기 때문에 되도록 진하게 먹는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 분량을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각자의 취향이 있다. ... 분유를 조금 적게 넣고 그 대신 물을 좀 더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순진한 엄마는 분유 회사가 광고하는 숫자대로 정확히 타주려고 애를 쓴다. 싱거운 분유로는 영양부족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갓난아기>40쪽 에서

 
 

맞다. 아기들은 다 안다. 어른들이나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간혹 자신을 잃는 것이지 아기들은 누구보다도 자기에 대해 잘 아는 시원始原의 존재다. 우리는 그들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자고로 어른은 자주 울어도 안되며 호기심으로 말썽을 부려도 안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결국 우리는 아이를 떼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를 어른의 키로 어른스런 생각으로 잡아당기기 전에(이 힘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이' 그대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쭉 이어져 왔다. 아마 <나는 갓난아기>도 그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기어이 경쟁사회는 아이를 삶의 중심에 놓는 지경까지 다다랗지만, 그게 이 책이 홀대당해야 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




...나는 위도 크지 않고 대식가도 아니어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거나 소화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주 젖이 먹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다. 밤에 잠깐 깨었을 때 십분 정도만 젖을 먹여 줘도 나를 안고 한 시간 넘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보다 숙면을 취하는 데 열 배는 더 효과적일 텐데, 어른들은 왜 그걸 모르는 걸까.-62쪽 에서



 

'나는 갓난아기야. 나를 알아줘, 내 얘기를 들어줘' 정도로, 부모중심육아와 아이중심육아에서, 과잉육아와 방치 사이에서, 육아의 환희와 고통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솜씨가 굉장하다. '해야한다'는 묵언의 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신입 부모들을 모아 다독인다. 아무리 가짜라도 감정이입의 장치는 꽤나 쓸만해서 요 대리아기에게 깜빡깜빡 속아 넘어갈 지경이다.

이 아기는 <나는 갓난아기>에 출현하기 위해 각종 증상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개한테도 물려봐야 했다. 알만큼 아는 부모도 이리저리 휘둘려야 했고, 주변인물들은 엉터리이거나 달관자이거나 속물이어야 했다. 수집되고 과장된 현실들은 시트콤처럼 유쾌했고, 기어코 메시지를 전하는 힘도 잃지 않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문학육아서' 한 권이 출생했던 것이다.
 
소아과 의사로서 메시지의 객관성을 검증받은 마쓰다 미치오의 몇몇 생각들은 양육법의 조언을 넘어, 부모의 양육 본능을 끄집어낸다. 아이와의 소통에서 가장 난항을 겪을 두 돌 전까진 이성(코칭)보다는 본능이 앞서야 하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오늘도 다시 쳐다봤다. 어제도 그랬고 아주 옛날에도 그랬다. 대놓고 보지 않아야 된다는 묵언으로 흘끗봤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어쩌면 더 힘차게)팔 다리를 내저으며 내 삶, 비장애의 영역으로 되돌아 온다. 나는 이제 그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엄마손을 꼭 쥔 아이는 묻는다. 

"저 사람은 왜 휠체(어)를 타고 있어?" 

그렇다. 전혀 무관하지 않다. 아이를 낳으면 무관심이야말로 특권이 된다. 나와 무관한 일은 거의 없어져버린다. 드세고 대차지지만 아줌마는 물잔을 찰랑거리는 감수성도 가지게 된다. '미담'은 더이상 예쁜 이야기가 아니라 아줌마가 그려야 할 미래의 붓칠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더블 테이크>가 미담은 아니다. 연하지도, 강인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우스꽝스럽게 꼬꾸라지고 놀랄만큼 담백하다. 두 다리 없이 태어난 20대의 이야기치곤 무척 가뿐하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는, 실은 시선을 'take'하는 우리의 눈은 그다지 가볍지 못하다. 굉장한 불운을 목도하는 상대적 안도감일지도 모르고 우리와 다른 신체에 깃든 고통스런 사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정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읽어야 하는게 장애 극복기고 더불어 '나도 사는 데 너도 살아라'같은 용기를 채집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원제 'double take' ) 케빈 마이클 코널리/황경신 옮김/달




더블 테이크(double take) ;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글자 그대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 또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

하지만 이 책, 지금 우리얘기하는 거 맞지? 되돌아보는 우리와 시선을 맞추자는 거지? 왜 쳐다 보냐고 묻는 거 맞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감출수 없는 호기심에 대한 정당한 태클?


아얘 사진까지 찍어두었군. 촛점의 흔들림도 개의치 않고 올려다 본 구도로 찍힌, 두려움과 호기심이 깃든 아이들이나 떫고 노골적인 표정의 어른들. '이것은 다리없는 사람의 스케이트보드입니다'라고 적힌 구르는 판 위에서 이른바 '더블 테이크'를 포착한 수 백 수천 개의 컷 중 18개의 사진이 각 장을 장식하고 있다. (총19장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한 장은 저자 케빈이 스키타는 장면이다) 

사실, 이 사실은 명백한 스포일러다! 중반 이후 서서히 밝혀지는 사진의 각도에 정말로 책을 'double take' 했으니 말이다. 말을 꺼냈으니 다시 담지는 않겠다. '이건 '역전'이군.' 속으로 생각한다. 그 사진 속에서 감시자는 우리가 아닌 그다. 그러나 어쩐지 케빈이 통쾌하지만은 않다. 이게 무슨 꿍꿍인지 고민하고, 장애를 '이용'하는 수작이 될까 걱정도 한다. 

'자경단 퍼레이드'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케빈이 속한 팀은 본디 없었던 다리를 이용해 유혈이 낭자할 신체절단 이벤트를 벌일 계획에 들뜬다. 케빈은 팀에 기여하는 자신의 역할에 거의 병적인 자부심에 차 있었고, 약간의 실패조차 예감하지 못했다. 불쾌감이나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던 구경꾼들 덕택에,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든 프로젝트에 대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되묻는다. 

그는 다시 본격적으로 '장애 재활용'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바로 더블 테이크의 시선을 붙잡는 이 사진들이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각국의 많은 도시들을 스케이트보드와 맨손으로 누비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쳐다본다. '뒤 돌아봐'라고 주문을 걸 판이다. 달라진게 있다. 적어도 그가 웃음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감정이 몰려 온다.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복수의 형식이기도 했고, 일종의 치료법, 카타르시스 이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목적임을 자각한다. 
 
그 고민들이 명확히 해결책을 찾은 것 아닌 듯 하다. (케빈은 이제 겨우 스물셋이다!) 어쨌든 그는 끝까지 갔다. 그가 받은 시선들을 되돌려 주었고,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도 싶었다. 낭떠러지 앞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이제 반대 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힘껏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큰다면 성공담 말고, 이런 도전기와 분투기를 권하고 싶다. 게다가 그의 작문실력은  A+++이지 않은가!                              
저작자 표시 동일 조건 변경 허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