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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진 트웬지 & 키스 캠벨 지음, 이남석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진 트웬지,키스캠벨/옥당/2010.6
기독교가 오로지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 선과 악을 구분하듯이,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는 나르시시즘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합니다. 인간이라면 '선과 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나르시시즘이 저를 옭아매고 말았습니다. 일생의 종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강렬한 책들은, 제게 '종교'와도 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부정하다 수긍하고, 수긍하다 도리질치고, 몸부림치다 온순해지길 반복하면서 동심원으로 중심부에 다가갑니다. 그곳에 실체가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믿음'인 것처럼(전 무교 입니다), 나의 나르시시즘과 마주앉아 황망합니다. 이곳저곳 어긋나고 줄이 끊어진 삶이 혹여 '나르시시즘' 때문은 아니었나 생채기를 내며 물어봅니다.
남보다 앞서기를 원하는가.
독특한 것들이 나를 빛낼 것이라 믿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가.
다른 사람과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더 강조하는가.
유명해지고 싶은가.
나는 나만 사랑하는가.
성과를 자랑하길 즐기는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사람을 만난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멋지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뎌졌는가.
아이에게 '너는 특별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의 행복은 침해받을 수 없는 것인가.
돈을 빌려서라도 나를 돋보이게 할 물건을 구입했는가.
날 비난한 사람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품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지긋지긋한 두더지처럼 문자를 뚫고 튀어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라고 방망이질을 해도 잠복된 나르시시즘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몇 가지 변명을 해봅니다. 이제 30대, 저는 '겸손의 시대'가 아닌 '자기 PR의 시대'를 걸어왔습니다. '도덕'이 아닌 '상상력, 개성의 모터'가 힘을 발휘하는 곳에 서있습니다. 이웃과 가족이 아닌 '웹'과 '사회적 지위'가 발분하는 소통의 에너지에 휘둘립니다. 더디게 늘거나 급격히 깎여나가는 저금 통장이 아닌 신용카드의 대출이용한도가 더 절대적인 숫자였습니다. 책은 이 모든 상황을 나르시시즘이 창궐하는 증표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겸손을 배울 곳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론 '겸손'이 성공의 시대에 어울리는 가치는 아니었습니다. '사랑받으려면 나를 드러내라'가 훨씬 솔직하고 당당해 보였죠. '겸손하라'는 권유보다 무서운 나르시시즘에 대한 해부는, 그것을 거의 악성 종양으로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파괴할 것을 종용합니다.
이 점은 무책임한 사회비판보다 뼈아픈 자아검열을 먼저 요구합니다. 언론과 교육과 웹시대와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나르시시즘을 확산시키고 파멸로 이끄는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결국 '나는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운가'를 묻게되는 이 책은 좀 잔인할 만큼 단순화 된 경향도 있습니다.
자신 안에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개의 현대인으로서 나르시시즘에 의한 인간 분류는 천사와 악마의 구별만큼이나 선명하면서도, 한편 의심스럽습니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욕구, 나와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천부권, 엣지있고 핫하고 쿨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유혹, 등이 모두 나르시시즘에 의해 발현된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이마에 거울을 하나씩 달고 있는 자아기계라도 되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 블로그만해도 독후라는 미명 아래 '나'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지, 어제도 잔소리를 퍼부은 시어머니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나르시스트는 아닌지, 방어기제로 적개심을 품은 제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에 이미 전염된 건 아닌지, 자기 얘길 하기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도 유사한 증상인지, 꾸미길 좋아하는 남편도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경계대상은 아닐지, 갑자기 '나르시시즘'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일상을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책은 수많은 처방전을 내놓는데, 그 중 나르시스트들을 격리 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되도록 얽히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합니다. '친밀하게 굴되 친구가 되지는 마라''그들과 주고받은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두어라. 상황이 나빠지면 뒤통수를 칠 나르시스트와 대적할 때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이 처방은 이 책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나르시스트들의 위험도에 얼마나 증오에 가까운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게합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악마처럼 분명 나르시시즘도 한 자리 차지할 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완벽한-경계할만한- 나르시스트의 모델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성형녀, 방송에 자주 노출되는 유명인, 라이프 스타일의 잡지들, 총기 살해자, 천부권자, 독특한 이름을 짓는 부모들, 자기계발서 속에 나르시시즘의 징후는 분명히 있지만 그들을 '나스시시스트'로 못박고 벌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책이 권하는 처방전은 '나'에게 만큼은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방어하고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나르시시스트라고 찍은 낙인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위험한가요. 나르시시즘은 존재할 망정 나르시시스트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 순화되어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강경한 어조를 조금 포기했다면 더욱 지적인 목소리가 될 수 있었음에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발적이면서도 소중한 아래의 구절들은 이 책을 빛나게 만듭니다. 이런 주장은 나르시시즘의 반대편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돕고, 서구의 자아비판을 통해 동양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이끌기도 합니다.
*저축을 하는 것에 더 많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신용도가 아닌)
*나르시시즘과 자존감에는 차이가 있다. 아이에게는 '특별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저 수학을 잘한다고 말해주면 된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존재이지만, 공통적인 경험과 도전과 특성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할 몫을 남겨놓지 않게 된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야 한다.
*'미래에 우리는 모두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앤디 워홀의 말-유명해지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빚은 숨기지만, 그들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은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불교에서 나온 개념이기도 한 '깨달음'은 나르시시즘을 줄이고 자아를 얌전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가르칠 수 있다면, 나르시시즘적인 공격성에 대한 잠재적 치료제를 얻게 될 것이다.(아이에게 동감과 동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라)
*학문적으로 우리는 '실패를 배우는'것이 '네가 특별하다'는 메시지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독서 후, 우연찮게 제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시민헌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국가적 각인인가요.
시민헌장 1.부지런하고 알뜰히 하여 남보다 앞서는 시민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