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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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책은 어리석음, 불교용어론 無明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책이다.

"무지는 교양이 없다든가 머리가 나쁘다는 듯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스스로의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떤 사고가 소용돌이 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뇌의 일부를 혹사하며 생각을 많이 할수록 신체와 마음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알기 어려워지고, 무지해진다.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 변화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늘 같은 얼굴이군, 지루해...'라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개념과 망상만 쌓이게 되고, 현실과 의식의 실제 흐름에 무지하게 된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왜 문제인가? 무지는 번뇌의 원인이고 번뇌는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무슨말인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오랜 친구 스트레스. 스트레스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스트레스 두가지가 있다. 금속이 자주 구부러지고 휘면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부러지듯이 육체도 스트레스를 받고 피곤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스트레스는 정신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적 스트레스는 욕심(탐)과 분노(치) 때문이다.

무엇이 갖고 싶고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욕심과 분노를 무지와 함께 3독이라 하는 이유는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고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도 갖지 못해도 번뇌가 일어난다. 욕심 나는 것을 가져도 더 갖고 싶고 못 가지게 되면 분노가 일어난다. 그러나 욕심내는 마음 자체가 어리석음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고 괴롭지 않아도 되는데 괴롭게 되니 문제인 것이다. 인생은 괴롭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 문제이다.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불쾌해지면 '이런 말은 듣기 싫다'라는 분노의 번뇌 에너지가 활성화된다. 단순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도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도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긴장하는 것도 원인은 모두 하나이다. 바로 분노의 번뇌 에너지가 연료가 되어 타오르는 충동이다. 분노의 어두운 번뇌 에너지가 증폭되면 스트레스의 뿌리가 된다."

화낼 일에는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대부분 분노할 것이 아닌 것에 분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은 우리 자신의 망상 때문이다.

'이 일을 실패하면 어쩌지?'라든가 '실패해서 저 사람에게 무시당하면 어쩌지?'하는 잡념이 연쇄적으로 재빠르게 일어나며 마음속에 들끓게 되고 마음의 메인 메모리는 헛된 잡념으로 가득찬다. 1초동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0.1초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나머지 0.9초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나 과거의 잡음이 남긴 메아리에 휘둘린다면 어떻게 될까? 10초 중 9초는 현실감이 사라지고 한 시간에 54분은 멍청히 있게 된다. 현실 그 자체에 직결되지 않는 망상에 탐닉한 결과, 현실감이 사라지고 행복감도 사라진다.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고병 즉 '생각병'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커뮤니케이션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상대가 자신을 희생향 삼아 쾌락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의 말소리라는 정보에 의식을 집중하면 상대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이 고통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망상을 멈추고 자비심에 가까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반사적으로 분노를 품게 된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부당한 이유라고 괴롭힐려 그런다고 생각하며 분노를 터트리기 전에 상대가 왜 분노하는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같은 불평을 도대체 몇번이나 되풀이하는 거야. 이 사람 나한테 스트레스를 풀고 있군!'하고 화를 내며 스스로의 고통을 더한다. 그러나 사실 불평하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풀기는 커녕 호릅이 얕아지고 표정이 굳고 목소리가 불쾌하게 올라가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상대의 고통을 본다면 화를 내고 싶은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이며 거창한 말이 아니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대개 이런 식이다. 스스로의 생각에 잡념에 휘둘려 분노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는 여유가 있다면 분노를 터트릴 이유가 없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간단하다. 우리를 휘두르려 하는 잡념을 줄이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잡념을 다스려야 한다. 어떻게?

"만일 화가 치민다고 생각되면, 이 '화가 치민다'를 따옴표로 묶어버린다. 그 다음 '나는 '화가 치민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가 치님다'고 행각다...'라고 되풀이 하며 마음속으로 외우타시피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 화가 치민다는 것은 단순한 생각일 뿐이고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책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불교 명상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짐작하겠지만 이상의 내용은 '알아차림(mindfulness)'를 일상생활의 맥락에 적용한 내용이다.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다음의 인용을 보면 분명해질 것이다.

"집중이 잘 안된다면 촉감에 주의를 기울여보라. 보통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럴 때쯤 의자 바닥과 접하고 있는 엉덩이의 감각, 등에서 배에 이르는 감각, 신체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감각에 지긋이 의식을 집중해 본다. 의식이 그런 촉감을 향하도록 하면 떨어진 집중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알아차림은 불교수행의 가장 기초이며 끝이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眞如)를 안다는 것이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인가? 이책처럼 말한다면 잡념으로 염색되기 전, 현상을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위에서 상대가 화낸다고 같이 따라 화내기 전에, 상대의 분노라는 입력에 나의 분노를 염색하기 전에 그 입력을 그대로 본다면 있는 그대로 상대의 고통이 보일 것이고 분노를 터트릴 이유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처럼 말이다.

이책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잡념, 즉 번뇌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위에서 든 예처럼 구체적인 맥락에서 여러가지를 말한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맛보는 것, 등 우리의 오감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언제나 어떤 의미가 부여되어야만 의식될 수 있다(현상학의 지향성 개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부여된 의미에 의해 우리가 부여한 의미에 의해 번뇌에 시달리고 번뇌는 괴로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감각자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불수는 없다) 반성할 수 있다. 그것이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 의미를 넘어 있는 그대로를,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事象 자체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 그것을 일상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책은 보여준다. 그리고 단순히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와닿게 아하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 라고 말할 수 있게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 이책의 장점이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 행복은 멀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실천에서 작은 실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 이책의 매력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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