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헤르만 요세프 초헤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이책은 신부님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가이다. 이책의 저자인 초헤 신부는 중세 기독교에서 말했던 7가지 악덕(seven deadly sins)에 따라 세태를 분석해 나간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바라기만 해라 그러면 될 것이다'는 사이비 종교식의 주문을 읆으면 당신도 성공할 수있다 구체적으로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출처불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시크릿같은 책이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공은 일종의 종교가 되어 있다.

성공. 좋은 일이다. 누가 부자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이라는 것이 말초적인 쾌락을 쫓는 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보통 성공의 궁극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부를 들어보자. 얼마만한 돈을 가지면 부를 이뤘다고 할 것인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쌓아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아도 자기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보일 것이고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끼듯이 시기심이란 악덕에 물들어 계속 돈을 쌓아올리는 일만 계속될 뿐이다.

즉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바램은 만족을 모르는 쾌락이란 악덕이다. 그렇게 된 이유를 저자는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이 성공 자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무엇을 위한 성공이냐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라는 외모지상주의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부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 자유의 의미는 사람들의 시선이란 외적으로 주어진 공허한 의미이기 때문에 성공을 위한 성공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러나 성공의 길을 가는 사람보다는 가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고 그 길에 오르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덕은 분노이다. 사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 뒤에 오는 좌절과 좌절에 갇혀 살면서 시기심이란 악덕을 키운다(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마이너스적 감정들이 노무현이란 분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7가지 악덕으로 분류되는 쾌락, 탐식, 게으름(무관심), 분노, 시기심, 오만, 탐욕은 인간이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흔히 볼 수 있는 결함이다. 저자는 그 악덕들의 근원에는 무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분명한 사람이 그런 악덕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악덕은 남에게 피해를 주기보다 자신의 삶을 망치기에 더 슬픈 결함이다. 저자는 그러한 악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미덕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책을 끝낸다. 악덕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겸양, 금욕, 부동심, 기쁨의 나눔, 열정, 순종, 양보이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책에는 더 많은 내용이 있다. 가령 후기 훗설이 자연과학적 태도가 생활세계를 잠식해 들어가면서 문명의 위기가 오게 되었다는 논지를 확장한 듯이 보이는, 시장의 논리가 삶을 지배하면서 즉 사회의 공통가치가 돈으로 통일되면서 의미가 상실된 것이라는 설명이나 재미를 추구하는 풍조의 무의미함, 자서전과 같은 장르가 유행하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삶에 관음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 역시 사람들간의 의미를 소통하는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라는 설명 등 흥미있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위에서 설명한 삶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논지가 전제되고 있다.

글자도 크고 두껍지도 않은 이책에 담긴 메시지는 밀도가 높다. 이책의 내용은 7가지 악덕이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윤리가 전제되어 잇다. 신부님이 쓴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신부님이 쓴 책이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거부감없이 동의할 수있는 삶의 지혜이며 그 지혜는 2천년이란 기독교의 역사가 실린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책의 문제는 저자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삶의 의미는 자신이 찾는 것이고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엿보게 할 수 있다. 저자가 악덕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미덕도 삶의 의미가 있어야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듯이 그러한 미덕은 무한한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고 그러한 노력은 의미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책에서 의미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저자가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제시하는 미덕은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미덕이다. 성직자인 저자에게 그 미덕들의 의미는 기독교적 의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만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닌 책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앙꼬 빠진 빵이 되었다고 이책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서가 아닌 책이기에 이책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보편성을 가진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에겐 자신의 신앙으로 생략된 부분을 메우면 되는 것이고 비신자에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메우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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