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소록
강희안 지음, 이병훈 옮김 / 을유문화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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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어새는 기록에 의하면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 일부지역에만 600마리 정도 살아 남았다니 심각한 멸종위기에 처한 조류가 아닐 수 없다.

저어새는 온몸이 흰색이고 다리와 부리 그리고 부리의 밑등으로부터 눈에 이르는 드러난 피부부분이 검은색을 띠고 있다. 특히 부리가 주걱모양이고 눈아래에 노란색의 반점이 있는 것이 아주 순한 인상을 준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희고 부드러운 댕기깃이 위로 솟구쳐 흡사 갈대가 흔들리는 듯하다. 비슷하게 생긴 백로나 다른 맹금류가 먹이를 사냥하는 모습은 어딘지 잔혹한 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갯벌에서 주걱모양의 부리를 이리저리 저으며 요행히 먹이가 ‘걸려들기’만 바랄뿐 인 듯한 저어새의 먹이 채취 모습은 바보같고, 그래서 가슴이 뭉클하다.

이 순하고 아름다운 동물이 불러일으키는 알 수 없는 뭉클함은, 이미 60억을 넘어 지구상 최고수준의 개체군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가지는 단순한 연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잠시 함께 빌어 살 뿐인 이 지구에서 다른 동식물들 역시 그들 나름의 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당한 무심함과 우리자신에게와 똑같은 존중을 기울여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일까?

조선 세종 때의 강희안은 식물은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지만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 들이는 법을 알고’ 천성을 어기지 않으면 그 참모습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1400 년경에 씌어진 ‘양화소록’은 그 당시 사람들이 완상해 온 꽃과 나무를 심고 옮기는 법, 습도와 온도를 맞추는 법 등 식물을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법을 알 수 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원예교본 같은 것이다. 수십 종에 달하는 꽃과 나무에 대한 옛사람들의 기록을 옮겨놓은 것도 다채롭고 읽을 만하지만, 무엇보다 강희안이라는 갓쓴 선비가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마이클 폴란-욕망의 식물학 저자-이 들으면 항의할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늘날만큼 식물생태학이니 유전학이니 하는 학문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도 용서하리라 )식물을 마치 벗을 대하듯 그 천성을 살피며 인간의 품격을 가다듬을 만한 장점을 찾아내려는 겸손함에 이 책의 미덕이 있다. 물론 일본 철쭉의 그 ‘곱고 찬란한 붉은 비단’ 같은 자태를 감상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을 세종의 덕화(德化)가 동해 먼데까지 미친 공으로 돌린 것에서는 가히 충신다운 면모도 엿볼 수 있겠다.

책 말미에서는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꽃을 분에 심는 법, 꽃을 취하는 법, 꽃을 기르는 법 등 양화(養花)에 대한 실제적 내용뿐 아니라 화분 놓는 법에 대해서까지 섬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자상한 품성도 보인다. 특히 오징어 뼈로 꽃나무를 찌르면 바로 죽는다거나 효자(孝子)나 잉부(孕婦)가 꽃나무를 손으로 꺾으면 몇 년이 지나도록 꽃이 피지 않는다는 설명은 재미있기까지 한다. 시험삼아 한 번 해 볼까 하는 장난끼가 동한다.

부록인 "화암수록"은 강희안 자신이 직접 꽃과 나무의 품재에 대해서 9가지 등급으로 나누고 품평을 논한 것이다. 소나무니 대나무니 작약이니 동백, 장미, 백일홍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보아왔던 꽃과 나무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겠다.

아쉬운 것은 이제는 이 책에 소개된 꽃 중 몇몇은 이제 여념집 뜨락에서 완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핀 치자나 사계화, 석창포 등을 만나기가 도심에서는 쉽지 않다.

멸종 위기로까지 내몰린 저어새나 이미 보기 어렵게 되어버린 꽃과 나무들은 자연을 천성대로 두지 않고 인간 기호의 변덕스러움에 맞춘다거나 오로지 인간만이 이땅의 주인인양 행세하는 오만함의 소치인 것 같아 자못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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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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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일을 하는 A씨는 작정하고 지리산으로 갔다. 한동안 활자로된 그 어떤 것도 스스로에게 금지할 요량으로. 그런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마치 금단현상처럼 무언가 허전하다 싶더니 이틀 째 되면서는 어디 눈에 띄는 라면봉지라도 없나하고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연히 등산객이 두고간 신문쪼가리를 발견하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결국 며칠 만에 다시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금지된 것은 늘 매혹적이다. 왜 하필 기말고사 전날에 유독 재밌는 만화책이 눈에 띄는지, 어찌하여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는 변장을 해서라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느냐 말이다.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일거리를 제쳐 두고 나는'연암을 만난다'. 국문학 교수인 박희병이 연암의 산문을 스무여 편 뽑아 우리글로 옮겨 놓았다. 그 스무여 편 되는 글들 모두가 아름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굳이 순서를 정하라고 한다면, ' 소완정이 쓴 「여름밤 벗을 방문하고 와」에 답한 글'을 제일로 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희병 교수가 여러 해 동안 읽고 연구하고 다듬어 놓은 본문에 이어 주해와 평설까지 함께 실은 수고로움 덕에 책의 두께는 세배로 늘어났지만, '이몽직의 요절에 애도하는 글'과 같이 연암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인 슬픔의 어떤 지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가외의 소득이라고만 한다면 지나치게 인색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그 글에서 어쩌면 내 마음의 한자락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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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보이 SF 걸작선 2
필립 K. 딕 외 지음, 앨리스 터너 엮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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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로뎅의 조각이다. 물론 다른 미술가들도 이 다나이드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내가 아는 다나이드는 오직 이 로뎅의 다나이드 뿐이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 아름다운 여인은 이토록 절망적으로 온 몸을 내던지고 엎드려 있는 것일까? 울고 있는 것일까? 숨이 끊어진 것일까? 한편으로 관능적이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무방비인가? 여인이 저렇게 머리채를 내던지고 희고 긴 목덜미를 저토록 무방비로 드러내 보일 때만큼 절망적인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

다나이드는 다나오스의 딸들이란 뜻으로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다나오스는 자신의 사위들에 의해 멸망한다는 신탁을 받는다. 이에 자신의 50명의 딸들을 이집트의 왕 아이굽터스의 아들들 50명과 결혼하게 해서 딸들에게 첫날밤에 남편들의 생명을 빼앗도록 명령한다. 그 중에 단 한 명은 살육을 행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49명의 딸들은 남편을 살해한 죄로 저승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붇는 영겁의 벌을 받는다. 이 영겁의 벌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여인의 고통을 로뎅은 자신의 손으로 재생시킨다. 다시 예술이라는 영원속으로 그 가엾은 여인의 고통을 묶어 버린 것이다.

나는 이 영원 속에 묶여 버린 다나이드 때문에 울적하다. 그 소재를 어디서 취했든 사람이 괴로움 속에 ‘영원히’ 붙박힌다는 사실만큼 끔찍하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란 주제는 그것이 고통과 슬픔의 영역일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많은 낙관론자들(?)의 욕망을 자극해 왔다. 질병없이 평생을 아니 영생한다는 것만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에게 달콤한 말은 없을 터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틀림없이 인생은 아름답다라는 전제하에 제기되는 말이거나 아니면 ‘이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플레이보이’와 ‘SF'-이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낱말의 조합을 제목으로 삼은 책은 최근에 나왔다. 그러나 책에 실린 글들은 지금보다 족히 20년은 더 먼 시기에 쓰인 것들이 태반이다. ’해저2만리‘의 작가 프랑스의 질․베른이 그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공상과학소설은 흔히 영원한 생명과 시간 여행, 현재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삶을 그 주제로 삼는다.

노먼 스핀래드의 ‘어떤 임종’은  무한히 연장된 생명으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이 물리적 시간상 뒤바뀌는데 이는 무한한 생명연장에의 욕구에 대한 경종일 뿐 아니라 근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J. G. 발라드의 「죽은 우주 비행사」는 우주 공간에 떠도는 죽은 연인의 시신을 거두려는 두 남녀가 회귀한 비행선에서 방출된 핵 방사능에 오염되어 비극적이 최후를 맞는다는 다소 우수어린 이야기다. 그보다 먼저 소개되는 레이․브래들버리의 ’화성의 죽은 도시‘는, 일단의 남녀가 화성의 미탐사 지역을 탐험하다가 각각 잠재된 욕망이 마술처럼 유감없이 현현하는 것을 보다가 파멸하게 되는 얘기다. 인간의 가없는 욕망은 파멸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섬뜩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이라는 짧은 글이 좋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없다. 세상의 종말이 바로 내일이란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제처럼 혹은 그 전전날처럼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어르고 깜빡 잊은 수돗물을 잠그는 일일 뿐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은 무한한 시간 속에 혼자 던져져 있다는 존재론적 문제에 기인할 지도 모른다는 어슐러 K 르귄의 ‘아홉생명’ 은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인간이 효율성을 내세워 창조한 복제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유일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열명의 복제인간이 서로 하나의 팀을 이뤄 완벽하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지만 사고로 모두 죽고 하나만 남는다. 그 남은 하나는 전체인가, 일부인가? 혹은 인간인가, 아닌가?

12편의 글들은 각각 나름대로 독자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책은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효용에 모두 충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복제인간의 탄생이 SF의 몫만이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욕망이 결합했을 때 어떤 일들이 가능할 지 상상해 보는데 길잡이는 될 만하다, 단 그것이 꼭 장미빛일 수만은 없다는 데 이 수십년 전의 작가들은 모두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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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정원
미셸 깽 지음, 이인숙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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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처절한 정원에서/석류는 얼마나 애처로운가’-아폴리네르

  일부 성서학자들은 에덴 동산의 금단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석류였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 진실여부를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석류라는 식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약용으로나 관상용으로나 인간에게 꽤나 효용가치가 높았던 모양이다.

  수분이 많고 신맛이 나는 석류열매는 날것으로 먹거나 즙을 만들어 먹으면 갈증을 없애준다. 어린시절 어긋난 이처럼 촘촘하게 박힌 못생긴 석류알을 입에 넣고 그 신맛에 진저리를 친 기억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석류는 안에 씨가 많아 다산의 상징이기도 해서 혼례복인 활옷이나 원삼에 문양으로 쓰이기도 한단다.

5~6월 경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듯한 오렌지 빛 붉은색의 꽃이 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렌지빛이라고 하기엔 좀더 도발적이고 그렇다고 붉은색이라고 하기엔 좀 순진한 색이다. 사실 장미나 튤립처럼 꽃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노력없이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꽃이 있지만 석류는 그런 종류의 꽃은 아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궁에서 우연히 시선에 부딪히는, 혹은 비바람에 흩어져 발길에 부딪쳐서야 비로소 그 꽃잎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런 종류의 꽃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류꽃은 참 예쁘다. 바람에 흔들리는 6월의 꽃잎은 차라리 여리고 가냘파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여름의 폭풍을 견딘 가을의 그 열매는 얼마나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지...




미셸 깽의 「처절한 정원」은 물론 이 석류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석류를 노래한 아폴리네르의 짧은 시를 제사(題詞)로 달고 죽음의 상황에 처한 작가의 아버지가 동생에게 그 시를 읊어주었다는 정도.

이야기는 2차 대전 당시 많은 유태인에게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한 어릿광대가 출입을 저지당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시 모리스 파퐁의 재판에 참석하려는 그 어릿광대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흔히 2차세계대전을 그린 전쟁 소설이 그렇듯 이 책을 나치에 대한 선악일변도의 글로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짧고 순진한 글은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 전쟁 속의 비참함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침묵의 무게가 오히려 사람의 정서를 자극하고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전쟁의 비인간성을, 마침내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작가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을 중심으로 씌어졌다.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몹시도 부끄럽게 했던 아버지 덕분에 작가는 세상에서 어릿광대를 가장 증오했다고 고백한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품위’있는 본업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어릿광대로 분장하고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웃기는 일을 자처하는 것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때인지라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부끄러워 어떤 고아라도 원한다면 기꺼이 아버지를 주어버리겠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에게는 속죄할 만큼의 잘못이 있고 그래서 평생 어릿광대 노릇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학대한다고 짐작한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이 비밀을 밝혀가는 것이 이 책의 중심 줄거리다. 책의 말미에 가서야 밝혀지는 진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감추인 비밀이 꼭 잔인할 것이라고 짐작할 필요는 없다.

글은 짧고 문체는 명랑하다. 짧은 글은 부담이 적다. 그러나 글이 짧다고 해서 쉽게 생각할 만큼 녹록한 주제가 아님은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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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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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갈 아파트를 단장하다가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쳤다. 약간의 통증이 있었지만 별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느긋하고 유쾌하며 고상했고 하는 일은 만족스러웠다. 아이들과 아내 역시 좋았고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옆구리 통증이 심해졌다. 의사는 맹장을 의심했다. 처방전대로 약을 복용하고 안정을 취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우연하게도 나지?

우연한 사고가 사건의 핵심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가구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면, 이반 일리치(톨스토이 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스의 상급자가 좌골신경통이 도지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대신 토마스가 테레사가 있는 시골로 검진을 가지 않았더라면 토마스와 테레사의 사랑은 결코 싹트지 않았을 것이다(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에 의해 우리 인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논한다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우리 인생에 만약 두갈래 길이 있다고 해서 둘 중 하나를 미리 탐색해 보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는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우연의 힘이 끼여든다고 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어쩌면 매 순간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앞선 우연한 신경통의 재발, 우연한 부딪침, 우연히 발견한 책 한권, 심지어 우연히 후각을 자극한 마들레느 냄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연의 값을 측정할 수는 있을까? 우연이 사건들의 공시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A가 일어날 때 B가 일어날 수 있는 수적인 값을 과연 측정할 수 있을까? 다시 헛되고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을 해보자, 우리 삶의 몇 퍼센트가 과연 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되는가?




풀 오스터는 미국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작가다. 나 역시 그의 ‘달의 궁전’을 읽었고 영화 ‘스모크’를 보았다. 달의 궁전은 처음 시작이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의 비관습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인생관이 처음 얼마동안 책에서 손을 놓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줄거리를 섬세하게 다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꼭 400쪽이 넘는 책의 분량 탓으로 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 기억력의 한계일수도 있고 갈수록 흥미를 떨어뜨리는 내용 탓일 수도 있으니까.

‘우연의 음악’이 내 수중에 떨어진 것은 2004년 4월 말이었다. 바하에 대한 책이 어디 없나 하고 신문을 검색하고 있던 차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내 눈에 띄었다.“…음악을 전공하는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책의 전개가 바하의 푸가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2000년 4월 7일자 일간지에서였다. 순전히 바하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 셈이 된 것이다. 푸가라, 푸가의 기법이라......

서른 중반의 소방관 짐 나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몰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뜻하지 않게 2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마치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부러진 잔가지가 별안간 발치에 떨어진 것처럼’ 자칭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를 만난다. 나쉬는 이 만남을 ‘마구잡이 식의 우발적인 만남’이라고 표현했지만 이후 이 우연한 만남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그는 이 도박의 명수라는 잭 포지에게 노름 돈을 대주기로 결심하고 그와 함께 사상 최고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두명의 억만장자 스톤과 플라워와 대적하러 간다. 1만달러의 판돈을 걸고 시작한 노름에서 처음 예상과는 달리 잭 포지는 졌을 뿐 아니라 나쉬가 아끼던 사브 차까지 잃게하고 급기야 마지막에 가서는 카드떼기로 1만 달러를 더 빚지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나쉬가 자초한 일이었다. 나쉬는 이미 1년을 넘게 길위에서 차을 몰고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떠났고 딸아이는 누나 집에 맡겼으며 인생에서 기대할 만한 어떤 것도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포기상태였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낯선 잭 포지를 일종의 패자부활전, 더 늦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1만달러의 빚,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두 명의 백만 장자의 집에서 벽돌쌓기라는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강제노역에 매달리면서 나쉬는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몇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도저히 갇혀있을 수 없는 젊은 잭 포지가 도망가려다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실려간다. 또 자신을 감시하는 머스크의 손자에게 증오와 살의를 느끼기도 한다. 어쨌든 나쉬는 노예같은 강제노역 계약이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일했다. 마침내 일은 끝났고 자유의 몸이 곧 될 터이다. 이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갇혀 있으면서 발견한 책임감과 타인에 대한 유대감이 저 멀리 두고 왔던 생활에서도 다시 제 값을 할 것인가.

‘우연의 음악‘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우연과 선택의 결합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이 우연히 굴러 들어온 돈 때문에 일상에서 일탈하고 우연히 만난 젊은이로 인해 삶이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결국 이 우연의 매순간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풀 오스터 자신의 원래 주제의식과 스타일을 조금 벗어난 이 책을 덮는 순간이 이 물음에 적절한 답을 찾는 순간이라고 기대하지는 말라. 늘 그렇듯 책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던지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나머지는 늘 우리 몫이다. 왜 여기 길 위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혹은 저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 모든 결정을 우연에 맡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럴 수 밖에’의 세계로 넘어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밝혀 둘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바하의 푸가 기법을 따랐다.’고 운운한 그 신문기사를 착각한 모양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바하의 푸가는 아니었다. 전혀 다른 책을 소개한 기사를 읽었던 것인데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책은 ‘언 이콜 뮤직(문이당) ’이었다. 이 이상한 우연 덕에 나는 ‘우연의 음악’을 읽게 되었다. 후회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필히 제목과 어울리는 상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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