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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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한여름 지나가는 소낙비다. 그 소리가 맑고 눈부시다. 쏴아,쏴아. 비들은 사선이다. 그러고 보니 사선이 아닌 비를 만난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비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일종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비가 요염할 때는 언제일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은하수가 요염하다고 짧게 묘사했다. 나는 요염과 은하수를 머릿속에 그리느라 몇 초를 흘려보낸다.그 몇 초 동안이라도 단어들이 의미대로 눈부시게 빛나기를 바라지만, 금방 그친 지금 저 비처럼 순간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소득없이 상상은 끝을 맺는다. 

설국은, 한겨울의 소설이다. 눈이 한겨울에만 내려서일까? 겨울의 눈덮인 고장을 생각해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7월 말, 복중이니까. 

인간은 여전히 외부 환경에 덧얹혀져 사는 존재이기 때문임을 실감한다. 한여름에 한겨울, 눈이 소복히 내리다 못해 귀까지 덮어버릴 지경의 먼나라를 그려보기엔 좀 거리가 있으니말이다.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그리 생겨먹어서일 수 있다. 

다시 해가 나올 기미가 보인다. 요코라는 여인은 끝내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녕 시마무라가 상상한 대로 혹은 전하는 이야기대로 그 선생 아들의 새 애인이었을까?  

12년에 걸쳐 다듬고 다듬은 연작들을 묶은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세월이 가서 1년 만에 눈고장을 찾아 여인들을 만나고...또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봄이거나 눈의 계절이거나에 다시 그 온천장 여관에 들러 그 여인들을 만나거나 상상하는 것이고...

수묵화는 기름냄새따윈 풍기지 않는다. 미묘한 종이 번짐은 경계 또한 갖지 않는다.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형체를 갖춘 수묵화에는 그리고 먹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독특하다. 사람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다. 아니다 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 두자(언어는 사람의 영혼인가? 문득, 나의 영혼은 작은 그 무엇이겠구나 싶다). 설국은 그런 느낌이다. 수묵화 같은. 여운이 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가지만 경계가 없다. 기름냄새 대신 형용할 수 없는 먹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끝이 없다. 우리 머릿속에 어떤 여지로 남는다. 요코가 누구이며 사마코는 무엇인가?  '헛수고'를 일삼는 이 여인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은 역시 '헛수고'인가?  

여인들의 생명력과 시마무라의 '헛수고'에 대한 상념은, 그래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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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리처드 예이츠 지음, 유정화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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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 된 이야기다.

오래 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할일 없이 빈둥거리던 그 시절, 막연한 자신감과 세상과 운명에 대한 무지로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내버리던 그 시절, 내가 자주 찾아가던 나의 후배, 그녀 김미경!


어느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집에서 한 정거장 반 정도의 연립주택 2층에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던 김미경, 그녀를 찾아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어슬렁거리는 내 그림자가 발끝에 채였으리라. 무심한 시선은 나의 키만큼만 나를 앞지르고 있었을 터이고, 내 손에 귤봉지 비슷한 어떤 것이라도 들려있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그야말로 늘상 웃으며 맞이해 주는 그녀들의 호의에 답할 만한 그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그 집을 방문하였던 것 같다.


그 날도 김미경 그는 낡아서 먼지가 폴폴나는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으레 방문에 따르는 이런 저런 인사말이 오갔을 법하고, 그 즈음 아프리카 민속음악에 빠져 있었던 그녀는 귀에 익지 않은 타악기소리로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무렵 그녀는 순전히 외모에만 연유하지 않는 그 어떤 이유로 비트겐쉬타인 원서를 강독하고 있었다. 그 침대 밑에서 나는 문고판 타르튀프를 발견하기도 하였다(그 책은 지금도 내게 있다). 그 침대 밑에서라면 무언들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마치 고서점에라도 온듯 특유의 냄새가 났던 책들이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나와 있었지. 그 넓고 낡은 침대며, 그 당시 우리들 나이만큼이나 거칠게 이어붙인 나무책장이며. 그 방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무려면 어떠랴. 두 여자들만의 방이었다고만 해 두자.


그날 그녀는 나에게 <위대한 유산>의 첫 문장들을 읽어 주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문장들이 미스 해비셤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9시 20분 전에 전생애가 정지해 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 말이다. 그즈음 그녀는 위대한 유산의 첫 문장을 자주 읽곤 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문장들을 반복하여 읽고 싶다는 것은, 그 문장들을 내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뜻일까? 그 행위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뒤 알폰소 쿠아론이 만든 영화 <위대한 유산>을 보러 갔을 때도, 내가 그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 바로 그날에도,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김미경 그녀를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위대한 유산, 첫페이지를 넘겼을 때, 그것이 이렇게 시작된다고 하여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성은 피립이고 내 세레명은 필립이었는데 어린아이 적 내 짧은 혀는 이 이름과 성을 핍 이상으로 길게도 분명하게도 발음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이름이 핍이라고 말했고 그 결과 나는 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성씨가 피립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묘비와 우리 누나인 조 가저리 부인―누나는 대장장이의 아내였다―의 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렇듯 미스 해비셤의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9시 20분 전에 전 생애가 멈춰버린 한 여자 이야기가 아니어도, 나의 기억이 따라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에도 내가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진정 놀라워해야 할 일은, 이토록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한 지점에 우뚝 멈춰 서 있는 그 두 자매에 대해, 내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기차에서 만난 독일 남자의 아내가 되어 멀리 떠나버린 김미경. 늘 싫은 내색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집이 기꺼이 아지트가 되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침묵하였던 그 여동생은, 이제 어떻게 되었을까?


잊혀진 것들은 아름답기보다는 쓸쓸하다. 그 두고 온 것들, 만지작거리며 들춰보던 책들의 표지며, 같이 웃었던 기억들조차, 마음에 미세한 떨림을 준다. 왜 어린시절을 회상하거나, 지금보다 몇 년 더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늘 감정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혀진 사물들에서 받는 어떤 인상이 쓸쓸함이라면, 꿈이나 사상, 어떤 가치있는 정신의 한 상태를 잊어버린 데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여기 두 젊은 부부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나이는 둘 다 스물 아홉. 남자는 귀엽고 사랑스런 두 아이의 아버지, 안정적인 직업까지 갖춘 부족할 것 없어 뵈는 중산층의 가장이다. 그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짧게 깎았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눈길을 끌 만큼 개성적인 면이 없는 몸매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평범하지 않은 변덕이나 들뜬 마음 같은게 어렸다.”(26쪽) 그는 한 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실히 알 때까지 직장없이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지냈지만 결혼을 하고, 이제 어느덧 중산층 부부들이 대개 그렇게 하듯 교외의 아늑한 집을 구해 이사하며 안정된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여자는, 뉴욕의 일류 드라마 학교를 나왔으나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로 여기 코넷티컷 교외의 레볼루셔너리 힐 에스테이트에 정착하였다. “스물아홉살의 그녀는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며, 큰 키에 은빛이 도는 금발의 미인이었다.”(19쪽)

이들 부부에게 삶의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자가 동네사람들과 만든, 자신의 어린 시절 배우의 꿈을 상기시켜준 연극공연이 실패한 바로 그날부터 였을 것이다.


그렇다. 살면서 우리는 매순간 뾰족하게 날이 서 있지는 않다. 비록 불만이 있을지라도, 이게 아닌데라고 거듭 깨우쳐주는 찰나의 순간은 존재하더라도, 더 큰 혹은 더 중요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를 이유삼아 항상 익숙하던 것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논리야말로 우리가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무르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계기 없는 반역이 도대체 가능하지 못할 것이란 이 비관적 전망 말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파리로 가자고 한다. 이미 계획은 확고부동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원래 원하던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 일자리가 없어도 자신이 먹여살리겠다고.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드디어 9월이 오면, 파리로 네 식구가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이 염병할 교외 주택가 타입의 좀스러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일이 지독하게 힘들다는 거지.....한통속으로 좀스럽고 무능하고 얼간이 같은 인간들 틈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거 말이지.....”(44쪽)라고 말할지언정 진정 여기를 벗어날 용기가 없었던 남자보다 여자는 더 과단성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시간’을 갖게 되는 거란 말이죠. 당신 인생에 처음으로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찾아내기 위한 시간을 갖게 될 거에요......”(163쪽)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남자는 어땠을까? “그 계획을 듣는 순간 겁에 질린 모습들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162쪽)

여자가 어떻게 서로를 설복시켰든 간에 마침내 두 사람은 유쾌한 혼돈, 도취된 방종의 시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여권을 신청하고, 사표를 쓰고, 밤마다 떠날 도시와 맞을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 갈망이 곧 몇 달 안의 성취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사람을 얼마나 매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인가? “그녀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해서 커튼콜을 받으며 섰을 때 딱딱하게 경직되고 굴욕감으로 참담하던 여배우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그녀에게서는 고전적인 미인의 자태가 풍겨 나왔다. 그 누구라도 유럽을 정복한 그녀의 모습을 그려볼 만했다(187쪽).”

남자 역시 “평소보다 말의 속도가 느리고 더 신중하며 더 깊은 어조로 더 유창하게 말한다는 것을, 그는 이제 말을 더듬거나 얘기를 매끄럽게 이어가기 위해 사과하듯 던졌던 말들에 기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밤이 이슥한 시각, 말을 아느라 목이 아프고 눈자위가 화끈거릴 때, 어깨를 웅크리고 턱은 쑥 내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무슨 밧줄처럼 걸고 있을때 창을 유심히 노려보면 자기에게도 어느덧 담대한 풍채가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188)

그러다가 그런 일이 터졌다. 뜻하지 않은 일. 생각지도 못했던 일. 여자가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자기 앞으로는 사실상 돈 한푼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갈 나이의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파리로 떠나고자 했던 이들에게, 어쩌면 결정적인 짐이 더해진 것이다. 유일하게 위선이나 안락함과 거리가 먼 기빙스 부인의 미친 아들 존이한 말처럼 “이 나라의 모든 것에 담긴 절망적인 공허”에 대해 이야기했던, 밤이 새도록 죽치고 앉아 공허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절망을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였던 바로 그 순간에 용기를 꺾을 가장 강력하고 그럴듯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

“가족이 생기면 진짜 삶에서 물러나 ‘안주해야’마땅하다는 생각....그건 교외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빚어낸 지극히 감상적인 거짓말이에요“. (167쪽)라고 웅변했던 여자도 이 세 번째 임신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필 때맞춰 남자에게는 승진의 기회도 왔다. 남자에게 그것은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을 접을 좋은 구실이 되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얼마나 교묘하고 불성실한 짓인가! 일단 그렇게 시작되면 그만두기가 너무나 어려워지는 것을....그리고 자신이 관여하는 삶이라는 게 월계수 극단이 <화석숲>에 관여하는 방식, 혹은 스티브 코빅이 자기 드럼에 관여하는 방식과 같다는 사실을 깨eke게 되었다.-열성적이고 대단히 감상적이며 한낱 시늉뿐이어서 매사가 온통 잘못된 방식.”(436쪽)

여자는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반드시 홀로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 자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책 앞머리의 “아아 슬프도다! 미약하면서도 격렬한 정열이여!”라는 존 키츠의 인용구에서 이미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내정되어 있었던 것인가.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좋겠다. 그 바람에 서글픔의 기미가 묻어있으면 안심이 좀 될 것 같다. 때로 우리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동조하는 듯한 일말의 자연의 기미인지도 모른다. 그 자매들이 있던 방은 이제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치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떠나 버린 레볼루셔너리 힐 에스테이트에 새로운 젊은 부부가 이사왔듯이. 삶은 계속되고 생활은 이어진다. 내 나이 스물 아홉이었던 때, 그 좁은 자매들의 방에서 그들과 내가 좇고자 했던 것이 정신의 고양이었는지, 그보다 더한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인생이 더 깊어가더라도 모르기는 매한가지 같다. 다만,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그 때, 쉽게 동요하고 쉽게 꿈꾸고, 그리고 쉽게 떠날 수도 있었을 그 때, 적어도 에이프릴 그녀만큼은 용감했던 것 같다. 또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지는 적어도 더 명료했던 것 같다. 잊혀진 사물들은 쓸쓸하지만, 잊혀진 꿈, 잊혀진 용기는, 그래서 슬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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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p 2009-11-1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개성있고 흥미롭게 잘 쓰시네요 대단해요

테레사 2009-11-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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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은 혹자에게는 위력이 되지 못한다. 마케팅이 너무 요란할 때, 누군가에게는 단지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격언을 상기시킬 뿐이다. 좋은 책이 나 같은 독자와 만나기 위해서 건너뛰어야 하는 어려운 관문인 셈이다. 영화와 문학이 다른 영역이면서 서로를 존중하듯이 그것들은 결콘 더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가끔 둘을 혼동하는 듯한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 나의 지독한 독선이자 아집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그 누군가를 닮았다. 책을 받아들고 책 날개를 펼치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그의 뾰족한 코와 위로 약간 올라간 두 눈. 친밀한 느낌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방비를 의미한다, 마치 2차 세계대전의 드레스덴처럼.  

뒤렌마트가 정의와 법의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방식을 떠올린 것인가? 슐링크는 법률가이자 작가이다. 그런 이력을 우연찮게 알지 못했다면 이 책은 그냥 건너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렌마트식은 아니다.  

당대의 법률이 과연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개인에 대해서 법률은 과연 어디까지 합법과 비합법을 허용할 것인가? 역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는 좀더 다른 문제를 다룬다. 

무엇보다 이 책은 수치심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 수치심은 단순하지 않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애인에게까지 숨기고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라는 엄청난 차이를 무시할 정도로 한나에게는 수치스러운 치부인가? 미하일은 어떤가? 20살이나 위인 여자의 애인이었다는 사실, 그것도 그 애인이 나찌부역자라는 사실이 한 여인의 전 생애를 감옥에 보내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였던가? 

배신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누구에게 복수할 수 있었나? 독일인들은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고 또 그럴 수 없는가? 

아니다. 더 직설적으로 물어야 되지 않을까? 나는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공격할 수 있을까?  

<마더나이트>에서 커크 보네거트가 뼈아프게 고백했듯이 나역시 그 당시 독일인으로 태어났다면, 하루하루 밥벌이를 하며 맨발이 삐죽 나온 유태인 시체를 그냥 못 본척 지나갈 것이었을까?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라는 상황설정이라고 해서 그 여자의 부역죄를 사면해 주진 못할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저지른 죄는 또 얼마나 많던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죄를 짓지 않은 것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책이 도착한 날은 영화를 보기 하루 전이었고, 나는 영화를 보기 2시간 전에 이 책의 끝에 도달했다. 케이트 윈슬렛은 한나 그 자체였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어느 연예기자의 말처럼, 이 이야기가 사랑의 이야기라고만 해석하고 싶다면, 스티븐 달드리는 한나의 유품에서 신문에서 오려낸 미하일의 사진을 버리지 않았어야 했을 터이다. 그러나 영화감독을 그 장면을 없앴다.  

한나는 왜 하필 가석방 바로 그날 새벽에 자살한 것인가?  한나가 문맹이었을 때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수치심이었고, 그 수치심은 어떤 의미에서  유태인 감시인으로 부역한 한나의 잘못된 선택에 구실을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허나 한나가 더이상 문맹이 아니었을 때, 적어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을 정도가 되었을 때, 한나가 자신의 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었을까? 

문맹의 한나는 역사에  대해서조차 완전한 문맹이었으며 역사에 대한 책임에조차 문맹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개인적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독일 국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수치심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한나의 수치심과 미하일의 수치심은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 넘는다. 한 시대 모든 이들을 하나의 죄의식에 몰아넣고, 그 이후 세대들에게 집단 유전될 수밖에 없는 죄의식이란, 도대체 죽음 이외 어떤 방법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책을 읽고 여러 날이 지났지만, 낮은 기압으로 머물로 있는 어떤 기운들이 있다. 독일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독일 국민들은 개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이상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악행이라고 과연 대다수의 개인이 동의하고 죄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든다. 이래 저래 편치 않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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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의 힘 - 커피가 병을 예방한다
오카 기타로 지음, 이윤숙 옮김 / 시금치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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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커피를 마신다면 그것은 순전히 거품때문이었다. 나는 커피의 거품이 좋다. 맛과 색을 감추고 위에 두둥실 떠있는 한덩이 미색의 거품!  그 거품을 작은 티스푼으로 떠먹는 맛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은밀하면서도 특별한 즐거움이다. 앞에 앉은 그 사람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어도 좋다. 형식과 예절에 맞지 않는다고 질책하여도 감수하련다. 풍부한 한덩이 거품을 타겟으로 작은 티스푼을 찔러 넣을 때 생기는 경계선을 통해 미처 스푼에 다 담겨지지 못하고 남아있는 거품의 잔재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짙은 커피의 본색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게  이런 즐거움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누리는 호사일 뿐이다. 내일 꼭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날, 일주일에 단 하루뿐인 금요일이라야, 이 커피의 거품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라니, 내가 하필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면장애가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인생의 3분의 1이 잠인 것이 좋아요."  2002년 빌려다 본 비디오 '프랑스 단편 영화'에서 나는 도미니크 피농의 이 말만 기억한다. 물론 "죽는 건, 자는 .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라고 한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함께 공감하는 말들에 소위 '필(feel)'이 꽂히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말하고보니 내 인생이 잠언으로 꽉 채워진 물잔 같다.). 

커피가 각성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1500년대 기독교 수도원에서 야간에 수도정진을 위한 비약으로 쓰였다는 데서 입증이 된 셈이다. 각성제는 사전대로라면  중추 신경을 흥분시켜 억제하고 피로느끼지 못하게 하는 을 일컫는다. 그 좋은 잠을 억제하고 싶은 경우가, 있을까 싶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러야 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헌데  내가 어제 드디어 커피드리퍼와 이디오피아산 예카체프 50그람을 사고 말았다. 이 말은 곧 매일 한잔씩 커피를 마시겠다는 뜻이다. 커피의 거품이 시각적 매혹이라면 고소하다못해 사람을 질식시킬듯한 향은, 피해갈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이다.어떤 의미에서 거품은 덤으로 얻는 부가적 즐거움이고, 커피의 본질적 가치는 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근처에 새로생긴 커피공방(서울 종로 통인동 커피공방)의 멋진 바리스타가 만들어 준 에스프레소 맛에 반하긴 했어도 선뜻 용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헌데 이 바리스타 양반이 쓴 서평 "커피 한잔의 힘"이 결국 결단하게 만들었다. 그래, 거품과 향을 매일 맛보는 거다! 이렇게 좋은 커피를, 이제부터 한잔씩 마시는 거다. 친절하게도 그 바리스타(!)씨는 핸드드립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시간있을 때 들러,직접 실습까지 해보라고 권한다.

우리의 바리스타씨는 아무래도 커피자체의 향과 맛, 제조법에 관심이 더 간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이 책 초반에 쓰인 커피의 역사가 재밌었다. 놀랍게도 커피를 오늘날처럼 손쉽게 마실 수 있게 된 지는 불과 500년 정도 밖에 안되었다고 한다. 친숙함의 정도가 역사의 길이에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가보다.  

한잔의 갈색(그 위 거품까지 말하자면,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할까?) 액체가 몸에 유용하다는 뒷부분의 상세하고도 전문적인 설명도 읽을 만하다. 이토록 유용한 커피를, 그동안 눈으로만, 향으로만 부러워하고 살아왔던 것이, 못내 안타깝다. 

더 나이들면, 작은 커피공방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요 앞 커피공방의 주인들은 젊은 부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담배연기도, 빵도 그 어떤 다른 냄새가 섞이지 않고 오롯이 커피향으로만 채워진 조그마한 가게에서,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커피콩을 손으로 고르고, 적절히 볶고, 가루내는 일이, 어쩐지 좋아 보인다. 물론 그들 커피공방에 '커피한잔의 힘'이란 책이 꽂혀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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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위대한 떨림 - D.H. 로렌스의 이야기 유럽사
D.H. 로렌스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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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미술 시간은, 늘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나는 늘 준비물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따로 건망증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집안 걱정이 많았고, 부모의 주머니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오늘 아침, 경향 신문에 즐거웠던 미술시간이란 제목의 기사가 스쳐지나갔기 때문일까? 나도 미술시간을 즐기고 맘껏 누렸더라면, 좋았을걸 이란 생각을 하였다. 중학교 미술시간은 왜그리 준비물이 많았을까? 목판이며 끌칼이며 포스트칼라잉크며 점토며......나의 형제들은 모두 넷이고, 그 넷들이 다 고만고만한 터울이라,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준비물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집은 당시, 심각한 금전사기에 휘둘려 거의 가정경제가 파탄의 지경이었으니까. 아이들도 민감하다. 집안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다. 나는, 거의 늘 준비물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런 나를 미술선생님은 야단치거나 심하게 수모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 눈초리, 음 너는 ....또...하던 그 눈빛의 감각이 나의 온 감각을 너무 생생하게 자극했다. 그건 자격지심과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미술시간이 있는 날은, 늘 힘이 없거나, 심장이 쫄아들었던가? 우리 형제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어느누구도 이에 대해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추억도 돈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린 아이들이 미술적 욕구를, 음악적 이끌림을 돈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어린아이의 궁핍은 더욱 처절하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어려운 재정상황에 놓여있던 시절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이 역사책 집필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이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고 경제적 여건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던 까닭에 이에 응했고, 다방면에 문필을 떨친 작가로서 역사서를 집필 못할 이유가 없었기도 하였을 터이다. 

해서 탄생한 책이 이 책이다. 소설가답게 역사책이 으레 보이는 지루함을 날려버렸다. 고백하지만 나의 애인이 감탄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읽다가 지금도 내 머리맡에 있다. 기번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통 나는 타인의 감탄에 공감하지 못하는 성미라,  내가 먼저 읽었다면 감탄하였음직한 책도 일단 타인이 선수를 치면, 시들해진다. 못된 성미라, 기번의 그 역작도 단숨에가 아니라 조금씩, 마치 포도주를 음미하듯 조금씩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비록 단 하룻동안은 아니지만, 재밌게 읽었다.

문장은 아름답다. 근 1900년을 훌쩍 넘는 기간의 유럽은, 이 지적인 문필가의 손에서, 아름답고 도도한 이야기로 되살아 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조국 영국사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왜였을까? 영국이 유럽역사에서 결코 소홀한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인데.   

편견이 삶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한다면, 나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일을 간과하곤 하는 나는 이 책을 통해,독일이 그리고 이탈리아가 유럽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내 자신에게 놀랐다. 

동양사에 대해서도 이 처럼 소설가가 쓴 역사책이 있다면, 좋을 텐데. 부채의식이라고 해야하나, 자의식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의 역사에 대해 손쉽게 손닿을 수 있는 책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로렌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서도, 수정을 가해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사랑하는 여인들을 읽어보는 일부터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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