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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비가 온다. 한여름 지나가는 소낙비다. 그 소리가 맑고 눈부시다. 쏴아,쏴아. 비들은 사선이다. 그러고 보니 사선이 아닌 비를 만난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비는 바람과 하나가 되어 일종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비가 요염할 때는 언제일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은하수가 요염하다고 짧게 묘사했다. 나는 요염과 은하수를 머릿속에 그리느라 몇 초를 흘려보낸다.그 몇 초 동안이라도 단어들이 의미대로 눈부시게 빛나기를 바라지만, 금방 그친 지금 저 비처럼 순간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소득없이 상상은 끝을 맺는다.
설국은, 한겨울의 소설이다. 눈이 한겨울에만 내려서일까? 겨울의 눈덮인 고장을 생각해 보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7월 말, 복중이니까.
인간은 여전히 외부 환경에 덧얹혀져 사는 존재이기 때문임을 실감한다. 한여름에 한겨울, 눈이 소복히 내리다 못해 귀까지 덮어버릴 지경의 먼나라를 그려보기엔 좀 거리가 있으니말이다.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그리 생겨먹어서일 수 있다.
다시 해가 나올 기미가 보인다. 요코라는 여인은 끝내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녕 시마무라가 상상한 대로 혹은 전하는 이야기대로 그 선생 아들의 새 애인이었을까?
12년에 걸쳐 다듬고 다듬은 연작들을 묶은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하나 하나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그 장면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그 장면에서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세월이 가서 1년 만에 눈고장을 찾아 여인들을 만나고...또 그렇게 끝이 나고, 다시 봄이거나 눈의 계절이거나에 다시 그 온천장 여관에 들러 그 여인들을 만나거나 상상하는 것이고...
수묵화는 기름냄새따윈 풍기지 않는다. 미묘한 종이 번짐은 경계 또한 갖지 않는다.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형체를 갖춘 수묵화에는 그리고 먹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독특하다. 사람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다. 아니다 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 두자(언어는 사람의 영혼인가? 문득, 나의 영혼은 작은 그 무엇이겠구나 싶다). 설국은 그런 느낌이다. 수묵화 같은. 여운이 구름처럼 하늘로 올라가지만 경계가 없다. 기름냄새 대신 형용할 수 없는 먹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끝이 없다. 우리 머릿속에 어떤 여지로 남는다. 요코가 누구이며 사마코는 무엇인가? '헛수고'를 일삼는 이 여인들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은 역시 '헛수고'인가?
여인들의 생명력과 시마무라의 '헛수고'에 대한 상념은, 그래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