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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위대한 떨림 - D.H. 로렌스의 이야기 유럽사
D.H. 로렌스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중학교 때 미술 시간은, 늘 피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나는 늘 준비물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따로 건망증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집안 걱정이 많았고, 부모의 주머니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오늘 아침, 경향 신문에 즐거웠던 미술시간이란 제목의 기사가 스쳐지나갔기 때문일까? 나도 미술시간을 즐기고 맘껏 누렸더라면, 좋았을걸 이란 생각을 하였다. 중학교 미술시간은 왜그리 준비물이 많았을까? 목판이며 끌칼이며 포스트칼라잉크며 점토며......나의 형제들은 모두 넷이고, 그 넷들이 다 고만고만한 터울이라,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준비물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집은 당시, 심각한 금전사기에 휘둘려 거의 가정경제가 파탄의 지경이었으니까. 아이들도 민감하다. 집안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하지 않아도 모를 수가 없다. 나는, 거의 늘 준비물을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런 나를 미술선생님은 야단치거나 심하게 수모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 눈초리, 음 너는 ....또...하던 그 눈빛의 감각이 나의 온 감각을 너무 생생하게 자극했다. 그건 자격지심과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미술시간이 있는 날은, 늘 힘이 없거나, 심장이 쫄아들었던가? 우리 형제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어느누구도 이에 대해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추억도 돈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린 아이들이 미술적 욕구를, 음악적 이끌림을 돈에 의해서 무의식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상황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어린아이의 궁핍은 더욱 처절하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어려운 재정상황에 놓여있던 시절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이 역사책 집필 의뢰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이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출판에 어려움이 있었고 경제적 여건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던 까닭에 이에 응했고, 다방면에 문필을 떨친 작가로서 역사서를 집필 못할 이유가 없었기도 하였을 터이다.
해서 탄생한 책이 이 책이다. 소설가답게 역사책이 으레 보이는 지루함을 날려버렸다. 고백하지만 나의 애인이 감탄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읽다가 지금도 내 머리맡에 있다. 기번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통 나는 타인의 감탄에 공감하지 못하는 성미라, 내가 먼저 읽었다면 감탄하였음직한 책도 일단 타인이 선수를 치면, 시들해진다. 못된 성미라, 기번의 그 역작도 단숨에가 아니라 조금씩, 마치 포도주를 음미하듯 조금씩 맛보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비록 단 하룻동안은 아니지만, 재밌게 읽었다.
문장은 아름답다. 근 1900년을 훌쩍 넘는 기간의 유럽은, 이 지적인 문필가의 손에서, 아름답고 도도한 이야기로 되살아 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조국 영국사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왜였을까? 영국이 유럽역사에서 결코 소홀한 대접을 받을 만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인데.
편견이 삶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한다면, 나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일을 간과하곤 하는 나는 이 책을 통해,독일이 그리고 이탈리아가 유럽의 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내 자신에게 놀랐다.
동양사에 대해서도 이 처럼 소설가가 쓴 역사책이 있다면, 좋을 텐데. 부채의식이라고 해야하나, 자의식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의 역사에 대해 손쉽게 손닿을 수 있는 책들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로렌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서도, 수정을 가해야 할 것이다. 우선 그의 사랑하는 여인들을 읽어보는 일부터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