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소설의 이해
우한용 외편 / 새문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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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어라.


이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 열거하는 그 이유는 많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말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그러다 정말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너무 많이 읽게 되면

뒷감당이 안 될까봐.


책을 많이 읽으면 좋은 이유로 정작 중요한 이유 하나를 건졌다.

이 책에서.


책을 많이 읽으면,

감동 같은 걸 기대 안 한 책에서 더 큰 감동을 챙길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내가 평소 안 읽는 책까지 읽게 된다.

혹은 자주 찾아 읽지만 '감동' 같은 건 눈곱만큼도 기대않았던 책까지 읽게 된다.


말하자면 '소설 이론서'같은 것.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서 손에 펴들게 되는 책은 아니지 않나? 흠흠)


이 책은 소설 이론서다.

아주아주아주 건조하고, 건조했고, 건조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몇 쪽 읽다가 읽기를 유예하기 십상인,

혹은 과제든 뭐든 어쩔 수 없는 읽음을 담보하는 

이런 이론서를 읽더라도,


각오하자.


뜻밖의 '감동' 복병을 만날 수도 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보다 나이를 더 먹은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이처럼 이야기가 나의 존재보다 앞서는 판에 남의 이야기만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속임일 지도 모른다. 

결국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재미이지만 

우리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소설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지름길이라고 생각된다. 

(14p)

어떤가.


굳이 소설작법서나 소설 이론서를 구태여 볼 것까지는 없는 당신이라도

코끝이 아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찡~~해 오지 않는가 말이다.


자꾸 곱씹게 되는 이 문장.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는 

우리보다 나이를 더 먹은 이야기도 있는 법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이야기라...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이리라.

내 안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가 있고

그 나까지 감안하면 나는 필경,

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이야기를 품었으리라.


문장에 빠져 허우적대다 정신 차려보니

소설 이론서다.


소설로 돌아가자, 얼른.

적어도 앞으로 나는 소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뀔 테다.


내가 읽는 소설은, 그 소설을 쓴 이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내가 쓰는 소설은, 그 소설을 쓰는 내가 자신도 모르는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모르는 것을 체험시키는 것-.

그게 책의 소명이요 소망이 아니겠는가.

소설도 그러하듯.


책의 외관은 딱, 안 읽기 좋게 생겼다.

1999년 출간된 초판 그대로라 올드하다.

폰트도 올드하다.

답답~~~한 것이, 딱 안 읽고 싶다.


그런데도 읽었다. 그래서 얻었다.

23년 동안 절판되지 않는 뚝심을 발휘했으나 리뷰가 덜렁 1개다.


앞으로는 표지와 출간연도에 속지 말자고 다시 한 번 뻔한 다짐을 한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쓴다면, 읽자. 얻는다.


이야기는 이야기에 이어져야 하고 끝이 없다. 그렇다면 완성된 형태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날이 인류의 종말과 시기상으로 맞아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종말은 언어의 종말이다. 소설은 새로운 변형은 있을지 몰라도 종말은 없다. - P11

소설은 인간의 가능성을 미래형으로 두고 탐구하는 것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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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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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시절, 광고회사에서 인턴 비슷한 걸 했다. 알바에 가깝겠지만.

시안을 잡던 '보스'님들이 갑자기 손모델이 필요하다 하면서

모두의 손이 회의 탁자 위로 모아졌드랬다.

마치, 선상님, 큰 죄를 지었으니 어여 작대기로 손등을 때려주세요, 하듯.


제일 젊은 나답게 내 손등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고 가늘고 길었....

아니, 그냥 그들의 구미에 맞았다.


그때부터 촬영을 하기 전까지 며칠 간 내 손은 황금손이 되었다.

그들은 내 손에 동동구리무를 처발처발해가며 마구 마사지를 해주었고

뜨거운 타올로 스팀도 해 주었고

알바생답게 쓰레기통 같은 걸 들어 내가려고 하면 

"야! 누가 얘한테 이거 시켰어?"했다.


'미생'에서 '우리 애'라고 하는 걸 장그래가 들었을 때 느낌 같은 게 몰아닥쳤다.


3일 천하.


내 황금손은 촬영이 끝나자 3일만에 다시 알바생의 손으로 전락했다. 


그 3일 동안, 내 손은 내 존재의 층위, 그 맨 위로 올라섰다.

나보다 내 손이 더 고귀했다. 아니, 나는 고귀하지 않을지언정, 내 손만큼은 고귀했다.


그때의 내 손을 '코'로 바꾸면 니콜라이 고골의 '코'가 된다.


인간의 총합보다 더 고귀해져버린 코.

왜?

잃어 버렸으니까.


그 코는 더 고귀해버린 존재답게 고급 관리의 외피마저 입는다.

더 이상 코가 아닌 것이다. 잃어버린 코는.


3월 2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기기묘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발사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두 가지 음식을 동시에 차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당연하지!)

아내가 던져 준 빵을 먹으려 그걸 자른 후 무언가 하얀 물체를 발견한다.


아는 사람의 코!


수요일과 일요일마다 면도를 하는 8등관 코발료프의 것.

아침에 일어나 코가 실종된 것을 안 코발료프는 코를 찾아 나선다. 

마차에서 내리는 제목을 입은 신사! 그의 코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제 코란 말입니다!


귀하께서는 뭔가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저는 저 자신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전혀 친밀한 관계일 리가 없는 것 같은데요.

(46-47p)

그는 곧장 신문사로 가서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알리는 광고를 내기로 결정했다.

(49p)


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52p)

이쯤 읽고 나면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을 찬미했는지 알 수 있다.

이쯤 읽고 나면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을 죄 긁어 모으게 되는 심정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고골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유머마저 갖췄다.


사실, 당신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게 몹시 유감스럽습니다. 코담배라도 맡으시면 어떨까요? 두통도 걱정거리도 사라질 겁니다. 그뿐 아니라 치질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55p) / 신문사 광고 담당 관리의 말

이 대목에서, 아무도 없는데 혼자 소리내서 웃었다.

그러다 곧 누가 볼새라 웃음을 싹 걷어냈다.


코가 없는 사람에게 코담배라니.


코가 없는 나에게 코담배를 건네던 사람들이 몇 생각나서 말이다.

웃다가 울면 안되는데...


이 슬픔은 코발료프가 천신만고 끝에 코를 찾았지만 코를 붙이지 못해 끙끙대다

찾아간 의사가 하는 말에서 분노어린 울음이 되고 만다.


지금 있는 그대로 계신 편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찬물로 자주 씻으십시오. 그러면 코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건강하게 지내실 거라는 점을 확신합니다. 

당신의 코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수하시길.

혹시 잃더라도 너무 울진 마시길.

어차피 세상은 당신 코 같은 건 코만큼도 안 여길 것이므로.


이때부터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고, 그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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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정진영 지음 / 무블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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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슬프다. 착하다. 그런데 너무 착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인물들이 다들 너무 착하고 무언가를 잘 깨닫고 잘 후회한다. 소설은 일상이다. 일상의 조각을 저만의 방식으로 푸는 것이다. 이렇게 착하고 잘 깨닫고 잘 후회하는 사람들로 꽉 찬 일상이라면 그게 허구다. 조금만 더 실제 같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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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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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는 저자를 빼고 읽어야 한다.

실제저자를 말이다.

우리는 내포작가만 의식하면 된다.

아니, 그조차 '작가'는 빼고 가도 된다. 빼고 갈수록 유익하다.

그게 소설을 읽는 방법이다.


윌리엄 골딩이 전쟁 경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소설이 언제 쓰여졌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야기'만 보면 된다. 


실제작가든 집필배경이든,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알아도 늦지 않다.


'파리대왕'이야말로 그렇게 읽어야 한다.

처음부터 다 알고 가면, 재미가 떨어진다.

작가든 배경이든 하는 건, 도대체가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 모르곘다면

그때 찾아봐도 된다.


'파리대왕'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라도 된다.

읽으면 다 알아진다.

열댓명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떨어져 치고받고 삼박질하다가 끝나는 이야기라면

그렇게만 읽어도 된다. 


얼마나 재밌나?!


소설이 꼭 무언가를 말해야 할까?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그 바닥을 파내려가려고 끙끙대는 이들이 많다.

뭔가 심오한 게 있겠지, 형이상학적인 게 있겠지.

난 그걸 놓치지 않을 거야.

대개는, 그러다 놓친다.


[금발의 소년은 몸을 굽히듯이 해서 이제 마지막 바위를 내려와 초호 쪽으로 길을 잡아 조심스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그 유명한 '파리대왕'의 첫문장이다. 


금발의 소년

마지막 바위

초호

나아가다


여기서 끌리는 게 없다면 한 문장만 더 보자.


[제복이었던 스웨터를 벗어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있었고 회색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풀칠이라도 한 듯 이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제 됐다. 당신은 윌리엄 골딩이 던진 '후크'에 걸려 들었다. 


제복을 입었던 금발 소년이 위기에 봉착했다!


뭘 더 기대하는가. 이제부터 300쪽 가량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당신은 그 바다에 뛰어들면 된다. 


'파리대왕'의 '파리대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파리 중에서 엄청나게 큰 '왕'파리를 말하는 줄 아는 사람이 열 명 중 아홉이다.

'파리대왕'을 소문으로 읽었기 때문이리라.


'파리대왕'을 텍스트로 읽은 사람은 안다.

'파리대왕'은 사실 잘린 돼지목, 아니 엄밀히 말하면 돼지머리임을.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인간, 우주에 혼자 떨어진 우주미아가 아니라면

어디서건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군집'을 이룬다.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군집'이 약화시키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한다.


사람이 많으니 폭력성을 누르니까.

사람이 많으니 폭력성이 불거지니까.


'파리대왕'은 후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소년들의 폭력성을 다룬 소설이다.

법과 질서, 규칙, 어른들의 잔소리가 소거된 세상에서 드러나는 '순수한' 폭력의 근원을

따져드는 소설이다.


'순수'해야 하므로 소년들이다.


읽으면서 '뭐 이런 나쁜 것들이 다 있나!' 하지 못한다.

법과 질서가 사라질 때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봉화를 고수하려는 랠프를 따를 것인가

사냥을 고수하려는 잭을 따를 것인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안에는 랠프, 잭, 돼지, 사이먼, 로저, 자줏빛 반점의 꼬마.


모두 다 있다.


군집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른이라고는 없어." - P9

어린이들은 메가폰을 들고 있던 어른들에게 그랬듯이 그에게 순순히 순종하였다.

순서를 가려서 중요한 일도 하지 않고, 또 온당한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조받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어? - P65

마스크는 이제 하나의 독립한 물체였다. 그 배후로 수치감과 자의식에서 해방된 잭이 숨어버린 것이었다. - P91

지금은 석양이 한쪽에서 비스듬히 비치고 있어서 그림자는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다시금 그는 격에 맞지 않게 야릇한 명상에 빠졌다. 만약 위에서 비치는 경우와 아래쪽에서 비치는 경우에 얼굴이 다르게 보인다면 대체 얼굴이란 무엇인가? 아니 얼굴뿐만 아니라 사물이란 무엇인가? - P113

조리가 닿고 수긍이 가며 법이 지켜지던 그런 세계가 이제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 전엔 이것저것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냐 이제는 배마저도 떠나버리고 만 것이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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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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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비참한 상황이 담보되는 경우가 많다.

평안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호화로운 생활이 지나쳐 퇴폐적인 향락을 일삼는 부호라면?

응당 그 자체가 죄이다.


그는 향락적인 것이지 평안한 것이 아니므로.

향락을 일삼는다는 것이 실은, 평안치 않을 수 있으므로.


비참한 상황은 죄를 담보한다.


가난한 창녀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소냐와

가난한 대학생으로 자신 때문에 창녀처럼 팔려가야 하는 여동생을 둔 라스꼴리니코프.


두 사람 앞에 비참한 상황이 놓였고 

그 둘은 죄인과 죄인이 아닌 사람으로 갈린다.


무엇이 이들을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가?


그것이 '죄와 벌' 하권의 맥락이다. 


오늘, 혹시 비참한 상황에 조우했다면,

'나'는 죄인을 택할 것인가, 죄인이 되지 않는 길을 택할 것인가?


여기서 그 죄의 무게와 크기의 문제는 그닥 중요치 않다는 사실이 바로.

'죄와벌'이란 소설이 거창해 보이지만 '사소'할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 삶과 붙어 있을 수 있다는 것.

어떻게 당신 내면에는 그런 치욕과 저급함이 그와는 정반대인 성스러운 다른 감정들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는 거지? - P471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하지요? - P471

자기가 먼저 선수 쳐서 부르지도 않은 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고, 아무 말 않아야 좋을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껄여 대면서, 여러 가지 암시를 흘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 P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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