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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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깨끗하게 책을 읽은 적이 거의 없다.

대개는 밑줄을 긋기 위해 손에 연필을 그러쥐고 책을 읽는다.

그래서 읽은 책은 대개 '걸레'가 된다.

메모도 숱하고 하고 뭘 그렇게 덕지덕지 붙이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새책과 진배 없다.


밑줄을 하나도 긋지 못했다.

밑줄 그을 곳이 없다.


어쩌다 그을 뻔했다. 연필을 갖다 대고 잠시 있었다.

그런데 긋지 못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밑줄긋기에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밑줄을 부르는 건 도드라진 문장이다.

독자적인 문장인 경우가 많다.


밑줄이 그어지지 않은 바로 앞 혹은 뒷문장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밑줄을 그으려고 할 때, 왜 하필 거기서부터일까?


그건, 그 문장을 따로 떼어놔도 괜찮아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앞뒤 문장과의 긴밀성이 끈끈하지 않을 때.

그냥 그 문장만으로도 말이 될 때.


"아니. 그냥."


이런 문장에 밑줄 긋는 사람은 별로 없다.

뭐가 '아니, 그냥'인지 앞뒤 문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는, '아니, 그냥' 자체보다는 '아니, 그냥'의 이유가 되는

다른 문장에 밑줄을 그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 책에 밑줄을 긋지 못한 건...


독립적으로 따로 떼어놓기엔 앞뒤 문장과 맥을 끊을 수가 없어서다.

어디서부터 밑줄을 그어야 할지, 시작점과 끝점을 찾지 못했다.


그냥 한 페이지를 다 그어야 한달까.


그건 밑줄답지 않다.

밑줄은 어쩌다 그어야 밑줄답다.


한 페이지를 다 그어야 한다면 그냥 줄을 치는 것이지, '밑줄'이라 할 수 없다.


도드라져서 밑줄로 떼놓을 문장은 없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가 끈끈해서 한 챕터가 한 문장처럼 느껴지는 책.


그게 이 책이다. 


낭비와 베끼기.


이 책은 줄곧 낭비와 베끼기에 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읽다 보면 알 수 있다. 글쓴이는 낭비하거나 베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글쓰기를 그저 그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아일린 마일스가 '낭비하고 베낀' 글을 읽는 재미가 컸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건데.

이런 게 문장이란 건데.


다음으로 읽을 책이 정해졌다.

아일린 마일스의 또다른 책은 번역본이 없다.

원서로 읽어야겠다.


설레라.


Chelsea Girls: A Novel


The Importance of Being Iceland: Travel Essays in Art (Semiotext(e) / Active Ag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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