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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평점 :
아, 깜짝이야.
누구네 집 책장에 있는 걸 꺼내서
거기 있는 의자에 앉아
아무 생각없이 아무 데나 펼쳐 읽다가 기울어진 몸을 일으키고
가로로 감기던 눈을 세로로 치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번역서였...?
국내서인줄 알았다. 번역서가 왜 번역한 티가 안 나지? 원래 저자가 쓴 그대로, 문자 그대로, 문자만 바뀐 것 같은 느낌은 뭐지?
놀란 김에 빌려다가 집에 가져왔다.
아마존 가서 냉큼 샘플 페이지를 확인했다.
원래 글 잘 쓰는 사람이네!
단어가 정갈하면서 분명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단말마는 아니고.
그래도 그렇지.
원래 글 잘 쓰는 사람 글을 가져다가
원래 잘 쓴 글을 그닥 잘 못 쓰는 자기 글로 둔갑시켜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래서 번역자는 글을 잘 써야 한다.
원저자보다 글을 더 잘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딱 원저자만큼은 써줘야 한다.
그걸 검증하긴 힘들겠지만.
번역 때문에 뒷방 늙은이 팔자 돼버린 번역서가 없으리라고는 말 못하겠다.
번역자가 원래 글 잘 쓰는 사람 같다.
이력을 보니 대학에서 화학과 전공...이과...
편견 하나를 부수게 된 날이다. ㅎㅎ
[내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었다]를 열 번도 더 읽었다.
시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고 일기도 아닌 글.
아버지에게 친부 성폭력을 당한 여자가 엄마를 생각하며 쓴 글.
어머니는 여전히 때때로 아버지의 언어로 말한다.
칵테일 두어 잔을 드시고 난 뒤면 말이다.
(103p)
마시고
드시고
뒤에
뒤면 말이다
이 사소한 차이가 독자를 울컥하거나 울컥하지 않게 가른다.
나는 장담한다.
영어는 이딴 걸 그렇게까지 중시하지 않는다.
마시고
드시고
둘다 'drink' 정도로 퉁친다
뒤에
뒤면 말이다
둘다 'after' 정도로 퉁친다.
(그래도 설마...할 사람들을 위해 확인 차 원서와 비교하려 주문해 놓은 상태)
영어에 없는 걸 한국어에서 굳이 만들어내면 반칙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영어에 없지만, 영어를 쓰는 원어민들은 희한하게 보이지 않는 그 차이를 느낀다.
그게 그들의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안 느끼는 게 아니다. 아무리 그냥 'drink'고 그냥 'after'라 하더라도. 그들에겐 차이가 있다. 어떻게 느끼는 지는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 모른다.
반면, 한국어에는 마시다/드시다, 뒤에/뒤에는 말이다,의 구분이 확연하기 때문에
살려내야 한다.
그게 한국어다. 한국어로 쓰인 책에는 그게 살아나야 한다.
정말 많은 한국어로 옮겨진 책들이 그걸 실패하고 있어서 속상...
이 책은 가슴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하리만치 속에 뜨거운 걸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시도 아니고 편지도 아니고 일기도 아니고 넋두리도 아니고...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그 소리답게 담아냈다.
원저자가 처음에 해냈고,
번역자가 같이 해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이들이 우는 곳에서 같이 울 수 있어서 좋다.
책 내용은 슬프지만...
슬픔으로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어서, 좋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