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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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존 밴빌의 '바다'를 읽고 빠졌다.

그의 바다에 풍덩. 

그의 문장은 길다. 정신 잘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호흡도 길고, 사유도 길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시를 닮았다.

시처럼 짧거나 운율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처럼, 그의 소설은 '보여준다'.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런 단순한 문장이 그에게로 가면 이렇게 된다.


그가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너무 기울이는 바람에 

나는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된, 이중으로 반사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까.


보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쓰는 사람들은 안다.

이런 '보여주는' 문장은 바로 그것을, 그것도 수백 번 보지 않고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써 내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상상력에 의지해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없는 것'을 그럴듯하게 적어내는 게 아니다. 


분명히 겪은 것이니 그렇게 해내는 것이다.

똑같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똑같은 그것처럼 가까운, 

다른 밀착된 경험을 했고, 작가는 그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주 어느 공간의 밀키웨이를 생생하게 

문자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한 번 쯤은 가 보았을, 

다른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은 다락방 한 구석을 체험해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오래된 빛>은 <바다>와 유사한 설정이 뚜렷하다.

의도적일 것이다.


'바다'에서도 친구의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었더랬다.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친구의 누이에게로 시선이 돌려졌지만.


'오래된 빛'에서는 친구의 어머니와 꽤 장기적인 밀애를 한다.


도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는 눈살 찌푸려지는 설정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롤리타'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듯,

그래서 '롤리타'의 도덕적 거스름보다 문학적 가치가 우위에서듯,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친구의 어머니와 즐기는 밀회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게 없으면 이 소설은 전개도, 절정도, 결말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오래된 빛, 이기 때문이다.


그 밀회에서 출발한 빛이 오십 년이 지난 '나'에게 와 닿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이 이미 몇 년, 아니, 몇 천년, 아니, 몇 백만년 전에 출발했듯.


우리가 보는 별빛은 모두 오래된 빛이듯. 


나는 '과거'를 이다지도 철학적이지 않은 듯 철학적으로 풀어낸 소설을 본 적 없다.


그에 따르면 우주에는 우리가 보거나 느끼거나 측정할 수 없는 사라진 질량이 있다.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훨씬 많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그에 비하면 성기고 보잘 것 없다. 나는 그것을, 무게 없고 투명한 물질이 들어 있는 눈에 부이지 않는 바다를 생각했다. 이 물질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탐지할 수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그 속에서 움직이고

그것도 우리를 통과해 움직인다.


소리 없고 은밀한 본질.


이제 그는 백만-십억-일조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 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 아주 작은 시간,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어디를 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254p)


자꾸 읽게 된다.

이 대목을 자꾸 되뇌게 된다.


그러면 소중했으나 내가 잊어버리고 만 과거의 오래된 빛이

내 눈에 와 닿을 것 같아서.


그러면 그 시간 속의 비어 있던 내가 지금의 질량으로 채워질 것 같아서.


사라진 질량을 회수할 수 있을 지도 몰라서.


오래된 빛을 찾는 이야기.

슬펐거나 아팠거나 고통스러웠거나 관계없이

지금은 모두 그립기만 한, 


아, 오래된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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