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보다 더 멀리 여행하고 가장 나이 많은 농부보다 도 같은 장소에 더 오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죽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보다 더 재미난 이야기꾼들은 없다. - P28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상처를 감추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이야기한다. - P29
어쩌면 입이 아니고 귀가 이야기하는 기관이 맞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왜 햄릿 아버지의 입이 아니라 귀에 독을 부었을까? 사람들을 세계와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입이 아니라 귀를 포기해야 한다. - P33
때로 모르는 낯선 사람이 창문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 P39
우리 할머니는 여행이란 낯선 물을 마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고장에는 다른 물이 있다. 낯선 풍경에 대해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지만 낯선 물은 위험할 수 있다. - P45
내가 아직 어린 여자애였을 때 나는 낯선 물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지구는 물공이고 그 위에서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헤엄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 P46
나는 식당 칸에서 오무르라 불리는 생선을 먹었다.(중략) 그렇게 해서 내가 먹은 오무르는 그날 밤 마치 자기의 여행을 드디어 끝낼 장소를 찾은 것처럼 내 몸 안에서 헤엄쳤다.
- P62
어머니는 자기는 책을 읽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도 다 못 읽는 긴 소설을 제일 좋아한다고 바로 답했다. - P65
너나 아버지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없구나. 모스크바로 간다느 ㄴ생각.
엄마는 왜 모스크바로 안 가는데요?
아버지나 네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도착을 하지 못하니까. 내가 여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거기에 도착할 수 있는 거야.
그러면 나도 거기에 안 가고 여기에 계속 있을래요.
너무 늦었어. 너는 이미 길을 떠났다. - P68
나는 기차에서 나를 빼놓고 유일하게 외국인인 프랑스 사람에게 가서 유럽은 모스크바에서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잠깐 웃더니 모스크바는 유럽이 아니라고 말했다. - P70
그 대신 내 눈길을 강하게 끈 것은 유럽 사람들의 몸은 항상 어떤 시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심지어는 등짝까지도 항상 어떤 시선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몸에 항상 시선을 다시 되돌려 줄 의무가 있었다. - P81
보이고 싶어 하고 보여야 하는 몸은 유럽의 몸이다. 그때 나르시스까지 등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욕구의 밑바탕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P82
나는 유럽을 보기 위하여 일본이라는 안경을 써야 한다. ‘일본식 시각‘이라는 것은 현재에도 없고 과거에도 없었기 때문에-나로서는 전혀 아까울 것도 없는데-이 안경은 지어낸 것이고 늘 다시 만들어야 한다. 내 일본식 시각은 내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하다. 나의 일본식 안경은 쉽게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기분에 따라 이 안경을 꼈다 벗었다 할 수도 없다. 이 안경은 내 눈의 통증 때문에 생겨났고 살이 안경 속으로 자라 들어간 것처럼 안경은 내 살 안으로 자라 들어갔다. - P86
이제 연필을 일본어 ‘엠피쓰‘가 아니라 독일어 ‘블라이슈티프트‘라고 부른다. ‘블라이슈티프트‘라는 단어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다룬다는 느낌을 주었다. 연필을 이 새 이름으로 불러야만 했을 때 나는 살짝 부끄러웠다. - P91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들은 특이한 습관이 있다. 그들은 책을 얼굴에 바싹 대고 읽는다. 그래서 책은 얼굴을 가리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쉽게 받는다. 책들은 읽는 사람들의 얼굴에 두 번째 이름과 호칭을 주는 마스크라 할 수 있다. - P101
때로 책에서 읽는 이야기 이외의 다른 목소리는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는 듯 오른손 둘째손가락으로 때로 귀의 구멍을 막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둘째손가락은 귀의 깊숙한 곳에서 오는 기억을 낚아채는 낚싯대가 되기도 한다. - P101
책 읽는 사람 옆에서 잠이 드는 사람은 꿈속에서 책의 주인공을 만난다. 잠을 잔 사람이 어느 날 우연히 그 책을 읽으면 그는 책 주인공이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 놀란다. - P103
전철에서 읽는 책이 아주 작으면 책 읽는 사람의 두 손의 손가락들은 책의 뒤표지에서 서로 만난다. 책 읽는 사람은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는 사람의 동작을 취하게 된다. - P104
중년의 부인이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안경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안경 아래쪽으로는 살아 있는 글자를 읽고 있고 위쪽을 통해서는 죽은 동상처럼 보이는 승객들을 본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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