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앨리스 먼로의 소설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로가 가족이나 친구 이야기를 많이 다루니 말이지만 '아무리 가족이나 친한 친구라고 해도 서로 간의 완전한 이해, 소통,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입장 내지 시선이 먼로의 소설에는 존재한다.

‘분리’라는 단어는 <태워줘서 고마워>의 한 대목에서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그 뒤 몸에 찾아드는 나른함과 한기. 그리고 분리.”(158) 이 소설 남자 주인공의 내적 독백에 해당하는 대목인데, 이 장면에서 남자애는 좀 뜬금없이 라틴어 문장을 떠올린다. 근데 이때 그가 떠올리는 라틴어 문장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 전체 문장은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성교 후에 모든 동물은 쓸쓸해진다)”인데, 남자애의 생각을 따라가는 서술 속에서 ‘포스트 코이툼’은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는 서로 떨어져(=분리되어) 제시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정말 기법적으로 탁월한 서술인 듯하다. 서술 자체가 ‘분리’라는 주제를 강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여자애(로이스)와의 교육 격차를 생각하면 이 라틴어 자체가 그와 그녀 사이 ‘분리’를 암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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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역시 '분리'가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다른 인물과 눈을 못 마주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른 채 순수하고 외곬이어서 '답답한' 마살레스 선생님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무슨 의도를 갖고 그러기 전에 눈이 자동적으로 외면한다.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삶, 노답인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렇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녀의 장애인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른 시선을 취할 수 있을지는 나 역시 자신이 없다. 물론 내가 그런 시선을 받을 때도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정의로운 주체가 구성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짐짓 심각하게 따지면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자(인종, 성, 장애, 계급, 종교)를 차별하는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도 하고, 다름과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하며, (빈부나 지식 수준이나 외모나 그밖의 기타 등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들도 한다. (또 이런 말들을 앞세워 차별에 무감각한 사람, 올바른 삶, 사회 정의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신나게 비난, 풍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말들을 실제 현실에, 매일의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그런 ‘우리들’을 풍자하거나 훈계하면서 환골탈태를 촉구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현실, 우리들의 한계(그건 어쩌면 인간 본연의 한계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단절된 채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런 게 앨리스 먼로의 메시지는 아닐 것 같다.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정리가 꼭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메시지를 (교훈적으로) 요약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써서 귀를 기울일 것’ 뭐 이런 식으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소설을 읽는 중에 우리가 생생하게 느꼈던 것들을 모두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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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마지막은 이렇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399쪽)

이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남의 인생, 남의 가치관을 두고 딱 잘라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심판’할 수 없게 만드는), 남의 삶을 두고 손쉽게 '딱하다'고 재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경험들, 어떤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예술과 문학이 잠깐 동안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순간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 즉 외교상의 공식 문서다. ‘외교상의 공식 문서’를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자명하다. 예를 갖춰야 한다. 카버가 체호프의 죽음 앞에서 '샴페인 마개를 조심스레 주워 챙기는 행동'을 통해 예를 갖추듯, 체호프가 자신의 소설과 희곡들을 통해 세상의 ‘등신들’에게 예를 갖추듯 말이다. 하지만 그 ‘저쪽 나라’가 보잘것없는 나라라면? 별 권력도, 힘도, 존재감도 없는 약소국이라면? 현실 정치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듯, 예를 갖추는 건 정말이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덧) 


작가 앨리스 먼로의 개인사 흥미롭다. 많은 소설들이 자전적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가장 훈훈했던(?) 사실 : 대학 입학한 10대 후반에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 20년 쯤 후 재회하여 결혼(첫 남편과 이혼 후 재혼)하여 평생 같이 산 것. 낭만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유행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부를 수 있을까나... 뭐랄까 체호프의 '사랑'에 대한 입장을 현실에서 실현한 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개인사가 너무 맘에 들어 독서모임 때 멤버들에게 소개했는데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인상적이면서 묘하게 위로가 되었던(이해가 되었던) 사실 : 
1) 평생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2)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오호, 아하, 저런, 흐음~을 반복했다. 

본받고 싶은 점 : 패션 감각이 뛰어나시다고. 

앨리스 먼로 소설은 한국에 3권 번역 출간 되어 있다. 몽땅 추천한다.



#막독 17기 #노답  

세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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