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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앨리스 먼로의 <위안>이란 소설.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이 소설 뭐랄까 ‘주체적인 삶’의 한 단면을 서늘하게 보여준달까. 왜 흔히들 말하는 그런 삶 있지 않나, 이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성적인 인식에 토대를 둔 삶.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마치 ‘제2의 자연’처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하나의 상.
주체성에 관한 여러 담론들이 떠돈지도 오래다. 물론 ‘주체성’을 여러 맥락, 여러 층위에서 다룬 난해하고도 정교한 이론들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매우 단순화된 주체성이란 신화/당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책을 읽더라도 ‘주체적인 독서’를 해야 하며, 소비를 하더라도 (광고의 기만술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도.
삶의 전 과정, 전 국면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이 신화. 이 신화 속에서는 내가 한 모든 판단과 행동의 책임 역시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물론 사회의 책임이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한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의식이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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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위안>에는 굉장히, 뼛속까지 주체적인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학교의 과학 선생이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그가 재직하는 학교가 시골 마을 학교여서 진심으로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창조론 지지자들과는 물론, 창조론도 하나의 설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달라는 온건한 타협안과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그에게 진화론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다. 과학적으로 옳다고 증명된 사실을 부정하는 다른 입장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비이성적이다. 문제는 그가 그런 비이성적인 견해를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피곤하고도 적대적인(그리고 끝이 없는) 논쟁을 기꺼이 감수한다.
종교와 정치, 성차별 논쟁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란 얘기가 있다. 때로 논쟁이 붙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그나마 훈훈한(?) 결말은 ‘그래 뭐 어쨌든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물론 그건 너와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포기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 과학 선생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논쟁한다. 창조론을 믿는 학생 및 학부모와 논쟁하고,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는 교장과 논쟁하고, 가망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게 안쓰러워 그를 달래려는 아내와도 논쟁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나요? 그게[창조론과 진화론 둘 중 무엇이 진리인지 하는 문제]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죠?”라고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와 아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단 논쟁을 하게 되자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둘 사이의 관계는 싸늘하게 식는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논쟁을, 자신의 이성과 과학적 진리를 사랑한다. 그는 창조론을, 그리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진화론과 동등한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라는,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타협안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나아가 인간 이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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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관련한 모든 면에서 주체적인 태도,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관철하고자 했던 과학 교사는 죽음도 그다운 방식으로 죽는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그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실행에 옮긴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신과) 은밀히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태도, 즉 거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어떤 희망을 가지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시종일관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사회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즉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죽는다.
앨리스 먼로는 그런 남자가 죽은 이후 혼자 남겨진 아내의 모습과 행동을 그린다.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른다.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영혼이 남는다는가 하는 건 모두 기만적인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바탕을 둔 모든 종교적(=비이성적) 의례를 제거하고 이성적이고 유물론적인(?) 절차에 따라 단순하고 깔끔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게 남편의 뜻이다. 아내는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싸늘한 한기를,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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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좀더 이어진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소설의 제목은 <위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