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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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메넬라오스여! 축복 받은 불사신들은 그대를 잊지
않았도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우스의 딸인 전리품을 가져다주는
아테네가 그대 앞에 서서 날카로운 화살을 막아주었도다.
마치 어머니가 단잠이 든 아이에게서 파리를 쫓아버리듯
아테네가 그대의 몸에서 화살을 살짝 빗나가게 했도다.
그리고 그녀는 혁대의 황금 죔쇠가 채워져 있고
가슴받이가 겹쳐진 곳으로 그 화살을 손수 인도했도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화살은 단단히 매어져 있는 혁대에 가 꽂혔다.
화살은 정교하게 만든 혁대를 지나 온갖 솜씨를 다하여 만든
가슴받이를 뚫고, 그가 투창들을 막아줄 울이 되게
몸에 두르고 있던 넓은 동판 배띠까지 뚫었다.
그를 가장 잘 보호해주던 배띠조차 화살은 뚫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살이 전사의 살갗을 스치자
상처에서 곧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치 마이오니아나 카리아의 여인이 말의 볼 장식을 만들고자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할 때와 같이―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전차를 타고 싸우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의 말에게는 장식이요 그의 마부에게는 영광이었다―
꼭 그처럼 메넬라오스여! 그대의 잘생긴 넓적다리와
정강이와 그 밑의 고운 복사뼈가 피로 물들었도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4권 127-147행.



 

* <일리아스>를 다시 읽고 있다. 모임에서 읽는 것인데, 전체 분량을 나눠 다섯 차례에 걸쳐 읽는 모임이다. 첫 모임에서는 전체 24권 중 1권부터 4권까지를 읽었다.


 

* 나눠서 읽으니 아무래도 꼼꼼히 읽게 되고,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들에 눈이 간다.

4권까지의 분량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3권, 헬레네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현남편 파리스의 대결이 펼쳐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 파리스...는 미남자이긴 한데 싸움 캐는 아니어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못 된다. (오죽하면 형인 헥토르는 파리스를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 미친 유혹자"라고 부른다.)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에게 3단 콤보 공격을 가한다. 1) 처음에는 창을 던지는데, 아슬아슬하게 옷을 스치고 지나간다. 2) 그러자 메넬라오스는 칼로 파리스의 투구를 내리친다. 그런데 이번에는 칼이 박살난다. 3) 거기에 아랑곳 않고 메넬라오스는 파리스의 투구에 달린 말총 장식을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간다. 투구끈이 파리스의 목을 죈다.


 

꼼짝 없이 죽을 찰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바로 아프로디테가 개입한다. 아프로디테는 안개를 일으켜 파리스를 감싸고 그를 구해 그의 침실에 데려다 놓는다. 이어서 노파로 변장하고 헬레네를 부르러 간다. 파리스가 침실에 있으니 가서 그의 곁에 있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운 목과 매력적인 가슴과 반짝이는 눈' 때문에 곧바로 정체를 들키고 만다. 그대로 신인데 참 어설프다고 해야 할까... 아님 노파로 변장하더라도 목 주름과 가슴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일부러 변장을 하다 만 혐의가 짙다. 참 미의 여신 답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는 헬레네가 아프로디테를 질타한다. 지금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터졌는데, 이런 상황에서 남편 잠 시중(=동침을 의미...)을 들라니 그게 대체 말이냐 똥이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나 파리스 옆에 가 있으라고. 너나 파리스를 잘 지켜주라고. 그러면 파리스가 너를 언젠가 아내나 노예로 삼아줄지도 모른다고. 감히 신한테 이렇게 말한다. 시건방진 헬레네로다...


 

당연히 아프로디테는 열 받는다. 그런 식으로 내 성질을 건드리면 조만간 혼구멍을 내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헬레네는 조용히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남편의 침실로 간다...


 

침실에서... 헬레네는 파리스에게 (신에게 다 못한) 막말을 한다. 결투에서 그런 식으로 살아돌아오다니 찐따도 이런 찐따가 없다고 개무시...아니 비난한다. [...] 하지만 싸움은 못해도 멘탈만은 트로이 최강인 파리스는 전혀 동요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나를 이겼지만 다음에는 내가 이길 것이오. 우리 편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 그러니 자, 우리 잠자리에 누워 사랑이나 즐깁시다. 일찍이 이렇듯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소." [...] 이런 사랑꾼이 없다.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우리의 미남자 파리스의 특징은 아무리 주변에서 자기를 개무시하는 막말을 한다하더라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몰라라 하고 사랑꾼으로서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다. 어떻게 보면 본받을 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무턱대고 본받아서는 안 될 일일 것도 같다. 조금만 상처가 되는 말을 들어도 끙끙 앓는 나 같은 멘탈 약자가 파리스의 저런 태도에서 얼마간 매력을 느끼는 건 괜찮겠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에 책임을 지닌 정치인... 예를 들어 박그네가 그래서는 안 될 일이리라... 하여튼 아 몰랑~ 파리스... 참 흥미로운 캐릭터다.

 

 

* 여기서 3권이 끝나고 4권으로 넘어간다. 4권의 첫머리에서는 신들이 파리스-메넬라오스 1 대 1 결투 결과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황금 사과 전설에 따라 헤라와 아테네는 그리스 편이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 편이다. 제우스는 대체로 중립...이라기보다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인간들이 제물을 많이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즉흥적으로 서약한 쪽 편을 들거나, 사태가 헤라가 좋아할만하게 전개되면 어깃장을 놓기 위해 트로이 편을 들거나 하는 식이다.) 


 

하여튼 4권 첫머리에서는 제우스와 헤라의 감정 싸움이 그려진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었는데도 아프로디테가 그를 구해낸 것을 두고, 제우스는 헤라에게 빈정댄다. "메넬라오스는 아르고스(=그리스)의 헤라와 아랄코메나이의 아테네, 이렇게 두 여신을 후원자로 가졌으나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그저 구경이나 하면 즐기는데 웃음을 좋아하는 아프로디테는 늘 알렉산드로스(=파리스)의 곁을 지키고 서서 죽음의 운명을 잘도 막아주는구려. 이번에도 죽는 줄 알았던 그를 구해주었소." 아프로디테가 적극적으로 움직여 파리스의 목숨을 구하는 동안 헤라, 아테네 니들은 뭐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제우스의 이런 말에 기분이 팍 상한 헤라는 어째서 트로이를 멸망시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거냐고 짜증을 낸다. 그러자 제우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는 자기한테 제물도 많이 바치는참 좋은 왕인데,  헤라 너는 왜 트로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고 더 짜증을 낸다. [...] 이에 헤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도시는 트로이가 아니라 아르고스와 스파르테와 뮈케네라고 응수한다. (참 애들처럼 싸운다...) 하지만 최고신 제우스의 짜증이 신경 쓰이기는 했는지 서로 양보를 좀 하자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상호 합의 하에 아테네를 트로이의 장수 판다로스에게 보낸다. 신의 전갈은 이렇다. 자자, 지금이 좋은 기회다. 지금 가서 메넬라오스한테 화살을 한 방 먹이는 거다. 그러면 파리스가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화살을 날리기 전에 아폴론에게 큰 제물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면 아폴론이 도와줄 것이다. (신이 인간을 꼬드길 때 잊지 않고 하라고 시키는 것이 바로 제물 서약이다... 이런 신발들... 아니 신들...)


 

이 같은 신의 꼬드김에 넘어간 판다로스는 메넬라오스를 향해 화살을 날린다. 판다로스가 날린 화살은 메넬라오스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부상을 입힌다. 맨 위 인용이 바로 그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 인용 대목에서 인상적인 것은 메넬라오스가 화살에 맞아 흘린 피에 대한 묘사다. 호메로스는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는데, 그 검은 피는 '마치 무엇무엇과 같았다,' 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마치~처럼', '마치 ~과 같았다'의 비유(직유)는 <일리아스>에서 무척 자주 사용된다. 그런데 그 비유가 지나치게 참신하달까 핀트가 미묘하게 안 맞는달까... 예를 들어 호메로스는 그리스군이 싸우러 나오는 모습을 두고 다음과 같은 비유를 쓴다.


마치 봄철에 우유가 통들을 적실 때면
수많은 파리 떼가 새까맣게 무리 지어 목자의
외양간 주위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듯이, 꼭 그만큼 많은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이 트로이아인들을 향해 들판에
버티고 섰다.  (2권, 469-473행)


음식물 쓰레기를 오랫동안 방치해뒀다가 파리 떼는 물론이고 쓰레기 봉투 안에 구더기[...] 음... 굳이 상상하자니 괴롭지만 [...] 구더기 떼가 들끓고 있는 걸 본 사람이라면 저 비유에 공감할 수 있을 것... 아니 아니 그럴리가! 군대와 파리 떼는 뭔가 많이 달라! 다르다고!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천연덕스럽게 군대와 파리 떼를 연결시키는 저런 4차원적이고 하이 개그스러운 비유들을 쓰고 앉았다... 호메로스가 시를 낭송하는데 마침 계절이 봄이었고, 낭송 장소 근처에 우유통이라도 하나 놓여 있었던 것일까.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메넬라오스의 검은 피 묘사 대목을 보자. 보자니... 여기서도 호메로스는 뭔가 4차원적 비유를 구사하는데, 이번에는 말의 볼 장식이다. '말의 볼 장식' [...] 이건 대체 뭔가. 경마장이라도 한 번 가볼 걸 그랬다. 뭐 실제로 봐야만 아는 건 아니다. 상상력을 동원해보자. 여튼 말에 볼 장식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마이오니와나 카리아의 여인이 만든 것... 그렇다. 이것은 핸드메이드다. "그것은 이제 보물 창고에 간직되어 있고 [...] 왕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간직되어 있으니"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말의 볼 장식이 아니다. 말의 볼 장식을 만들려면 "상아에 자줏빛 염료를 칠"해야 한다. 재료는 값비싼 상아이며 색깔은 왕의 혈통을 뜻하는 자주색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실 전용 명품, 로얄패밀리가 쓰는 명품인 것이다. 호메로스 이 사람... 시 낭송 잘했다고 말 볼 장식이라도 하나 하사받은 것일까. 아니면 하나 갖고 싶다는 바람을 낭송 중에 은근 피력한 것일까. 명품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지 싶다.


* 하여간에 [...] 이렇듯 호메로스가 4차원적 비유를 사용한 덕택에 메넬라오스의 부상은 잠시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근데 이건 부상을 입은 것이어서 그나마 낫다. 사람이 죽어도 호메로스는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그가 먼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아스가 그의 오른쪽 가슴 위
젖꼭지 옆을 맞혔다. 그래서 청동 창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가자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맨 꼭대기에만 가지들이 나 있는 이 포플러나무는
어떤 수레 제조공이 훌륭한 수레의 바퀴 테로
구부려 쓸 양으로 번쩍이는 무쇠로 베어 넘겼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강둑에 누워 시들어가고 있다.
꼭 그처럼 고귀한 아아아스는 안테미온의 아들 시모에이시오스를
죽였다. [...] (4권, 480-489행)


아니, 적어두고 보니 마찬가지가 아니라 [...]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메넬라오스는 그리스군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자 신분상 로열패밀리이며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고, 시모..뭐시기는(미안 시모...) 이 장면에만 등장하는(그리고 등장과 동시에 죽어나가는...지못미...) 엑스트라라고 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한가하게 강둑의 포플러나무로 수레 바퀴 테를 만들었느니... 그래서 강둑에서 시들어가고 있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포플러나무의 시듦과 인간의 죽음을 같은 레벨에 놓고 비유한 건 좀 심하다는 생각, 아무리 참신한 비유를 추구한다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호메로스가 줄기차게 구사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 익숙해진다. 하도 자주 나오다보니 나중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일리아스>가 또 워낙 긴 작품이지 않나. 그 긴 작품에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저런 비유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뭐랄까... 그냥 포기하게 된달까... 호메로스식 하이개그를 인정하게 되고 만달까... 그러다 달관하게 된달까... 그런 태도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는 느낌이다. 하기는 뭐 사람이 죽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포플러나무가 죽는 거나 사람이 죽는 거나 따지고 보면 매한가지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일리아스>는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일찍 죽을 운명임을 알고 있다. <일리아스> 1권에는 아킬레우스가 엄마 테티스에게 투정부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를 단명하도록 낳아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시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만이라도 주셨어야죠.(흑흑)"


처음에는 이렇게 투정...(진상)을 부렸던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헥토르와의 결투,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으려는 프리아모스 왕과의 교섭 등의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일찍 죽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일리아스>는 결국 이런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아킬레우스가 달라졌어요!



 

* 인간은 죽는다, 라는 사실에 대한 고민을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많이 했던 것 같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든 인간은 결국 죽을 존재라면,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리고 죽음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 각각 따로 떼어놓아도 어려운 이 두 질문을 호메로스는 한 번에 다룬다. 음. 일단 시도가 좋다. 패기 있다. 우주의 힘... 아니 고대 그리스의 집단 지성...의 도움을 받아 호메로스가 내놓은 답안은 <일리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호메로스의 답안이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들 거라는 보장은 물론 없다. 거의 3000년전에 작성된 답안이고 너무 길어서(요즘 사람들 긴 글 참 싫어한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가리고 심사하라고 한다면 논술 심사위원들이나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은 아마 십중팔구 안 좋아하면서 낮은 점수를 줄 것 같다. 구전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답안이라 신경숙 만큼이나... 표절 시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호메로스가 지치지도 않고 줄기차게 구사하는 지나치게 신선한, 저 4차원적 비유들부터가 맘에 안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위원 같은 게 아니니까 <일리아스>를 꼼꼼히 읽고, 그냥 재미 삼아 호메로스가 제출한 답안에 각자 주관적 감상에 따른 점수를 매겨보는 것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점수는?

일리아스, 호메로스, 메넬라오스, 말의볼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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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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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아버지 제우스에게 기도한 뒤 청동 창을 번쩍 들어
뒤로 물러서던 그의 목구멍의 아랫부분을 찔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무거운 손을 믿고 힘껏 밀어 넣었다.
창끝이 그의 부드러운 목을 곧장 뚫고 나가자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의 위에서는 무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카리스 여신들의 머리털과도 같은 그의 머리털이,
금띠와 은띠로 단단히 땋은 그의 머리털이 피에 젖었다.
마치 물이 넉넉히 솟아오르는 탁 트인 장소에
농부가 올리브나무의 튼튼한 묘목을 심어놓으면
그것이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나 온갖 바람의
입김에 흔들려도 흰 꽃을 가득 피우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폭풍이 세차게 불어 닥쳐
그것을 구덩이에서 뽑아 땅에 길게 뉘듯이, 꼭 그처럼
판토오스의 아들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에우포르보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가 쓰러뜨려 무구들을 벗겼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468-9.



*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서는 개차반 악당 왕으로 나오지만, 호메로스의 묘사를 보면 메넬라오스 역시 아킬레우스 못지 않은 짱짱맨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무구를 벗기는' 등 약탈자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이란 약탈이 주목적인 행위였다고도 하고... 전장에서의 '탁월한' 활약을 묘사함에 있어 호메로스는 인물의 도덕적 면모나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는다.


* 힘들 때, 특히 (불특정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 <일리아스>의 하드고어물을 연상케하는(하지만 훨씬 간결 담백한) 잔인하고 리얼한 살상 장면을 읽는 건, 솔직히 큰 위로가 된다. 이런 표면적 맥락에서도 고전 읽기는 힐링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 메넬라오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에우포르보스는 오직 이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메넬라오스의 무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짧게나마 에우포르보스라는 인물의 내력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서정적인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에우포르보스의 내력은 "농부에 의해 심어져 사랑스럽게 무럭무럭 자라난, 온갖 바람의 입김을 이겨내며 흰 꽃을 가득 피워 낸 올리브 나무"에 비유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란 나무라도 어느 날 큰 폭풍이 한 차례 불어 닥치면 뿌리가 뽑혀 죽고 만다.

* 이런 장면들은 ‘인생은 속절없고, 운명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같은 주연 배우들 역시 동일한 파토스를 전해주지만, 에우포르보스의 죽음은 그가 '엑스트라'이기에 한층 더 절절한 구석이 있다.

* 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위와 같은 묘사는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답다. 고도로 이상화된 영웅의 행위가 가장 일상적인 비유와 어우러져 있으며,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가장 드라이한 묘사와 가장 서정적인 묘사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그렇다. 위 대목은 살육의 '순간'을 건조하게 묘사한 것이지만, 호메로스는 그 순간적 사건을 자연의 섭리라는 입지에서 조명한다. 잔인함에 경악한다거나 무상한 죽음에 슬퍼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허용되지 않지만, '올리브나무' 비유를 통해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가 영원성을 얻는다. 호메로스의 묘사는 마치 차원 이동을 방불케 한다. 작품의 핵심을 요약한다거나 청소년용 축약본을 만들 때면 빠질 게 분명한 게 이런 ‘엑스트라들이 죽어나가는 장면들’이겠지만, 실은 이게 바로 <일리아스>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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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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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역시 그 여행 중의 일이었는데, 대양을 횡단하는 동안, 매일 똑같은 밤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는 밤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중앙 갑판의 큰 응접실에서 쇼팽의 왈츠가 울려 퍼졌다. 그 곡은 그녀가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알고 있던 곡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그 곡을 배우려 애썼지만 한 번도 정확하게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어머니도 그녀가 피아노 치기를 포기하는 것을 승낙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밤과 밤 사이에 흐릿해져 버린 그날 밤에 대해, 갑자기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 배 위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133-134.


 
소설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쇼팽의 왈츠를 찾아서 들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이제서야--두어 달이 지나서야 실행에 옮기게 됐다. 나는 쇼팽을 그닥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 피레스가 연주한 이 왈츠곡들은 생각보다 좋다. 꽤 좋다.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쇼팽을 좋아하게 될 거 같진 않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쇼팽을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좋아질 듯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는 쇼팽과는 별개의 이야기로, 나는 <연인>의 위 대목이 꽤 신경 쓰인다. 오역인 듯 오역 아닌 오역 같은 한 문장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 문장을, 화자가 예전 소녀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을, 훗날 대양 횡단 여행 중에 쇼팽의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된 시점에, 그때 그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라는 식으로 읽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쓰여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란 또 무슨 말일까?


오역일까? 사실 이 소설엔 오역이나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과 문장이 꽤 있는 편이이서('남동생'을 '둘째 오빠'라고 번역해 놓은 게 대표적) 그냥 오역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가능하다면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다. 프랑스어를 좀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프랑스어를 못한다.


오역이 아닐 거라고, 복잡한 문장 구조와 (번역이 어려운) 미묘한 뉘앙스의 단어와 표현들로 쓰여진 원문을 번역자가 최대한 정확히 번역하려 노력한 것이라고 믿어 보자.


좀 애매모호한 대목은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다('이런'이 뭘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대목을 통째로 빼고 문장을 재구성해보면,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가 된다. 문장 구조가 좀 단순해졌다. 그렇다면 해석이 잘 안 되는 부분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부분이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뭔가 미묘하고 혼란스럽다. 일반적으로는 "훗날 나는 쇼팽의 음악을 듣고 당시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알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쓸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썼다. 나는 '익숙한' 언어 습관에 따라 위 문장을 오독한 셈이다.


소설의 화자는 소녀 시절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게 가졌던 감정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에 값하는 것인지 확실히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게 사랑에 값하는 어떤 감정이었기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은 그게 사랑인지 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어린 시절 콜랑의 남자와 했던 경험을 '사랑'으로 자리매김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정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우리가 대개 과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사랑으로 미화하고 넘어가거나 뿌연 안개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위 문장은 꽤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무엇보다 화자의 정직함이 돋보인다. 내 감정은 내 거니까 내 맘대로 처리하고 내 맘대로 의미를 (대충 좋은 쪽으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아니면 굳이 정확히 정리하려고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상처를 들쑤시지 않기 위해 과거를 윤색(또는 망각)하는 이런 태도가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의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날것의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때로, '현재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치열함을, 심적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하고 정확하고 무사공평한 분석이 반드시 미덕인 것은 아니라고, 요즘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연인>을 쓸 무렵, 70세의 뒤라스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녀 시절 중국인 남자와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히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의 그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었을까? "그건 사랑이었어." "아니 그건 사랑과는 다른 무엇이었어." 이렇게 단정지어 말하는 대신, 거짓이 섞인 확신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소유하는 대신, 뒤라스는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라고 쓴다. 이 문장이 오역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말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쇼팽의 왈츠가 들리는 그 순간 불현듯, 사랑인듯 사랑아닌 사랑 같은 그 감정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싶다.

 

 

독서 모임을 하면서 번역에 대한 불만을 들을 때가 많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색함이 남는 직역보다는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의역을 선호한다. 번역자를 두고서, 이 사람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도 자주 듣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해서 '번역을 참 잘했군!'하고 칭찬만 할 일은 아니닐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대가로 희생되고 삭제되는 요소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은 복잡한 문장을 필요로 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은 역시 혼란스러운 표현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역자나 편집자가 깔끔하고 명확하게 다듬어 버리면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깃든 중요한 뭔가를 놓쳐버리는 셈이다. [...]


일단은 이렇게 써둔다. 나중에 위 문장이 엉터리 오역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럼 좀 민망할 것 같기는 하다. 이런 글은 어쨌든 원문을 확인하고 나서 써야 하는 글인데, 확인도 하지 않고 불확실한 사실들을 가지고 제멋대로 추측해서 썼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의 힘이란 고작 우리의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는 것일 테고 우리 능력이란 기껏해야 우리의 수단들을 저울질하는 정도인 것이다."(장 그르니에, <담배>, <<일상적인 삶>>)


약점들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활용해 보려 노력해봤으니, 달리 말해 (프랑스어를 모르고 원문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약점을 약점으로 남겨둔 덕분에 저 인용 대목을 여러 모로 곱씹어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0125

막독13기 레이디 / 첫 번째 책  

 

*

영화 <연인>(1992)에서도 저 장면을 다뤘고, bgm으로 쇼팽의 왈츠를 쓰고 있는데, 이때 쓰이는 곡은 왈츠 10-2번 / 작품번호 69-2번(Op.69 No. 2 in B minor) 라고 한다. 위 영상에서는 35:16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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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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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8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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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군 2015-10-08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어떤 글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덧글 남깁니다. 프랑스어에서는 `남동생`과 `작은 오빠`를 같은 표현으로 쓰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영문판에는 younger brother라고 되어 있다지만, 그 영역이 오역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남동생`이라고 100%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그리고 `아 이게 자전적 소설이었지`라는 생각에 연보를 보니, 뒤라스는 `2남 1녀의 막내`였군요. 이 전기적 사실을 소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영문 번역이 오역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고보니 영어도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younger brother가 남동생과 작은 오빠 둘 다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군요...
 
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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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 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
우리 집에는 잔치도, 크리스마스트리도, 수놓은 손수건도, 꽃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묘지도, 그와 관련된 기억도 없다. 오직 어머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69; 71면.

 

* 제인 마치 주연의 영화로 유명한 <연인>을 읽었다. 내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소녀와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자전적 소설이니 이 모녀 관계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불행에 빠진 여인(lady in distress)'은 여러 19세기 소설들에 등장하는 진부한 모티브인데, 이를 참고하자면, 20세기 소설의 흔한 모티프로 '불행에 빠진 엄마(mother in distress)'를 제시할 수 있을 듯도 하다.

 

* 작가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나 자신의 경우를 보더라도, '불행에 빠진 엄마'를 가진 이, 그러한 엄마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며 자란 사람은 사회의 한 편에 비켜서서 사회를 증오하는 사회부적응자, 자존감이 낮은 사람, 집단성을 거부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은 듯하다. 

 

 

 

 

이 모든 것(가족들 사이의 폭력, 증오)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첫 번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의 연인들이다. 근무지 밖에서 만날 때, 처음엔 사이공 거리에서, 다음에는 정기 여객선에서, 기차에서, 그 후에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는 속내 이야기를 무한정 풀어 놓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75면.

 

* '고백' 역시 흥미로운 키워드이다. <인간 짐승>의 여주인공 세브린은 고백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인에게 자기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시피) 불행의 씨앗이 된다. 한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도 두 연인이 각자 자기의 속내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뭐 어쩌라는 것인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속내를 풀어놓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소설에 비추어 어떤 교훈을 얻기란 어렵다. 아, 세상만사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남을 뿐.   

 

 

 

베티 페르낭데즈
나는 그녀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그녀를 잊기엔 너무 때가 늦었다. 아무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 상황도, 시대도, 추위도, 배고픔도, 독일의 패배도, 죄악의 폭로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 그녀는 아주 낡고 초라한 유럽식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노루 가죽 조각이나, 낡은 구식 양복, 오래된 커튼감, 낡은 바탕천, 낡은 옷감 조각, 낡은 고급 기성복 누더기, 또는 좀먹은 여우 털, 오래된 수달피를 걸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찢기고, 추위에 떨고, 오열하는, 유배당한 사람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컸다. 그래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너무 말라서 옷이 헐렁헐렁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생김생김으로... 인하여, 그녀가 건드리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라몽 페르낭데즈
라몽 페르낭데즈는 발자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완전히 잊혀서 그것을 증명할 만한 근거가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지식이었다. 그는 정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견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발자크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인 양, 자신이 발자크가 되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라몽 페르낭데즈는 지식에서까지도 숭고한 고상함을 지니고 있었고, 본질적이고도 확실한 방식으로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의 의무나 무게를 만들지 않았다.


대독일 협력자 & 공산당 당원
페르낭데즈 부부는 대독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같은 일, 똑같은 연민, 똑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같은 미신이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82-84면. 

 

<연인>의 중반에는 좀 뜬금없는 대목이 있다. 화자가 ‘(독일 점령 하의) 파리 시절’(자전적 소설임을 고려하면 뒤라스가 작가로서 막 명함을 내민 시기다)을 회고하며, 당시 교제하고 지냈던 두 명의 여인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인데, 이 대목은 줄거리 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종의 군더더기다. (이 대목을 기준으로 작품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라스가 묘사하는 두 레이디의 우아함과 고상함은 그 자체로 독자의 눈길을 끈다. 위 인용은 베티 페르낭데즈에 대한 묘사인데, 뒤이어 그녀의 남편인 라몬 페르낭데즈의 고상함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그리고 그 말미에 이들이 '대독일 협력자'였다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뒤라스 본인이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한 인간의 됨됨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매력은 그 사람이 견지하는 정치적 신념과 별개일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발자크를 언급하는 센스.) 그렇다고 정치나 사회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개인적 미덕만을 앞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 화자는 베티 페르낭데즈의 우아함만을 기억한다.” “어떤 것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화자는 베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그녀는 그 어떤 끔찍한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항상 길을 걷는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끔찍한 것들을 뒤로한 채 길을 걷는다. 상처를 완벽히 극복할 수 없다면, 관건은 상처나 역사적 사건들을 뒤로한 채 우아하게 걷는 법을 터득하는 것, 혹은 다른 것들은 뒤로한 채(외면한 채) 우아함만을 기억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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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34
찰스 디킨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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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억압자 혹은 피억압자이던 사람들은 혁명의 순간에 제 위치를 어떻게 의식하며 또 어떤 행태를 보이는가, 위기의 순간에 우애나 애정은 어떻게 변하고 또 어떻게 지켜지는가, 인간의 미덕과 사악함은 어떤 상황에서 발휘되는가, 삶의 가치란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가로서, 또 중년 남자로서, 여러모로 ‘격변’과 ‘위기’에 처한 디킨스는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위기에 처한 개개인이 어떻게 하면 가치있게,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위기를 성찰할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디킨스의 작품 중 가장 ‘종교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특수함 때문이 아닐까.”


역자 성은애의 한 마디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새로운 번역이 나왔습니다. (이미 지난 7월에 나왔네요). 기존의 펭귄클래식 번역도 괜찮았습니다만, 이번 번역본은 창비에서 나온 것이라 기대를 품어봄직합니다. 일단 '역자의 한 마디'가 눈에 들어오네요.

 

 

"역사적 격변의 순간에, 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어떤 선택을 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두고 '역사적 격변의 순간'이자 '위기의 순간'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굳이 세계적인 석학들의 진단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역사적 격변'이니 '위기'니 하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도 많을 줄로 압니다. (일단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이 위기의 연속입니다.) 

 

이런 시대에 나는 (그리고 우리들 각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이딴 식으로 생겨먹은 세계에서의 삶이 전적으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 가치는 과연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뭐 이런 문제에 대해 디킨스가 무슨 뾰족한 답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답을 준다하더라도 그 자신만의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래도 그가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택의 문제, 삶의 가치의 문제를 제기한 것, 역사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제가 쓴 것이지만)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역사-시대의 흐름에 맞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별로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디킨스의 주인공들은 '역사에 맞선다'라는 표현에 합당한 그런 선택들을 하지만... 그러니까 소설이겠죠. 


 

오늘날 자본주의적 관계망을 전적으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개인은 없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착취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서 '가차 없는 착취자'로 존재한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고 또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짐짓 모른 척 승인하고 있다, 아니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승인할 수밖에 없다, 는 생각입니다. 그러한 해소불가능한 모순, 치유불가능한 모순을 상처처럼 우리 양심에 새겨 넣은 채, '병리학적 주체'로서 우리는 이 가혹한 역사의 흐름을, '네 이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착취하라'는 게 절대명제로 자리한 이 세계를 가까스로 하루 하루 버텨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뭐...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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