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은 없다
(진정한, 충분한)
우리는 기댈 데 없이 살아가고,
버려진 채 죽는다.
...
연민을 구하는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우리의 몸은 망가졌지만
우리의 살은 여전히 탐욕스럽다.

젊고 싱싱한 몸의
약속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노년으로 접어든다.
아무것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

사라진 우리의 나날에 대한
헛된 기억 외에는,
증오의 소스라침
그리고 적나라한 기억 외에는.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섹스와 광고가 판치는 우리 사회는 욕망의 충족을 개인적인 영역에 묶어 두면서 욕망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전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어.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경쟁이 지속되어야 하고, 경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증가하고 확대되어야 하는 거지. 그 욕망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어.

- 미셸 우엘벡, <소립자>

아감벤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인 '소시민계급'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소시민계급은 자신의 이해(권리)에 민감하지만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과의 차별화에도 민감하다. 그들은 기업이 저지르는 부정에 항의하기도 하지만, 기업이 제공하는 자본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극)에 깊이 도취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체제의 저항자라기보다는 수호자에 더 가깝다. [...] 정치가 소멸될 때, 그 뒤로 어른거리는 것은 '분노의 그림자'이며 도래하는 폭력에 대한 예감이다.

- 강경미, <'도래하는 폭력'에 대하여>, <<말과 활>> 2호.


*
언어가 지니는 현실규정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할 말을 품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 문장으로 쓰는 것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XX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라는 맹세를 입 밖에 내는 건 효과가 크다. 말에 마음이 구속된다고 할까, 그런 효과가 생긴다.

우엘벡 같은 경우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지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지옥은 바로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니까.’ 굉장히 기분 나쁜 선언적 메시지다. 근데 이게 또 설득력이 있다. 작가로서 당대를 바라보는 통찰이 돋보인다고 할까.

물론 당대에 대한 통찰은 웬만한 작가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해진다). 우엘벡의 특별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통찰보다 단연 묘사가 앞선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작가들의 경우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윤리적' 통찰을 앞세우느라 묘사가 희생되곤 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묘사를 아낀다고 할까 아니면 겁낸다고 할까. 특히 감정 묘사, 심리 묘사에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묘사된 현실은 지옥인데 작가(화자)는 자꾸 거기서 희망을 찾으려한다.

감정이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사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포장을 한다. 귀에 괜찮게 들리는 표현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동시에 진부한) 표현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가령 ‘모모 작가가 모모 소설에서 제시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겉보기엔 파국적이지만) 인간이 사랑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라거나 ‘모모 작가의 모모 작품은 죽음과 광기에 맞서 (작가는 결국 미쳐서 죽었지만) 그가 끝까지 추구하려 했던 진실의 기록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일단 '사랑'이니 '진실'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면 독자는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고. 광고의 3요소, 3B(beauty, baby, beast)가 고객들에게 부담없이 어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드러내는 일이니 위험 부담이 매우 크고 또 때에 따라선 굉장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당대 사회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고, 그 지옥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누구도 이 지옥만들기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며, 또 그만둘 수도 없다.'라는 파국적 통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건, 그렇게 물러섬으로써 명백한 결론 내기를 유보하는 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불가능한 희망을 위치시키려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엘벡은 그런 ‘한 발짝 물러섬’이 없다. '진격의 우엘벡'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과활 - 2호 - 2013 10-11월호
말과활 편집부 지음 / 일곱번째숲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인간이 찍었던 모든 사진들 중, 그 주인공이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나서도 계속 유통되는 사진은 오직 이것 한 장뿐이다."

 

홍세화 씨가 발행인으로 있는 '종합 인문주의 정치 비평지'를 표방하는 <말과 활> 2호에서 무척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체 게바라 사진의 기구하고 고달픈 오십 년>(김현호, 사진비평가)이란 제목의 글입니다.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한(먼산?) 체 게바라의 사진(혹은 그것의 팝 아트 버전 이미지)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라는 그의 말(로 간주되는 문구)과 더불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2000년에 실천문학사에서 낸 붉은색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은 체(Che)의 이미지와 저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됐고 큰 반향을 일으켰죠. 얼마 안 가 <혁명을 팝니다>와 같은 책들이 나와 혁명의 이상과 혁명가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전유하고 맥락 없이 소비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체의 사진은 비단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종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사진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괴이하다. '게릴레로 에로이코'(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사진에 붙인 이름, '영웅 게릴라'란 뜻)는 엄청난 수의 티셔츠와 포스터로 제작된다. 전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는 여전히 잘 팔린다. 동티모르의 이슬람 원리주의 게릴라들과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체 게베라 티셔츠를 입는다.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나 생전의 우고 차베스도 마찬가지였다.

 

얄궂게도 가자 지구 서안의 팔레스타인 인티파타들과 이스라엘 축구팀인 FC텔아비브 서포터들은 모두 게릴레로 에로이코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체 게바라의 얼굴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어깨와 마이크 타이슨의 배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으며, 지젤 번천의 비키니 수영복과 엘리자베스 헐리의 루이비통 가방에도 있다. 심지어 독재자의 아들 알 사디 카다피는 체 게바라의 얼굴을 호화 요트의 양쪽 옆면에 크게 그려넣기까지 했다. 스노보드, 보드카 병, 팬티, 머그컵, 와인 라벨, 지포 라이터, 담뱃갑, 콘돔, 열쇠고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벨파스트와 베이루트, 베를린, 서울, 뉴욕, 리마, 홍콩, 네팔에 이르기까지 이 사진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곳에 살아서 움직인다."

 

가히 '혁명을 상업주의가 포획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인은 역시나 상업자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글의 저자는 혁명과 혁명가를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왜 이 사진만이 그렇게 포획당했는지,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서부터 글이 재밌어집니다.

 

체의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원래 패션사진가(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알베르토 코르다라는 이름인데요. 그는 정식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생일잔치나 세례식,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며 허락 없이 사진을 찍은 뒤 현상한 것을 들고 가서 흥정해파는 일로 생겨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코르다는 아바나 구시가지에 '메트로폴리나타'란 이름의 스튜디오를 여는데, 여기서 그는 쿠바의 젊고 예쁜 여성들을 모델로 미국 잡지에 실리는 것 같은 '패션사진'들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가 롤모델로 삼은 인물은 당대 최고의 패션사진가로 꼽힌 뉴욕의 리처드 아베든이었다고 해요. 코르다는 혁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거죠. 그보다는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의 쿠바에는 패셔너블한 모델도 별로 없었고, 패셔너블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코르다는 쿠바 혁명의 주역들인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사진을 찍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실제로 젊고 잘생긴, 그리고 멋진 미소를 지닌 청년들"이었죠. 체 게바라의 사진-이미지가 레닌이나 마오쩌둥, 호치민의 사진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외모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혁명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체 게바라의 나이는 불과 31세, 피델 카스트로의 나이는 33세였습니다. 코르다는 이 젊고 잘생긴 혁명가들의 사진을 "마치 패션쇼의 뒤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셀러브리티들처럼 화사하게" 찍었습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이 하나의 패션 아이콘이 되고 패션 상품으로 무차별하게 소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맥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혁명이 패션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혁명은 처음부터 패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던 셈입니다.

 

 

*

<DOMINO>에 이어 또 하나의 '자극적인' 잡지가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uanpark 2013-12-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작가 쟌 모리스가 체 게바라와 얽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엮어 얘기했던 대목이 문득 떠오르네요...
체 티셔츠를 입고서도, 해맑은 표정으로 "근데 체 게바라가 누구에요?"라고 물었던 어느 젊은 히치하이커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던 그 이야기.....ㅋ
시로군님 덕분에, 얼른 찾아서, 서재에 올리기로~^^&
 
『도련님』의 시대 1 - 나쓰메 소세키 편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메이지 38년(1905년)

소세키 나쓰메 긴노스케. 이때 나이 만 38세 10개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 연봉 800엔....
제1고등학교 영문학 강사 연봉 700엔.
매달 120엔이 넘는 큰돈이 들어오지만...

참고로 메이지 40년 이와테 현 시부타미 진죠 소학교 대리교사였던
다쿠보쿠 이시카와 하지메(시인)의 월급은 8엔에 지나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저런 이유로
생활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이해부터
메이지 대학에도 출강해 월급 30엔을 받고 있었다.

"돈이 궁하진 않아. 어차피 <호토토기스>에 실을 거네.
다카하마 군이 잘 봐준다고 해도 1매 당 50전이 고작이겠지."

-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가와 나쓰오 글, <[도련님]의 시대 : 나쓰메 소세키>

* <[도련님]의 시대>의 시작부분인데 처음부터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인상적. 돈 이야기는 작품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언급된다. 소세키는 돈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소세키의 작품 세계와 막스 베버의 이론을 다루는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보면 소세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도련님>도 예외는 아니다. <도련님>은 중학교 교사로서 월급 40엔을 받았던 도련님이 철도기사로 직업을 바꾸면서 월급을 얼마를 받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며 끝난다.

* 만화를 쭉 읽다보면 라프카디오 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스 태생 아일랜드인인 그는 미국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일본으로 건너와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한다. 메이지 29년(1896년) 그는 도쿄제국대학 강사로 초청을 받아 월급 400엔을 받는다.

헌은 서양인이지만 일본을, 특히 옛 일본을 좋아했다. 그가 일본에 귀화한 이유이기도 한데, 결과적으로 이점은 그에게 약점으로 작용한다. 당시 일본은 '신시대'를 부르짖고 있었던 것. 메이지 36년(1903년) 제국대학에서는 헌에게 강사 월급을 200엔으로 줄이기로 했다며 양해를 구한다.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 선생'을 고용해야 하는데 대학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유학하고 돌아온 일본인 선생'은 다름 아닌 나쓰메 소세키였다.

* 나쓰메 소세키의 월급이 이것저것 합해 120-150엔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헌의 월급 400엔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절반인 200엔도 소세키의 월급보다 많다. 하지만 처의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헌에게 이 감봉은 타격이 컸던 것 같다. 대학의 자리를 뺏긴다는 것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신시대'의 일본에는, 일본을 좋아해서 귀화까지 한 이 사내가 있을 자리가 더 이상 없었다.

* 헌의 학생들은 유임 운동을 벌이며 신임 강사 나쓰메 소세키의 수업을 보이콧 하기도 하지만, 헌은 자리에서 물러난 지 3년 후 협십증으로 죽는다.

* 이 일로 나쓰메 소세키는 많은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국비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영문학자 나쓰메 역시 서구를 싫어했다. 무턱대고 서구를 모방하려는 '신시대' 일본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에게 월급 120엔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한 것은 '신시대' 일본이었다.

* 나쓰메는 평생 신경증을 앓았고 주사가 심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성공 이후, 그는 대학 강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된다.

* 돈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매달 내가 버는 돈은 터무니 없이 적다. 그래서 생활에 어려움을 느낀다. 헌처럼 부양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나 하나 먹고 사는 게 힘들다.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겠지. 이렇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진 않는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70년대에는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생존에, 먹고사니즘에 매달려 있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진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는 시대의 성격, 시대의 지향에 의해 규정되고 만들어진다. 메이지 38년의 일본은 '신시대'를 지향했고 그러한 지향에 맞는 이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2010년대의 한국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참고 사항으로만 언급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월급이 120-150엔일 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월급은 8엔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격차다. 이사카와의 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고, 또 시를 썼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먼 멜빌. 181981일생. 1891928일 사망. <모비 딕>의 저자. 그는 무지 큰 흰 고래가 나오는 좀 이상한, 그리고 쓸데없이 무지 두꺼운 소설을 1851, 그의 나이 만 서른둘에 출간한다.

 

 

멜빌은 <모비 딕>을 쓰기 전에도 많은 소설들을 썼다. 데뷔작인 <타이피>(1846)<오무>(1847), <마디>(1849), <흰 재킷>(1850) . 모두 선원 경험을 토대로 한 모험 소설들이었다. 이렇게 제목과 출간년도를 써놓아도 구해서 볼 길도 딱히 볼 일도 없는 이 소설들은 출간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모비 딕>은 아니었다

 

 

서른셋의 나이에 그는 끝장났다고 느꼈다. 그 자신이 특별한 것이 되리라 믿었던 책은 망했다. 미국과 영국의 평자들의 혹평을 받은 <모비 딕>은 출간 후 18개월 동안 2,300부가 팔렸다. 후속작 <피에르>는 출판된 후 35년 동안 단 2030부가 팔렸고, 평자들의 조롱을 받았다. 죽기 전까지 이 책으로 멜빌이 번 돈은 157달러에 불과했다.

 

그는 돈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돈이란 세계가 작가의 작품에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것일진대, 멜빌은 자신의 의심스러운 어두운 비전을 독자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51아마도 <모비 딕> 출간 직후에호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멜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돈은 날 엿먹이고 있고, 악마는 날 비웃고 있어요. 전 지쳐 쓰러지고 말겁니다. 너무 오래 써서 너덜너덜해진 육두구 강판처럼 말입니다. 제가 가장 쓰고 싶은 건 돈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쓸 수가 없어요. 제 작품들은 잡동사니 범벅이고 제 모든 책들은 이리저리 짜깁기한 누더기죠.”  - <빌리 버드 외>, 펭귄판 인트로덕션에서

 

 

생전에 멜빌이 얻은 문학적 명성은 초라했다. <모비 딕> 이후 그의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1857년부터 그는 실질적인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35년 동안, 그는 지방 세관에서 일용직(=일당을 받는 날품팔이)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꾸린다. 독자의 계속된 외면 속에서 그는 독자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하지만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 두지는 않는다. 멜빌은 세관에서 근무하는 틈틈이 장편 서사시 <클라렐>을 썼다(난해하고 방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중편 소설 <빌리 버드>의 초고가 발견되었다. 죽기 직전까지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셋의 나이에 끝장났다고 느꼈다라고 했는데, 멜빌의 나이 서른 셋이면 1852년이다. <모비 딕>이 출판되고 1년이 지난 시점인 것이다. <모비 딕>보다 한 해 앞서 출판된 것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였다.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두 권의 작품이 1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연달아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두 작품이 받은 대우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1804년 생인 호손은 멜빌보다 15살 연상인데, 멜빌은 그를 문학적 스승이자 친구로 생각했다. 호손 역시 상당 기간 동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세관에서 몇 년 간 근무하기도 했지만, 나이 마흔여섯에 출간한 첫 장편소설 <주홍글자>의 출간과 성공 이후 나름 일이 잘 풀린다.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주홍글자>는 잘 팔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화제작이 되었고, 호손 역시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이다. 1853년 호손은 영국 영사로 임명되어 리버풀에서 4년 간 머물렀으며, 이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다.

 

 

멜빌과 호손의 관계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멜빌은 호손을 경애해마지 않았지만 호손은 그만큼의 경애를 멜빌에게 표현했던 것 같지 않다. <빌리 버드 외>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들은 이웃이었고 만나기도 했지만 멜빌이 바란 것만큼 자주는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호손은 (유럽으로) 떠나버리고 둘은 편지와 작품(<블라이드데일 로맨스><피에르>)을 서로 주고 받았다.”

 

 

 

요컨대 멜빌과 호손은 이웃이었지만 돈독한 이웃은 아니었던 듯하다.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땠는지를 알려면 서간집을 보면 될 일이겠지만, 그것까지 구해서 살펴볼 여력은 없다... 해서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호손은 자신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틈나는 대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멜빌을, 자신이 분류하기에 애송이 대중 소설 작가에 지나지 않은 멜빌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부유한 외가 덕택에 (생활은 어려웠으나) 나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좋은 교육을 받은 호손이 보기에 멜빌은 바다와 적도의 섬들에서 제멋대로 굴러 먹다가 그 경험담을 팔아 작가랍시고 설치는 놈쯤으로 인식되었을지도 모른다. 멜빌은 호손의 소설들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고, 호손 소설들이 내뿜는 '다크 포스'에 감동했고, 그런 감동을 호손에게 어필했고, 나아가 호손을 셰익스피어와 비견하기도 하는 등,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어떻게 보면 호들갑을 떨었지만, 호손은 멜빌을 그냥 친구정도로만 생각했지 친한 친구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홍 글자>를 읽고, 또 책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보고 <모비 딕>을 써내려가는, “나도 뭔가 지금까지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에 불타 종이 위에 글씨를 휘갈기는 멜빌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제로 멜빌은 <모비 딕>을 쓰는 동안 셰익스피어를 탐독했으며,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고 또 묘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중들이 멜빌에게 기대한 것은 해양모험소설이었다. (그가 이전의 소설들에서 아직 써먹지 않은 소재인) 포경선에서의 생활을 다룬 <모비 딕>은 개고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험담과는 다른 기묘한 작품으로 변모했는데, 여기에 평자들과 독자들은 모두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이해할만도 한 것이 만약 <삼총사>를 읽는데, 갑자기 검술의 방식과 규칙에 대한 긴 설명이 튀어나오고 그게 또 다시 형이상학적 고찰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십중팔구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책을 펴든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포경과 고래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찰이 길게 이어지는 <모비 딕>은 당대 독자들이 보기에는 처음 몇 챕터를 읽다가 덮어두기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멜빌은 <모비 딕>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상업적 성공은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작품을 허투로 쓰지는 않았다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품을 허투로 썼는지 정말 공들여 썼는지는,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에 작가 스스로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모비 딕>을 외면했고 멜빌은 대중작가로서 자신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작은 건물은 처음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이 완성할 수 있지만, 웅장하고 참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세의 손에 맡겨두는 법이다.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 이 책도 초고,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오오, 시간과 체력과 돈과 인내를! (220)

 

 

 

신이여, 내가 아무것도 완성하지 않도록 보살펴주소서!”라고 멜빌은 <모비 딕>에서 쓰고 있다.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라는 이슈메일의 말은 소설 <모비 딕>이 대중들 앞에서 처할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비 딕>을 두고, 이게 과연 소설인지, 그리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미심쩍어 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걸작 <모비 딕>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모비 딕>이 고등학교 과정 필수 도서라고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미국의 학생들 대부분은 이 작품을 지겨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 결국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멜빌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광기였으리라. <모비 딕>에서 멜빌은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에 기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246)

 

 

오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252)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고 반문하는 것, 그리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인식하고 증오하는 것, 이것이 멜빌이 죽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흰 고래=모비 딕을 코앞까지 닥쳐온 벽으로 느끼고 그것을 넘어서려는/넘어선다기 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고 꿰뚫으려는 저 절실한 마음, 곧바로 광기어린 집착과 증오로 이어지는 그 절실함은, 그러나 동시대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집착남들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멜빌이 붙들린 것과 유사한 광기에 불들려, 분량이나 밀도 면에서 <모비 딕>에 뒤지지 않는 길고 긴 글을 써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절감했고 쉬지 않고 뭔가를 써댐으로써, 자신이 경험하고 인식한 것을 자기 식대로 묘사하고 표현하고 또 주장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아니 최소한 견뎌내고자 했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의 집착남들은 결국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한 미국의 외로운 집착남보다는 동시대인들, 그리고 나아가 후세인들의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아마도 짐작건대, '덜 외로웠을' 거란 점이다.

 

 

 

오늘날에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많지만 멜빌의 영향을 받았노라고 자처하는 소설가나 문학인들은 거의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모비 딕>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만약 <모비 딕>은 거대한 괴물 흰 고래를 추적하고 잡는 모험이야기가 아니라, ‘포경과 고래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를 통해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훌륭한 고찰이라고 설명한다하더라도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고작 포경수술운운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시도할 것이다.

 

 

끝장났다고 느낀 1852년을 멜빌은 어떻게 보냈을까. 2013년 현재, 1852년의 멜빌과 비슷한 나이이며, 역시 나는/우리는/우리 모두는 끝장났다고 선언하고 싶은 유혹에 자주 시달리는 요즘의 나로서는 그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멜빌이 서른셋에 느꼈을, 그 이후에 점점 자주 느꼈을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멜빌들을 떠올리면 더욱 할 말을 잃게 된다.

 

 

 

<모비 딕>의 비평적, 대중적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장났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 해인 1853, 그는 <필경사 바틀비>라는 비극적이지만 유머로 가득 찬, 종잡을 수 없는, 그러나 꽤 매력적인 중편소설을 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백오십 여 년이 지난 후에서야 재조명된다. 1857년, 마침내 그는 모든 대외적인 글쓰기 활동을 포기하고 절필 상태에 들어간다. 포기한 이후에도 그는 35년을 더 살았고 혼자서 글을 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내게 멜빌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인 <모비 딕>과 <필경사 바틀비>의 작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장나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에도 생의 말년 35년 동안을 무명작가로 산 사람으로, '세계의 종말 이후를 담담히 살아간 사람'으로서 더 각별해졌다. 멜빌이 몸소 실행하고 보여준 '종말 이후의 삶과 글쓰기'를, 종말론적 서사와 공멸의 상상력이 널리 퍼진 이 시대에 어찌 각별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숙자 / 말없는사나이 [알라딘 특가]
존 포드 외 감독, 모린 오하라 외 출연 / 에이치디디브이디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을 좋아한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변종 웨스턴'이라 여겨졌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탈리아 웨스턴' '스파게티/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도 불렸다. 이런 명명을 한 사람들은 명칭 자체에 경멸의 의미를 담았다. 장르적 오리지날리티가 없는 이유로, 잘해봐야 '변종'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변종은 그 나름의 에너지와 활력을 가진다. 오리지널이 형성해온 권위를 통쾌하게 무너뜨리기도 한다. 특히 시대의 변천으로 인해 오리지널 장르의 정서와 기법이 더 이상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을 때, 순진한 낭만주의의 소산으로 받아들여질 때, 변종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 영향력은 때로 사람들의 피부를 뚫고 스며들 정도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상 인식 틀을, 더불어 감각 작용을 이전과는 판이하게 바꿔 놓는다.  

 

이런 영화는 한 번 보는 영화가 아니다. 반복해서 봐야 되는, 몇 번이고 자발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 잡아 먹힌 것이다. 60년대의 <007 시리즈>, 70년대의 이소룡 영화들이 그런 영화들이다. 90년대 한국에는 주윤발-장국영-왕가위로 대표되는 다양한 홍콩 영화들이 있었다.

 

이런 영화들을 본 관객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여전히 영화에 사로잡힌 상태로 남아 있다. 영화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주변의 모든 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들린다. 관객 자신도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누가 누가 더 영화 주인공 흉내를 잘 내나, 라는 식의 '흉내 배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들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일단 레오네의 웨스턴은 그것을 보고 난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을 따라) '인상을 팍 쓰게' 만든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은 동적 액션이 특징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움직임이 최대한 절제된 정적인 영화다. (게다가 템포도 느리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인물의 움직임과 연기가 절제된 대신, 돋보이는 것은 연출, 카메라, 그리고 음악(+ 음향)이다. 가만 보면 레오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별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말을 타거나 걷거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아니면 심지어 의자에 몸을 뻗고 누워 있거나 한다. 이게 지금 연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터뷰를 통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함께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작업을 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기분이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pmdAsL1n6q4 

<석양의 무법자> 마지막 결투 시퀀스

 

 

가만히 있는 배우들로부터 연기를 끌어내는 건 연출이다. 우선은 카메라가 가장 특징적인데 이 카메라는 자주 배우들의 신체를 클로즈업 한다.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얼굴은 물론이고, 허리에 찬 총,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손, 모자 챙에 살짝 가려진 눈, 펄럭이는 외투, 입에 문 담배, 손에 든 돌과 같은 것을 클로즈업, 또는 줌인한다. 덕택에 배우들의 '인상 쓴' 표정과 함께 동작의 디테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 워크에 잠재된 효과를 극대화하는 건 편집이다. 인상 쓴 얼굴, 총에 걸쳐진 손, 모자, 외투, 담배, 돌들을 적절한 타이밍상에 배치함으로써 영화는 (알고 보면) 딱히 별 것도 안 하고 인상만 쓰고 있는 세 명의 배우들로부터 엄청난 에너지와 상황의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마지막으로 '음악(+음향)'이 있다. 여기서, 세르지오 레오네와 일찍부터 파트너쉽을 이루어 함께 작업한 음악가가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는 엄청난 에너지가 깃든 템포를 영화에 부여한다. (음악과 음향이 없다면) 그저 멀뚱히 서 있는 세 명의 배우지만, 이들은 그냥 서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게이지를 맥스로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며, 잠시 후면 이렇게 쌓인 에너지를 한 순간에 터뜨릴 것이다, 라는 확신 어린 긴장감은 바로 (연출과 함께)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덕분에 생기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그 자체로 레오네표 '스파게티 웨스턴'을 보는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처음부터 끝까지 총질(총소리)이 난무하는 요즘 액션 영화와는 다르다. 레오네는 총을 아끼고 또 아껴둔다. 총격에 관한 모든 건 영화의(혹은 각 시퀀스의) 마지막에 가서, 그것도 30초에서 1분 사이의 한 순간에, 그것도 너무나 허망한 방식으로 보여진다. 긴장감에 휩싸여 기다리는 동안 제멋대로 부풀어 오른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기억해둘 점은 총격 장면을 앞둔 몇 분 간의 그 뜸 들이고 폼 잡는 장면이 레오네 영화의 정수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레오네의 웨스턴은 엄청 뜸을 들이는 영화이며, 엄청 '폼 잡는' 영화다. 이 영화는 아크로바틱한 신체 액션을 선보임으로써 인간 신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어떤 '통쾌함'이나 '처절함'의 미학을 핵심으로 하고 있지 않다. 기계화된 살상 무기 및 그것을 신체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주인공들이 선보이는 '살육의 향연'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두두두두두두X100'이 아니라 '탕, 탕, 탕'인 것이다. 레오네의 웨스턴은 '폼 잡는 장면'에 많은 비중을 둔다. 어떤 상황에서든 폼 잡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 또 빼먹지 않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레오네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폼생폼사의 미학이랄까. 혹은 기다림의 미학.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 우리가 레오네의 영화를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내들이다. '자기 할 건 다 하는 사내들'이라고 썼지만 실은 그 한다는 것이 대개 '폼 잡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이 사내들이 속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서도 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웨스턴이란 장르 명칭에 이미 들어 있듯 레오네 영화의 배경은 '서부'다. 아직 법-질서가 들어오지 않은, 법-질서에 의해 재편되기 이전의 서부. 쉽게 말해 '약육강식'의 세계이며, 유일한 목표는 '황금'인 세계다. 바로 이 '황금'을 갖기 위해 거의 '고독한 늑대'와 다를 게 없는 거칠고 잔인한 사내들이 몰려와 서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내들이 서로 맞닥뜨렸을 때 하는 일은 (여자도 없는데) 서로의 앞에서 '폼을 잡는' 일이다. 누가 더 폼을 잘 잡을 수 있나를 두고 배틀이라도 벌이는 듯.

 

이러한 '폼 배틀'을 두고, 상대의 '간을 보는' 것이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한껏 여유를 부리는 폼 잡기는 실력 차를 강조함으로써 상대의 기를 죽이려는 것이기도 하고, 만만치 않은 상대의 경우에는 심리적 도발을 통해 평정심을 잃게 함으로써 곧 있을 결투에서 어떤 이점을 취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여유를 부리긴 하지만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무리를 이루지 않고 혼자 다니기 때문에, 또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보안관도 아닌 '무법자outlaw'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지할 것은 이들이 '여유를 부리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여유를 부린다'는 것이다. 정확히 레오네의 영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 말이 그 말 같이 들리겠지만 이 차이는 크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이름은 노바디>(1973)--이 영화는 크레딧 상으로 보면 토니노 발레리라는 이탈리아 감독의 영화지만, 세르지오 레오네가 각본, 제작을 담당했다. 그리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크레딧에만 오르지 않았을 뿐, 공동 감독까지를 맡았다고 한다--에서 헨리 폰다는 이발소 의자에 누워 면도를 하는데, 면도날을 든 이발사에게 자기 목을 맡긴 상태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밖에는 그를 습격하려는 일당들이 있고 여기 면도날을 들고 있는 이발사는 사실 그 일당 중의 한 명이다. 진짜 이발사는 이미 결박되어 창고에 감금되어 있다. 이상한 낌새를 챘지만 헨리 폰다는 여전히 면도를 즐긴다. 이발사 역을 맡은 악당이 면도 크림을 바르고 면도날을 헨리 폰다의 목으로 가져간다.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하지만 악당이 이상한 느낌에 자신의 엉덩이께를 내려다보는데 이미 헨리 폰다의 총이 그를 겨누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태로 면도가 끝까지 진행된다. 드디어 헨리 폰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면도가 잘 됐는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바깥의 일당들이 총을 쏜다. 헨리 폰다는 아주 간결하게 몸만 살짝 틀어 총 몇 발을 쏜다. 일망타진. 상황이 끝나자 헨리 폰다는 턱을 쓰다듬으며 몇 발 걷다가 조끼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이발소 돈통에 넣어둔다. 진짜 이발사가 해준 건 아니었지만 면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옷들을 제대로 챙겨 입고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분무형 스킨까지를 뿌린 후에야 천천히 이발소를 떠난다.

 

http://www.youtube.com/watch?v=rVaq2kAlSLY&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오프닝 시퀀스 : 헨리 폰다 면도 장면

 

 

이런 식으로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상황을 지배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든 당황하는 법도 초조해하는 법도 없이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 앞서의 '이발소' 시퀀스에서는 장면 내내 째깍째깍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레오네+모리꼬네가 자주 사용하는 음향 기법이다. 하지만 이때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관객들뿐이다. 화면 속에서는 누구도 긴장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긴장을 하긴 하지만 긴장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좀 더 정확을 기하자면, 적어도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떤다든지, 실수로 총을 쏜다든지 해서 판을 중간에 엎어버리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헨리 폰다도 여유를 과시하지만, 바깥의 악당도 말 등에 솔질을 하며, 면도를 하는 악당도 집중해서 면도를 한다. 천천히, 여유 있게, 나름 대로 품위를 지켜 가며 말이다. 이런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들이야말로 진정 '시간을 지배하는 자'들이로구나.

 

레오네의 주인공들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 형편이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다가오는 위험/위협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유를 잃지 않는다. 일례로 레오네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말을 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달리는 모습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레오네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뚜벅 뚜벅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걷는다. 현실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딱히 벽에 붙어 걷거나 주위를 쉴새없이 살피거나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커다란 실내나 복도 한 가운데를 유유자적하게 걷는다. 두리번거리기는 하는데, 그건 딱히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전혀 긴장감 없이 위험의 복판으로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레오네의 영화에서 불안해지는 건 관객뿐이다) 시야각이 넓은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주인공은 잠깐 사이에 자신의 발달된 '촉'으로 적의 위치와 수를 파악한다. 뚜벅 뚜벅 이후에 아주 잠깐 총소리가 몇 방 들리고, 상황은 정리된다. 이처럼, 이들은 '공간을 지배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다시 아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시계 바늘 소리와 구두 발자국 소리는 흥미로운 대비를 이룬다. 일단 둘 다 영화의 템포, 혹은 페이스(pace)와 연관되는 요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런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시계 바늘 소리는 짧은 총격전 이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디제시스 바깥의 음향이었던 셈인데, 이제 시계 소리 대신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디제시스 내의 음향이다. 어찌 보면 관객은 시계 소리라는 음향 효과에 낚여 괜히 긴장한 셈이다. 그리고 총격전 이후 구두 발자국 소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만들어낸 영화의 템포를 현저히 완화시킨다. 영화의 템포가 재조정 된 것이다. 헨리 폰다는 느리게 발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면서 자기가 할 일--여유를 과시하며 폼 잡는 일--을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페이스'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헨리 폰다는 가차 없이 등속도로 흐르는 '세월-시계 소리-템포'를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이고 흡수하여 컨트롤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마당에, (기차 시간표와 함께) '기차'가 서부로 들어오는 마당에,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새로운 무기들이 등장한 마당에, 계획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수많은 적들이 자신을 노리는 와중에, 여전히 '폼을 있는 대로 다 잡는'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인 자신의 '낭만적'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전설의 레전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존 웨인과 더불어 웨스턴의 대표 스타였던 헨리 폰다는 <내 이름은 노바디>를 마지막으로 웨스턴을 영원히 떠난다. 출연 시 나이가 70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니 나이 탓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장르 영화 출연은 계속 했다.) 어쨌든 1973년 헨리 폰다의 <내 이름은 노바디> 출연과 그 직후의 (웨스턴에서의) 은퇴는 이 해를 기점으로 '한 시대가 저물었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이런 느낌은 물론 (역시 헨리 폰다가 출연했고 역시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한) 1968년 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나 샘 페킨파의 <관계의 종말>에서도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초 황혼을 맞은 시대는 바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시대다. 낭만적 형태의 '마이 페이스'와 '마이 웨이'가 가능했던 시대. 다른 뭣보다도 '폼'과 '멋'이 우선시되었던 시대. 시계의 템포가 우리 일상을 지금보다는 덜 규율하던 시대. 국가의 행정망과 자본의 유통, 판매, 홍보망이 지금 보단 훨씬 느슨해서 국민 모두가 거기에 포획되지는 않았던 시대.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완전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시대. 담배 하나 입에 물고 질겅거리는 것이나 옷을 펄럭이는 것,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내려놓는 동작만으로도 '폼'을 잡을 수 있었던 시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현란한 액션과 빠른 편집, 그리고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면 관객의 눈을 잡아두기 힘든 시대다. 싸움 전의 5-10분 동안 폼 잡는 시간은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오늘날 관객이 원하는 것은 5-10분 내내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정신 없는 액션 씬이다. 시계 초침의 템포 보다 더 빠른 자극적인 감각을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각은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거의 완전히 휘발되어 버린다. 액션 영화의 OST들이 전하는 빠른 비트는 '페이스'와는 거의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페이스를 무참히 망가뜨려 놓는다. 때문에 두시간 반 동안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완전히 지쳐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오늘날 액션 영화는 우리 피부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많은 생채기를 남겨 놓으며, 바디 블로와 같은 타격을 가해 우리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식과 관점이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다른 무엇보다) '그저 즐기기 위해' 본다(해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즐김의 대상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반의 생각과는 달리) 이 '도피' 행위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도피' 행위는 그 자체로 적극적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크린과 화면 속에 나만의 영역과 지분을 확보, 구축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피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즐긴다는 것은 영화를 아무 생각없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다른 세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눈과 귀를, 오감을 최대한 열어두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체험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영화적 환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환상'에 매몰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안전 거리가 확보된 '환상 체험'과 그 거리가 확 줄어든, 혹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지는 '영화적 체험'은 다르다. 물론 우리들 대부분은 스크린의 물리적 현존을 알고서 영화를 본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우리가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안전 거리를 무화시키면서, 우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관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피부를, 이른바 현실 감각과 방어 기제를, 살아오며 길들인 감각 작용들을 좀 느린 페이스이지만 분명하게 뚫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한의학에서의 침처럼, 그러한 '영화적 체험'은 우리의 막힌 '혈'을 뚫는다.

 

레오네와 웨스턴, 헨리 폰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대는 이미 지났지만, 그들의 영화가 영화제에서, 아카이브나 예술영화관이 마련한 회고전에서 계속 반복 상영되는 한(더불어 유투브에서 반복 재생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여유 있게 자기 할 거 다 하는 사내'들이 선보인 '폼생폼사'의 미학과 '기다림/뜸들임'의 미학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건, 대중 문화 전반에서 (빠른) 템포가 우세한 요즘이지만, '(나만의) 페이스'를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열망과 노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간에 쫓겨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매일의 일상을 보낸다. 여가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여가마저도 스케일이 크고 속도감 있는 영화를 보며 보내거나 빠른 비트의 아이돌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보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을 보는 장소도, 요즘은 극장이나 공연장, 심지어 집의 TV 앞에서가 아니라 출퇴근시 이동을 하는 도중에 만원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 기기들을 통해서 본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기는커녕, 협소하디 협소한 공간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가운데,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에 쫓겨 가며, 찍어내듯 만들어진 문화상품들을 즐긴다. 그렇게 처절하게라도 해야 '자기 할 거 다 하면서도 문화에도 밝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천천히 여유 있게'가 빠져 있다. '폼 잡고 뜸들이는 것'도 빠져 있다(스마트 기기 덕(?)에 뜸들이는 시간이 대폭 줄었고, 만원 버스에서 손바닥 만한 화면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래도 '폼'과는 거리가 멀다). 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감각이 '자본'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바깥을 상상할 힘을 잃었다. 70년대 후반-80년대의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로운 늑대 =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외부의 무법자'이면서도 인간미와 여유를 가진, 그리고 폼에 많은 의미를 둔 인물은 80년대 이후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현실 차원에서 보면, 6-70년대에도 미국 서부는 이미 개척이 완료된 공간이긴 했다. 그런데 이는 상상력의 문제이고, 상상력에 양분을 제공하는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아직 개척이 완료되지 않은 '무법적' 공간으로서 과거 서부를 상상하여 영화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기획은 60-70년대에도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영화에서도 그런 기획 자체가, 그런 상상력 자체가 상품성, 사업성이 없다고 여겨진다(내용과 스타일의 올드함도 올드함이지만, 템포가 너무 느려서 오늘날 빠른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이 잘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이미 웨스턴은 별 인기가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지닌 장르로서의 수명을 다했다고들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 '웨스턴적 상상력'은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지배적인 것은 '좀비적 상상력'(디스토피아적 상상력) '테리리즘적 상상력' '수퍼히어로적 상상력'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만이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감히 없을 것이다. 오래된 '고전'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걸 일깨워주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잊혀진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웨스턴은 우리에게 '시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된 듯한 '영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전율이 흐를 정도로 생생한 이런 영화적 체험이 주는 재미를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6-70년대의 옛날 영화들로 때로 '도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러한 도피 체험이, 점점 더 빨라지는 템포가 나를 지배하고 내 감각을 마비시키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나의 페이스'와 '나의 감각'을 되찾는 데 생각외로 꽤 도움이 됨을 알았음에야.

 

 

http://www.youtube.com/watch?v=WCkWG2xkAsc&feature=player_embedded

<무숙자>(<내 이름은 노바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