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은 없다
(진정한, 충분한)
우리는 기댈 데 없이 살아가고,
버려진 채 죽는다.
...
연민을 구하는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우리의 몸은 망가졌지만
우리의 살은 여전히 탐욕스럽다.

젊고 싱싱한 몸의
약속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노년으로 접어든다.
아무것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

사라진 우리의 나날에 대한
헛된 기억 외에는,
증오의 소스라침
그리고 적나라한 기억 외에는.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섹스와 광고가 판치는 우리 사회는 욕망의 충족을 개인적인 영역에 묶어 두면서 욕망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전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어.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경쟁이 지속되어야 하고, 경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증가하고 확대되어야 하는 거지. 그 욕망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어.

- 미셸 우엘벡, <소립자>

아감벤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인 '소시민계급'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소시민계급은 자신의 이해(권리)에 민감하지만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과의 차별화에도 민감하다. 그들은 기업이 저지르는 부정에 항의하기도 하지만, 기업이 제공하는 자본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극)에 깊이 도취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체제의 저항자라기보다는 수호자에 더 가깝다. [...] 정치가 소멸될 때, 그 뒤로 어른거리는 것은 '분노의 그림자'이며 도래하는 폭력에 대한 예감이다.

- 강경미, <'도래하는 폭력'에 대하여>, <<말과 활>> 2호.


*
언어가 지니는 현실규정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할 말을 품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 문장으로 쓰는 것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XX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라는 맹세를 입 밖에 내는 건 효과가 크다. 말에 마음이 구속된다고 할까, 그런 효과가 생긴다.

우엘벡 같은 경우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지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지옥은 바로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니까.’ 굉장히 기분 나쁜 선언적 메시지다. 근데 이게 또 설득력이 있다. 작가로서 당대를 바라보는 통찰이 돋보인다고 할까.

물론 당대에 대한 통찰은 웬만한 작가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해진다). 우엘벡의 특별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통찰보다 단연 묘사가 앞선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작가들의 경우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윤리적' 통찰을 앞세우느라 묘사가 희생되곤 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묘사를 아낀다고 할까 아니면 겁낸다고 할까. 특히 감정 묘사, 심리 묘사에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묘사된 현실은 지옥인데 작가(화자)는 자꾸 거기서 희망을 찾으려한다.

감정이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사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포장을 한다. 귀에 괜찮게 들리는 표현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동시에 진부한) 표현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가령 ‘모모 작가가 모모 소설에서 제시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겉보기엔 파국적이지만) 인간이 사랑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라거나 ‘모모 작가의 모모 작품은 죽음과 광기에 맞서 (작가는 결국 미쳐서 죽었지만) 그가 끝까지 추구하려 했던 진실의 기록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일단 '사랑'이니 '진실'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면 독자는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고. 광고의 3요소, 3B(beauty, baby, beast)가 고객들에게 부담없이 어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드러내는 일이니 위험 부담이 매우 크고 또 때에 따라선 굉장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당대 사회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고, 그 지옥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누구도 이 지옥만들기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며, 또 그만둘 수도 없다.'라는 파국적 통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건, 그렇게 물러섬으로써 명백한 결론 내기를 유보하는 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불가능한 희망을 위치시키려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엘벡은 그런 ‘한 발짝 물러섬’이 없다. '진격의 우엘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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