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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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문한 <모차르트>가 도착해서 읽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평전으로, 부제는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입니다.

무려 '사회학적 고찰'이다 보니 읽는 게 마냥 쉽지 만은 않습니다. 어째서 '사회학적 고찰'이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해, 엘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개인적 운명, 유일무이한 인간이자 유일무이한 예술가로서 그의 운명은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즉 당시 음악가들이 궁정 귀족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례에서 우리는 사회학자들의 장인적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면, 한 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이 아무리 일회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후세에게 전기 형식으로 이해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를 이루려면 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를 명료하게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이 경우엔 18세기의 예술가가--자기 시대의 다른 사회적 인물들과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만들어내는 결합태의 검증 가능한 이론적 모델을 완성해내는 일이다. (24-25)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어깨에 지워졌던 사회적 강제'에 대해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습니다. 논의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사회는 아직 '낭만적 천재'의 개념을 몰랐다. 따라서 천재를 천재로 대할 줄 몰랐고,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 역시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들의 궁정에서의 서열은 '과자 제조공' '요리사' 또는 '시종'과 같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궁정 아첨꾼'에 해당했다, 고 엘리아스는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궁정 음악가'들은 그들의 '낮은 신분'에 맞게 "음악적 취향뿐만 아니라 의상이나 전체 인간적 특징에 이르기까지 궁정의 행동 규범 및 감정 규범에 맞춰야만"(26)했다고 합니다. 마치 승진 기회를 노리고 있는 대기업 직원이 상사의 규범에 맞게 행동(그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것처럼요.

말하자면 모차르트는 '천재 시대 이전의 천재'였던 셈인데,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엘리아스는 쓰고 있습니다.

천재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었던 사회. 거기서 모차르트는 뭔가 공정하지 않음을 느꼈고, 분노를 터뜨렸으며,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여 싸웁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종일관 개인적인 투쟁"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투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고 엘리아스는 또한 쓰고 있습니다.

베토벤과의 비교도 (짤막하지만) 흥미롭습니다.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궁정-귀족적 전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반면, "베토벤은 이 전통을 박차고 나왔다"(48)고 서술합니다. 모차르트보다 15년 늦게 태어난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속박한 '궁정'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유 시장'에서 '자유 예술가'로서 작업했으며, 자신의 음악적 환상을 일관성 있게 추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59)고 합니다. 물론 엘리아스는 이 ('자유 시장'이 보증하는 한 존재할 수 있는) '자유 예술가'상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들 역시 다음과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보면 흥미롭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음악 장르 가운데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인적, 재정적 자원이 필수였던 탓에 (여차하면 유랑 극단에 의해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던 연극과는 달리) 전적으로 궁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49)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과연 신의 축복을 차고 넘치게 받은 천재일까요? 위대한 예술은 천재들의 전유물인 걸까요? 엘리아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술가의 착상(환상, 상상)은 (예술의) 재료 및 사회(특히 양자가 지니는 한계)와 연관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위대한 것으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자발적으로 발휘한 '예술가적 양심'이었다고 말합니다.

좀 길지만 다음의 인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술가의 착상이 재료 및 사회와 동시에 연관된다는 것은—첫눈에 그 관계가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결코 우연이 아니다. 각각의 예술 영역을 특징짓는 재료들은 무한히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예술가의 자의에 강하게 저항한다. 한 예술작품이 탄생하려면 개인의 환상은 이 재료들 중의 하나 속에서 재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한다. 예술가가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환상과 재료 사이의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환상은 형태를 가지게 되고 한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동시에 의사소통의 수단, 즉 반드시 예술가의 동시대인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타인들의 공감의 대상이 된다.

어떤 예술가도, 즉 모차르트조차도 힘 안 들이고 창작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는 강물처럼 흐르는 환상의 물결이 재료의 고유성과 거의 완벽하다 할 정도로 융화되어 있고 음의 형태는 오랜 기간 동안 놀라우리만치 가볍게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으며 그 음의 풍부한 독창성은 뛰어난 음 형태의 내재적 일관성과 무리없이 결합되어 있지만, 모차르트는 어떤 작품에서도 지켜보는 양심의 눈 밑에서 검토하고 개정하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훗날 "작곡하지 않는 것보다 작곡하는 일이 더 쉽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발언이며 그 신빙성도 상당히 높다. 언뜻 보기에 이는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이 내뱉는 말쯤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고뇌에 지친 인간의 고통에 찬 절규임을 알게 된다.

모차르트는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이 고통을 때론 장난기 어린 우아한 작품들을, 때론 깊이 심금을 울리는 작품들을 창조함으로써 극복하였다. 그가 이 작품들을 통해 추구했던 성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지나치게 엄격한 그의 양심 때문이기도 하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의식하고 있었고 그 재능을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의무를 배반했더라면 한결 수월하게 지나갔을 경우에조차 그는 그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이 순전히 그의 결정만은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몰고 간 것은 부분적으로 자기 강제였지만, 다른 한편 하나의 결정이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별다른 자기 성찰 없이 자신의 예술가적 양심을 그가 필요로 했던 청중의 사랑과 갈채를 상실할 정도로까지 추구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후세의 감탄과 찬사를 받을 만하다.

모차르트와 같이 그토록 경이로운 인간의 인격 구조에 대한 간략한 언급은 인간 모차르트와 예술가 모차르트를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양 나누어 말하는 습관이 자명성을 상실케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인간 모차르트를 천재의 이상형에 들어맞도록 이상화하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가 모차르트를 일종의 초인으로, 인간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가벼운 경멸감을 가지고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에게 합당치 못한 평가이다. (88-90)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는 그가 이전에 했던 작업들, 특히 <궁정사회>나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논의됐던 점들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비롯한 18세기의 음악적 양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고정된 사회적 구조이자 틀'이었던 궁정 사회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나, 모차르트의 죽음을 '사회적 실존의 좌절' 즉, '사회적 죽음'으로 본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여겨져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나중에 죽음을 앞두고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자신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어 '스스로를 포기'하다시피 죽어 간 모차르트의 생애는 그 자체로 매우 드라마틱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생애를 한 개인의 드라마로 내버려두지 않고 한 편의 '사회학적 드라마'로 서술한 것이 엘리아스의 [모차르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어나 설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찬찬히 읽다 보면 비교적 부담없이 사회학적 논의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기분이 내킨다면, 모차르트를 틀어놓고 읽어나가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http://youtu.be/rfeoBc4fD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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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나누리 옮김 / 필맥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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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을 문제로 삼으라"고 멋지게 말했듯이 자신에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대답을 구하는 인간은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 길을 마치 지도처럼 펼쳐 보게 된다. 그는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때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은 어느 자서전에서나 볼 수 있다. 인생의 묘사인가 체험의 묘사인가, 타인을 위한 예증인가 자신을 위한 예증인가, 객관적이고 외적인 자서전인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자서전인가, 즉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자신에 대한 보고인가로 길이 나뉘는 것이다. 앞의 길이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경향을 띠고 교회나 책에서 볼 수 있는 고해처럼 상투적인 표현방식을 사용한다면, 뒤의 길은 독백하듯이 생각하는 것이어서 대부분 일기의 형식만으로 충분하다. 괴테, 스탕달, 톨스토이와 같이 정말로 복합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이 두 길의 완전한 통합을 시도했고, 그 결과로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아성찰은 그저 준비단계일 뿐이지 깊이 숙고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다. 모든 사실은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진실로 유지되기가 쉽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진짜 고난과 고통이 시작되고, 정직성이라는 영웅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형제애를 발휘해 인간의 일회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본능적 충동이 우리를 몰아붙이지만, 그만큼이나 반대의 충동, 즉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에 대해 침묵하려는 의지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보호와 침묵의 의지는 수치심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 인간의 수치심이 지닌 근본적인 비밀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가장 잔인한 모습과 불쾌한 모습을 노출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읽는 사람이 조롱하는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가장 빠져들기 쉬운 위험한 유혹인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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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깊이 읽기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톨스토이' 때문에 읽기 시작했지만, [서문]이 오히려 인상 깊은 책입니다.


'톨스토이'에 관한 글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에도 똑같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번역은 다릅니다. 문단 구분도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카사노바...>는 본래 저자인 츠바이크가 카사노바-스탕탈-톨스토이로 이어지는 정신적, 예술적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쓴 책이기 때문에 필맥 출판사본을 읽는 게 합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소 인위적 발췌 편집이긴 하지만) ['톨스토이' vs '도스토예프스키' = '빛' vs '어둠']의 구도 역시 무척 땡기는 구도이긴 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 둘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그렇고, 둘의 라이벌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원래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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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1 : 재능있는 리플리 리플리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그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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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 시리즈의 전체가 드디어 번역 출간 되는군요. 1권부터 5권까지 다 출간된 것은 아니고 우선 1-3권만 나왔습니다.

1권 <재능 있는 리플리> 2권 <지하의 리플리> 3권 <리플리의 게임>까지가 일단 나온 것이죠.

<리플리를 쫓는 소년> <리플리 언더 워터>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4권과 5권은 내년에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출간 기념 이벤트도 하네요.

 

 

 

 

 

 

시리즈의 첫편인 <재능 있는 리플리(The Talented Mr. Repley)>(1955)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서문화사(네. '바로 그' 출판사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에서 나온 <태양은 가득히>로만 읽을 수 있었죠.

 

 

그 한참 전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태양은 가득히>라는 같은 제목으로 출간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은 <리플리>를 원작으로 삼은 프랑스 영화(르네 클레망 감독, 1960)의 제목을 따른 것이지요.

영화의 주인공 알랭 들롱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리플리>는 일종의 '영화 소설'로 읽혀온 셈입니다.

 

 

1999년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재능 있는 리플리>가 개봉하면서 <리플리>는 원래의 제목을, 그리고 하이스미스라는 걸출한 작가의 소설이라는 원래의 자리를 되찾은 셈이지만, 영화의 인기에도 불구하고(크게 흥행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이 되지 않아 국내 추리소설 팬들(혹은 하이스미스 팬들)의 갈증은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민음사에서 하이스미스 단편선을 내놓으면서 가뭄에 단비 역할을 했습니다만, <리플리> 시리즈가 빠진 하이스미스는 앙꼬 없는 찐빵...

열혈 추리팬들로서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었던 것... (뭐 저는 그정도 열혈 팬은 아니었습니다)

 

 

리플리 시리즈의 각 권 출간 년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능 있는 리플리> 1955

<지하의 리플리> 1970

<리플리의 게임> 1974

<리플리를 쫓는 소년> 1980

<리플리 언더 워터> 1991

 

대략 40여 년에 걸쳐 집필된 시리즈인 셈입니다.

 

 

시리즈가 연속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각 권 마다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출간됐다는 사실,

특히 1편이 출간되고 15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2편이 출간된 것이 눈에 띄네요.

 

 

여기서 한 가지 추정해보게 되는 것은 애초에 하이스미스는 리플리를 시리즈물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리플리라는 캐릭터의 인기와 매력이 워낙 높아 2편을 내게 된 것이 아닌가.

다른 작품들도 (4년, 6년, 11년이란 시간적 격차로 미루어 볼 때) 마찬가지 상황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캐릭터를 창조하고 장악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셈입니다.

작가가 창조해낸 캐릭터가 그 인기와 매력을 무기로 작가를 장악하고 글쓰기를 계속하도록 추동한 경우랄까요.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그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건 모든 작가들의 꿈일 겁니다.

 

그는 물건 갖기를 좋아했다. 많은 물건을 갖는 게 아니고,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던 물건 중 오랜 시간에 걸쳐 고른 물건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자존심이 길러진다. 문제는 겉모양이 아니고 품질이며, 그 품질을 소중히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자각되고, 존재한다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 다만 톰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뿐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존재하고 있다. 세상에는 비록 돈이 있어도 자기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류는 알 수 없지만 보증이다.

(<태양은 가득히>, 동서문화사, 313-4)

 

 

제가 개인적으로 번역 비교를 해보고 싶은 대목은 위의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베스트 컷'으로 꼽은 대목이기도 하지요.

(에리히 프롬의 스테디 셀러)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사실에 대한 자각, 즉 소유/소유에 대한 자각이 존재를 보증해준다는 것인데, 이만큼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존재방식을 잘 표현한 대목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주체의 존재 방식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소비(그리고 소비를 통해 얻게 되는 물건/사물)는 존재를 보증해줄 뿐더러 존재를 풍요롭게(기쁘게, 충만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물건을 고르는 것, 물건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품질을 사랑하는 것은 자존심(자존감)을 길러준다는 것이지요. 무분별한 소비가 아니라 스마트한 소비, 감성이 스민 소비인 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유와 존재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는데, 사실 소유와 존재는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위의 인용 대목은 말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톰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톰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 '소비를 존재와 연결시킬 줄 모르는 사람'을 자신과 구분하는 톰의 이분법은 결국 범죄로 이어지고, 자기 기만과 정체성의 혼란/분열로 이어지니까요. 디키를 똑같이 흉내 내는 톰은 디키일까요 톰일까요.

 

 

톰은 타인으로 위장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위장하려고 하는 인물의 분위기와 기질을 먼저 익히는 일과 그 분위기와 기질에 어울리는 얼굴 표정을 수반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밖의 일은 자연스럽게 그것에 맞추어 나가면 된다. (169)

 

 

톰은 고독감은 느꼈어도 쓸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전 세계가 그의 청중이 되어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 때문에 그는 무척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파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독특하고 순수한 분위기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명배우가 무대에서 중요한 역을 연기할 때 갖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역은, 다른 누가 하더라도 이 이상 멋지게 연기할 수 없다'는 확신과 같았다. (175-6)

 

 

리플리는 마치 게임을 하듯,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디키를 연기하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는 자신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삶의 에너지와 자부심을 길어올립니다.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한 게임이기에 그의 스물네 시간은 언제나 긴장감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긴장감 자체가 에너지로 작용하며, 리플리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리플리는 두 개의 정체성을 능수능란하게 오가야 하며 각각의 정체성과 각각이 놓인 상황을 완벽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는 12역을 담당하는 배우이자 총감독이 되어야 합니다. 감독이 주연 배우를 맡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리플리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상황이 리플리에 의해 연출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즉 누구도 리플리의 의도를 알지 못하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마치 스탭과 조연배우들의 도움 없이 혼자 영화를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보면 리플리가 벌인 일은 단 한 사람의 연기력과 연출력으로 세계 전체와 맞서는 일, 세계 전체를 기만하는 일인 셈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운명에, 그리고 그 운명을 결정한 신에게 도전합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정확한 계산연기, 그리고 '상상'에 능한 리플리는 아슬아슬하게 이 모든 일을 해냅니다. 결국 그는 디키가 되는 데 성공하고, 그 연후에는 디키가 가진 것만 고스란히 빼먹고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돈만 많고 쓸 줄 모르는 무분별한 소비자를 죽이고 돈만 빼앗아 (본인이 염원해마지 않았던) 스마트한 소비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리플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점이 궁금했었는데, 이제 시리즈 전체가 출간이 되니 곧 그 궁금증을 풀 수 있겠지요. 일단은 1권과 2권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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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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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이영애 결혼 기념 재탕 리뷰 
 

  이런 영화를 볼 땐, 고개는 약간 쳐들고, 눈은 상대를 얕보듯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다리는 외로 꼬고, 가볍게 의자 팔걸이에 걸쳐진 손은 이따금씩 생각났다는 듯 하늘하늘 흔들어 주는, 그런 자세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오프닝 시퀀스가 무지막지하게 아아띠스띡artistic하면서도 빤따아스띡fantastic하게 시작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이제 와선 그런 생각도 드네요.




  박찬욱의 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삘이 좋았습니다. 평론가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이에스에이>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가 흐를 때, 완전히, 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이, 매료되었습니다. 그가 찍은 또 다른 영화 제목이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더욱 더 매료되었습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이라, 오호라, 과연, 그렇군.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분연히 일어나,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습니다.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 우리 시대의 거장이 될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백열전구처럼 머리를 휘익 스쳤습니다. 요즘은 뭐 삼파장 램프가 대세입니다만.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 찬욱씨가(이제부터 찬욱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가 제과점 청년에게 그냥 ‘금자씨’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영화에서 나타낼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하드보일드한 영상같으니라고... 그이 하드보일드한 영상들은 곧 쿨한 것과 일맥상통한 어떤 인상들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아아, 게다가 이 영화, 흥행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흥행에 실패한 어떤 영화들은 쉽사리 컬트(숭배의 대상)의 반열에 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찬욱씨의 최고의 영화로 꼽기로 해버렸습니다. 이 영화 왜 이렇게 잔인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즐겨 한 마디 했습니다. <제이에스에이>보다 백 배 낫지 않냐? 나의 허영심은 이렇게 채워졌습니다.




  <올드 보이>는 지난 일 년간 하나의 현상, 이었습니다.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이 이 영화를 둘러싸고 불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보라색 위주로 물든(물론 핏빛은 제외하구요) 이 차가운 색감의 영화를 둘러싸고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어쩌면 찬욱씨의 운이 억세게 좋았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구와는 다르게 그의 사주는 엄청나게 좋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그가 부럽습니다. 나는 찬욱씨가 부럽고, 부러운 나머지 약간 질투마저 납니다. 이번에 <금자씨>에서도 사실, 감탄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써먹을려고 생각해두었던 그런 설정들을 자유자재로, 그만의 스타일 속여 녹여, 구사하고 있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이와이 순지의 영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를 보면, 일본 경찰이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을 통역을 통해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요. 그런 설정을 언젠가 써먹어 봐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런, 이게 뭡니까. 우리 찬욱씨가...... 선수를 쳐 버리고 만 겁니다. 멋집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가 봅니다. 이건 사기다. 아니다. 이건 예술이다. 사기건 예술이건 간에, 아니, 그냥 사기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이정도로만 치면, 충분히 용서할만하지 않을까요?




  사실, 나는 그의 스타일이 마음에 듭니다. 그는 확연히 스타일 위주입니다.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죠. 그게 무슨 스타일이냐구요? 아, 이거 참, 스타일 구기네, 이렇게 말할 때의 그 스타일하고는 약간 다른 그런 것이죠. 어떤 영화가 생각이 나네요. 부산의 깡패들이 나오는 조폭 영화의 대표작 이라 할 수 있는 영화인데, 거기서 주인공 깡패가 어렸을 때 친구였던 다른 조직의 깡패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수를 쓰면 빠져나갈 수도 있는데도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말죠. 왜 그랬느냐는 또 다른 친구의 질문에 그는 대답합니다. ‘쪽팔려서.’




  아아, 쪽팔려서. 명언입니다. 물론 위에 언급된 영화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스타일입니다만, 어느덧 우리는 스타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폼생폼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찬욱씨는 칸에서 상을 탈 수밖에 없는 그런 사주를 타고난 겁니다. 그는 위대한 시기에 걸맞는 사주를 타고나 이제 세계 속의 위대한 한국인 감독이 될 겁니다. 사실, <올드보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타일의 예고편에 불과한 거죠. 그 이전으로 소급해 들어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죠. 거기에서 ‘스타일’은 아직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송강호와 신하균이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비록 신하균이 ‘녹색 머리의 벙어리’로 나온다 해도 말이죠. 신하균이 신장을 도둑맞고 텅 빈 폐건물에서 배가 갈린 채 홀로 뒹굴며 신음할 때, 배두나가 엽기적인 전기 고문을 받고 잔인하게 살해당할 때도, 우리는 최소한 얼굴을 찌푸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온갖 만화적(사실 만화에서 출발했으니 당연하겠지만)이고 엽기적이고 잔인한 설정들로 치장되어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반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반전과 주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사악한 주제를 담고 있는 <올드 보이>도 사실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최민식의 ‘레게 파마’를 오버하는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굳이 있다면 유지태가 쓸 데 없이 메뚜기 자세로 요가나 하는 정도? 허리가 무지 아팠다던데....... 말하자면 찬욱씨는 이 때만해도 선을 그을 줄 알았다는 거죠. 요기, 요기, 이 ‘레게 파마’ 이것까지가 선이야.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구. 아아, 그러나, 어떡합니까, ‘레게 파마’ 그 자체로 센세이션인 것을. 아티스틱하고 판타스틱한 것을. 사람들은 열광하고 말았습니다. <올드 보이>에서 ‘진짜 주제’가 뭔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스타일,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왕가위가 보여준 것을, 타란티노가 보여준 것을 우리의 찬욱씨는 마치 애국이라도 하듯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선보임으로써 우리 대중들의 환호와 외국의 유수한 평론가들의 갈채를 한번에 얻어버린 겁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의 영화는 어느 덧 컬트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어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금자씨>에서 찬욱씨는 또 다른 도약을 합니다. 그는 이제 아주 가볍게 우리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풀나풀 날아다닙니다. 그의 사주가 궁금할뿐더러, 이제 그의 머릿속을 갈라서 헤집어 보고 싶은 욕망이 뭉클뭉클 솟아오를 지경입니다. 영화에서, 이영애가 ‘개새’ 비슷한 어떤 것을 끌고 가서 죽입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진짜로 빛이 나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스타일 죽이는 어떤 총을 만들어 준 사내는 팔에 정말이지 멋진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이영애의 입을 빌려, 감독은 말합니다. ‘무조건 아름다워야 해.’ 그래서 한겨울에 얇디얇은 땡땡이 옷을 입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설정도 해봅니다. 허무함을 바탕색으로 하고 있는 알록달록 퇴폐미가 하늘을 찌릅니다. 지하 하숙방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얼룩무늬 벽지가 발라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올드 보이>의 감금방도, 보라색 선물상자도, 그러했습니다만. 하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은 20세 유괴범 금자를 취조하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지하 하숙방과 달리 엄청나게 사실적인 그런 공간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찬욱씨는 균형 감각도 뛰어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제어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인 겁니다. 살인이 마치 반상회처럼, 하나의 파티처럼 벌어지는 폐교의 교실이라는 공간도 그렇습니다. 아아, 생각하면 할수록, 입술사이로 감탄사만이 비어져 나옵니다. 찬욱씨의 장기랄 수 있는 스틸 사진을 연상케 하는 정지된 화면들 역시 여전히 놀랍습니다. 매우 일본적인 화면들이긴 하지만.




  두서 없이 늘어놓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하나 빼 먹었네요. 요는, <금자씨>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 찬욱씨의 이전 두 영화보다 더 설득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무책임하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혹시, 행간에서 읽었습니까? 하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몇십 년을 계획한, 그리고 복수가 성공하자 죽어버린 <올드 보이>의 유지태는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변명처럼 말해야 합니다. 모래알이든, 큰 돌이든 물에 가라앉는 것은 같다나요. ‘비범한 미친놈’이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는’ 데 급급한 ‘보통사람’에게 복수를 하는 어이없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15년간의 감금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복수란 대개 자신과 급이 같은 인물에 대해서 행할 수 있는 것이죠. 상대방이 모르는 복수는 복수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15년간 감금을 통해 ‘보통사람’은 ‘비범한’ 프로타고니스트로 업그레이드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걸출한 안타고니스트에 어울리는. 반면에, <금자씨>의 복수의 대상은 커다란 사회악이며 미친 정신병자입니다. 뭔가 따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복수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복수의 과정도 한 절대적인 개인에 의해 집전되지 않습니다. 금자씨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되는, 그럼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그런 카리스마입니다. 영화의 전체 흐름을 관통하는 ‘금자씨의 복수’라는 하나의 중심적인 결을 타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어집니다. 복수의 준비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한 복수의 실행과정이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영화의 구조가, 그리고 복수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와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 속으로 넓게 퍼진 뿌리, 그리고 튼실한 몸통, 그리고 몸통 위로 아름답게 펼쳐진 가지와 이파리, 아아, 그것들이 알맞은 세기의 바람에 흩날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탄성을 내지릅니다. 비닐에 고인 저 피, 아~ 아름다워라.




  문제는, ‘개새’를 비롯한, 스타일입니다. 사실, ‘개새’가 아닌 ‘개사람’인데, 그런 직유적인 이미지는 아무래도 좀 거친 느낌을 주죠. 구성의 세련됨에 비해 좀 거칠다 싶은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식탁 섹스’ 장면도 좀 거칠죠. 이름이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만. 웃음이 삐죽삐죽 비어져 나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왜 웃음이 나오느냐, 이 말이죠. 대다수의 관객은 또 함정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데 쓴웃음인 대로 그냥 웃고 넘겨버리고 맙니다. 원래, 부르기가 무지하게 어색한 ‘생일 축가’를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부르는 장면을 통해 찬욱씨는 결정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란 게 이래요. 이렇게도 뻘쭘하고 어색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자, 내가 약간의 키치적인 수법들을 동원해 그걸 조금 비틀어 봤어요. 어때요, 충격적이라구요? 엽기적이라구요? 역겹다구요? 동의할 수 없다구요? 아주 약간 비틀어봤을 뿐인데요? 여러분이 평소에 생일 축가를 어떤 식으로 부르는 지 생각해 보세요.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면, 직원들이 우습기 짝이 없는 복장을 하고 불러준다는 그 생일 축가를 생각해 보세요.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당 못하고 참석자 모두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죠. 어라, 어색하네? 왜 이래? 아냐, 이래선 안 돼. 급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바탕 어색한 웃음이 자리를 휩쓸고, 잠시 ‘천사가 지나가는 바람에 고요했던’ 자리엔 또 다시 명랑함과 즐거움이 깃들죠. 어색함은 어느새 잊혀지고 맙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게 아니니까요. 우리가 생일 파티 자리에 제격이라고 여겼던 게 아니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금자씨>를 보고 웃습니다. 웃음 한 구석에 불편함이 깃들어있습니다만 애써 무시합니다. 찬욱씨는 역시 멋져. 이젠 우리에게 웃음까지 선사하네. 이제 또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탈려나? 그의 이름이 포털 싸이트의 검색어 순위에 오르고, 어느덧 정보의 바다는 박씨 천하가 됩니다. 박주영, 박지성, 박세리, 박찬호...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이 나에게 훌륭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며 얼굴을 ‘마음껏’ 일그러뜨릴 수 있어서였습니다. <금자씨>에서는 미안하지만, 그게 안 됩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요. 그렇지만, 미안할 건 없겠죠? <금자씨>는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고, 당분간 찬욱씨의 좋은 운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니까요.




  끝으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찬욱씨에 대한 질투심이 어려 있는 글입니다. 찬욱씨가 영화 첫 머리에서 금자씨의 입을 빌려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이제 쓸 데 없는 질투는 그만두고 ‘나나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 편, ‘금자씨’의 눈화장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니었나, ‘금자야, 너 눈 화장이 그게 뭐니~’라는 최민식의 느끼한 한마디는 너무나도 시의 적절한 멘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찬욱씨, 거 스타일이 그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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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브라더스(CJ한국영화할인)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와이키키 브라더스>

 

감독 임순례

출연 이얼, 황정민, 박원상, 오광록, 오지혜, 박해일, 문혜원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벌써 8년 전 영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봉한 2001년,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꿈 많은, 뭘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었다. 문학이 좋았고, 음악이 좋았다. 이것들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뭔가 그럴듯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리 재미있지 않았던 것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삶에 찌들어 있었고 음악을 통해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꿈꾸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아니 자발적으로 그만두어 버린 것 같았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했다.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무너져가면서 그러한 느낌은 강화되었다. 강수가 대마초에 취해 불안한 웃음을 흘릴 때, 정석이 칼을 맞고 신경질적 발작을 일으킬 때 그랬다. 그리고 성인 주점에서 성우가 손님의 강요에 의해 벌거벗고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때 그러한 느낌은 절정에 달했다.

 

왜 이런 비관적인 영화를 만든 걸까. 궁금했다. 2001년에 나는 이 영화가 꿈이 생활과 현실에 의해 압사당하는 필연적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던 것 같다. 쉽게 압사당하지 않을 거라고.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아마도 치기였으리라.

 

생각해보면, (지금도 그렇지만) 몰락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와 다자이 오사무가 좋았다. 만약 압사당한다 하더라도 그들처럼 압사당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몰락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자신의 몰락에 대해 타인 혹은 사회 탓을 하면서 구차하게 불만을 늘어놓거나 하지 않는 몰락은 아름답다. 지하생활자나 다자이의 궤변과 수다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최대한 삼가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독백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성격과 기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령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아무래도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낙오자들의 변명이 아니다. 그렇게 여겨질 확률이 높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독백은 주관이 섞인 불만이나 자기 변명이 아니라 놀라운 자기 반성이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반성과는 다르다. 일반적 의미의 반성이란,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잘못과 오류를 뉘우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에게 반성은 자기 발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는 결코 뉘우치지 않는다.

 

사실 변명이나 반성은 어떤 논리적 비약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개인적 몰락에 대한 원인으로 사회(타인)라는 심급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변명과 반성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둘 모두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이 기질과 사회의 요구가 불일치한 데서 찾는다. 단지 전자는 사회 탓을 더하고 후자는 자기 탓을 더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지하생활자의 자기 반성이 변명도 일반적인 의미의 반성도 아닌 이유, 더불어 그가 낙오자가 아닌 이유는 자신의 기질에 대해 말할 뿐 사회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사회 모두를 객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꿈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과 타협하면서 꿈의 크기를 축소시켜야 한다. 그런데 꿈을 축소시키는 방법이 아무래도 기질상 서툰 이들이 있다. 그러면 말이 많아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그 말을 채우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실은 그런 심정에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 첫머리의 "나는 병든 인간, 비열한 인간" 운운은 문자 그대로의 자기 고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몰락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당대 사회에서 진행되는 몰락을 객관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취한 방법을 참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설이 아니라 영화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펜이 아니라 단지 비춰지는 그대로를 포착할 뿐인 카메라를 도구로 삼는 영화는 소설과 달리 내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많은 영화들은 내면을 보여주는 척한다. 할리우드에서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전형적 실패담으로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 세상에 도전하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 말미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남기는 식으로 말이다. '너희들의 도전은 비록 실패했을 망정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는 극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같은 영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새는 잘 나오지 않지만) 노래방에서 반쯤 벌거벗은 미녀들이 해변을 뛰어다니는 화면을 볼 때마다, (극히 드물겠지만) 버스를 운전하며 우는 마을버스 기사 아저씨를 볼 때마다,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혹은 사는 게 힘들어 울고 싶을 때 이 영화는 다시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설프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아직도 믿는다. 그 방법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틀렸다. 아름답게 몰락하는 방법 따윈 없다. 물론 아름답게 사는 방법도 없다. 삶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이 말에 대해서는 섣부른 단정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이도 많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짓고 절망하는 대신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삶과 세상을 아름다움과 연결시키려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태도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아름다움은 우리 주변 사소한 것들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만과 불평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포기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말이지 객관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름다움은 사소함 속에 깃들어 있다'라는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는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성우가 늦은 오후 좁은 하숙방에서 작곡을 할 때, 개장 전의 업소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때(그리고 그것을 인희가 지켜보고 있을 때)이다. 이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성우가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 이어지는 장면은 그러한 안도감에 균열을 낸다. 순간의 아름다움은 피칠갑한 정석의 난입과 뒤이은 발작에 의해, 친구 수철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에 의해 파괴된다.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역할--즉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환상을 부여하는 것--을 완전히 배반하는 이러한 장면 전개는 아마도 의도적인 것이리라. 그러나 만약 영화가 여기서 그쳐버렸다면 나는 실망했을 것이다. 영화 역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영화에 그쳐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는 예상치 못한 순간 비관의 정서를 탈피한다. 그것도 극도로 답답하고 우울하고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말이다. 

 

노래방에서 탈의를 강요당한 성우가 노래를 부르다 화면을 응시하면, 나체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남녀가 희미하게 보이고, 화면 속에는 비키니를 입은 금발 미녀가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데 그 화면은 곧 어린 시절의 성우와 친구들 장면으로 바뀐다.

 

여기서 성우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지도 (만약 현실도피라면 회상 장면이 이어졌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회한이라는 정서로 물들이고 있지도 않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우리/내가 왜 이렇게 됐지?"라고 말하는 반면, 성우는 한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나체일지언정, 노래에는 관심도 없는 속물들 사이에서일지언정, 그는 어쨌든 지금도 계속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때 진리라고 믿어왔던 것을, 숭고한 것으로 여겼던 것을 쉽게 내던지는 데 익숙하다. 적어도 현실에,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또 그런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술이라도 취했다면 거기에 (아무도 믿지 않을,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믿지 않을) 기나긴 변명들이 덧붙는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만 그런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8년 만에 다시 보면서 얼마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취해있을 시간에 살아있으라. 말할 시간에 연주하라. 현실 탓을 하면서 꿈을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는 대신 꿈과 관련된 일을 단 한 조각이라도 실행에 옮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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