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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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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유학생이 자신의 고국을 떠올리면,  썩은 관료들에게 연줄을 대고 뇌물을 바쳐야 일이 처리되고, 원하는 바와는 상괌없이 당이 정해준 학교로 가서 당이 정해준 전공을 공부하고 당이 정해준 직업을 가져야 하는 황폐한 땅이었다. 개인의 취향과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제당하는 곳이었고, 회피와 부정으로 얼룩진 삶에 길들여지는 곳이었다. 그 유학생의 텐안문 사건에 대한 부주의한 발언이 당국에 반체제 인물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어, 감시와 통제 하에 놓여지게 된 것은 그 머나먼 땅 고국을 영원히 떠나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갈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음을 의미했다. 


그래도 1980년대의 이민자들은 작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토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문맹이고, 가난했던 초기 중국 이민자들이 낯설고 차별적인 땅에 정착하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한 채 노예처럼 혹사당해야 했던 것과는 달리, 80년대 중국 이민자들은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중국을 벗어나 먼 이국 땅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똑똑하고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중국에서 이루어놓은 성취를 밀어놓고 좌절당한 삶을 비통해하는 것이었다. 낯선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아닌 그 낯섬의 바닥에 자신을 던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을 뜻했다.  아내에거 점점 무능해져가는 것이었고, 공산주의 체제에서 성장한 사람이 자본주의라는 경멸스런 체제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었다. 


유색인 우대 정책으로 배정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흑인이기를 바랐던 엉뚱한 것이었다. 하찮은 직업을 구하기 위해 숱한 면담을 하러 다니지 않기를 꿈꾸는 소박한 것이었다.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더라도 반체제인물로 체포되지 않도록 미국 시민이기를 바라는 아이러닉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보다는 동포에게 엮이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닫는 쓸쓸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살에 박힌 가시처럼 사는 것. 동네 나온 빈집에 중국인이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는 이웃이 있는 동네로 이사가는 것이었다.

 

주인공 난 우에게 첫사랑 베이나는 갖지 못할 이상이었다. 먹고 살고,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현실적인 장벽이 시를 쓰는 것을 가로막는 것처럼, 빨간색 일본 승용차를 사줄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한 경제적 환경은 베이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 핑핑은 현실이었다. 사랑하고 싶어 괴로워하면서도 사랑하게 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미국이자 안주해야 할 곳, 운명이 정해진 잔인한 곳이기도 했으며, 악착같이 벌어서 집을 사고 빚을 갚고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에게는 시를 쓰고 싶은 욕망만 있을 뿐, 시를 쓸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소망만 있을 뿐, 노동의 굴레에서 한 발작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자유는 그를 버리고 떠난 첫사랑 베이나이자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시쓰기이기도 했다. 아이를 위해 선택한 삶이었기에, 아내와 가족은 자신의 이상이 아닌, 굴레였다. 자유가 아닌 구속이었다. 이혼할 수도 없는 것. 돌아갈 곳 없는 것. 돌아갈 수 없어서 결국 요리사가 되는 것. 한권 한권 사서 모은 책들을 눈쌓인 쓰레기 더미 옆에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난의 아내 핑핑에게 1980년대에 미국에 살면서 중국을 생각했을 때, 깨끗한 화장실을 필사적으로 찾아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산다는 것은 더이상 깨끗한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악몽과을 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천안문 광장으로 인해 아이와 가족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머나먼 땅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안전함이었다. 그녀에게 미국에 아이를 데려와 정착한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살면서도 이혼할 수 없는 림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덜 사랑했었다면, 그녀는 덜 불행했을까. 아이가 주인집 도둑 누명을 썼다가 진실이 밝혀졌어도 값싼 노동력에 대한 댓가로 제공해주는 다락방을 당장 떠날 수 없는 서글픈 것이었다. 머나 먼 타국 땅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함께 살면서도 이미 떠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남편의 쓸쓸한 뒷모습만을 바라보는 외로운 나날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 둘이어서 더 외롭지만 혼자일 수 없어 이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부부가 선택한 삶은 중국인 이민자가 아무 기술 없이 그저 고된 노동을 정직하게 보상받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소박한 것이었다. 노동한 것만큼의 댓가로 먹고 사는 일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시인 지망인이 현실을 직시하자 우 부부는 동시에 한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난 우가 이상을 멀리하고 밀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첫사랑의 환상 베이나를 잊고,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을 잊는 것이었다. 핑핑의 소박한 소망인 매일매일 똑같을 수 있는 날들이 가까와 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함께 같은 곳을 보고 걷는 길에서 둘은 조금씩 서로를 배려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에게는 뜨겁지 않아도 의무와 책임이 아닌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랑이 싹터감을 배우게 했다. 그 속에는 왕부부처럼 30년을 살아도 여전히 어울리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주변을 배회하는 이방인 신세가 될까 걱정히는 것. 교회에 나가지 않는 한 고립된 삶을 살다가 고독과 외로움이 노후를 덮칠 것을 알고 있는 것. 그렇지만 어떻게든 정착히고 싶은 곳. 달리 갈 곳이 없는 것. 부모의 어눌한 영어가 종종 아이를 당황스럽고 짜증나게 만드는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아득한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깨닫게 된다. 이민자의 삶은 중국인 사회와 완전히 단절하고 방해받지 않고 살고 싶어도 중국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본토의 홍수 피해를 모른 척 할 수 없도록 중국인 사회에서 그들을 알고 기부금을 걷으러 와서 애국심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는 걸 참아야 하는 것.  불안정하게 사는 걸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신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감을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하루하루 매일 메모하듯 건조한 문체로 써 내려간 소설. 간결한 문체는 일상의 아주 작은 일들이 빼곡히 쌓이고 모여져 어느 정도 큰 덩이의 시간 뭉치를 만들어 내면 안쪽에부터 깊은 울림을 준다.  하루하루의 일과를 따라가다 보면 몽상가 같았던 난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사랑. 그는 정직했으므로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아내를 사랑받지 못하는 채로 견디게 했다. 헌신하는 핑핑에게 마음쓰는 일, 고마워하는 것들 그런 소소함이 사랑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자각하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너무나 길고 외롭고 고통스럽게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또 그 만큼의 시련을 겪은 후에야 난과 가족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에서 애틋한 존재로 바뀐다. .

 

1권 2권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아 많이 두 권으로 나누었겠지만, 내용적으로도 1권과 2권이 분리가 된다. 2권에서는 이민자로서 긴 시간동안 이루어내야 할 생활의 안정을 달성한 후 난의 자아에 대한 탐색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1편에서 이민자로서 생활고와 씨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2편에서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시쓰기라는 자아의 실현을 위해 겪는 일상을 다룬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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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Cosmos: A Spacetime Odyssey (코스모스) (2014)(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20th Century Fox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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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TV시리즈로 제작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전세계 대중들에게 광활한 우주의 세계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최근 내셔널지오그래픽스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빅 히스토리 코스모스'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 후속작을 몇주 전까지 방송했다. 전세계 180여개국에서 동시 방송되었고, 제작비만 450억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좋은 소식 한 가지, 나쁜 소식 한 가지가 있다. 나쁜 소식은 국내 DVD/BlueRay가 발매되지 않았다는 거다.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은 해외 구매 제품이며 한글 자막이 없다. 컨트리코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내셔널 그래픽스 채널의 다큐멘터리들이 네이버 VOD 서비스를 통해 편당 700원씩에 판매되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아직 없다. 좋은 한 가지소식은 내셔널지오그래픽스에서 시청자들의 의견을 물어 재방송을 계획하고 있다는 거다(https://ko-kr.facebook.com/NatGeoKorea). 추측이지만, IPTV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언제든 재방을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바마도 추천했다.

미국은 언제나 큰 꿈을 꾸고 멀리 나아가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비롯된 탐구 정신입니다. 현재 우리는 우리가 느꼈던 가능성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탐험해야 할 새로운 세계가 있고, 우리 미국은 이에 열정을 바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계는 없습니다. 그러니 눈을 뜨고 상상력을 펼치십시오. 위대한 발견의 다음 차례는 바로 당신입니다(한글 자막에는 미국 대신 우리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오바마는 우리 대신 미국이라는 주어를 사용했다.) - 출처 : 내셔널지오그래픽스 채널 tvcast

 

화질과 사운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현란한 CG는 환상과 과학의 경계에서 매혹한다. 약 90분짜리 다큐가 총 13편이다. 1. 은하수에 서서, 2. 생명의 강물, 3. 지식이 두려움을 정복할 때, 4. 밤하늘의 유령, 5 빛의 뒤에서, 6. 깊이 더 깊이, 7. 깨끗한 방, 8. 태양의 자매들, 9. 잃어버린 세계, 10. 세상을 바꾸는 힘, 11. 불멸을 꿈꾸다. 12. 지구의 메시지, 13 창백한 푸른 점. 각 에피소드의 부제다. 과학 다큐의 제목을 이으니 시가 된다.

 

그렇다. 제목은 내용을 반영한다. 철학과 과학은 하나다. 과학의 발견은 생각과 의심과 철학에서 왔다.  수억광년의 광활한 우주와 수백 마이크로 세계가 통한다.  끝도 없이 넓고 넓은 광활한 우주를 이해하려면 끝도 없이 작고 작은 원자의 세계 전자 안쪽의 중성자와 원자핵과 이를 둘러싼 전자들의 성질과 이 작디작은 원자의 시작점을 이해해야 힌다. 그 가장 기본 원소의 시작 점에 광활한 우주 탄생의 신비가 있다. 시간의 시작점 우주의 시원을 탐구하면 끝없는 시간 속 생명의 기원과 오랜 시간 속 진화를 거듭한 고등 생명체가 하나로 이어지고,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더 선명해진다.

 

별의 붕괴는 별의 생명이다.  성간 구름이 붕괴하여 별이 형성되고 별이 스스로 붕과하여 폭발과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태양은 원래 크기보다 백배 부풀어오르는 적색거성과 지구만큼 작아지는 백색왜성 단계를 거쳐 거대한 핵폭발로 생을 마감한다. 신성, 초신성, 극초신성들이다. 별이 죽으면 산산조각이 되어 먼지가 되지만 중력이 그 먼지들을 끌어다가 새별을 탄성시킨다. 코스모에서는 버려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 우주과학이 아니다. 생명의 존재 이유를 사유의 바다에서 과학적 탐구로 이루어내면, 우리인류가 아주 오래 전에 두려워했던 별들이 자연 법칙임을 알았던 것처럼, 시간과 우주와 외계에 대한 조금 더 단단한 이해로 더 넓은 세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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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존 카치오포 외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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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씨 표류기>의 정려원은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택한 자발적 외로움은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영화 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코믹하고 엉뚱한 행동 속에서 짠하게 전해지는 그녀의 상처를 읽는다. 언젠가 무슨 일을 계기로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신체상의 상처는 상흔을 남길지언정 언젠가는 그 아픔을 잊을만큼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고 잊혀진다.  그러나 사회 라는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났다면 그 상처와 아픔은 영원한 것이 되어버린다.

 

할로의 실험은 사회행동실험을 예로 드는 심리학, 행동학 계통의 책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실험으로, 새끼 붉은 원숭이의 애착에 대한 실험이다. 아기 때의 어미와의 신체적 접촉의 부재, 다른 원숭이와의 격리가 평생 사회적 동료와 어울리지, 새끼를 제대로 못하는 사회적 부적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 루마니아의 독재 정권 하에서 탄생한 고아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않은 채 아무런 신체적 접촉 없이 유아기를 보낸 아이들은 울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정신과 운동 기능의 발달 부진을 겪었으면 후에 영구적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거리의 부랑자가 되거나 일부는 비밀경찰로 이용되었다는 사례는 어린 시절의 사회적 친밀도와 신체적 접촉이 인간을 형성하는 데 주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할때 활성화되는 감정 영역의 뇌부위는 신체적 고통에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부위와 일치한다고 한다.사회적 유대감이 주는 위안과 고립당했을 때의 통렬한 고통은 인간을 사회적 평가에 예민하게 한다. 초기 인류는 함께 무리를 이럴때 생존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므로 유대감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결구 고립에 처하면 불안감을 느끼고 사고 인지도 손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외로움을 탄다는 것이 사교성의 부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외로움은 원래 가진 사교성을  억누를 때 문제가 생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로, 사회적 유대감의 수준을 아주 높게 설정한 유전적 영향과  사회적 유대감의 부재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를 꼽는다. 

 

서구 사회는 지난 5 세기 이상 반드시 서로 어울려 지내야 하는 인간이 제일 우선인 필수 조건들을 부차적인 요소로 격하시켰다. 75

지금 우리 사회가 아무리 풍요롭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상태라고 해도 그 표면 아래에서는 우리가 6만년 전 폭풍 후의 공포에 직면해 한 곳에 모여들어 서로 위안을 구했던 바로 그 허약한 존재 그대로라는 것이다. 자연은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관계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조절 장치가 무너지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포 차원에서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난다.87

 

관계의 양이 아니라 관계의 질이 중요

저자의 연구팀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 등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 해서 외로움의 보편적 구조를 찾았다. 그것은 브루너가 발견한 자아의 세 가지 차원, 개인적, 상관적, 집단적 관계와 일치한다. 이 세가지 차원 각각에서 문제는 관계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 질은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욕구와 기호에 따라 결정된다.

 

사회적 고립은 고혈압 비만 운동 부족 흡연과 동일한 강도로 질병과 조기 사망의 위험 요소라는 연구결과가  사이언스지에 실렸다. 예로, 외로움을 심하게 느낀 다음날 아침 코르티솔 수치가 높고, 외로움을 느끼는 고령자의 경우 아침 소변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인 에피네프린의 수치가 높게 나온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의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학과시험의 스트레스가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소외감이 수면의 깊이 와 질을 저하시킨다. 수면 박탈은 신진대사, 신경계 호르몬을 조절해 노화와 똑같은 영향을 미치친다. 옥시토신은 사회적 유대감과 가장 관련있는 호르몬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줄여주고 고통을 누구러뜨리며 주의집중력을 높여 준다. 친밀한 행위인 섹스를 할 때 오르가즘을 느끼면 옥시토신이 대량으로 혈류에 유입되어 상대방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와 혈압이 낮아지는데,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배우자 사이의 유대감이 더욱 돈독해진다고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행복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비슷한 행복에 빠지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런 행복감마저 느끼지 못한다. 외로움은 충동과 감정조절 능력을 약화시키고 적대감과 불안감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게 한다. 외로운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인지와 자기 조절 기능이 손상된다.

 

외로움은 견디기 힘든 두려움을 유발한다.특히 청소년은 또래집단과 필사적으로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판단 능력과 정체성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배척당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자멸적인 어리석은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앞으로 겪게 될 실망과 좌절, 배척 당할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무의미 하며 절대로 관계가 잘 풀리지 않으리라는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해 낸다 238

외로움을 덜 느끼려면

외로움을 덜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은 순간 순간에 적합한 진정한 사회적 상호작용이명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에 나가서 설치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며 모호한 상황에서는 다른사람이 행동이나 말을 선의로 해석한다. 남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주면서도 신중한 판단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는다.

 

사회적 유대감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 내밀기.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 낼 확률을 높이고 실망할 가능성을 줄이려면 좀 더 안전한 자선 활동으로 실험할 필요가 있다.  노숙자쉼터 나 호스피스 병동의 자원 봉사 등을 통해 긍정적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 자신감도 생기고 자기 조절 능력이 강화된다

 

재미있는 설문조사가 있다 1985년 미국에서 자기 마음을 편하게 터 놓을 나는 친구가 몇명이나 있는가 라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세명이었다. 2004년에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0명이었다. 4분의 1이다.  2004년 미국인 약 10%가 우울증이 조울증에 시달렸고 자녀가 우울증과 주의력 결핍 장애로 약을 복용 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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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입니다
안도현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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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ㅡ황진이

 

 

길고 긴 시간의 기다림.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님 그리워 더욱 긴 밤의 시간을 한 허리 베듯 뚝 잘라다 그걸 또 이불 밑에 두었다가 그분이 오신 짧은 시간에 꺼낼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시조를 볼 때마다 언어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안도현 시인이 고른 글귀에도 이 시가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우리 고시조 중 가장 아름답고 절절한 작품이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모든 시의 범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절절하다.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어라 와야 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 듯이 사공놈의 성령인지 사앗대로 찌르듯이 두더지 영식인지 곳곳이 뒤지듯이 평생이 처음이요 흉중에도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어라 참말로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ㅡ 이정보의  우리 사설시조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전문

풀이는 이렇다.

 

간 밤에 자고 간 그놈 참 못잊겠네. 기와 만드는 놈의 아들인지 진흙을 마구 짓이기는 것처럼, 사공놈이 손으로 삿대를 잡고 찌르는 것처럼, 두더지의 지체 높은 아들인지 내 놈 곳곳을 뒤지는 것처럼, 평생에 처음이었네, 이 가슴도 야릇하네.  이전에도 나 그런 일 수없이 겪었으나 참말로 간밤의 그 놈은 차마 잊을 수가 없네. 87

 

사설 시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서민 문학이라 할 만 합니다. 고리타분한 시조 형식을 파기하는 대담성도 놀랍지만 재담• 욕설• 음담 등을 시조의에 도입함으로써 풍자와 해학의 세계를 호쾌하게 열어제친 아주 귀중한 문화 유산입니다. 87

안도현 시인의 산문집 <나는 당신이다>는 그의 서재 오래된 책 속에서 찾아낸 밑줄과 그 밑줄 속 생각들을 담아낸 책이다. 10여년 전에 쓴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 라는 두 권의 책에서 추리고 개정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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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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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섬
어차피 인류의 사랑 행각이  더이상 종족 보존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ㄱ,ㄴ,ㄷ 셋이서 경험하는 쓰리섬이 관습과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터부시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혼전섹스가 여성에게만 특별히 범죄가 되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았던 것, 아직까지 그런 문화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변화하는 인간 세상에서 쓰리섬이 프리섹스만큼이나 자유로운 하나의 취향으로 받아들여질 날이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매우 개인적인 사건이므로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느냐의 여부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사생활 보호라는 관점에서 더욱 시사적일 수 있다. 일부 개방적인 나라의 자유로운 부류의 인간들 사이에선 쾌락적 관계맺기에서 쓰리섬이라는 선택이 조금 예외적이기는 하나, 사적 영역으로 크게 윤리적인 지탄을 받지 않고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세 사람이 함께하는 성행위가 많은 문화권에서 폭넓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있다는 말은 아니다.  관습과 인습에 반하는 것은 때로 범죄처럼 취급받기도, 현행법상 범법 행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기이한 덩어리지기는 독자들에게 납득을 주었는가. 외롭고 가난한 영혼들이 품은 상처받은 내면의 가시들을 접고, 오로지 서로의 육체에 탐닉한 채로 그 겨울을 나고 있었다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문제는 그거다. 아무리 마법같은 언어로 독자들을 설득했다 해도, <은교>의 칠십넘은 노파가 어린 고등학생의 몸을 향해 욕망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주입된 관습과 인습의 뿌리는 쓰리섬을 선뜻 받아들이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은근슬쩍 모른 체 수사적 문학 표현의 한 방법으로 존중하고, 소설의 축인 쓰리섬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해도 되는가. 하나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좋다는 화자의 고백을 따라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박범신 작가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들의 기이한 애정 행각을 환타지를 대하듯 무심히 넘기게 된다.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끄덕끄덕거리며. 

 

그렇다고 해서, 그런 행위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가능성 있는 현실적 행위로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가의 귀 속에 살고 있다는 그 간지러운 곰팡이들에게 전달된 불행한 가시 선인장의 얘기로, 꿈처럼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환상으로 무심히 상징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읽는다.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세 사람, 그래서, ㄱ, ㄴ, ㄷ으로 불리고 부르는 것으로서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던 세 사람,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지 못하고 단지 햇빛이 주는 명암과 온도와 바람이 주는 습도에 따라 변화하는, 서로에게 단지 풍경이었던 세 사람이 무참함의 늪 깊숙히 우물을 파고 그 속에 빠지고 빠뜨리는 삶의 무상함과 상처와 권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우리는 세 사람의 쓰리섬을 읽으며 스크린 속 동영상에서 나오는 저속하고 값싸고  탐욕스럽게 보이는 클로즈업된 살색 장면을 상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내면이 치유를 경험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환상처럼 다루게 된다. 독자들에게 쓰리섬을 거부감없이 주입시키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들의  행위는 범죄와 같이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도 용납될 수도 납득되지도 않는 패륜 행위였는가. 물론 살인은 그렇다. 세 사람의 강한 정신적 일체감이 에너지가 되어 스스로 판 우물 속에 스스로 빠졌다고 설득하지만, 살인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그것도, 불멸의 사랑 따위를 위해서라니 너무 나갔다. 그러나 쓰리섬은?  덩어리라는 일관된 표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한 채 셋이서 서로를 만지며 탐닉함으로써 각자의 상처와 상실감에서 벗어나 혼연일체가 되고 비로소 온전한 인간임을 느끼는 시간들. 그렇게 서로를 보듬고 안는 그 치유의 시간에 우리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살색 클로즈업을 상상할 수도 그 엄숙한 치유의 장면에 돌을 던질 수도 없다.

 

 

숭고함과 저속함 사이

인간이 결혼 여부를 떠나 성적인 부분에서 남여, 남남, 여여의  일대일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리고 이런 관계가 대다수 문화에서 윤리와 관습을 떠받치는  기둥이 된 이유는, 독점적 애정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애정 행위가 두 사람만의 은밀함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치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만족감이 사랑이라는 언어로 치환되었을 때, 그 속에서 자라난 소유와 안락의 욕망이 다른 인간 본성과 융합되어 하나로 모여진 결과였을 가능성이 높다.  ㄱ ㄴ ㄷ 은 이 룰을 깼다.

 

성행위는 가장 숭고한 언어와, 가장 저속한 언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생물학적으로 교접이라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 Make love라고 말한다. 유전자 전달이 목적이었던 그 숭고한 행위가 그와 동시에 진화의 경로를 타고 이제, 어느 문화권에서나 가장 저속한 욕으로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둘이서 하나 되는 가장 고결한 순간 그 일체감이 이루는 행복을 안정되게 소유하고 싶어 우리는 일대일 배타적 관계를 택했다. 몸과 몸이 만나 서로를 핥아주고 만져주고 한 몸이 되는 순간의 황홀함을 찬미하여 동물적 교접 행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썼지만, 동시에 은밀해졌다. 소유하고 싶은 정신적 욕망을 육체의 탐닉으로 가장 만족스럽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방금 정의 내린 육체의 탐닉에는 필연적으로 소유의 욕망이 내제되어 있을 수 밗에 없고 가장 추하고 역겨운 것과 자연스럽게 통할 수 밗에 없다. 그래서 성행위는 '사랑'이었다가 가장 저속한 '욕'이었다가 그 둘 사이를 언제든 빠르게 순간이동한다.

 

ㄱ, ㄴ, ㄷ은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을까. ㄴ은 더플백을 메고 사라질 사람이라, 자기가 빠지게 될 깊은 우물을 스스로 파는 사람이라 욕망할 수 없으며. 욕망하지 않기에 셋이서 함께 행복하게 덩어리져 지낼 수 있었다. 둘이라면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산하는 충족감이 너무 커서 다시 또 욕망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었다. 그들은 셋이 함께 세 개의 꼭지점에서 삼각형 대신 둥근 원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모든 상처를 잊고 한 덩어리가 되었기에 서로를 욕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묻지 않음으로써  서로에게 다만 풍경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물이 완성되는 순간 이별의 긴박감이 감돌던 순간. 이제 ㄱ, ㄴ, ㄷ 덩어리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풍경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은 각자 다른 위치에 있음에도 동시에 한 몸처럼 그들 스스로가 만든 원형 안에서 살의를 느꼈고 불멸의 사랑을 욕망했다. 그들이 서로를 욕망하는 순간 아니 욕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아름다운 환상들은 터부와 범죄 가득한 어두운 먹색으로 마법처럼 세상을 변화시켰다. 숭고함은 저속함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그렇게 풍경은 빛과 구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쓰리섬은 애초에 서로를 욕망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행위였다. 인간이 인간에게 소망을 품고 위로를 구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티끌만큼이나 작은 감정일지라도 서로에게 풍경이 될 수 없다.


선인장 가시, 우물, 풍경, 풍경이 된 몸짓

강렬한 프롤로그에 이끌려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ㄴ과 ㄷ의 이야기를 ㄱ이라는 화자에게 듣게 되는 일. 이 때 ㄱ, ㄴ, ㄷ은 이상한가. 작가는 묻는다. 그러면서  풍경1 풍경2 처럼 어떤 풍경에 숫자를 붙이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풍경과 사람은 다르다. 풍경은 경계가 없는 연속적인 어떤 것이고 가만히 그 상태에 있지만, 인간의 감정과 외부의 환경에 따라 사람을 변화시킨다. 한 인간에게 어떤 풍경은 시시각각 옮기는 발걸음에 따라, 그 사람의 감정에 따라. 빛의 강도와 바람의 세기와 해와 달의 위치와 계절과 환경에 따라 다채로운 색상을 인간에게 부여하지만, 풍경 자체는 어떤 대상이 아닌, 나, 나를 둘러싼 환경, 그냥 뭉뚱그림 그 자체이다. 인간은 풍경이 될 수 없다. 인간의 고유성은 그가 통과했던 역사와 그 속에서 품은 가시와 몸뚱아리는 욕망과 결합되어 그 모든 사람들에게 풍경이었다가도 순식간에 욕망의 대상으로 변한다. 보이지 않는 아픔을 공유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겠다고 가시로 몸을 감쌌다고 해서 애초 풍경으로 설정한 대상이 영원히 풍경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아니 그런 소망울 가졌다면 그것 자체가 욕망이다.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상처받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으리, 무엇이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실의 슬픔과 결핍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 절망의 끝자락을 가시로 품으며 자신을 감추고 혹독한 겨울을 덩어리지기로 의지했던 서로에게 익명이었던 세 몸짓들처럼 우리 역시 저마다의 사연을 가시에 품고 있는 선인장이다. 부모가 살아계시다고 해서, 형제가 나로 인해 죽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과 광기의 현대사가 내 가족에게 총구를 들이대 쏘아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시 없을까.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가꾸어졌다 해도, 그 고른 온도 속 변화없음의 망망함, 매일 똑같은 일상의 무료와 권태가 작은 가시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뿐. ㄷ의 어미가 딸을 겁탈한 남자와 몸을 섞고 살고, 그 남자의 딸을 죽여 자기 딸의 호적을 만들었듯 비루한 삶은 어디에서든 희망 없이 이어진다. 너무 크고 아파서, 꺼낼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상처들은 깊은 우물 속 비밀스레 연결된 지하의 물길들을 가슴 속에서 흐르게 놔둔 채 소소한 풍경들 속에서 하루를 맞고, 하루를 맺는다. 그리고 다시 상처받고 상처줄 인간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 한 모금 물을 통해 다시 그를 욕망하며 풍경을 사람으로 바꾸는 기적을 경험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게 사랑이다. 익명의 서로가 풍경이 되어 한덩어리되는 것은 살색으로 뒤덮인 네모난 스크린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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