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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평점 :
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으로 알려진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는 폭력적이고 기괴한 장면은 거의 없다. 와이프도 샤론스톤급의 미녀라는 설명이 없고, 그저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매일 화성에 가는 꿈을 꾼다. 화성의 사막같이 황량한 풍경이 너무 현실같고, 꿈을 꾸고 나면 이상한 그림움 같은 걸 느낀다. 그래서 그는 화성에 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화성에 갈 형편이 안된다. 그의 아내는 그가 화성 꿈에 대해 얘기하면, 면박을 주며 비난한다. 왜 그는 화성에 갖다 오면 안되는 거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진 기억의 끝자락을 쫓아 화성 여행을 꿈꾸고 그게 뜻대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자, 가짜 기억을 심기로 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토탈리콜(Rekall)이라는 기억주입 회사다. 화성에 다녀오지 않고도 화성에 다녀온 기억을 심겠다는 거다. 비용은 거의 화성에 다녀오는 것과 맞먹는다. 화성 탐사 기억 주입은 단 몇 시간 만에 끝나지만, 끝나고 나면 그는 2주동안 화성에 다녀왔다는 모든 증명과 기념품들, 사진, 그리고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실제로 다녀온 사람들보다 더 생생한 기억을 갖게 된다.
《토탈리콜》의 원작이 라고 해서 읽었는데, 최초로 이런 스토리를 이렇게 압축적으로 고안해낸 필립 K 딕도 대단하지만, 그걸 바탕으로 토탈리콜 같은 디테일을 창조할 수 있었던 영화 관계자들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리메이크판은 세련된 미래 사회의 상상력을 제공했지만, 구판이 더 좋다. 내가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도 엄청 좋아하지만 프라임 비디오로 갈아탄 후 《일렉트릭 드림》에 흥분했던 게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굉장히 건조하고, 레트로한 느낌인데 폭발적 상상력으로 기괴하고 낯설지만 흥미로운 스토리를 갖는다. 그런데 이게 현란한 SF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감독 및 극본가들의 새로운 해석에 세밀한 디테일이 더해지고 살아있는 인물들의 연기로 전해지니 두 개의 다른 매체 속 이야기를함께 읽고 보는 재미가 크다.
“무엇보다 선생 본인이 화성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나도, 우리 회사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생 마음속에서는 실제 여행과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실하게 보증하죠. 이주일어치의 리콜입니다.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전부 들어가있죠. 이걸 기억하세요.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드립니다. 아시겠어요?”
그런데, 기억주입 중 리콜 회사의 기억 조작 담당자는 퀘일을 시술하던 중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그가 실제로 화성에 다녀왔었고, 그 다녀왔던 기억이 인위적으로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화성에 다녀왔다는 지워진 기억의 심층부에 있는 어떤 채울 수 없는 욕망이 계속 화성을 갈망하게 했던 것이다. 시술 도중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콜 회사 사람들은 자신들마저 위험에 처했음을 알게 되고, 그의 화성 기억에 약간의 구멍을 낸다. 또한 화성에 다녀온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증거품들과 함께 화성여행을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동시에 리콜 회사에서의 기억 주입의 일도 함께 기억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겁고 보람찬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화성에 갔던 적이 없잖아.
하지만 이걸 보면― 갈색 봉투에 담긴 식료품을 한 아름 든 채로, 커스틴이 문가에 모습을 보였다.
“왜 대낮에 집에 와있는 거예요?”
언제나 똑같은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실려있었다. 그는 아내를 보고 물었다.
“내가 화성에 갔었나? 당신은 알겠지.”
이제 아내는 화성에 갔었는지, 안갔었는지 선택하라고 한다. 퀘렌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은 문제다. 하지만 아내에게 이것은 선택의 문제고, 삶과 죽음의 문제다.
“세상에, 아무래도 정말로 갔다 왔던 것 같아. 그리고 동시에 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인지 선택해요.”
“어떻게 선택을 해? 양쪽 기억이 전부 내 머릿속에 새겨져있는데,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짠데도 어느 게 진짜인지 알 방법이 없단 말이야. ...
알고 보니, 퀘일은 인터플랜의 스파이로, 화성에서 수십명의 무장한 보안요원들을 처리하고 최고 지도자를 암살한 자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자를 살려두면 인터플랜 조직 자체에 치명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서 화성에서의 기억을 지우고 소시민적인 삶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화성의 기억을 갖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인터플랜에게는 큰 위협이다.
이 짧은 소설에, 당대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고 여겨지는 몇가지 신기술들이 쿨하게 삽입되어 있다. 그의 두뇌에 통신 기능을 비롯한 여러 기능을 제공하는 어떤 모듈이 심겨져 있어서, 그의 생각이 인터플랜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된다. 그래서 거짓말은 불가능하고(거짓을 생각하면 될까), 생각으로만 통신한다. 이러한 생각 통신 기술은 최근 Clarkesworld 매거진에서 읽은 몇몇 SF 소설과 최근 SF 소설에서는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어서, 신체에 이식했건, 웨어러블을 착용했건 기기 없이 입 속으로 원거리의 대상과 대화한다.
아내는 화성에 다녀왔다는 그를 떠나고, 바로 그를 해치우러 나타난 요원들. 그 요원들을 보자, 더욱 빠르게 지워졌던 진짜 기억이 되살아나며 자신이 아주 유능한 킬러로서 무장한 군인들을 재빠르게 처리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행동한다. 본 아이덴터티에서 기억을 잃은 본이 본능적으로 물리적 공격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요원을 처리하고 거리로 나온 그는 점점 더 확실하게 자신의 과거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머리속의 목소리, 인터플랜의 상급자와 대화를 한다. 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유일한 전략은 다시 모든 기억을 지우고 더욱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는 것. 그것에 동의하고 방법을 살펴보지만, 이처럼 한 번 실패한 경험 때문에 어떤 기억을 주입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정신분석가에게 프로파일링을 의뢰해서 퀘일에게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환상을 찾아내어 그것을 심어주기로 한다.
그 환상이 지구를 구할 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또 다른 지워진 기억이 가진 지구 차원의 비밀은 무엇일까? 킬러로서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선택했던 현재가 지워진 과거 기억과 겹치는 기억을 심고, 그 중첩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기억을 심어야 하는 처지. 그가 선택해야 할 환상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책에 있는 단편 하나 하나가 후루룩 읽어 치우기에는 아까울만큼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