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초이스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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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 더 판타지 


오버 더 판타지


전작인 오버 더 호라이즌에 실린 작품들의 연작을 이루며, 그것들과 주제의식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현실의 어느 중세 시대와 비슷한 배경이지만, 판타지적 존재들과 함께 어울어져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건들이 동력이 되어 서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결국 딜레마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고 실험을 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곳은 바로 현실의 삶이다. 작가가 정교하게 창조한 세계가 현실적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마법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가득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또다른 판타지가 존재하며, 오버 더 시리즈의 전작들에서처럼 판타지가 그어놓은 판타지 속의 판타지와 분리되어 있고, 경계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위어울프들이 늑대로 변하고, 뱀파이어 법관이 낮에는 둥둥 떠다니는 관을 타고 다니고, 나무가 책장 모양으로 자라는 판타지적 세계지만, 그 곳에서 바이올린이 죽고, 마법사가 대를 이으며 마법의 세기가 커지고, 개양이가 태어나는 일들은 모두 비현실적으로 비춰지며 더더욱 부활이란 가당치도 않은 믿음으로 치부되는 곳이다. 그러나 연작을 통해, 오버더 시리즈의 서사와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그 세계관 내의 경계를 지난 시리즈에서는 희생을 치르며 지키는 것으로 보였다. 음악은 죽지 않았고, 마법은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계승되지 않으며, 개양이들은 그냥 자기 길을 간다. 그렇다면 부활은? 아이러닉하게도 지켜져야 할 것은 바로 죽음. 부활없는 죽음. 훼손되지 않는 영원한 죽음이다.



삶과 죽음, 부활 


제국의 한 개척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룬 소설로, 폐광의 무너진 환기구에 갇혀 열하루 만에 시체로 발굴된 6세 서니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죽은 자가 있다면, 남겨진 자가 있고, 그 죽음을 소유한 자들은 죽은 자가 아닌 남겨진 자들이다. 아이의 죽음은 작은 개척도시를 통채로 흔들고, 아이의 부모는 이성을 잃어 독미나리를 먹은 후 부활을 믿기 시작한다. 같은 날 마차 사고로 죽음에서 구조된 덴워드 이카드가 소유했던 장검이 부활의 도구로 부각되면서, 아이의 죽음은 마을을 큰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리고, 오버 더 시리즈에서 막지 못한 더 많은 이의 죽음을 소환하기에까지 이른다. 


전작에서 가장 신뢰하는 친구 케이토의 약혼녀 지데를 죽여야 했던 티르는 비록 그 행위가 보안관보로서 도시를 지키기 위한 직업적이고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잠재 의식은 그 살인의 밤을 지우고 싶다.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누구도 믿지 않았던 부활은 뭔가를 대가로  지불하고 교환 가능한 선택이 된다. 인간이 부활을 얻는 대가로 지불해야 할 것은 식물을 태우지 않는 것. 불 없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부활이 보장된다면 추운 겨울은 죽었다가 여름에 다시 태어나면 될까. 부활에 대한  찬반 논쟁은 때로 코믹하고 때로는 깊은 철학적 명제를 제시하며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크게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주민과 숲을 파괴함으로써 부활을 막고자 하는 덴워드의 논리와 죽은 자를 부활시키고 싶은 몇몇 주민의 뜻으로 양분되지만, 도시는 불능 상태가 되고, 죽은 지데의 부활과, 그녀가 죽음으로 인해 빼앗겼던 소중한 삶을 목격한 티르는 딜레마에 빠진다. 



원본과 사본, 정체성 , 그리고 나하다.


1인칭 화자는 자신이 티르 스트라이크라며 그 이름을 밝히고, '삼십여년 전부터 티르 스트라이크하고 있다'는 투덜거림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 가 동사가 되는데, 타동사도 아닌 자동사다. 자신을 하다니, 기묘하고 신선한 발상이다. 하긴, 스트라이크라는 이름은 가지고 놀기 좋은 이름이긴 하다.  그런데 지금은 티르 스트라이크하기 힘든 시기란다. '나'라는 유일무이한 정체만이 할 수 있는 사유와 기억과 행동과 표정과 말투 그 모든 행위(행위라는 말 밖에는 그 모든 내가 하는 걸 설명할 길이 없는 게 답답하다)인 내가 내가 되게 만드는 것들을 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거다. 이야기의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서 '나를 하는 것'이 오버 더 시리즈에서 온갖 (마법적) 종족들이 활개치는 개척도시에서 보안관보로서 ‘나’의 직업적 행위와 고초 뿐 아니라, ‘나’의 전체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비누풀인지 티르 스트라이크인지, 둘 다인지 독자로서는 완전히 이해불가능한 상태를 경험할 때, 화자인 티르 스트라이크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뒤집어 쓴 정교한 복제품이며 그 본질은 비누풀이라는 걸 알고, 그걸 독자에게 어떻게든 설명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이 이상한 타자로서의 나와의 동거와 향후 시점의 분리는 점차 식물 전체와 죽은 이들의 복제로 확대된다.  지데를 죽인 티르는 지데의 사본을 원본과 구분하지 못했다. 지데를 사랑한 케이토는 눈앞에서 생생하게 티르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지데라고 믿고 있는 여성이 사실은 지데가 아님을 증명해 내며 눈물을 흘린다. 위어울프가 팔찌를 벗고도 변신하지 못한다면 정교하지 못한 복제품이다. 자신이 지데라는 믿음까지 완벽하게 복제한 복제품은 변신이라는 본질적 복제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버그일까. 혹은 반복되는 복제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중유한 본질을 잃게 됨을 뜻하는 걸까.  



부활은 과거와 미래, 파괴와 회복에 대한 주제로 연결된다.  과거에 죽은 자들은 살아나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케이토는 사본을 사랑하면 왜 안될까. 똑같은 눈동자를 하고 똑같은 웃음을 짓고, 똑같이 말하고 있는데 탄로난 일부의 정체성의 결핍을 무시하면 케이토의 미래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고, 친구의 약혼녀를 죽였다는 티르의 과거는 지워지는데. 결국, 티르에게 내가 내가 아니라 비누풀인데, 내 정체성과 내 기억을 모두 지니고 있다면 무엇이 나를 비누풀이게 하는가하는 문제가 이 부활의 복제 문제와 다르지 않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무언가가 가슴에 찡하고 박혀오는 듯했던 장면은 다름아닌 10명의, 자신이 모두 서니라고 믿고 있던 서니 복제품 앞에서 누가 더 서니인가의 선택 앞에 직면해야 했던 부모들의 당황한 모습이다. 그들은 이제 서니의 완전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세계


작은 개척 마을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양한 종들의 개성이 인상적이었다. 오크와 유니콘 뱀파이어 엘프 웨어울프 등 알려진 종들도 있지만 야채 뱀파이어와 카닛 아니제이와 같이 생소한 족속들도 있다. 이들 다양한 족속들의 생물학적 다채로움과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작은 마을에서 어느 족속도 생물학적 혹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계급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까마득한 선사 시대에 흩어져 이주하면서 만나는 모든 호모 종의 씨를 말리고 멸종에 이르게 하고 피부색과 얼굴형의 작은 차이로 노예를 구분했던 현실적 인간의 행태와 차이를 보인다. 티르 스트라이크는 인간이지만 어떤 우리 인간이 현실 속에서 누리는 인간으로서의 특권도 없으며 오크인 보안관의 부하직원일 뿐이고 발이 닳도록 마을의 크고 작은 사건을 따라다니며 해결사 역할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개체일 뿐이다. 


조금만 달라도 괴물로 치부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이렇게 다양한 족속들이 인간적인 지성과 시스템을 갖추고 살아간다는 설정은 신화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신적 존재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만담처럼 푸근하고 따뜻하다. 작가 특유의 개성있고 센스있는 혼자말과 드립력이 특히 가독성과 몰입을 높인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설사 인간이 더 존엄하다는 인간적 세계관을 대입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서사가 전체 식물계와 대립하는 동물(?)계의 대립구도로 확대되면서 누가 인간이건 누가 ‘괴물’이건 그런 인간 더 존엄의 문제는 지엽적인 게 되어버린다. 


삶이 존엄한 건 유일하게 공평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 만큼이나 공평하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낮잠 만큼이나 가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재고 저리 재고 곰곰 생각하여 역시 죽음은 한 번에 영원에 도달하는 게 덜 골치아프다고 결론내리겠지만 만일 그 선택이, 청천벽력 같은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라면 어떨까.  전 인류를 대상으로한 투표로 부활의 가부가 결정된다면, 나는 어떤 편에 설 것이고 또 전 인류가 하나의 목소리로 내린 결론은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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