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2015년 김보영의 소설을 번역 출간한 적 있는 SF 잡지 클락스월드에 2019년은 많은 한국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9개의 단편을 번역하고 그 첫번째 소설을 출간했던 4월호 이슈 155에서 편집자 닐 클락스는 길거리 혹은 세상 반대편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중국의 SF가 세상에 빛을 보고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황기를 맞이했던 건 우리나라에서는 <종이 동물원>과 <제국의 위엄>이 출간된 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가 처음으로 자신이 번역한 중국 단편들을 보내 그것을 2011년에 싣기 시작하면서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켄리우를 몇년 동안 꾸준하게 출간한 중국 SF 소설이 몇 년 이상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출판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있는 잉여적 상황에서, 단지 영어권에 전달되지 못해서 묻히는 훌륭한 작품이 많다는 것을 잊기 쉽다고, 그래서 변방의 언어로 적힌 소설들에 관심을 갖고 출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클락스월드 매가진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2019년 총 9개의 작품을 게제하기로 하였고, 이미 배명훈, 김보영, 듀나, 복거일, 정소연 등의 작품이 한회 혹은 두회에 걸쳐 게제되어 있다. 가장 최근 호가 8월호인데 지난 달에 이어 2회째로 듀나의 <The Second Nanny>가 게재되어 있다. 




가끔 가장 최신의 따끈따끈한 과학소설이 땡길 때는 클락스월드에 들어가보곤 하는데 재밌게 읽은 봇 소설이 하나 있어서 소개한다. 웰스의 살인봇 일기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읽게 된 건데 살인봇 일기와는 또다른 재미가 있었다. 2017년도에 나왔고 아마도 휴고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거나 혹은 단편상까지 받았거나 그런 작품이다. 과월호까지 모두 온라인에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작품은 읽어주기까지 한다.  길지 않고 온라인이라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은 우리의 구세주 파파고님이나 구글번역가님께 부탁해서 읽으면 된다. 

SF 중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 라고 불리는 범주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넓고 깜깜한 우주에서 우주선에 탄 채로 떠다니면서 할 게 쌈질 밖에 할 게 더 있나.  게다가 중세시대의 이야기를 우주로 옮겨운 것일 뿐인 듯한 비슷비슷한 설정의 클리쉐가 많은 분야가 또 이 분야이기도 하다. 로봇이 주인공이 되면 좀 달라진다. 예를 들어 murder bot diaries의 경우 먼 미래, 먼 공간 속 행성이 배경이지만, 장르적 크리쉐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최소한으로 줄였고, 고집불통 착한 로봇의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1인칭 시점으로 끌어가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작년인가 재작년 휴고상 목록에서 제목에 이끌려서 찾아 읽었다. 


우주선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기에, 자잘한 액션 묘사에 쓰인 어휘가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궁금증은 풀릴 정도였다. 예전의 로봇 주연 소설들이 대개 반란을 일으켜 인간과 전쟁을 주로 한다면 요즘 소설 속 로봇들의 주제는 의식을 가진 봇의 다양한 캐릭터의 특성이 잔재미를 준다라고나 할까. 어느날 잠에서 깨어난 다용도 로봇은 자기가 비활성화된 동안 엄청난 시간이 흘렀으며, 그 엄청난 시간 속에서 봇들의 세계 역시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알게 된다. 봇들은 전문화되었고, 봇넷이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그 봇넷 커뮤니들을 통해 모두들 알고 있던 거였다. 수세대 만에 깨어난 봇9은 보다 근사하고 멋진 일을 수행하고 싶었지만, 우주선으로부터 해충을 퇴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주선 역시 봇의 일종으로 휘하에 모든 종류의 봇들을 거느리고 조정하고 있다. 


이 전문화된 봇들은 크기가 매우 작고, 종류도 청소봇, 함체봇, 식크봇 등 다양한데, 알고 보면 우주선을 움직이고 관리하는 자동화된 부품의 업그레이드된 버전 정도로 보인다. 봇들의 명칭은 숫자로 된 시리얼로 되어 있다보니, 4030이니 123456이니 하는 봇들이 볼 때 봇9이란 까마득한 전설의 봇이다.


숲속의 잠자는 공주가 막 깨어나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을 때,  자신은 그 개념조차도 알 길이 없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그렇게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숲속의 공주와 봇9의 다른 점은 그는 인간이고 그것은 기계라는 점이다. 이 구형 멀티봇이 처음에 봇넷을 알게 되었을 때 봇넷의 존재 필요성을 의심한다. 태생 자체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봇들은 애초에 시스템으로부터 받는 탑다운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존재 목적이 아니었던가. 자기들끼리의 상호 대화가 왜 필요한가. 그것은 존재 목적에 어긋나지 않은가. 하지만 봇들이 쉬는 시간에 봇넷의 액세스를 허용한 것은 그들의 최고 책임자인 우주선(역시 봇임) 자체다. 정보의 공유는 봇들의 효율성과 능률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는 걸 알아챌 만큼 우주선은 똑똑하다.




봇9은 Incidental이라 불리는 해충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잠들어 있던 수세대간의 문화적 기술적 갭을 업그레이드 하지만, 그동안 인간들은 인류를 파멸하기 위해 지구를 향해 가고 있는 외계인들의 우주선과 사투를 벌인다. 지구와 충돌을 막기 위해 우주선체 자체와 충돌하여 장렬히 희생하자는 인간적 인간들과, 똑똑한 머리와 엄청난 개체수로 인간과, 지구, 그리고 자신들까지 모두를 구출하고자 하는 봇들이 만들어내는 유쾌하고 귀여운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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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클래식 22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장 드 보쉐르 그림,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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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전쯤 루키우스 아폴레이우스가 쓴 산문 방식의 소설로 세계 최초의 산문 방식의 장편 소설이라고 한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였다고 하고 공간적 배경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연안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로마로 간다. 장편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 여러 다른 소설들이 비중이 별로 없는 작중 인물들을 통해 전달되는 천일야화와 비슷한 형식이다. 주 스토리의 드라마틱함과 주인공의 고생담의 비중이 전체 이야기들 중 가장 크므로 장편 소설의 범주라규 해도 큰 무리는 없다. 돈키호테를 비롯한 여러 근대 소설들이 이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고나 차용했다고 한다.

호기심 강한 루키우스가 마법 덕후여서 덕질하다가 당나귀로 변해 온갖 구박에 맞아가며 이리 저리 팔려다니면서 겪는 잔혹사에 가까운 모험담이다. 하인들을 거느리고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고생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당나귀로 변한 루키우스는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하는 일상적 노동이 몹시도 서툴고 괴로와 게으르고 못되먹은 당나귀라는 오명을 쓰며 팔려가는 곳마다 죽을 고비를 맞는다.

로마 시대이긴 하나 그리스 신화적인 세계관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주이야기를 포함한 모든 이야기들의 주제는 파괴적이고 신화적 방탕함에 기초하고 있다. 애욕이 엄치는 여인들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정부를 집안으로 들이고 정숙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황금에 눈이 멀어 쉽게 자신을 차지하려는 방탕한 이웃을 집에 들인다. 양아들을 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리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이 주인공 당나귀가 유명해지자 당나귀에 정욕을 느껴 큰 값을 지불하고 육욕의 하룻밤을 보내는 귀족 부인도 있다.

아름답고 부자인 이 부인과 당나귀가 보내는 정욕의 하룻밤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주인은 이 신기한 행위를 만인에게 공개하면 큰 돈을 벌게 될거라 생각하고 사자밥이 되기로 되어 있는 사형수와 원형극장의 무대에 펼쳐진 침대에서 정사장면을 연출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꽉 들어찬 인파 한 가운데서 사람과 당나귀가 정사한 장면이라.. 이건 현대식 포르노에서 조차 꿈도 못꿀 금기 아닌가. 어찌어찌 위기는 모면하지만 하나의 위기가 끝나면 늘 다른 더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큰 줄기 서사는 변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가 그를 구해주기 전까지는.

주인공이 당나귀로 변한 건 여행인지 모험인지로 타지에 와서 어느 집에 묶고 있는데 이 집 하녀와 엮여 매일 정사를 벌이며 쑥덕거리다가 집 주인 마님이 부엉이로 변하는 마법을 보고 자신도 한 번 변해보게 그 마법 연고를 빌려달라고 부탁부탁해서 자초한 일이다. 그 집 하녀가 실수로 부엉이가 아닌 당나귀로 변하는 엉뚱한 연고를 가져왔던 것이다. 다시 사람으로 변하려면 장미꽃을 따먹어야 하는데 밤은 늦고 어디 장미꽃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과 그 집 당나귀가 있는 마굿간에서 잠을 청하면서 고난의 길은 시작된다. 이 말과 당나귀는 그들 눈에 주인이 아닌 신참으로 보이는 당나귀가 자기 구유에서 먹을 걸 먹자 마구 못되게 굴었던 것. 마침 그 집에 든 도둑들이 이 당나귀와 말들에게 이 집에서 훔친 값비싼 물건들을 잔뜩 싣고 가게 되었으니 무거워 죽을 지경이지만 맞아가며 짐을 싣고 가는 당나귀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결말 부분에 가서 완전히 톤이 달라지는데 고생고생하다가 도망쳐서는 신들을 부르며 온 마음을 바쳐 기도를 드리니 아름다운 여신이 나타나 그를 인간으로 바꾸는 신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미꽃 화관을 먹고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이 일을 전후로 해학과 위트로 넘쳐나던 글의 스타일이 갑자기 신을 찬양하는 신전 모드로 바뀌는데 저자가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살면서 알게 된 신들에 대한 지식이 망라된 듯하다. 그 모든 신들은 각기 다른 지방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숭배되지만 결국은 하나로 모아지는 듯하며 이집트 신화의 요소와 기독교적 세계관이 배합된 느낌이다. 천일야화에서 느낄 수 있는 동양적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도 1800년 전에 쓰인 소설 형식이라는 점은 당대 사회를 알 수 있는 신뢰있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성서만 해도 이야기가 너무 압축되어 있어 그토록 다이나믹한 그토리임에도 문학적 접근은 어려운데, 이 글은 애초부터 이야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보니 자연스레 일상적 모습이 엿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의 영향인지 남녀노소 할것 없이 자유분방을 떠나 결혼 후에도 방탕을 즐긴 듯이 보이며 여성의 성적 욕망을 남성들보다 더 크게 부각시킨 것이 인상적이다. 노예와 하인이라는 말이 섞여서 쓰였는데 어떤 구분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노예들은 적어도 스파르타쿠스(드라마)나 독립전쟁 전 미국남부의 노예들처럼 비참하거나 핍박받지 않은 듯하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상업의 발달이 천일야화의 동양적 분위기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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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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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명의 인물에 열 다섯번의 탄생과 열다섯번의 죽음이 있다.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고 죽어도 죽어도 계속해서 같은 운명을 가지고 되풀이해서 반복되는 삶과 죽음이 세계와 우주의 진리라도 해도, 산 육체에 담고 있는 기억이 죽은 상태에서 소실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다음 생에 가지고 태어나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축복이라면 기억이 축복이고 저주라면 변치 않고 반복되는 운명일 것이다.


해리 오거스트의 운명은 강간으로 영주의 하녀에게서 잉태되어 화장실에서 태어나면서 동시에 어머니는 죽고 그 어머니를 잉태시킨 부모집의 충실한 하인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첫번째 삶에서는 그의 생부를 알지 못하지만 두반째 세번째 삶을 거치면서 자신을 냉대하고 외면하는 주인집 식구들이 자신의 생모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양부모에게 자신을 양육을 맡긴 생부와 그 식구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타임 리프와 타임 점프의 다른점이 전자는 주인공의 고유 타임라인 안에서 이동하는 것이고 후자는 다중우주와 관계되는 개념이라고 쿠오라에 누가 질문하고 답변한 걸 봤는데, 이런 장르적 구분의 표준이 확립되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해리 오거스트가 겪고 있는 세계는 이런 개념들과 익숙한듯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데가 있다. 타임루프. 같은 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것. 시간에 갇힌 영원한 생.


한 생에서의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른다. 뒤로 가는 시간이란 리셋할때 뿐이므로 죽어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요기조기 마음에 안드는 순간에 가서 마음에 안드는 행동만 수선하는 게 가능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 젖을 빨고 똥오줌을 싸고 걸음마를 배우는 과정을 거쳐 전 생애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억겹의 시간동안 똑같은 환경 똑같은 타임라인 내에서 새로 시작하면서 쌓이는 지식은 변함없이 흐르는 세계를 변화시킬 만큼 누적힌다.


게다가 그는 자신과 같은 종족 중에서도 드문 기억술사다. 머든 걸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이 종적들은 생이 반복되면서 돈을 벌기 쉽고 전쟁의 포화와 집단 학살의 현장을 피해 안전하게 아늑하게 살기 쉽다. 지난 생의 기억 속에서 어느 경주마에게 걸 지 알려주니까. 세계를 예측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그 끔찍함에세 세계를 구하려 노력해 보아도 똑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양민이 학살되는 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개인의 영달이 목표이며 흘러가는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지난 생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성인 이후의 풍요로운 선택에 따르는 대가는 학대와 상처로 얼룩진 불우한 유아 시절의 낭비되는 몇 년의 시간이다. 기억은 생애 초기 3~4년에 걸쳐 서서히 회복되며 미숙한 육체 속에 갇힌 수백년이라는 나이와 경험은 지루함으로 점철된다.


길어야 한 세기가 못되는 시간 속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여러 생애를 다루지만 그는 세기와 세기 사이에 대화하는 법을 터득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기막히게 신선한 대목이다. 어린 시절 구출처럼 이것은 협력으로만 가능하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크로노스 클럽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해리는 세번째 생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기의 비밀을 말했다가 정신병원에 갇히는 혹독한 댓가를 치르다가 한 남자에게 구출되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한술 더 떠 자신을 통해 세계를 바꾸려고 그를 고문한다. 먼저 본 세상을 빠짐없이 털어 놓으라는 고문과 강압.  탈출과 실패를 거듭하던 해리는 기지를 발휘해 신문 광고를 통해 크로노스 클럽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구출을 요청한다.


구출이란 죽음이다. 지루하게 지고만 있는 컴퓨터 체스 게임을 재시작하듯 에잇 이번 생은 엉망이야 다시! 이렇게 재시작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상상할 수록 매력적이지만 리셋이후 유아라는 육체적 감옥에 갇히는 생애 초기 몇년은 가장 위험한 시기다. 또한 탄생위치와 시간이 알려지는 건, 태아 살인을 통해 영원히 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크로노스 클럽의 동료들은 불우한 어린 환경에서 서로를 구출한다. 그들의 나이가 다르기에 아이가 노출된 취약한 양육 환경에서 장학 재단 같는 걸 만들어 사회적 성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교육 등을 지원한다. 유아 시절 구출 작전 말고도 크로노스 클럽에서 하는 흥미로운 일이 바로 세대간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들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속삭이는 방법은 꼬마가 죽을 때가 된 늙은이에게 가서 말해주는 방법이다. 


현재 해리가 태어난 해는 1900년대 초로 노환으로 죽는 보통의 생애에는 1980년대까지 더 길 때는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까지 보고 죽는다. 죽기 직전 그는 꼬마 아이의 방문을 받는다. 1980년대에 꼬마인 아이는 전생에서 평생을 살아 늙어 죽기 직전까지 21세기를 경험했고 따라서 21세기의 기억을 지녔으므로 늙은 해리와 두 세대간의 지식 교환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꼬마가 늙어 죽기 직전에 21세기말에 태어난 더 후세의 꼬마가 22세기에서 전해줄 말을 한다면 두 세대간의 통신이 가능한 거다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해리에게 전해지는 말이 있다. 30세기에서 전하는 목소리.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다.당연한 거지만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


반대로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다. 자신의 종족들이 눈치챌 수 있는 암호로 돌이나 무덤이나 그 무억이 되었건 수세기 혹은 수십세기의 후대가 찾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새겨 놓는다.


수많은 삶 속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외면하는 생부와 생조모들을 겪지만 각각의 삶들은 모두 다르다. 생을 거듭할 수록 지식과 경험은 더욱 넓어가고 거듭되는 삶의 비밀 우주에 대한 진실을 알 길이 없는데 그걸 풀어보겠다고 그러니까 평행우주 사이를 이동하는 퀀텀 미러의 개발을 착수하는 빈센트를 만나면서 그의 나머지 생들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지독히도 사랑했고 지독하게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SF적 장르적 테두리에 머물지 않고 깊고 멀고 슬프다.


질문은 여전히 많고 대답은 독자의 몫이다. 지난 생에서도 그 지난 생에서도 사람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 그는 매 생애마다 나타나 그 살인자를 죽이지만 그 때마다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살인자는 절규하며 스러진다. 나쁜 짓울 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 죽다니. 열세대 후손들이 속삭임을 통해 세계가 끔찍해지고 있다는 말에 그들이 세상에 관여하기 때문이라고 확인하고 빈센트의 계획을 무효화시키는 데 과연 그 이유가 빈센트가 수행하고 있는 과학 기술의 지나치게 빠른 발전일까 하는 것들. 한국말 읽는 것처럼 번역도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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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 최인훈 전집 8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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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막연히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죽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든 죽음을 생각하는 건 때로 감미롭다. 만족스럽지 않은 삶의 상태를 벗어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라도 죽음이라는 추상적 상태는 마지막 보루로서의 출구를 마치 희망처럼 제시한다. 어둠 속에서 아주 몹시도 지루하고 끔찍하고 진부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보다가 어느 임계점을 만날 때가 있다. 됐어. 여기까지야. 이제 그만. 이만하면 충분히 된거야. 중간에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그렇게 캄캄하게만 느껴지는 삶 밖으로 걸어나오는 데 걸림돌이 되는 건 다름 아닌 사후에 남겨질 육신이다. 삶이 떠나고 죽음이 남은 자리에 죽은 몸도 함께 남는다. 누워 꼼짝 못하는 몸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삶이 끝난 다음에도 스스로의 의지대로 어찌할 수 없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서, 죽음보다 끔찍한 죽는 순간의 공포를 견디고, 죽는 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고작 그 몸에 대해 조작 가능한 것이라고는 누울 자리를 찾는 일 뿐이다.

여자가 일하는 접대업소가 인테리어 공사로 쉬는 기간 여자는 죽어 누울 자리를 찾아 온천 도시로 가서 여관에 숙소를 잡는다. 숲속의 아늑한 구석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곳 죽기에 안성맞춤이다. 만일 셋방에서 죽는다면 세든 사람들 모두에게 구경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녀는 이 곳에서 홀로 죽을 작정이었던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두 남녀가 잔듸밭에 누워 밀회를 즐기고 있다. 죽기로 작정한 장소에서는 죽음의 그림자 대신 남녀의 사랑과 웃음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왜 죽기로 작정한 것일까. 당대 여성에게 자살 동기는 남자의 배신이라는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그 상투성마저도 오랜 시대에 걸쳐 절대적으로 취약했던 여성의 위치를 생생히 드러낸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여러 영역에서 금기시되고 제한된 상황에서 경제력을 갖기 위해 평생 의존할 남자를 찾는 데 실패한 여성이 할 만한 일이 접대와 관련된 일만큼 흔치 않았으나 접대는 나이와 함께 소멸되어 가는 성적 매력을 뜯어먹고 사는 직업이었으므로 더욱 더 남자의 순정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죽으려고 맡아놓은 자리에 남녀가 있으니 여긴 내가 먼저찜했으니 좀 비켜주실래요? 할 수도 없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와도 또 그 다음 날 다시 와도 그들은 아침 일찍도 와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죽을 자리에 누워 있는 남녀의 웃음소리는 여자가 죽기로 작정한 이유를 독자들에게 설명할 계기가 된다. 시대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 한 접대부는 자신을 향한 남자의 순정을 딱하게 여겼지만 그 순정에 중독되어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을까.

남자의 성적 욕구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순정으로 착각하는 오류로 인해 상처받는 게 운명이라면 이번 생은 이 형편없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인생극장에 반전을 기대하며 낭비하지 말고 비상구라고 쓰인 희미한 표지판을 따라 성큼성큼 극장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다음 생에(혹시 있다면) 더 득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이번 생에 쌓이는 업보는 이번 생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적 가치와 규범으로 판단될 것이기에 더 살면 살수록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악이 선보다 클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남녀의 웃음소리는 결국 자신의 웃음소리다. 환상과 꿈과 현실의 모호한 관계가 밝혀지기까지 여자의 심리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죽음에 이르는 삶의 권태라면 조금 더 일찍이 그러니까 젊고 천재적인 작가들이 폐결핵으로 푹푹 쓰러져 죽어 나가던 시대의 상투성이지 가속되는 산업화의 속도에 맞춰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대한민국 경제를 아래로부터 떠받들던 시대의 정서가 아니었다.

산업화의 그늘 속에 소외되고 외면된 그 죽음마저도 구경거리와 뒷담화 소재에 쓰일 하찮은 사람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의 어둠 속에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하고 더더욱 허용되지 않은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나누었으며 그 경계는 얼마나 깊고 넓고 큰 것이었으며 또 이쪽과 저쪽은 얼마나 우연히 결정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웃음소리와 그 속에 배어 있던 희망이 사랑이 이미 두 남녀의 죽음으로 밝혀지면서 웃음과 희망과 사랑이 죽은 것이므로 이제 다시 돌아가서 그것 없는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3일동안 여성의 환각과 잠 속의 꿈과 현실 사이의 몽롱함에서 깨어나서 그녀가 향할 곳이 그 시대에, 어느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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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환자 - 최인호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6
최인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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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작품은 70~80년대에 영화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걷지 말고 뛰어라>, <깊고 푸른 밤> 등 당대 흥행에 성공한 많은 영화들이 최인호 작가의 원작 소설을 각색하거나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견습환자>의 주인공은 가벼운 증상으로 병원에 갔으나 폐결핵에서 기인한 늑막염이라는 병명을 진단 받고 입원 상태에 이른다. 거기서 의료진과 병원 직원들의 감정을 관찰하며 스스로 진단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웃게 함으로써 치료하겠다는 의지를 펼친다. 주인공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의료진들을 웃겨 보려고 노력하지만,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의료진들의 조직화된 '웃음부재'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당대의 한 병폐인 듯하다. 당대의 사회가 의사들에게 메마르고 삭막한 이성적 의료 행위를 요구했다면 최근 트랜드는 반대다. 잘 웃고, 친절하게 병과 증상과 치료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고, 나을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서비스 역시 의료 의 질을 결정한다. 객관적인 의료지식으로 무장한 채 냉철해야 하는 치료 행위와 아픈 몸을 믿고 맡기고 설명을 요구하는 의료 서비스라는 상반된 입장은 사람을 대하는 업무에서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억제해야 하는 오늘날 서비스직의 감정 노동의 현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2와 1/2>는 다가구 주택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한 주택 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다룬다. 죽은 사람은 혼자서 셋방에 살면서 같은 주택의 남자들을 잠자리로 끌어들이곤 했던 한 젊은 여성이다. 주인공 이서영은 장티푸스 예방 주사 후유증으로 힘겨운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들어가다가 셋방의 여자가 문을 빼꼼히 열고 담배를 청하면서 밤 1시에 자기 방으로 자러 오라는 유혹을 듣고 잠이 드는데,  한밤중에 경찰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그녀가 살해되었으며 한 집에 세들어 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찰서로 조사를 받으러  끌려간다. 장티푸스 백신으로 몹시 힘든 그는 곧이어, 경찰이 피해자가 자신과 같은 임질을 앓고 있으며 자신이 몽유병으로 평소 피해자의 방 근처를 서성거리곤 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지막까지 세 사람의 용의자가 남는데, 이들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몸을 피해 있자고 작정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나, 지치고 아픈 이서영은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이 죽였다고 말하고자 하는 충동을 겪는다.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그 어떤 말로도 마지막 문단보다 더 잘 설명할 길이 없다.


그 갈색의 계집애는 지금 우리 시대의 나이 서른 이상 먹은 자식들이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망가뜨리고, 학대하고, 울리고, 때리고, 죽일 수 있는 여인이라고 고백하는 편이 더 홀가분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들이 잘 해결해 주리라 믿고 싶었다 57


혼자서 셋방을 살며 밤에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이라면 그 어떤 남성이든 그 어떤 폭력도 용인되는 사회. 이런 사회를 생각없이 통과해온 세대라면, 국회위원이 되어서도 가족을, 그러니까 아내를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말하는 것에 아무 문제도 못느낀다. 

사실 유명한 영화 제목이었던 <깊고 푸른 밤>을 먼저 읽었고, 다시 앞쪽으로 되돌아가 <견습환자>부터 읽어나가면서, <술꾼>을 읽었을 때, 여기서 멈추고 이 단편에 집중해서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 그래서 이 리뷰의 제목은 [단편]술꾼 이렇게 될 뻔했는데, 조금씩 언급하면서 길어지고 있다. 어쨌거나 결국 술꾼에 대한 내 감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거 같다. <술꾼>에서, 어린 아이가 동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집에 엄마가 피를 토하며 죽을 것 같다고, 아버지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고, 아버지는 엄마가 죽을 거 같으면 술집으로 저를 찾으로 오라 했다고, 여기 우리 아버지 있나요? 이렇게 물으며 다닌다.

작은 대포집과 술취한 어른들, 아버지를 찾아 고개를 빼꼼 들이민 아이. 급속한 근대화 속 도시 빈민이 처한 자리의 익숙한 듯한 풍경이다. 물론 지금 아이가 술사는 것도 금지되어 있지만 지금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할 일이 생기고 있으니 바로 아이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다. 아이는 처음에는 사양하는 듯하지만, 눈치도 못채게 잽싸고 빠르게 잔을 비우고, 김치를 집어먹는다.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다른 술집을 계속 다니고, 그렇게 술에 취해간다.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면, 아이의 행동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고, 그 이유는 알콜 중독, 그것의 더 앞선 이유는 상실에 있다는 섬뜩한 반전에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가지 사건을 묵도하는데, 하나는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 한 사내가 소년을 죽이려 시도하다가, 스스로를 죽이는 사건이고, 또 하나는 길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그대로 두었다가는 얼어죽을 것이 뻔한 사내의 지갑을 훔쳐 술값으로 쓰는 일이다. 

한쪽 팔을 잃은 사내는 아이에게서 과거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 틀림없다. 그는 아이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죽이고 싶었다. 한밤에 죽어 쓰러져 가는 사내는 아이의 미래 모습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소문난 술주정꾼이 되어 버린 아이에게 기다리는 운명은 그 디테일만 다를 뿐 거리에서 죽어가는 술중독자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제 기자 간담회에서 질낮은 도돌이표 질문을 피해 채널을 돌리다 마주친 조국의 답변이 귓가를 맴돈다. '맞습니다. 저는 금수저입니다. 금수저로 태어나고 강남에 살아도 사회와 제도가 공평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토록 당연한 말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낡은 제도권의 단단한 기반에 의해 지탱하고 강화되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는 동안, 가난과 절망 역시 되물림된다. 술취한 아비를 찾아다니며 술에 취하는 아이의 미래는 술취해 거리에 죽는 아버지의 미래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나.

하지만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피를 토한 어머니와 술집 어딘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는 이미 박제된 과거였으니, 흡족해진 만큼의 술을 얻어마신 아이가 향하는 곳은 고아원의 개구멍.  충격적인 소설이었다. 지금 수준의 인권이라면 가능하지 않는 소설이지만, 아이를 소재로 하였기에 전해지는 근대화의 속도 속에 스러져간 수많은 실패와 낙담, 빈곤, 절망의 분위기는 음산한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읽는 듯하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어머니와 술집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이미지. 파괴되어 재생되지 않는 가정의 이미지가 스냅사진처럼 삶을 떠나지 않고 어린 아이를 지배하는 이 이미지 속에서 섬뜩함을 느낀다. 

<타인의 방> 역시 괴기함을 따지자면 카프카가 떠올리는 소설이었지만, <깊고 푸른 밤>이나 <술꾼>에 비해 오히려 해학적이었다.  새벽에 출장에서 돌아왔는데 자기한테 열쇠가 있는데도 문을 쾅쾅 두드린다. 아파트 복도에서 사람들이 빼꼼 내다보며, 당신 누구냐, 3년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웃이다. 속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결국 자기 손으로 열쇠를 따고 들어가서 무얼 발견했을까? 물체들이 움직이고,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와중에, 와이프가 쪽지를 써놓고 집을 비운 걸 알게 되는데. 

<깊고 푸른 밤>은 로드 무비. 작가가 미국 갔다가 대마초로 활동이 금지된 모 가수를 만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로, 뭘 말하는지 알겠는데, 요즘 소설과 비교해봤을 때 묘사가 (지나치게) 치밀하다. 

문동에서 나온 한국 문학 단편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시리즈 전체에 대해 신뢰가 생긴다고나 할까.. (철지난) 근현대 한국 문학을 읽고 싶다면 여기서 고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당대 사회의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사회 전반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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