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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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속에서,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이 희생과 인내 잘해줘봐야 그 인내 속의 강인함 모성 같은 걸로 다루어지는 게 가끔 못마땅하다. 그런 게 요구되는 사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고 선하지 못한 인간이 되어 버리는 사회에서 그거 말고 다른 이상적인 여성상을 원하느냐 라고 하면서, 그것이야 말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똑같이 비슷비슷한 좋게 말해 헌신적인 삶, 실제로는 착취되는 삶만이 퍼져있다면, 왜 그 똑같은 삶이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 왜 어떻게 소설이 되고, 좋은 소설이 되고, 상 받는 소설이 되고, 널리 읽히는 소설이 되는가.


안나 카레리나가, 마담 보봐리가 그토록 윤리적 지탄을 받는 여성이 주인공임에도 수백년동안 읽히는 이유는, 그녀들의 삶이 용감무쌍하고 본받을만 하고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비록 독자들에게조차도 지탄받을 인격을 드러내는 일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 여성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다뤄지고, 그 불륜의 ‘악마적’ 욕망의 이면에 남녀 보편적인 그러니까 인간적인 진신들을 비추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배경이 되는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체제 내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였는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다. 북한을 여행하는 이유와 같다. 뭐 대단한 오락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그 체제 속의 사람들, 무늬만 공산주의의고 사유재산과 자유가 보장된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인권유린과 핵미사일과 같은 어두운 베일 속에 숨겨진 그 곳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어서 서구 사람들이 북한에 여행을 가듯. 소비에트 연맹 시절의 러시아 소설을 읽었다.


스테레오 타입의 주체성 없는 여성의 대표는 미인이다. 미인에 대한 찬사가 빠진 자리에 추녀의 이미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큰 키에 책만 읽는 소네치카는 도서관에서 만난 남편과의 삶 속에서, 자신이 그 남자에게 너무 너무, 그러니까 남자에게 부당하리만큼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세대만큼의 차이가 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인 남편이 당하는 체제적 억압과 그로 인한 가난마저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 행복은 하늘같은 남편과 함께하는 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딸의 친구와의 관계를 확인한 후에도, 올 것이 왔다, 이 남자를 나혼자 오래 차지하는 것은 부당했다라고 생각할 정도다. 보통 막장 코드라 하면 부적절한 관계가 겹치기로 일어나거나 자극적이고도 부적절한 관계가 형성될 때 그렇다. 뭐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 같은 고전적 막장 말고 막장의 창의력은 무궁무진하다.


(늙은) 남편이 너무 멋있고 대단한 예술가여서 젊은 여자를 사랑해도 되고, 아니 그러는 게 당연하고, 자신은 그 젊은 여자애 마저도 품을 수 있다면, 막장 맞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진짜 막장이 아니다. 이 여자애가 딸의 친구인데, 딸이 사랑한다. 그러니까 이 고아애를 한 가족 세 사람이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극적 소재도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게 쓰느냐에 따라 막장 코드를 벗어나 ‘박경리 문학상’을 받는 대단한 작품이 될 수도 있다. 문학상은 재미없어야 되는 거냐고!!!! 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 자극적 막장 소재를 얼마나 잔잔하고도 평이하게 그리고 있는지, 하마터면 눈치채지 못하고, 타샤를, 야사를, 소네치카를, 그리고 작품 속 늙고 잘난 그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공감하며 이해할 뻔 했다는 것이다.


책소개를 하자면, 세 편의 중편이 들어있고, 그 중의 하나인데, 주로 가족 드라마인 것 같고. 작품 설명과 리뷰들을 읽어보면 세 편에 들어있는 소설들의 주제는 일관되게 가족과 여성의 인내로 다루어지는 듯하다. 소설 속 여성은 원작에 반말 존대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번역되면서 둘이 대화할 때 남자는 반말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에서 고양이 인간들이 우주어를 쓰면서 한국적 존대-하대 문화를 흡수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남성 중심의 어머니들에게서 태어났다고 해도,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셔서 번역자들은 이 점을 신경써서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 부졸드 소설 속 여성들은 비록 그 미래의 세계에서조차  고립된 채로 700년을 지내니 다시 원시적 남녀차등의 문화로 돌아가는 행성이 배경이지만, 그 속에서 여성의 활약은 눈부시다. 여성은 존중받고, 대상화되지 않음에도 여전히 우주 전체를 달굴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뜨거운 로맨스를 갖는다. 


여러 소설들을 배회하다가 소네치카 같은 여성들을 만나니, 이런 의문이 든다. 공산주의는 실패했다고 쳐도, 애초에 여성과 남성의 그 엄청난 간극을 메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면서 ‘공평’하다는 ‘공산’주의는 대체 왜 시작한거니. 이건 진보 인사들이 유독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는 시점에서도 돌이켜볼 만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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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에드거 앨런 포 단편들 중 가장 짧은 단편이다.  표제작인 검은 고양이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어렸을 때부터 어떤 경로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야기를 파악하고 있었고, 가끔가다 한 번씩 읽는데, 읽을 때마다, 어떻게 끝나는재 대략 알고 읽는데도 불구하고, 짜릿한 공포감에 휩싸인다. 


아몬틸라도의 술통(The Cask of Amontillado)은 한글로 옮긴 제목부터가 살짝 코믹한 느낌이 들고 또 이야기를 풀어놓는 톤  역시 뭔가 재미있는 일화를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어서(물론 번역상의 느낌이겠지만)어서 방심하고 읽다가 쿵 하고 놀라 자빠지는 경험을 한다. 워낙 짧아서 다시 읽는 건 일도 아니지만, 결국 헐 하고 다시 돌아가서 읽게 되는데, 그 주인공의 심리를 촘촘히 들여다 보기 위해서다. 



포투나토라는 작자가 주인공에게 어떤 식으로 모욕을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복수를 다짐하는 주인공. 그는 단순히 말로 협박하지 않을 것이며, 제대로 잘못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좀 허세스러운 다짐을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포투나토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며 갑자기 술 얘기를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 아몬틸라도 라는 술이 (찾아보니 쉐리의 일종이라고) 엄청 비싸고 대단한 거인 모양으로 그 술을 구했다고 하면서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해있는 포투나토와 우연히 만난 주인공은 포투나토에게 아몬틸라도를 구했는데, 아무래도 사기당한 거 같아서 그걸 감정하러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그런데 포투나토는 술에 대해서는 전문가급의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말을 듣고는 자기가 감식을 해주겠다고 조르다시피 해서, 주인공 집으로 온다. 


주인공은 독자하게 앞으로 얘기하게 될 상황들이 철저하게 계산되고 계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냥 일이 그렇게 된 것처럼 덤덤하게 자기도 마치 처음 보는 상태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하인들은 마침 집에 없는데, 이유가 자기가 집을 잘 지키라고 했기 때문에, 하인들은 밤새 축제에서 놀다 올 것이라는 거다. 술은 지하에 있고, 아몬틸라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고 싶어 안달이 난 포투나토는 차고 음침한 지하로 들어간다. 


지하실의 규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냥 보통의 집 지하에 파놓은 작은 공간이 아니다. 한참을 들어가고 내려가고 지나가고 하다보면 공동 묘지가 있고, 해골 바가지들이 쌓여 있는 무슨 대성당의 납골당 같은 분위기인데, 그곳을 더 지나 아예 어둡고 구석진 토굴까지 향한다. 아몬틸라도는 어디에 있는지 영문도 모르고 포투나토는 습기와 초석 때문에 기침을 해대고, 주인공은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자네 건강에 안좋으니 다시 되돌아가자고 설득을 하나 이미 아몬틸라도에 꽂힌 포투나토는 포기할 수 없다며 계속 가자고 고집한다. 


(여기부터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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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토굴에 도착한 주인공은 포투나토에게 아몬틸라도가 저 토굴 구석에 있다고 해서 구석으로 보내놓고는 순식간에 제압하여 바위에 묶어놓는다. 그리고 하는 일은, <검은 고양이>에서 아내와 고양이에게 했던 것과 동일하다. 아니 아내보다는 검은 고양이에게 했던 일과 동일하다. 


검은고양이와 이것, 이 소설, 그리고 어셔가의 몰락까지 세 편의 소설의 주요 공간은 이처럼 대저택의 지하실이고, 거기에는 다른 형태의 생매장이 있다. 지하실의 생매장은 공포 중에서도 극한의 공포가 아닐 수 없다. 그 깊고 어두운 곳에 넣어버리고 발라버리면 (여기서 발라버린다는 말은 말 그대로 벽을 쌓고 모르타르 칠을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가두고 발라버린다는 뜻) 반세기가 지나도 누구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검은 고양이에서 주인공이 허세로 경찰관들 앞에서 벽을 두드려 자초했던 결론과 비교했을 때, 여기서도 거의 완전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완수한 후, 약간의 동요를 보이는데, 나는 이게 포 소설의 예술이 아닌가 싶다. 그를 지하 토굴 구석에 가두고 벽을 쌓는 동안 공포로 가득찬 포투나토가 애걸 복걸하고, 그가 대답하면서 서로  큰소리로 대화하던 것이 어느 순간 끊기자, 그는 궁금해서 포투나토! 포투나토를 외치는 것이 한 예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주인공이 모든 걸 제압한 후, 그리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어 가는 중에 보이는 이런 동요는 섬뜩하고 폭력적인 인간의 근원적 불안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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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10-05 16:0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그 네로와 이 고양이는 개념이 다른 걸로 ㅋㅋ
 
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 - 쉽게 재밌게 읽는 옛 그림 길라잡이
윤철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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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그림들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더듬어 추측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인물화는 역사에 남겨진 유명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산수화는 당대인들의 이상향과 우리 강산의 모습을 그리고 민속화는 정말 얼마 없는 민중들의 실제 일상의 보습을 보여준다. 그밖에도 책과 문구를 그린 그림 개 고양이 같은 애완 동물이나 식물과 정물화는 선조들이 자연과 어울리던 모습의 일부로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이런 민속사적 가치를 떠나서도 나는 우리 옛 그림들이 참 좋다.


흔하고 화려하고 또 사실적으로 묘사된 서양화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잔잔하고 정적면서도 편안한 분위기그건 아마도 신비감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있었지만 갑자기 없어져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의 정서는 잔잔하게 퍼져가는 먹물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동양의 그림은 ‘사의(뜻을 그리다)’ 라고 해서 복잡한 현실의 사실적 재현보다는 단순하고 생략된 묘사를 이용하여 사람의 심정, 생각 사상을 주로 그림에 표현하였기에, 알쏭달쏭한 그 뜻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무한의 세계가 탐구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채색화도 있기는 하지만 많은 옛 그림에서 단출한 붓과 먹 몇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재료로 다채로운 그림을 표현하기 위해 붓의 터치감과 먹의 농담 등을 자유자재로 조합하여 사용한다. 서양화가 밀려들기 전까지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니까 중국 대륙에서 수천년동안 사용하면서 발전해온 기술을 받아들이고 수정하여 전수한 기술이므로, 잘 알지 못했던 미술적 기교가 엄청 많다.


이 책의 구성은 이것만 알면 미술이 재밌다. 라고 하는 제목과는 달리, 백과사전적인 구성을 띠고 있으므로 재미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 뭘 잘 모르면, 그림이 좋아서 월페이퍼로 화면 가득 채워놓고 들여다 본다고 한들, 그 그림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굉장히 한정적이다. 그렇다고 그림이라는 거, 그리고 예술이라는 게 뭘 알아듣고 말해야 감상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지식이, 동양화에 관련된 모든 용어들을 나열 설명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 그것이 진짜로 뭘 뜻하는지 이해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또한 해당 용어들을 대표하는 그림이 옆에 나와 있는데, 그 그림과의 연관성도 적다.



그림을 깃들인 용어 설명집에 가까운 책이라,  읽은 후, 대부분은 잊었지만, 읽으면서 들은 느낌은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특히 그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림의 모든 기법들과 용어들이 송이니 당이니 하는 중국 나라들에서 기원을 찾고 있으며, 유명 화가의 영향권 내에 있다.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는 화본집이 유행했다는 거다. 심지어 우리가 알고 있는 굉장히 유명한 국내 작품들도 중국에서 건너온 <고씨화보>, <당시화보>, <개자원화전> 같은 유행처럼 휩쓸었던 화본집의 내용과 핵심 부분이 일치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이건 옛그림의 정취를 좋아하던 내게 약간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배신감인데, (특히 그 이름도 유명한 정선의 그림까지 그럴 줄이야)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중국에서 간행된 어느 화보보다 인기가 높았던 베스트셀러 화보입니다. 이 화보는 우선 전체가 다색판화로 돼 있습니다. 그 위에 해당 장르에 대한 화론의 소개는 물론 유명 화가의 기법을 부분으로 분해해 실어놓아 초심자라도 쉽게 따라 그릴 수 있게 했습니다.”


“《고씨화보(顧氏畵譜)》는 17세기 말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화보 가운데 가장 먼저 전해졌습니다.명나라 때의 전당(錢塘) 사람 고병(顧炳, 미상)이 역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목판으로 찍어 1603년에 펴낸 것으로..그림에 대한 교양서 역할은 물론 그림 그리는 화가들에게도 좋은 화본(畵本)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에서 이 책을 가장 먼저 활용한 화가는 윤두서로, 그의 그림 가운데 몇몇은 《고씨화보》에 실린 그림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그 외에 정선, 심사정, 최북, 김득신 등이 이 화보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분명한 그림을 남겼습니다.”



여러가지 기법들이 많이 설명되어 있지만, 메모할만한 수묵화의 붓사용법 몇가지 메모.

피마준(披麻皴)은 옅은 먹을 묻혀 얇고 가는 선을 평행하게 여러 번 중복해 긋는 기법, 부벽준은 약간 마른 먹을 묻힌 붓을 옆으로 뉘어 빠르게 내려 그으면 도끼로 내리친 것과 같은 느낌이 나는 거친 바위가 표현, 하협준은 연잎을 들고 아래로 내려뜨리면 잎맥 선이 아래를 향하면서 퍼져나가는 것처럼 표현한다.


또한 예황식(倪黃式) 산수는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유행한 산수화의 한 경향으로 예찬과 황공망의 기법을 합친 것이다.  앞쪽에 얕은 언덕이 있고, 그 뒤로 넓은 수면이 펼쳐져 있으며, 물가 끝에 다시 낮은 산이 이어진 구도를 말한다. 황공망의 필법은 그가 자주 구사한 피마준 기법을 말한다.



중국 그림 소개가 많아서 내겐 신선했다. 밑에 있는 마원의 그림  참 좋다 싶었더니, 유럽에서는 표준적인 중국 화풍으로 생각할 정도로 영향력이 높은 마하파의 화풍으로 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남송의 화원화가 마원과 하규의 화풍이라고 한다.  간결한 필치로 광활한 느낌을 주는 산수 묘사가 특징으로 그림 중심을 한쪽 아래에 두고 반대편의 넓고 빈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 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마원은 빈 공간에 정교하게 묘사된 나무를 자주 그렸고, 하규는 일부만 그려진 산세를 강조하기 위해 먹색이 강한 부벽준을 잘 구사했다고. 서양에까지 그렇게 알려질 정도이니.. 당연히 한국, 일본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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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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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아이는 여자 아이다. 떠나온 곳은 떠나간 곳이다. 죽음은 시작이다. 살해자는 살해당한 자이다. 나는 너지만 너와 나는 다른 삶이 있다. 키큰아이는 키작은 아이이다.  교사는 학생이고, 할머니는 어린 손녀고 어머니는 아버지이고. 남동생은 여동생이다. 반역자는 반역당한 자다. 욕망하는 자가 대상화되는 자다.



꿈속에서 종종 나와 타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어떤 타인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나’더라는 식의 기이한 경험은 꿈속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득한 무의식 속에서 타자는 나의 자아 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타자 속으로 들어간다. 타인과 나의 이 이상한 오버래핑이 그쪽 세상에서는 분명 어떤 맥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잠이 깨어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혼몽한 기억들은 흩어져 눈깜임이 된다. 찰라적 시간으로 얇게 압축되며 결국은 사라진다. 붙들고 남는 것은 책에 등장한 터너의 ⟪Cave of despire⟫처럼 경계와 윤곽이 사라져 희미하게 번져가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유체의 이미지 뿐이다. 



꿈은 시와 비슷하다. 아득하고 푸근한 기억일 때도, 끔찍한 공포의 습격일 때도. 그 어떤 상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때도, 그 꿈의 형체, 시각적 기억과 스토리와, 맥락은 마치 한 방울의 잉크가 물 속에서 스미듯 사라진다. 배경도, 소리도, 맥락도 모두 빠르게 물러설 때, 그것을 잡으려 애타게 허우적 거리는 동안 잠시 아주 잠시 더 머무는 어떤 느낌과  감각이 있다. 이 느낌과 감각은 하나의 몸이 꿈과 현실이라는 이질적 두 상태를 공유할 때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되고 경계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다리는 붕괴한다. 



붕괴된 다리의 파편이 물잔 속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푸른색 잉크처럼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서 점점이 흐려지다가 의식에 스민다. 아주 조금. 마음의 톤을 변화시킨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리고 시가 된다.글자를 모르는 눈아이와 얼이와 그림자같은 아이들의 몹시도 긴 시처럼, 그게 무엇인지 명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글자시스템을 갖지 못했기에 문자가 되지 못한 시, 마음 속의 시가 된다. 서사는 사라지고 한 방울 잉크로 붙잡아 전체에 스며든 느낌은 잊힌 꿈 속의 폐허가 된 림보의 섬 속에서, 아득하고 그립고 섬뜩하고 또 슬플 때를 알고 스민 물감의 흐릿한 흔적으로 현실 세계의 시를 쓴다. 놀랍고도 긴 시를.  상상력이 쌓은 시를 쓴다. 서사가 완성되는 동안 새로운 세계는 재건되고 폐허 속의 기억은 파괴된다.



각 작품이 따로 발표되어,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 읽다보니 연작인 것 같았고,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더 읽어 보니,  (작가가 이 말에 동의할지는 의문이지만) 이 개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고 결론내렸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어서, 나는 그렇게 읽기로 했다.  나에게는 이 책의 개별 작품들을 하나씩 떼어놓으려야 떼어지지가 않았다. 조금씩 느슨하게 연결되다가 흐릿해지면서 서로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어떤 응집력이 자꾸 서로 불규칙하게 붙여 경계가 사라진다. 결국 야박하게 쥐어주던 ‘이야기’ 귀퉁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맥락이 사라지고, 거대하고 자유롭게, 끝없이 넘실거리는 은유와 알레고리가 풍부한 이미지로 흡수된다. 아무렴 어때. 이야기만이 삶의 목적인 건 아니잖아 ?



어떤 유명한 소설가가 그랬다는데, 하나의 소설이 천명에게 읽히면 천 개의 소설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제대로 기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에게도 하나인 소설은 몇 번 읽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 에 따라 무한대로 증식한다. 그러니 작가여 팔리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시라. 하나의 낯선 소설은, 하나의 지독히도 낯선 소설은 한 명의 독자만 가져도 밀리언셀러도 될 수도 있다. 몇 번을 읽었고, 여러 방식으로. 때로 띄엄띄엄. 때로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을 때마다 달랐다. 다만 한 가지, 최종적인 느낌, 느낌의 순간만이 기록으로 박제가능하다는 점이 아쉽다. 



6살때까지 남자아이였다가 7살 이후 여자아이가 되는 아이들은 여왕, 마법사, 혹은 흉노에게 해를 당할까봐 남자로 살지만 7살 이후 여성이 되고, 죽거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거나, 어머니의 부재에 익숙하다. 이 기본적인 설정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배역과 파트를 서로 바꾸어가면서 되풀이하는 연극같다. 같은 시대의 비슷한 인생 무대에서 조금씩 다른 배역으로 살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키가 훌쩍 커 버린 여자 아이는 어떤 인생에서는 교사에게, 동네 건달들에게, 갖가지로 배경을 달리하며 탐욕의 대상이되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소외를 안고 사는 아이는 희미한 존재감 속에서 물성을 잃어버린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에서 트럭을 타고 스키타이의 묘지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눈아이는  ⟪얼이에 대해서⟫ 에서 밤기차를 타고 반두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1979⟫ 에서 키큰 여자아이를 욕망하는 과수원집 교사에게 아이의 여행은 거짓말이다.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에서 만난 눈이 먼 눈아이는  ⟪눈 속에서..⟫에서 본 아이와 이름도 묘사도 같다.  경찰서 창 밖으로 화자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던 눈먼 아이. 이 눈먼 눈아이는 마법사를 어머니로 둔 ⟪눈 속에서..⟫의 화자와도 ⟪눈 속에서..⟫에서 화자가 목격한 눈먼 아이와도 동일 인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마법사 어머니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흉노의 어머니가 아네모네 즙을 눈에 넣어 눈을 멀게 한 아이와 화자가 단순하게 단일 인물로 보일 수는 없다.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마법사의 묘기이기도 하다. ⟪노인울라에서⟫는 작품 내에서 두 인물이 분열된 한 사람 같기도 하다. 눈아이를 실명시킨 흉노의 여왕은, 미친 여자인 얼이의 어머니이고 얼이의 유일한 친구이의 분신이자(얼이에 대하여), 아기를 낳아 도랑에 버린 냄새나는 유방암 환자(도둑자매), 사라지는 마법을 펼치며 먹고 사는 눈아이의 부재의 어머니(눈속에서..), 30년 전 양철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난 후 반두 공원에서 홀로 살아온 할머니(기차가..)이자 그 할머니의 손녀, 혹은 그 일부들이다.



성 정체성도 없어진다.  ⟪얼이에 대해서⟫ 에서 화자인 ‘나’는 얼이가 반두로 떠난 후 오랫동안 아팠고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남자로 묘사되는데, 알고보니 여자였고, 얼이와 얼이의 미친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편지를 쓰는 화자는 ⟪1979⟫에서 교사의 관념과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다시 남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교사의 남동생은 동일 소설의 리우진과 다시 경계를 공유하며 겹쳐간다. 남자아이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자아이였던 리우진. 남동생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 자기 인생 전체를 보내지 않는 편지를 쓰느라 결석하는 남동생과 가상의 여행으로 수업에 빠지는 리우진은 눈아이=얼=남동생=리우진의 순환이 세대와 성 나이를 찌그러뜨리고 무너뜨리다가 서서히 나를 지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여러 인물이 하나의 인물로 모아지는 듯하지만 이야기가 불은 만큼 다시 또 여러 인물로 분신하면서 서로 를 뚫고 섞여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만든다. 겹쳐지고 오그라들다가 불쑥 새 살이 튀어나와 자라면서 겹치고 꼬이고 살점을 파고 들어 분리도 합체도 불가능한 어떤 흐리멍덩한 덩어리의 생명체는 ⟪도둑 자매⟫ ,  ⟪뱀과 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수렁 속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간다. 


인물들이 겪는 결핍과 상실, 학대, 욕망, 기억과 망각이 서로를 소환하는 방식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그것은 죄책감이다. 얼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여동생의 탄생에 원죄를 씌우고, 여동생의 탄생에 대한 거부감은 다시 죽음으로 귀결된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은 얼이의 것에 비해 간결하고 명료하다. 거봐 네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으니 죽었잖아. 확인되지 않은 죽음과 확인된 죽음 이후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소멸하기를 원했으되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못한 인간의 원죄는 오래도록 반두의 고원 반역의 땅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압제의 시대에 시인은 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는지 우리가 가진 원초적 죄첵감의 근원에 대해 숙연해진다.


죽은 모든 아기들은 얼이, 눈아이, 화자와, 마법사 혹은 여왕인 어머니들이다. 30년간 반두의 고원에서 홀로 살다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할머니는 이 모든 이야기의 총합으로 보여진다. 크고 무거운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밤 기차를 타고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의 지프를 타고 온 훤칠한 남자에게 유혹당하고 돼지 장수에게 살해당해 숲 속에 버려진 아이이자, 갓 태어난 아기를 도랑에 버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아네모네 즙을 짜 눈멀게 한 흉노의 어머니이자, 어린 아이를 욕망하고 마조히즘의 백일몽을 꾸며 사직서를 쓰는 교사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나 인가? 나는 세상에 이토록 홀로 내버려지고, 아버지를 찾아 떠나고 , 욕망하고, 죄를 짓고, 유폐되지 않았던가. 길고 긴 나의 이야기, 나의 꿈 이야기이자, 나의 현실의 이야기가 아주 작은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었다가 마구 섞여 다시 패치웍된 거가 아닌가. 이것은 내가 꾼 한 편의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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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라인 판타지 로버트 A. 하인라인 걸작선 2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조호근 옮김 / 시공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단편 : 너희 모든 좀비들은(All you zombies) 

영화 : 타임 패러독스


언젠가 매우 오래전에 타임 패러독스에 대한 영화 리뷰를 썼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 영화 보고 나서, 누군가 영어로 된 텍스트를 알려줘서 찾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얼마 전에 그 영화를 다시 봤다. IPTV에 한달에 1만원 정도 내고 프리미엄 영화 채널에 가입되어 있는데, 어느날 그 영화가 앞에 뜨더라. 오래 전에 봐서 상세한 내용은 기억 못하고, 엄청나게 아주 엄청나게 충격적인 반전이 시작되면 더더욱 충격적인 결말로, 그래서 결국은 이거 뭐 막장이야 뭐야 하고 끝나는 내용임에도, 그 상세한 스토리를 기억력 못하는 나는 뭥미 하면서 다시 보았다. 다시 보아도 처음 봤을 때랑 마찬가지로 또 충격적이고 (솔직히 보면서 내용이 생각나기 때문에 충격은 덜하지만), 그래도 두번째 볼때는 문맥을 더 많이 이해하는 관계로 더욱 심도있게 관람할 수 있다. 그걸 보고 나서 다시 또 텍스트를 찾아본다. 이거 보니 그 영화를 첫번째 봤을 때랑 똑같은 프로세스를 반복한다. 영화 보고, 충격 먹고, 인터넷 서핑하고, 텍스트 찾아 읽고, 리뷰 쓰고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는 한국말 텍스트를 못구해서 읽을 수 없었고, 지금은 인터넷에 떠다닌다는 거다. 어떤 잡지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누가 베껴서 인터넷에 올려놨다. 구글에서 타임패러독스 원작 이렇게 대충 치면 많이 나온다. 그것보다 더욱 희소식은 시공사에서 해당 단편을 담은 단편집이 나왔다는 소식이다. 바로 이 책 <하인라인 판타지>가 그것이다. 텍스트를 떠다니는 인터넷으로 읽고, 리뷰를 쓰려니 제대로 번역된 책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품을 팔아 인터넷 책방 상품을 뒤져서 발견해냈다. 2017년 5월 발간인데 이렇게 묻혀있다니. 하인라인이 쓴 소설이라면 전에 어떤 애가 달이랑 화성에 가서 벌이는 모험을 담은 장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하나만 읽었는데, 뭐 그닥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던지라, 저자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지만, 시공사의 하인라인 걸작선 세트(혹은 시리즈) 도서는 탐난다. 그 중에서 단편집은 오직 이 책 하나인 듯하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하인라인의 단편집은 없는 듯하다. 


지난 번에 영어로 읽었을 때는, 영화에 대한 느낌이 워낙에 강했던 데 반해 제공된 단편 텍스트가 워낙 짧아 이게 뭐야 했던 기억만 있는데, 이번에는 짧다는 걸 알고 읽어서 그런지, 영화 안보고 텍스트만 보는 읽는 것도 상당히 신선한 경험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아직 안보신 분은 인터넷으로 텍스트를 먼저 읽고 그 감상을 말해주시길.   


책 얘기만 하고 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내용을 조금만 말하면 스포가 되고, 스포가 되는 순간 읽는 즐거움은 폭망한다. 그러므로 아직 안읽으신 분은 아래 내용은 스킵하시길. 조금만 힌트를 주자면, 시간 여행물인데, 제목이 너희 모두는 좀비라는 좀 판타지나 괴기 스러운 제목이다. 얼른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좀비라는 말을 썼는지 오싹한 느낌과 함께 제목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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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가 될 수도 있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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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물들을 보면, 시간을 되돌아가서 자기 자신과 만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시간 여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이 가능할까 라고 묻는 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불가능한 걸 주제로 했기에,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더욱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함의 세계를 조롱하며 즐기는 방법이다. 시간 여행을 해서, 너 자신과 만난다면? 이라는 이 불가능한 상상속에서 평범한 인간이 가능한 상상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가끔 스무살의 내 자신과 만나면, 너는 잘 살아갈꺼야.  하지만 키 큰 남자 뭔가 우수에 차 있고, 뭔가 알 수 없는 생각이 있어 보이는 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다시 생각해보렴 하고 조심스럽게 조언해줄 것 같다(진담은 농담을 이용해서 해야 뼈가 있어 보이면서도 덜 심각해보임).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가 스무살의 온전한 나 자신과 만난다면, 나는 그녀를 눈물겹도록 사랑할 것 같다. 어쩌면 남자로 태어나 그녀를 사랑할 것 같다. 이런 자뻑은 만일 돌아간 내가 (혹시 남자 행세를 하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실제로 가능할 지도 모른다. 반대의 성이 된 자신이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는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음하하하 여기까지. 


다시 정리. 텍스트로 찾아서 읽으시오(여기를 누르면 링크로 이동. 참고로 루리웹임). 10분이면 읽음. 그리고 나서 영화를 보시오. 나는 거꾸로 해서 이 텍스트의 참맛을 잘 모르겠으며, 이런 막장스런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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