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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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아이는 여자 아이다. 떠나온 곳은 떠나간 곳이다. 죽음은 시작이다. 살해자는 살해당한 자이다. 나는 너지만 너와 나는 다른 삶이 있다. 키큰아이는 키작은 아이이다.  교사는 학생이고, 할머니는 어린 손녀고 어머니는 아버지이고. 남동생은 여동생이다. 반역자는 반역당한 자다. 욕망하는 자가 대상화되는 자다.



꿈속에서 종종 나와 타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어떤 타인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나’더라는 식의 기이한 경험은 꿈속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득한 무의식 속에서 타자는 나의 자아 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타자 속으로 들어간다. 타인과 나의 이 이상한 오버래핑이 그쪽 세상에서는 분명 어떤 맥락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잠이 깨어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혼몽한 기억들은 흩어져 눈깜임이 된다. 찰라적 시간으로 얇게 압축되며 결국은 사라진다. 붙들고 남는 것은 책에 등장한 터너의 ⟪Cave of despire⟫처럼 경계와 윤곽이 사라져 희미하게 번져가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진 유체의 이미지 뿐이다. 



꿈은 시와 비슷하다. 아득하고 푸근한 기억일 때도, 끔찍한 공포의 습격일 때도. 그 어떤 상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때도, 그 꿈의 형체, 시각적 기억과 스토리와, 맥락은 마치 한 방울의 잉크가 물 속에서 스미듯 사라진다. 배경도, 소리도, 맥락도 모두 빠르게 물러설 때, 그것을 잡으려 애타게 허우적 거리는 동안 잠시 아주 잠시 더 머무는 어떤 느낌과  감각이 있다. 이 느낌과 감각은 하나의 몸이 꿈과 현실이라는 이질적 두 상태를 공유할 때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되고 경계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다리는 붕괴한다. 



붕괴된 다리의 파편이 물잔 속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푸른색 잉크처럼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면서 점점이 흐려지다가 의식에 스민다. 아주 조금. 마음의 톤을 변화시킨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리고 시가 된다.글자를 모르는 눈아이와 얼이와 그림자같은 아이들의 몹시도 긴 시처럼, 그게 무엇인지 명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글자시스템을 갖지 못했기에 문자가 되지 못한 시, 마음 속의 시가 된다. 서사는 사라지고 한 방울 잉크로 붙잡아 전체에 스며든 느낌은 잊힌 꿈 속의 폐허가 된 림보의 섬 속에서, 아득하고 그립고 섬뜩하고 또 슬플 때를 알고 스민 물감의 흐릿한 흔적으로 현실 세계의 시를 쓴다. 놀랍고도 긴 시를.  상상력이 쌓은 시를 쓴다. 서사가 완성되는 동안 새로운 세계는 재건되고 폐허 속의 기억은 파괴된다.



각 작품이 따로 발표되어,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 읽다보니 연작인 것 같았고, 세계관을 공유하며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더 읽어 보니,  (작가가 이 말에 동의할지는 의문이지만) 이 개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고 결론내렸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어서, 나는 그렇게 읽기로 했다.  나에게는 이 책의 개별 작품들을 하나씩 떼어놓으려야 떼어지지가 않았다. 조금씩 느슨하게 연결되다가 흐릿해지면서 서로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어떤 응집력이 자꾸 서로 불규칙하게 붙여 경계가 사라진다. 결국 야박하게 쥐어주던 ‘이야기’ 귀퉁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맥락이 사라지고, 거대하고 자유롭게, 끝없이 넘실거리는 은유와 알레고리가 풍부한 이미지로 흡수된다. 아무렴 어때. 이야기만이 삶의 목적인 건 아니잖아 ?



어떤 유명한 소설가가 그랬다는데, 하나의 소설이 천명에게 읽히면 천 개의 소설이 된다고 했다고 한다. 제대로 기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 사람에게도 하나인 소설은 몇 번 읽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 에 따라 무한대로 증식한다. 그러니 작가여 팔리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시라. 하나의 낯선 소설은, 하나의 지독히도 낯선 소설은 한 명의 독자만 가져도 밀리언셀러도 될 수도 있다. 몇 번을 읽었고, 여러 방식으로. 때로 띄엄띄엄. 때로 같은 페이지를 반복적으로. 읽을 때마다 달랐다. 다만 한 가지, 최종적인 느낌, 느낌의 순간만이 기록으로 박제가능하다는 점이 아쉽다. 



6살때까지 남자아이였다가 7살 이후 여자아이가 되는 아이들은 여왕, 마법사, 혹은 흉노에게 해를 당할까봐 남자로 살지만 7살 이후 여성이 되고, 죽거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거나, 어머니의 부재에 익숙하다. 이 기본적인 설정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배역과 파트를 서로 바꾸어가면서 되풀이하는 연극같다. 같은 시대의 비슷한 인생 무대에서 조금씩 다른 배역으로 살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키가 훌쩍 커 버린 여자 아이는 어떤 인생에서는 교사에게, 동네 건달들에게, 갖가지로 배경을 달리하며 탐욕의 대상이되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소외를 안고 사는 아이는 희미한 존재감 속에서 물성을 잃어버린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에서 트럭을 타고 스키타이의 묘지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눈아이는  ⟪얼이에 대해서⟫ 에서 밤기차를 타고 반두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1979⟫ 에서 키큰 여자아이를 욕망하는 과수원집 교사에게 아이의 여행은 거짓말이다. ⟪노인 울라Noin Ula에서⟫ 에서 만난 눈이 먼 눈아이는  ⟪눈 속에서..⟫에서 본 아이와 이름도 묘사도 같다.  경찰서 창 밖으로 화자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던 눈먼 아이. 이 눈먼 눈아이는 마법사를 어머니로 둔 ⟪눈 속에서..⟫의 화자와도 ⟪눈 속에서..⟫에서 화자가 목격한 눈먼 아이와도 동일 인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마법사 어머니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다. 흉노의 어머니가 아네모네 즙을 눈에 넣어 눈을 멀게 한 아이와 화자가 단순하게 단일 인물로 보일 수는 없다.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마법사의 묘기이기도 하다. ⟪노인울라에서⟫는 작품 내에서 두 인물이 분열된 한 사람 같기도 하다. 눈아이를 실명시킨 흉노의 여왕은, 미친 여자인 얼이의 어머니이고 얼이의 유일한 친구이의 분신이자(얼이에 대하여), 아기를 낳아 도랑에 버린 냄새나는 유방암 환자(도둑자매), 사라지는 마법을 펼치며 먹고 사는 눈아이의 부재의 어머니(눈속에서..), 30년 전 양철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난 후 반두 공원에서 홀로 살아온 할머니(기차가..)이자 그 할머니의 손녀, 혹은 그 일부들이다.



성 정체성도 없어진다.  ⟪얼이에 대해서⟫ 에서 화자인 ‘나’는 얼이가 반두로 떠난 후 오랫동안 아팠고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남자로 묘사되는데, 알고보니 여자였고, 얼이와 얼이의 미친 어머니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편지를 쓰는 화자는 ⟪1979⟫에서 교사의 관념과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다시 남성으로 바뀌어 있다. 이 교사의 남동생은 동일 소설의 리우진과 다시 경계를 공유하며 겹쳐간다. 남자아이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자아이였던 리우진. 남동생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 자기 인생 전체를 보내지 않는 편지를 쓰느라 결석하는 남동생과 가상의 여행으로 수업에 빠지는 리우진은 눈아이=얼=남동생=리우진의 순환이 세대와 성 나이를 찌그러뜨리고 무너뜨리다가 서서히 나를 지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면서 여러 인물이 하나의 인물로 모아지는 듯하지만 이야기가 불은 만큼 다시 또 여러 인물로 분신하면서 서로 를 뚫고 섞여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만든다. 겹쳐지고 오그라들다가 불쑥 새 살이 튀어나와 자라면서 겹치고 꼬이고 살점을 파고 들어 분리도 합체도 불가능한 어떤 흐리멍덩한 덩어리의 생명체는 ⟪도둑 자매⟫ ,  ⟪뱀과 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수렁 속으로 소용돌이쳐 들어간다. 


인물들이 겪는 결핍과 상실, 학대, 욕망, 기억과 망각이 서로를 소환하는 방식은 알 수 없는 슬픔을 동반한다. 그것은 죄책감이다. 얼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여동생의 탄생에 원죄를 씌우고, 여동생의 탄생에 대한 거부감은 다시 죽음으로 귀결된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은 얼이의 것에 비해 간결하고 명료하다. 거봐 네가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으니 죽었잖아. 확인되지 않은 죽음과 확인된 죽음 이후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소멸하기를 원했으되 물리적으로 사라지지 못한 인간의 원죄는 오래도록 반두의 고원 반역의 땅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압제의 시대에 시인은 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는지 우리가 가진 원초적 죄첵감의 근원에 대해 숙연해진다.


죽은 모든 아기들은 얼이, 눈아이, 화자와, 마법사 혹은 여왕인 어머니들이다. 30년간 반두의 고원에서 홀로 살다간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할머니는 이 모든 이야기의 총합으로 보여진다. 크고 무거운 푸른 양철 가방을 들고 밤 기차를 타고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의 지프를 타고 온 훤칠한 남자에게 유혹당하고 돼지 장수에게 살해당해 숲 속에 버려진 아이이자, 갓 태어난 아기를 도랑에 버리고, 자신의 아이에게 아네모네 즙을 짜 눈멀게 한 흉노의 어머니이자, 어린 아이를 욕망하고 마조히즘의 백일몽을 꾸며 사직서를 쓰는 교사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 나 인가? 나는 세상에 이토록 홀로 내버려지고, 아버지를 찾아 떠나고 , 욕망하고, 죄를 짓고, 유폐되지 않았던가. 길고 긴 나의 이야기, 나의 꿈 이야기이자, 나의 현실의 이야기가 아주 작은 조각조각으로 분해되었다가 마구 섞여 다시 패치웍된 거가 아닌가. 이것은 내가 꾼 한 편의 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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