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1 : 선조 이중톈 중국사 1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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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하늘에 서광이 비칠 때 아침별은 아직 남아 있고 달빛도 어슴푸레했다. 자신의 과업을 마치고 물러나면서 이브는 쏜살같이 날아가는 여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동양의 그 위대한 여신이 구름에 휩싸인 황토 언덕 위에 서서 사방에 빛을 뿌리며 포효하는 것을 확인했다.”


역사책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잡히지 않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전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맨 앞의 약 반쪽에 해당되는 내용이고, 사기에서는 단 몇줄, 혹은 몇 단어에 해당되는 내용을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엮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갑골과 금문 문자 이야기이다. 유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가 아니라, 성경을 포함한 전세계의 역사가 총동원되어, 중국인들의 창조신화 여와와 복희의 신화를 세계라는 전체 속에서 본다.


여와는 중국의 창조신으로 진흑으로 사람을 빚다가 빚다가 지쳐 나중에는 나뭇가지에 진흙을 묻혀 마구 흩뿌려 사람들을 창조해낸다. 평균 수명이 스무살도 되지 않던 네안데르탈인의 서른살도 넘지 못했던 베이징원인을 생각해보면, 오래 전 인간(혹은 인간 이전 단계의 어떤 생명체)의 수명은 매우 짧았으며, 따라서 생식능력은 신비한 힘이었고 여성 생식기가 숭배되었는데, 그것이 개구리와 물고기에 대한 토템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최초의 여와의 신화는 개구리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 최초의 모계적인 씨족사회를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남녀가 뒤섞여 놀고 중매나 약혼도 없었으며 어머니가 누구인지만 알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섹스도 자유로웠고 선택권은 주로 여성에게 있었다. 여성은 심지어 원하기만 하면 동시에 여러 남자친구를 가질 수도 있었다. 여성의 유일한 ‘횡포’는 더 나은 섹스 상대의 선택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종족 보존이 목적이었으므로 탈락자에 대한 냉대나 소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물며 선택은 자유롭고 쌍방향적이었다. 강간도, 매음도, 감정적인 갈등도 없었다. 재산 분규도 없었다”


그러나 권력이 일단 탄생하자 관리는 통치로, 소유는 점유로, 안배는 사주로, 배치는 노역으로 바뀌고 감옥, 군대, 정부, 국가가 연이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계씨족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모호한 의식 속에서 여성생식숭배만으로는 모자라고, 생명 창조에서 남성의 작용을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일치해서 탄생한 것이 남성생식숭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상징으로서 뱀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와의 시대가 가고 복희의 시대가 오는데, 흥미로운 점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와와 복희는 모두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라는 것이다.  여와가 상징하는 것은 모계씨족사회이고, 복희가 상징하는 것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부계 씨족 사회다.


즉 이 책에서 설명하는 역사는 하나라 이전의 역사를 여와-복희-염제-황제-요순이라는 기호로 해석하고 각기 모계씨족, 부계씨족, 초기부락, 후기부락, 부락연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규정하고 그 변천사를 추정한다. 중국 역사와 신화를 제대로 잘 몰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겠지만, 베스트셀러 작가 답게 아무것도 몰라도 홀리듯 읽을 수 있게 흥미로운 문체를 유지한다.


선사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보잘것 없는 한 줌의 유물과 현대인의 가치에 갇힌 제한된 상상력의 결합이다. 길고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선조들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유물과 전승은 공기 중의 물방울 만큼이나 작다. 결국 우리가 선사시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과 통찰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 신비로운 미지의 과거로 가는 빗장을 열어주는 열쇠 중 하나는 신화다. 신화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를 재구성하는 관점도 무한대다.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과 신화가 기록되는 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신화는 누구의 상상력에 의해서건, 혹은 어떤 사건에 의해서건, 그것이 발생한 순간의 이야기가 공간을 넓혀 말과 말로 세대와 세대를 넘어 시공을 퍼져 가며 더 그럴싸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그것이 기록되던 어느 순간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이중택은 신화를 “세계적 범위의 집단몽상”이라고 썼다. 민족끼리 자원을 공유하는 신화는 결국 이브라는 세계 최초의 여성에게 도달한다.


제목에서 풍기는 딱딱한 역사책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책을 이토록 흥미로운 추리와 가설로 된 확실하지 않은 시작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여와는 뱀이 아니라 개구리였다라는 주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중국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중국 신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최초 공동체가 모계사회였다고 공언한다. 신화와 유물, 그리고 한글 만큼 훌륭한 그들의 문자들이 결합해서 뜻을 이룬 과정 등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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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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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고 싶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역설이 판타지와 추리, 성장 등의 장르가 교묘히 결합된 이 소설이 던지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나서 진실이란 살아남는 것이고, 거짓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먹고 살던 나무는 소설의 끝과 함께 죽어 판타지가 되어 사라지고 소설로 부화한 거짓이 되겠다. 그 나무가 먹고 자랐던 시대 속의 거짓말들은 나무가 토해내던, 정확히 말해서는 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몸에 작용해 만들어내는 환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어떤 진실의 토대가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임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함께 읽었는데, 묘하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바로 종교 혹은 신화의 탄생 과정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알레고리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다닐 때에도 다니지 않을 때에도, 구약을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억압(‘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류의’)과 강요에 저항하면서도 신약의 일부를 역사와 철학적 은유로 이해했다. 신념을 지키는 건 이래 저래 힘든 일이다. 내 경우는 거꾸로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나는 뭔 뜻인지도 잘 모르고(그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카레르의 왕국에서 루카가 그랬듯, 예수의 이런 저런 말씀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교회(확신에 찬 신자들)가 그것은 은유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며, 예수의 부활과 모든 기적을 성경을 근거로 하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그 교회가 목사를 둘러싸고 두 패로 갈려 폭력으로 얼룩진 분열과 갈등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의 뜻은 당신을 이런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열혈 신자들이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기록하였지만 로마의 기독교 승인 이후 공의회에서 이것은 이단이고 저것은 신성이 아니고 등등을 정했으니, 그 1800년 전에 정해진 그것이 긴 시간 속을 걸어오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의 뼈와 살과 함께 땅 속에 깊게 뿌리 박혔으니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거짓을 먹고 자란 나무가 토해내는 진실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무가 애초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였는지, 마을에 퍼진 거짓말 때문에 쑥쑥 자라났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살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려진 더 커다란 진짜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워듣고 터득한 몇 가지 나름의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이 나무처럼 거짓말은 아주 작은 거짓말로 시작해 스스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예수의 말씀과도 통한다. 한 톨의 씨앗은 온 들판을 풍성하게 황금빛으로 물들일 수 있다지 않았나. 소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거짓말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통과해가면서 괴물처럼 커져간다.


그래서, 범인은 잡히냐고? 범인만 잡힌다면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거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의 묘미가 없지. 이제 왜 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왜 살해당했나. 저명한 학자지만 황우석 이상으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조작 사건으로 더이상 동네 창피해서 발붙일 수가 없어 조그만 섬으로 이사왔는데, 거기 사람들이라고 신문도 안 보고 사나. 귀족처럼 살던 목사 가족은 더욱이 목사가 자살했다는 의심 때문에, 하루 아침에 비오는 날 마차도 없이 진흙길을 걸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다. 머리는 좋은데 빅토리아 시대의 차별적 여성의 지위(말해 뭘해) 때문에 자기는 이미 다 아는 과학자들과의 대화에도 모르는 척 바보 표정을 지어야 하는 이 소녀는 과학자로서의 아버지, 목사로서의 아버지가 존경 너머 경외로운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옳았지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 존경과 믿음마저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살해당했다면 살해당했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닌가. 이 쯤해서 소녀와 독자들은 목사의 연구 업적을 가로챌 목적이라든가, 혹은 거짓말 나무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랬을까.


반대로, 소녀는 허영과 사치, 예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엄마를 증오한다. 아버지가 죽자 마자, 동네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행동들이 역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 철없는 아가씨야. 시대를 보자. 아버지의 자살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그들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리고 시대는 여성의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키워내야 할 아들도 딸도 있고, 또 알고 보니 죽기 전 아버지는 땡전 한 푼 남겨놓지 않았다.그리고 사회가 여성에게 인정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가치는 그 시대가 마련한 기준에 부합되는 여성성 뿐.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스터리라기에는 곳곳에 헛점이 눈에 띈다. 종종 개연성도 부족하고, 특히 상황의 긴박함에 대한 묘사에서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불필요한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이 많고 지루하게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히 배경과 상황을 묘사하다가도 가장 중요하고 궁금한 부분은 몇 번씩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마도 이 부분은 상세 묘사를 후루룩 읽어서 놓쳤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다시 읽어야 할 만큼 빡빡하고 밀도높은 소설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다고 치자 식으로 넘어갈 만한 부분 말이다.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대의 큰 과학자가 될 재목의 영민한 여성들이 사회의 편견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삶이 한 편으로는 자신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쪽의 서사가 반전처럼 등장한다. 이 부분의 비중을 키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여성의 삶은 거의 몇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데, 결국 그 여성의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아이의 삶과 많은 공통분모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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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post apocalypse)이라는 쟝르가 따로 있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황폐하고 퇴락한 도시와 거리 풍경은 쓸쓸한 감성을 자극한다. 핵전쟁이든, 범 우주적 재앙이든, 종말 후에도 어떤 종류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쟝르적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미지의 세계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 중 맨 앞에 실린 올슨 스콧 카드의 고물수집을 소개한다. 읽고는 뭐 어쨌다는 거야? 하고 책을 덮었는데,  쨍하고 맑은 가을날의 풍경과 대조적인 종말(혹은 대참사) 이후의 풍경이 상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올슨 스콧 카드는 엔더의 게임과 죽은 자를 위한 변명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하고 그 밖에도 여러 상을 수상한 이름난 SF 작가다. 2013년 영화 <엔더의 게임> 개봉과 함께 국내에도 재출간되었다.  글쓰기 저서도 눈에 띈다. 



고물수집


이 단편은 1980년대에 발표되었다. 핵전쟁과 대홍수 같은 대재앙이 끝난 후 생존자들의 삶을 그렸는데, 종교적인 부분도 있고 뭔가 너무 심오한 듯 하면서 심심하게 끝난다. 트럭을 몰고 멀리 있는 파괴된 도시에서 냉장고니 세탁기 같은 고물을 수집해오는 걸로 먹고 사는 데니는 마지막 전자 제품 하나를 수거한 후, 더이상 수거할 쓰레기가 없어 실직하게 생겼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주변은 종말 전에는 도시였는데(솔트레이크가 배경인듯), 소금 호수가 되어, 마천루를 포함한 버려진 도심가들이 물 밖으로 솟아 있고, 그 곳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 금이 숨겨져 있다고 트럭 운전사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흘려 들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음만 먹으면, 거기에 있는 금을 그냥 가져오면 팔자가 필 거라고, 마치 종신 보험에 들어놓은 것처럼 든든해 했다. 실직을 앞두고 몇일 쉬는 지금이 그 종신보험을 탈 적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몬교 교인들이거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 몰몬교를 믿는다. 오직 디바만이 이방인처럼(실제로 이방인이기도 하다) 믿지 않으며, 그들의 종교를 대놓고 비웃는다. 형이라고 불러 친동생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친구였던 레히와, 동네의 노파 로레인의 도움으로 잠수복과 모터 보트를 구해,  호수 한복판 예전에 도시였던 곳에 물밖으로 솟아나온 첨탑 건물로 금을 캐러 물속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며 주워 올라온다. 그런데 물속에서 건진 것은 금이 아니라 캔 쪼가리다. 


디바가 금이라 믿고 있던 건 뾰족한 걸로 희망 사항들을 기도로 긁어 적은 쇳조각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 내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그 쇳조각에 기도를 적어 두고 온 것인데, 더 화가 나는 건 그를 돕던 두 사람 로레인 아줌마와 레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몰몬교도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기도문을 남겨두었지만, 아무도 디버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걸 혼자만 알지 못했고, 또한 금이 있다는 소문 역시 자신만 잘못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디바가 몰몬교에 대해 늘 비웃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는 익사한 도시에 살면서, 늘 과거에 속해있는 그 사람들이 딱하다고, 자신의 도시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으며 그의 도시는 바로 미래에 있다고 자기 합리를 하며 그곳을 떠난다. 


오랫동안 폐품 트럭을 몰고 헛간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이곳에 속해본 적이 없음을 자각하며, 떠나는 자. 종말 이후의 디테일에 몰몬교라는 종교적 색채가 제 3자의 눈으로 비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쿵 하고 내려앉는 한 방 이런 게 없어 조금 아쉬웠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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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유 -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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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혔던 것 같은데, 몬 내용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체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간간히 박힌 인상은 있다. 이 책의 전작인 미 비포유가 출간 당시 흥했는데,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하고 바로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사실 중요한 로맨스는 다 끝나고 홀로 남은 여주가 그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라, 개중 미 비포유를 매우 좋아했던 독자들과는 다르게 읽혔을 것 같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야 사랑이랬는데, 전편에서 죽은 남자 윌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후속편에서는 그 환상이 처참히 깨진다. 사랑했을 때는 몰랐던 남자의 과거가 드러나고, 그 과거가 남긴 씨앗이 있었다. 윌이 그냥 곱게 죽은게 아니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안락사라는 금기의 주제를 건드렸던 주인공이라, 미국으로 돌아온 후 루이자는 상실의 슬픔 뿐만 아니라 따가운 사회적 시선도 견뎌야 한다. 그러다가 옥상에서 실수로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그게 실수가 아니라 자살기도였다고 생각하고는 심리치료까지 다니는 처지가 되는데, 그걸 목격하는 사람이 바로, 윌도 모르게 태어난 윌의 사춘기 딸이다. 


윌의 딸은 죽은 아버지가 궁금해서 뿌리를 더듬고 싶어서 찾아온 거 같지는 않다. 갈 곳이 없어 재워주기 시작한 그녀가 이제 루이자의 동반자가 되지만, 가출, 마약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그녀와 루이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샘과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하는 전형적인 드라마적 공식을 따르는데, 술술 잘 읽혀 하루만에 뚝딱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용 자체보다는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삶, 그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윌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존재, 또 윌과 유전자로 연결된 그 충격적 존재가 윌이라는 환상화된 사랑을 어떤 식으로 깨뜨리고 그 동시에 현실 속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매개가 되는지 이런 부분에서 잘잘한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공감되도록 잘 표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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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읽은 지 오래되어 세부사항은 기억나지도 않고, 읽을 때의 느낌(살짝 불편한?)만 기억난다.  책방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의 일이므로 책에 대한 기본적 호감도가 지금보다는 더 낮았을 수도 있을 때의 일이다. 어쨌든  이런 스토리는 불편하다.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인데, 그 여자가 너무 못생겨서 사랑마저도 금기처럼 여겨진다. 주인공 남자가 화자이고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자는 떠나는데, 못생겨서 떠난다. 그리고 나중에 둘은 재회한다. 어떤 책은 읽고 나서 얼마 안가 읽은 사실까지도 까마득하게 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이상하게도 읽을 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기억난다. 제목이 살짝 허세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문체에서도 그런 걸 느꼈던 것 같다.  여자의 비밀이 드러나기까지 미스터리에 가까운 그 자의식이 두 사람의 사연을 궁금하게 하다가 드러난 비밀(?)은 이 여자가 단지 못생겼다는 거고, 그 모든 이별, 사랑의 실패, 도피가 여자가 못생겼기 때문에 거기서 출발한 귀결이라는 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미'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름다움인데, 단지 그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배척받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어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말할 때,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개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예쁘다 못생겼다를 이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외모 뿐만이 아니지 않나. 아무리 못생겼다고 해도, 자꾸 보면 예뼈지는게 사람 얼굴이다.


이런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여성의 가치가 미적 기준으로 판단되는 시대적 영향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그 '못생긴' 여성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 '못생김' 이외에는 그 여성을 특징짓지 않으므로 독자는 이 여성의 정체에 대해 전혀 할 말이 없고 살아있는 캐릭터가 되지도 못할 뿐, 긴 머리채를 늘이고 성에 갇힌 라푼젤의 이미지와 다를 바가 없다. 못생겼다고 생각이 없나? 못생겼다고 가치관이 없나? 못생겼다고 캐릭터가 없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거기에 못생겼음 그 하나만이 남은 여성은 남성위주의 시선에서 단지 호기심에 불과한 신비에 쌓인 인형같은 존재일 뿐이다. 일반 인형과 다른 건 못생긴 인형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못생겼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인지, 무엇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결국 그렇게 못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자선을 하듯,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문체로 그 못생긴 여성을, 어느날 사라져버린 그 못생긴 여성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그림 얘기가 나온다. 


못생긴 남자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창조주프랑켄슈타인에게서 버림받고 숨어 지내게 된 이유 역시 못생겨서다. 사랑이 차고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날 심오한 과학적 세계에 탐닉하게 되고, 자신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 소설이 처음 빛을 보았을 때 메리 쉘리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리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이다. 문학사에 기록될만한 대단한 작품을 쓴 건 맞지만, 어린 그녀에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재는 잣대는 18년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책에서 본 것들이 전부다. 특히 삶에서 어떤 깊이 있는 철학을 통찰할 수 있었을까.


200년 전의 소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거의 처음으로 시도하는 SF 소설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18세의 나이였기에 이런 상상을 글로 옮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만든 생명을, 지금으로 말한다면 안드로이드를 그토록 혐오하고 내버리고 도망치고 하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금 시각으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생긴다. 


괴물의 유일한 소망은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거였지만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내친다.  오늘날의 안드로이드(상상 속의)는 대체로 사랑받고 싶어하지도, 사랑받을 별로 이유도 없음을 돌이켜볼 때 이 소설의 주제는 못생긴 생명을 배척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며, 내용은 괴물이 갑자기 뚝 떨어지듯 못생기게 태어난 하나의 개체로서 소외와 결핍 속에 어떡하든 남들과 섞여 살고자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18세 소녀에 메리 쉘리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차 있어야 옳았고, 한 못생기고 기이한 생명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았다. 그토록 추악하고 기괴한 생명일지라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다는 것을. 창조주의 기술부족으로 결정된 추악한 외모가 창조주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그 아이러닉한 상황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성찰과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못생긴 것과 잘생긴 것을 거꾸로 놓았을 때.


아래 링크는 우연히 팟 캐스트를 듣다가 알게 된 이야기 'eye of the beholder' 인데 

오래 전에 환상특급이라는 단막 SF 드라마로 방영된 것이다. 팟라디오 용으로 목소리 연기하는 걸로 들었는데 반전 짱이다. 왜 이 소설에 이 드라마를 연결시켜놨는지는 아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너무 못생겨서, 수십번의 수술로도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다.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단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추악한 얼굴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붕대를 감고 살겠다고 부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들을 그들끼리 살도록 다른 장소로 추방(?)하는 것이다. 화면에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과 일부 모습만 보인다. 반전이 기가막히다.


Eye of the beholder 링크 http://www.pandora.tv/view/cdm74/12740957/#3982765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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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11-15 15:32   좋아요 1 | URL
예쁘고 밉고의 문제는 첫인상에서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한 거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단 몇 분만 이야기해보아도, 그 사람이 진짜로 이쁘고 밉고가 태도와 말투와 지성과 캐릭터 모든 것이 함께 융화되어 결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말투와 목소리 억양 이런 것은 외모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개성을 크게 좌우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