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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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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다가 지운다. 다시 썼다가 다시 지운다. 그렇게 일주일이 열흘이 지났다. 격앙된 목소리로 그날의 기록에서 받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쏟아내었다.. 지운다. 슬픈 얼굴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글자들을 화면위에 늘어뜨렸다.. 지운다. 눈물로 울음을 울지 못한다. 그동안 흘렀던 눈물과 똑같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그동안 쌓았던 을분과 똑같은 을분을 터뜨릴 수는 없다. 이것은 소소한 감정의 소비로 마무리할 수 있는 종류의 진실이 아니다. 울면 안된다. 가족과 싸웠다고, 몸이 아프다고, 저녁 어스름이 감성을 건드린다고 흘렸던 것과 똑같은 물리적 성분으로 구성된 액체를 흘려 내림으로 해서 잠시 머물렀다가 떠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은.

 

1980년 광주, 5.18은 '고립'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은폐'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닸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아직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해 아른아른 우리들 삶의 틈새로 흘러다니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방사능 피폭처럼과 유전자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잔인하게 세포들을 태운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 총검 앞에 학살.고문.폭력.살인.능욕과 같은 가장 잔인한 언어들은 무기력하다. 그 어떤 언어도 참담했던 기억 앞에서는 무능하게 스크린과 지면을 채울 뿐 희생자를 가둔 가장 깊은 곳의 진실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몫이다. 이 책에서 다시 깨닫는 그 날 광주의 실상은, 25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아픔, 이들의 고립, 저들의 은폐, 저들의 폭력이 희생자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방가능 피폭처럼 몸속의 유전자와 시간이 함께 파멸해가는 것이어서,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계속되는 고통이고, 순간순간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시간과 함께 켜켜히 산처럼 쌓여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곧 삶이 되어 버리는, 우리가 한 때 외면하고, 오해하고, 은폐했던 가장 잔인한 역사의 한 장이다.

 

그 열흘간의 고립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날의 폭력과, 그 날의 학살과 도륙의 잔인성이 아니다. 그 날의 피와 멍, 찢기고 찔리고 총에 맞아 헤집어진 내장과 머리통과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함께 있었던 16세 한 소년의, 16세 나이의 순진하고 맑은 영혼이 삶과 죽음이 공유하는 두렵고 냄새 역겨운 현장 속에서 맞설 수 있었던 고결함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단지 소년의 친구, 그 시간 죽어 원혼이 되었을 정대가 먼저 죽었다. 함께 대열에 있던 정대가 총소리와 함께 무너졌을 때 함깨 잡고 있았던 손을 놓쳤고, 공포의 순간이 스쳐간 후 친구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이 소년을 그렇게 했다. 소년은 마르크스의 혁명 전사도 정의의 수호 천사도 아니었다. 왜 태극기로 주검을 덮는지가 궁금했던 한 소년이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지 궁금했던 소년이 은숙 누나에게 들은 대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고, 그들은 나라가 아니라는 궁색한 대답을 듣고 혼란스러운만큼 딱 그만큼밖에 역사도, 민족도, 자유도, 민주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소년이었다. 엄마가 찾아와 회유해도 끝까지 도청을 떠나지 않게 했던 소년의,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 다른 소년들과 함께 가지런히 한꺼번에 주검이 되어 도청바닥에 누워있던 사진 한 장 속에 남겨져야 했던 그 소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설 만한 고결함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지극히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그들이 소년인 나를, 죄없는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죽음의 공포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16세 아이였다.  소의 눈망울처럼 순진한 16세 아이의 눈에 비친 도륙과 학살의 현장에서 그토록 순수하고 단순하게 맞서게 했던 것의 실체가 '불의에 맞서는'이라는 말로 설명되어 질 수 있는 단순한 것이었을까.

 

책을 읽고 꽤 시간이 흘렀다. 책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다른 책도 또 다른 책을 읽었어도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적는다는 것의 의미, 생각한다는 것의 한계, 공감하고, 간접경험을 하고, 깨닫고, 알게 되고 책 속의 글자를 통해 하는 정신적 행위가 차고 단단한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모르는 사실을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상 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사진으로 다큐로 다른 종류의 문자로 자주 접했던 내용이었지만, 그 때마다 엄숙하고 숭고한 무엇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조용히 반추하게 했지만, 공포에 맞선 양심적 선택이 역사적 순간을 외면하고자 하는 내적 이기적 자아를 이길 수 있을까. 소용없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그럼 지금 무얼 할 수 있느냐는 것은 또다른 선택이다.

 

광주가 고립되어 있는 동안, 내가 살던 도시와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총을 탈취해 도시를 불태우고 체계를 전복하려 해서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알지도 못했거나 혹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해와 달이 엄청나게 많이 바뀌어 광주와 인연이 닿아 살게 되어 처음 찾은 5.18 묘역에서 17세, 18세의 비석을 보았을 때의 먹먹함은 대학 시절 이후 시청각 자료로 접했던 무참했던 사진과 동영상과 글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 그 날의 기억에 대해 조심스레 물어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깜깜했던 5월의 밤을 기억했다. 여학생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2007년 여름 흥행돌풍을 몰고 왔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김요원이 맡았던 여학생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까만 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던 광주 시민에게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목소리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극중 김요원이, 영화 속 결혼식장 모두 웃고 있는 단체 사진 속 유일하게 어둡고 무표정한 모습의 김요원이 그 모든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는 사실 외에, 그 다음 일에 대해 영화는 말할 기회를 잃었다. <소년이 온다>에는 그 다음 이야기가 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했을 그 다음 이야기, 인간으로서 어느 처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고문과 맞닥뜨렸는지에 대해 여자로서 더는 치욕적일 수 없을 가학행위를 받고, 그 기억과 공포와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디테일이 여기에 있다.

 

가해자들. 그들을 총으로 쏘고, 그들의 시체를 트럭에 퍼 나르고,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빠개고, 잡혀온 사람들을 온갖 이름의 고문으로 세포의 구석구석 상흔을 남긴 그 가해자들은 그럼 누구일까. 가학적이기로 가장 유명한 실험으로 밀그램의 전기고문 실험과 짐바도르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떠올렸다. 인간의 권위에 대응하는 본능을 보여준다는 이 실험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의 심리를 변호하는 데 쓰였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총을 쏜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총구를 하늘로 치켜올려 맞추지 않게 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잔학한 본성을 이해하는 데 무슨 위안이 될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 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117

잔혹함. 부당함. 아니아니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왔다.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나의 값싼 눈물을 내가 사소한 삶의 불평 불만 때문에 눈 밖으로 짜내었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삶의 무게에 짓눌렸다고 징징거릴때 빼내던 똑같은 눈물을.  내가 지는 석양의 고독함에 홀려 충만한 감성이 불러내는 삶의 원초적 슬픔을 느꼈을때 흘렸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내가 인간 관계에서 상처 받아 이 세상 나만 혼자라고 느꼈을 때 흐느끼던 똑같은 성분의 눈물을. 그 값싼 눈물을 너 16세 소년의 원혼을 향해 흘리지는 않기로 했다. 너는, 혼이 되어 육체가 없이 내게로 온 너는 그렇게 소비될 수 있는 감정으로 닦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는 소소한 일을 가지고 너무 그동안 많이 울었다. 쉽게 소비되고 또 다시 채워지고 했던 나의 눈물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학살 앞에 스러져가 혼이 된 너를 향한 마음과 같은 가치가 될 수 없다. 너의 혼은, 너는 죽어서, 왜 죽었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너는 그래서 이 여름, 나에게로 왔다.  작가를 한강을 통해

 

서정적 예술성을 지향하는 작가가  목적의식을 가진 계몽적 글쓰기를 선택해야만 하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  예술성을 버리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경우가 있다. 한강은 예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역사가 결코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진실을 전한다. 김형수는 문학적, 창작적, 작가적 가치관을 확립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묶은 그의 글에서 '피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것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삶으로 송두리째 안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서럽고 몽환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시작에서 우리는 16세 소년의 영혼을 맞는다. 대의가 무엇인지나 알았을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는지에 대해, 역사의 무엇이었는지, 그가 그 자리에 서고 달리고 앞으로 진전하고 끝내는 친구의 손을 놓치고 총을 맞고 리어커에 십자 모양으로 실리고, 서러운 혼이 되어 더럽혀진 썩어가는 몸들 사이에 붙잡혀 아른아른 거리고 있었던 것의 의미가,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놓았으며, 그 역사의 수혜자들이 자신의 희생을 어떻게 망각해가고 있게 될지 전혀 눈꼽만큼의 아이디어도 없을 그 순박하기 짝이 없는 정대를, 그의 혼을 묘사할 때, 작가는 시인이다. 값싸게 슬퍼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그 소년의 혼, 갑작스레 죽어 다시는 몸이 될 수 없는 혼이 가까스로 썩어가는 자신의 몸으로부터 멀어져,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혼을 향해 눈을 감고 바라보고 안고 공유한다. 깊이 공유한다. 

 

경험이다. 짧막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기록과 역사를 허구라는 형식으로 엮었지만, <화려한 휴가>를 소비하는 형식으로 혹은 다른 역사 소설을 소비하는 형식으로 이 책을 통해 감정을 자극받거나 카타르시스적 슬픔을 배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소년을, 자꾸 멀어져가는 소년의 원혼을 붙잡아 멀리 보내지 말고, 기억하고, 다짐하고, 계속해서 경험해야 할 것이다.

 

*  EBS의 지식채널 e에서 실려보내준 영상 속에 이 책의 주인공 동호의 실제 이야기가 약간 있어서 링크한다.

 http://youtu.be/uTiIbqqUDA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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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자마자 바로 읽어 치우는 것보다 좀 묵혀뒀다 읽어야 깊은 맛이 난다.

집에서 묵혀두는 것도 좋지만, 이미 책방에서 묵은 걸 주문하면 할인이 크다.

도서정가제를 언제 시행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자주 조바심이 나서.. 요몇달 특가 도서들을 사들인다.

 

오늘은 이런 책... 사고 나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10% 밖에 할인이 아니고, <불안>도 20% 일반 서적과 다름이 없다. 덜렁대기는.. 사실 보통의 책 중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영혼의 박물관>인데 말이다. 왜그랬어.. 

 

밀란 쿤데라의 책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몇년 전부터 다시 읽고 싶어 주문. 개정판 이전 책이라 그런지 50% 할인이다. <생각의 탄생>은 30%.  줄리안 반스가 좀 더 젊은 시절 쓴 책을 읽고 싶어 <10 1/2>을 선택했는데 30% 할인이다.

 

생각해 보니 원래는 장하준 교수의 새 책 소식에, <그들이 말해주지 않는 23가지>를 사려고 카트를 들락거렸는데 엉뚱한 책을 주문했네. <나쁜 사마리아인> 까지 세 권 세트로 살까. 하나만 살까 고민하다가 옆으로 밀어두고 원래 카트에 있던 것 중 고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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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는 예술가, 음악가, 유명인 들의 인명과 작품 일람 등 숱한 고유명사를 나열하며 예술을 대상화하기를 피한다. 다만 역사 속에서 음악과 예술의 시원을 탐측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가운데 서 가장 음악적이고 예술적인 순간들을 날카롭게 포착해 리드미컬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음악과 예술을 이미 체화한 시인만이 서술할 수 있는 이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 같은 세계사 속에서 선후관계나 권력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와 순간의 개별성과 단독성이다. 
이 책에서 역사를 분절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서술의 가치를 가진 역사의 다양한 장면들이다. 그 장면은 하나의 문명일 수도 있고 한 인물일 수도 있다. 물론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한 편의 오페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조각조각의 존재들이 모여 거대한 모자이크와도 같은 역사를 이루어간다. 또한 이 책의 마디마디를 이루는 장면들은 서로 엇비슷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테면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은 ‘잉카 문명’의 역사와 맞먹는 존재이며, 단테의 『신곡』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필적하는 사건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해석과 서술이야말로 이 책이 다른 역사서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책에서 역사는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전쟁터가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예술의 풍경화이다. 책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왜 하필 ‘음악의’ 세계사인가? 음악은 물처럼 흐르고 역사는 음악처럼 흐른다. 그러므로 ‘음악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음악의’ 세계사이기도 하지만 ‘음악 같은’ ‘음악처럼 흐르는’ 세계사이기도 하다. 즉 음악은 예술을 달리 부르는 상징적인 이름이며,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스스로가 곧 예술인 역사, 인간의 가장 위대한 예술품으로서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출판사 소개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 2011년 1월 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코너에서 ‘삶을 바꾼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되었던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의 글이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정민 교수는 2004년 대한민국 인문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던 『미쳐야 미친다』를 통해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운명적인 만남을 소개한 이래, 10여 년 동안 정약용과 황상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만난 소장자들을 어렵게 설득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고 그 노력의 결실로,『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산의 재발견』 등을 발표하면서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적 업적 그리고 그 문화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밝혀왔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저자의 이런 오랜 노력의 정점을 찍는 결과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기간은 1801년에서 1818년까지 18년 동안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조선 후기 최고의 지적 성취에 속하는 수많은 저작들을 쏟아냈다. 또한 조선시대 권력의 변방이었던 그곳 강진에서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 등의 승려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지적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법을 통해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 제자 가운데 황상이 있다.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인문학이 귀결할 지점은 추상화된 인류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간이어야 할지 모른다. 지워진 흔적들과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꼭꼭 숨어 있는 먼지 낀 자료들을 찾아내야 하는 한문학의 길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그가 맺었던 관계들의 망을 통해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그 삶의 잊힌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은, 어렵기에 더욱 빛난다. 정민 교수는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삶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인간 정약용의 속살 같은 마음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끊겨 있던 흔적들을 추적하여 황상이라는 한 사람의 빛나는 삶을 복원시켜낸다. 
이제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은, 독자들의 머리를 깨우고 가슴을 울릴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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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신간이 나왔다. 단편집인가보다.



표제작 「신중한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계속 곤경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 Y의 이야기다. 그는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로 들끓는 도시를 떠나 은퇴 후의 한적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공들여 교외에 집을 완성했으나 아내와 딸의 압력에 못 이겨 해외 파견 근무를 거절하지 못해 이웃에게 집 관리를 맡기고 떠나게 된다. 3년간의 타국 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가꾼 정원이 엉망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세입자라고 주장하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Y. 하지만 사내는 집을 관리해주겠다던 이웃(장팔식)이 임의로 작성해준 임대 계약서를 내밀며 ‘장팔식에게 따지라’고 막무가내로 버틴다. 이러한 순간 Y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한다. 심지어 하루에 만 원씩 쳐서 월세를 내고 퀴퀴한 다락방에 기거하며 하루하루 집의 정원을 가꾸고 연못을 고치기에 열심이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한 채 이전의 외형만을 복원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스스로 편하기 때문이다.(출판사 해설글)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작가 컴백.


1961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에 만들어진 흑인 빈민촌 <소웨토>의 콩알만 한 판잣집에서 놈베코가 태어난다. 아버지는 그녀가 수정되자마자(!) 사라졌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법의 하얀 가루로 잊어 보려던 어머니는 일찍이 세상을 떴다. 다섯 살 때부터 공동변소에서 똥을 치우며 생계를 이어야 했던 놈베코. 그녀는 빈민촌의 여느 주민들처럼 까막눈이었지만 <셈을 할 줄 아는 능력>, 즉 수(數)에 대한 감각과 세상만사를 영리하게 따져 보는 능력만은 타고났다. 문학애호가인 옆집 호색한과 라디오를 통해 글과 말을 깨우친 놈베코는 바깥세상이 너무도 궁금하다. 어느 날 강도에게 습격당해 죽은 호색한의 집에서 수백만 달러 어치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놈베코는 그 길로 빈민촌을 탈출한다. 요하네스버그쯤 이르러 <백인의 차에 치인 죄>를 범하고 만 놈베코는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중 철책으로 둘러싸인 비밀 핵무기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그녀가 세계의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列國)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비천한 태생이지만 두뇌만은 비범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여정이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필체로 그려졌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바보들에 대한 요나스 요나손의 풍자가 오달지다! (출판사 제공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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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작가수업 1
김형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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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지루하고 여전히 추운 겨울의 끝자락, 기다려도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고 앙칼지고 매서운 추위가 물러서지 않을 무렵, 우리에게 명명된, '꽃샘추위'라는 예쁜 언어는 기다림의 소망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저자는 '문학은 존재의 저 끝 어디에 있는 것들을 명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생각, 어떤 느낌, 어떤 현상들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공기의 습기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애쓰 스스로 생명을 키워나가는 들꽃이 되고, 아끼고 가꾸어 피울 수 있는 장미가 되고,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열매가 된다.  그것을 문학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글쓰기라는 영역으로 확장해서 이해한다. 


저자는 문학의 본질을 소통으로 보았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고, 또 많이 읽어주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작가들은 간혹 베스트셀러를 숭배하고 많이 팔리는 길을 섬기게 되므로 이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하는 작가라면 문학적 도전을 중단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말이었으나, 나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눈이 띄었다. 문학의 본질이 소통에 있는 것처럼, 리뷰와 같은 글쓰기의 본질도 소통에 있는 것일까. 작가가 아니니, 문학사적 지평을 넓힐 필요가 없으니 소통에만 치중하면 될까. 소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만일 누군가가 와서 읽어주지 않는다면 오탈자와 비문이 가득하고 뒤엉킨 생각들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인터넷 어느 한 공간에 남겨진 나의 글을 그야 말로 산 속의 잡초처럼 여름 한 철 지고 갈 어지러이 마음 타래에 불과하다. 그래도 안쓰는 것보다는 낫다. 글은 남고, 글 속의 생각도 남겨진다. 비록 정리되지 않을지라도... 


최근 들어 글쓰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뭘 대단하게 쓰는 것도 이걸로 밥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생각을 옮기는 일이 두려워졌다. 생각이 없어진 거 같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생각했다. 글쓰기를 생각의 기록으로 여겼을 때에는 두서없는 생각의 타래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을 때, 그 엉킨 실타래들은 이제 기억 속에서 휘발해 버리는 대신 자기들끼리 얽힌 채로 생명을 잃는다. 식물에 물을 주면 꽃을 피우듯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은 외부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생각 밖으로 나온 타래들이 소통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반대로 소통을 생각하니 생각이 정지되는 듯하다. 시인과 소설가를 치열한 고독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돌고 돈다. 생각이 있어야 글이 되고, 글이 있어야, 소통이 되는데, 소통이 생기면 새 생각이 없어지고, 생각이 없으니 쓸 글이 당연히 없지 않은가. 새삼 작가들이 대단하다.  


제가 이곳에서 제 마음을 정성껏 글자에 담아서 전달을 하면 그것이 나의 상상력이 미칠 수 없는 머나먼 어떤 곳에 가서 내가 원하는 무슨 일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때 그 위대한 문학적 기적이 얼마나 전율스러웠는지요. 그 후 저는 속수무책일 때마다 글이라는 무기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서정'이란 '객관 세계에 의하여 환기된 주관적인 감정'이라 한다. 늘 보는 풍경 속에 익숙해져 있다 보면 꽃이 피고 계절이 변하고 나뭇잎이 떨어지는 객관 세계가 마음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작가는 이것을 권태라고 했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매일 밥을 먹으며 가족과 부부와 동료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인간 관계에서 권태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화려한 연예게를 살아가는 사람도 아닌데 감정이 요동치는 환경에 무작정 몸을 맡길 수도 없다. 문학은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객관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중요한 답변이다. 책은 왜 읽을까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 문학은 나에게 삶과 관계의 권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수단일까? 생각을 풍성하게 하는 문학적 텍스트가, 현실적 삶과 관계맺기에서 권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흠 더 생각해보자.


작가 김형수는 실천 문학을 하게 되었던 자기 고백을 풍부한 감성적 언어로 시작하여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했고, 책은 강의 내용 그대로 인쇄되었다. 예비 작가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 예비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작가적 가치관과 언어와 문학의 본질에 대해, 진솔하게 안내한다. <고종석의 문장>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보았지만, 자의식과 언어의 아름다움과 같은 서정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이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암울한 시대를 만났을 때의 지식인의 양심적 선택은 불가피하다. 그가 '1980년대 민족문학을 이끌어온 대표 시인이자 논객'이라는 점을 믿을 수 없을만큼 작가의 언어는 잔잔하고 맑다. 


문학을 공부할 목적이 아니라, 문학을 이해할 목적으로 읽었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라는 제목이 끌렸다. 문학이 예술을 전하고자 했다면 문학적 코드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문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코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알려주었다. 문학적 코드라는 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이해한 그 마음은 다시 또 '명명'되었을 때 또다시 예술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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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5 1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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