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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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읽었을 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너무 허접하게 숙제하듯 쓴 것 같다.  지평을 읽고 나니,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애정이 생겨서, 주말에 다시 읽었다. 지평이 좋아서 파트릭 모디아노가 좋아졌는데, 사실 지평보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더 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현재는 1965년이고 기억을 되찾은 기의 기억이 끝나는 곳은 1943년. 그리고 기가 기억을 상실한 시점은 10년전이다.  앞프스의 눈밭에서 연인을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살아왔을, 흥신소에서 일하기 전 12년이 소설 전체에서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그 알려지지 않은 간격동안에도 그는 연기처럼 잠시 머물다 흔적도 없이 흩어진 어떤 누구였을까. 무엇을 했을까.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기억상실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다시 따져보니 그게 비어 있다.  그 일과 기억 상실 사이에 있는 공백이 의미하는 건 뭘까. 전쟁은 끝났고 아마도 연인은 죽었거나 실종되었겠고 그 이후부터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 기껏해야 쉬이 지워져버리는 연기처럼 수초도 머물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을테다.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 어둠속에 비친 환한 실루엣. 수초 후엔 바람이 흩어 놓을 모래 위의 발자국. 선탠을 즐기던 부자들의 모든 사진 한 귀퉁이에 한결같이  찍혀있던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변의 사나이.


그리고 그가 기억을 찾아 떠난 길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존재감없는 사람들이다. 그 여정 속에 그가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페드로이자 지미이자 맥케부아이자 여러 사람으로 불렸을 자신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이 작은 조연들은 기만큼이나  적막하고 쓸끌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곁을 스치는 풍경같은 무심히 잊혀질 존재들이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외로운 자들이고, 그들을 파트릭 모디아노는 한명씩 한명씩 기의 기억 찾기 여정 속에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천장이 낮아 누워서 얘기해야 편한 스피오겔, 한 때 미국 시민권을 위해 결혼한 게이의 법적 남편이었고, 지금은 30년 어린 아내가 파티를 하는 동안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바에서 연주하는 한 때의 피아니스트.  공탁에 넘어간 귀족의  헛간을 30여년간 홀로 지키며 기억 속을 살고 있는 영지관리인. 드니즈와 함께 살던 집에서 그 오래된 인테리어를 전혀 바꾸지 않고 박제처럼 홀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 수십년전 드니즈가 모델이었던 무크 잡지를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드니즈의 어릴 적 담배 심부름을 하러 가던 가게의 주인, 극도의 불안 증세를 가진 그녀를 찍은 사진작가와 그녀 위층에 살던 사내를 죽였다고 믿는 푸른기사의 환영처럼 남겨진 목소리, 살해당한  그녀의 사진작가. 그 중 일부는 작은 서사적 실마리도 되지 못한 채 목적 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있다. 축복받고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결혼식날 혼자 남의 차에 웅크려 있다가 기에게 업혀간 신부처럼.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혹시 그가 찾은 기억이 왜곡된 거짓 기억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왜냐하면 그의 과거와의 첫번째 연결 고리가 첨부터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다시 따져보디로 했다. 기억 찾기 여정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소나쉬체. 그는 기를 보고 과거에 알았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연락을 해 달라고 했고 그 일이 직접적으로 자기 과거를 찾는 시작점이 되었을 것이다. 소나쉬체와 그의 친구 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스티오파와 함께 다니던 패거리였거나 카스티유 호텔 손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힌트와 함께 스티오파가 신문에 낸 가족 장례식 소식을 얻는다. 그 식당에서 결혼 파티를 끝낸 후 홀로 남의 차에 홀로 앉아있던 신부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에 또 무엇인가가 머리속에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모른다.


기는 소나쉬체가 준 신문 정보로 장례식장에 가서 스티오파를 미행해서 자신이 러시아 망명귀족에 대해 기사를 쓴다고 하면서 접근한다. 스티오파가 준 사진들 중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사진속에서 자신이 팔을 얹은 여자에 대한 정보와 사진들을 얻어간다. 사진 속의 여자는  게이 오를로프다. 기는 이제 이 여자의 관계있었던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기록 속의 흔적을 계속 추적해가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잡아간다.


기는 위트가 그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게이의 전남편 윌도 블란트의 이름과 체류번호를 알아내서 찾아간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때 그때 임기응변적으로 거짓말을한다. 소나쉬체에게 자신이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이 안먹혀들어갔으므로, 또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처지를 일일히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거짓말이 더 잘 통한다는 걸 안다.  게이의 전남편 윌도 블란트에게는 자신이 게이의 사촌이라고 말하고, 게이의 남친이었던 하워드 드 뤼즈의 사촌에게 가서는 하워드 가문에 대해 알고 싶다고 얘기해서 자신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리고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가 살던 저택의 영지 관리인에게는 미국에서 하워드와 친구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이제껏 자신이라 믿어왔던 러시아 망명귀족도 게이 오를리프의 연인도 아님을 알게 된다. 대신 사진 속의 다른 쪽에 서 있던 남자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남미에서 왔으며 또한 이름은 페드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거짓말 얘기로 돌아가면, 페드로로 자신의 과거를 급 회항한 기는  이제 페드로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프레디 가족이 남긴 유물 속 사진 뒤에 페드로의 전화번호가 메모된 것을 발견하고 집을 찾아간다. 오래된 집은 그대로 남겨졌고 그 집에 살던 사람이라고 얘기하자 여자가 페드로 면서 쭈뼛거리자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가 메케부아씨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자기의 성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서 들은 건 자신이 드니즈와 연인이었으며 드니즈와 국경을 넘기로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에게서 받은 정보는 드니즈가 남긴 수첩 속에서 나온  드니즈의 출생증명서와 자신이 므제브 국경을 무사히 넘었을 때 연락책인 올레그 드 브레데의 전화번호다. 이제 드니즈의 출생지로 가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기억하는 남자에게 드니즈에 대한 정보와 그녀가 모델로 실려있는 잡지를 빌려오고, 사진 기자를 찾아간다.


이렇게 하나씩 정보를 찾아내다 끝에 가서 자신을 알아보는 그 시절 친구를 만난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아주 디테일한 기억 회복. 그 아름다운 스위스 국경 마을의 설경 속으로 펼쳐지던 한없이 슬프고 아련한 진짜 이야기 37장을 기억해낸다.


그런데 이 기억은 진짜였을까. 절묘한 타이밍에 경마 기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를 확인시켜주기 전까지는 사실상 그가 그 페드로라는 사실이 왜곡된 뇌의 거짓일 가능성도 높다. 왜냐 하면 처음 그를 알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소나쉬체가 알려준 스피오티오파는 사실상 이 전체 연결 고리에서 거의 접합점을 찾을 수 없고.. 또 거기서 발견한 무수히 많은 옛 러시아 사진들 중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찍어서 찾아가기 시작한 당사자도 사실은 자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또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찍은 것이 실제 자신이라면 이것은 너무 많은 우연의 남발이다. 이 우연의 남발로부터 건져낸 실존이 1943년 사라진 어떤 존재이고, 키와 덩치가 비슷하다는 사실밖에는 사실상 소설속에서 기가 페드로라고 증명된 건 없다. 뒤로 갈수록 그가 찾는 페드로는 점점 뚜렷하게 어떤 한 인물로 모아진다.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껏 하나씩 수집해온 정보가 하나의 실존으로 완성되어하는 동안 한 사람의 이미지가 그대로 기억으로 치환되는 왜곡일 수 있다. 만일 그 경마선수가 그를 알아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점점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모르겠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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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3-05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니까 지평은 2010년에 나왔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1978년에 나온 소설이에요. 아마도 지평은 작가가 많이 힘을 빼고 썼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작가들이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깊어질수록 작품이 좀 단순해지잖아요. 그만큼 단련되고 정제된 언어와 구조를 띤다고 할까요. 기네스님 리뷰를 보니까 왠지 제 취향에는 이 책이 더 맞지 않나 싶어요 재밌어 보여요. 잘 읽었습니다

CREBBP 2016-03-05 17:52   좋아요 1 | URL
딱 맞는 말씀이에요. 힘을 좀 빼고 쓴 소설이 지평이고 그 만큼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읽고 나서 개운한게 대중을 존중한다는 느낌이고 이 소설은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삶을 전쟁터로 여기고 쓴 것 같지요. 그럼에도 간결한 미가 아름답습니다. 리뷰를 오랜만에 제가 다시 봐도 잘 모르는 거 있는데 제3자가 읽으면 어떨지 상상이 ㅋㅋ
 
빅데이터 인문학 : 진격의 서막 - 800만 권의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에레즈 에이든 외 지음, 김재중 옮김 / 사계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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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전세계의 모든 책을 디지탈화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9년만에 3천만권을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두 사람은 그 방대한 양의 책들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는 도구를 개발했다. 그것이 엔그램뷰어다. 이 책은 엔그램뷰어의 탄생 배경과 엔그램뷰어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얘기다. 빅데이터에 대한 시대적 통찰을 얻을 수는 있지만 빅데이터라는 거대한 흐름 자체를 설명해주는 책은 아니다. 엔그램이 구글북스라는 구글의 디지털 라이브러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도구이고, 구글북스 자체가 빅데이터이고, 그것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쉽고 재미있고 직관적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빅데이터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빅데이터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제목 <빅데이터:진격의 서막>은 오버다. 항상 원제 uncharted(미개척의, 미지의)를 봐야한다. 원제처럼 새롭다. 몰랐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통찰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달이나 화성 같은 완전 미지의 세계를 살살 딛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코앞에 있다. 당장 누구라도 컴퓨터나 휴대폰만 있으면 해 볼 수 있다. 그게 무엇일까. 


캐런 라이머의 <전설적, 어휘적, 다변적 사랑>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연애 소설 한 편을 골라, 전체 텍스트를 알파벳 순으로 정렬해서 재배치한 책이다. 그러니까 맨 첫장은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 A...이렇게 시작하고 또 어디쯤 가면 몇 페이지고 아름다운 아름다운 아름다운이 계속되는 책이다. 이렇게 정렬해 놓은 단어들의 목록은 그 책에 대한 대략적인 통찰을 준다. 아름다운 이라는 형용사가 그 책에서 쓰인 단어 중 가장 많이 쓰인 단어라는 점을 비롯해 특정 단어들의 빈도가 주는 통찰들 말이다.


구글이 가진 그 방대한 책에 대한 메타 데이터와 컨텐츠는 민감한 지적재산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저자 두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이 캐런 라이머의 아이디어다. 그들은 구글북스의 빅데이터, 롱데이터에서 단어들의 갯수를 세어 시대별로 그래프를 그려주는 툴을 만들었다. http://books.google.com/ngram 을 들어가면 바로 확인 가능하다. 책을 덮고, 사이트를 들어가서 몇몇 단어만 입력해봐도, 대략 이 책이 뭘 얘기하고 있겠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 엔그램으로 뭘 할 수 있나. 무궁무진하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무엇을 했나. 재미있는 걸 했다. 


우선 그들은 언어의 변천사를 살폈다. 엔그램을 통해 불규칙동사와 규칙동사의 역사를 탐험했다. 나도 따라해봤다. 기억엔 없지만 학창시절의 어느 화창한 오후 우리들은 trhive/throve/throven 형태의 불규칙동사를 외우고 또 외웠을 것이다.burn/burnt/burnt 형태는 기억난다. 흑흑 억지로 구겨넣었어야 했었을 기억나지 않은 시절을 생각하니 분하고 원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바로 확인해봤다.






그렇다. trhove는 1920년대에, burnt는 1880년대에 이미 미국 영어에서는 마지막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잘 쓰이지도 않아 잘 알고 있지 않았던 미국 사람들은 우리가 자장면과 짜장면을 가지고 언쟁을 하듯 치고박고 하다가 자연스럽게 짜장면을 받아들인 것처럼 trhived와 burned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책속에 더 많이  썼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시절 이런 것들을 외우고 있었다면,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언어를 배운 것이다. 책에는 영어에서의 이러한 불규칙동사와 규칙동사의 어원들과 변천사들을 언어학적 관점에 아주 재미있게 설명한다.  


두 사람은 엔그램을 통해 baby와 sitter가 합쳐져 baby-sitter가 되고 하이픈이 없어져 babysitter가 되는것과 같이 두 개의 합성어가 생기는 과정을 예로 들어,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고 성장하고 사멸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지난 50년 사이에 급속도로 언어가 성장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논한다. 


그 다음에 주목한 것이 명성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엔그램에 넣으면 정확하게 그 사람이 언제 얼마나 많은 책에서 언급되었는지라는 아주 명백해 보이는 정량적 명성을 얻어낼 수 있다. 1800년부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차례로 넣어 분석한 것, 같은 해에 태어난 50명의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 등의 사례를 통해 이들이 얻어낸 사실은, 명성이란 그 누구의 명성이라 하더라도 비슷한 패턴의 그래프를 따라 출생 후 20~40년 후부터 책에 거론되기 시작하며, 사망 직후 높아지고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하향 곡선을 따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추세가 현재로 가까와올 수록 명성이 최고에 오르는 속도도 빠르고 사라지는 것도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저자들은 어느 무명씨의 유명한 말 "미래에는 모두가 15분만에 유명해질 것이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1800년대 집단은 사전에 언급하는 수준으로 거론하는 빈도를 가지는 명성데뷔 연령이 43세였는데, 20세기 중반부터는 29세로 낮아졌다.  이 명성이 높아지는 속도도 날이 갈수록 빨라져서 1800년대에는 43세에 데뷔에 75세에 절정에 이를 때까지 8년이 걸리는데, 1950년대 집단의 경우 명성이 두 배로 늘어나는 3년으로 짧아졋다. 빠르게 이룬 것은 빠르게 거둔다. 이 명성이 사라지는 속도를 보자. 1800년대에는 명성이 떨어지는 반감기가 120년이었는데, 1900년 71년으로 떨어졌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을 보자. 엔그램을 이용하면, 어떤 비극의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져갔는지를 알 수 있다. 분서가 이루어졌던 나치 시대에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저자들의 이름들은 한결같이 나치의 괴벨스가 '제국문화부'를 신설했던 1933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사라진다. 파울 클레,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예술가들이 탄압받던 시기에 그들의 이름은 독일어로 된 모든 텍스트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정의의 코스프레를 하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가 1947년 했던 짓은 나치가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던 예술가들에게 했던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 텐이라고 불리운 블랙리스트에 올린 사람들은  그 사건 이후 10여년간 메이저 스튜디오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들의 경력에 미친 충격은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스탈린이 트로이카로 트로츠카를 제압하고 정권을 잡은 후, 숙청한 트로이카들과 트로츠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숙청당한 2000만명에 속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모두 러시아 어로 된 텍스트 바깥으로 쫓겨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명성을 가졌던 트로츠키와 트로이카들마저도, 후르쇼프 이후에도 평판을 되찾는데 부분적으로만 성공했고 그것도 여러 세대가 걸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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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늙지 않는다 - 치매 걱정 없이 100세까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법이 담긴
다니엘 G. 에이멘, 에이멘클리닉 지음, 윤미나 옮김 / 브레인월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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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성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질병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을 적용한다면 몸은 그대로인데 그 사람이었던 영혼이 몸에서 점점점점 멀어져간다는 뜻이다. 어느 날 집 대문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 어느 날 길을 찾지 못하고 그러다가 친구를,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끝으로 갈수록 자신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잔인한 병이다. 오래 전에 알았던 어떤 시에 같이 있어도 당신이 그립다 라는 낭만적 구절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그 자리엔 늙은 노부모가 영혼을 떠나보낸 채 몸만 잔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책의 부제는 치매 걱정 없이 100세까지 장수하는 법이고 저자는 임상신경과학자이고 정신과전문의라도 소개되어 있다.  이 책 말고도 뇌 건강에 대한 책을 많이 써서 <그것은 뇌다>는 2005년 미 아마존닷컴의 초우량도서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표지도 깔끔하고 표지에 두 달이면 당신의 뇌도 놀랍도록 젊고 건강해진다 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치매 예방과 치료에 새롭고 핵심적인 정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포커스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이렇게 표지에  뭔가를 쉽게 해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홍보성 문구는 대개 있는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그리고 원제를 확인해야 한다. Use your brain to change your age.로 직접적으로 놀랄만한 치매 치료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원제였다. 책의 내용은 일반적인 건강 관련 내용이다. 뇌가 건강하려면 건강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약물과 알코올 담배 지나친 카페인 섭취를 금하고 스도쿠나 퍼즐 같이 뇌가 잘 돌아가는 운동을 하고 의도적으로 기억력 훈련을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보조제를 섭취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뇌 클리닉인 에이먼클리닉 같은 곳에 방문해서 SPECT 뇌촬영을 해서 뇌를 들여다보고 적절한 검사와 상담을 하여 문제 해결 프로그램에 들어가라는 것이 요지다.


이 책은 뇡서 몸의 작용에 대해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만일 나처럼 치매나 기억력 저하 같은 문제로 실질적인 도움을 크게 기대했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반적인 건강과 뇌건강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만족스러울 것이다.예를 들어 1장에서 제시하는 뇌 건강에 대한 20가지 브레인팁은 다음과 같다.


1.3개월마다 건강관련 검사를 받고 수치를 기록관리한다 
2. 채지방지수를 관리한다. 똥배는 만병의 근원 
3.과일 채소를 5~10회 먹는다.  
4.수면은 8시간 이상 취한다. 
5. 혈압을 관리한다 
6. 금연 
7. 과음금지 
8. 전혈구검사를 받는다. 어떤 병이든 조기치료가 뒤늦은 치료보다 훨씬 더 낫다.
10. HbA1C 검사(최근 2~3개월간의 평균 혈당)를 받고 안정된 혈당을 유지한다. 알파리포산은 혈당을 안정시킨다.
11. 25-하이드록시 비타민 d 수치를 확인한다.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인지능력이 감퇴할 수 있다.
12. 갑상선 호르몬 수치를 안다. 갑상선 호르몬 이상은 뇌질환의 원인.
13.C-반응성 단백질 수치를 안다. 이것은 염증을 측정하는 척도로 염증 증가는 노화와 인지능력 감퇴의 원인
14. 호모시스테인 수치를 알자 이 수치가 증가하면 뇌 건강에 이상옴 
15. 페리틴 수치 검사. 이것은 철분 저장량의 척도. 철분저장량이 과다하면 혈관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있다.
16. 유리 테스토스테론과 총 토스테스테 론 수치를 알자. 이 호르몬 부족은 혈관계 질환과 우울증 성욕 감퇴의 원인 이 수치가 부족하면 생긴다 
17.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을 과소평가 하지 말고 검사해 본다 
18. gps가 치매 진단을 지연시킬 수 있다 50세 이후에는 규칙적으로  기억력 검사를. 
19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모든 위험인자를 줄인다. 위험 인자로는 당뇨 심장병 비만 우울증 놔부상 등이 해당된다 
29.어릴때부터 건강관리


위에서 검사하고 금하는 것들이 모두 치매나 뇌혈관질환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하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건강 관리지침은 어머니들이라면 아침 프로그램들과 각종 건강 정보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몇가지 보조제에 대해 소개되어 있는데 그게 저자 자신의 에이먼클리닉에서 브레인부스터라고 명명해서 판매하고 있는 건강보조식품들에 대한 설명이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지 모르고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조식품으로는 허가가 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때문에 해외직구 같은 걸 하지 않는 이상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원리로 어떤 건강기능식품이 뇌건강에 도움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큰 도움이다. 여기서 소개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비타민 보조제와 생선기름 등은 국내에 많이 판매되고 있지만 해롭다는 의견과 이롭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므로 전적으로 이 책만을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여기서는 매일 섭취하라고 나온다.


ㅇ생선기름과 커큐민(울금원료) : 염증을 줄여줌
ㅇ N-아세틸시스테인(NAC),  알파리포산 : 활성산소를 처리하고 항산화 작용을 촉진 
ㅇ 빈포세틴, 은행 : 혈액순환 개선 
ㅇ 후페르진A, 아세틸-L-카르니틴 : 학습과 관련된 신경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을 증가시킴
ㅇ 아세틸-L-카르니틴, 코엔자임큐텐 미토콘드리아 작용을 촉진 미토콘드리아는 나이를 먹고 노화가 진행될수록 감소하는 세포의 에너지 발전소 
ㅇ 브레인 메모리 부스트 자기네 클리닉에서 위의 보조제들을 섞어 만든 보조제


직접적으로 뇌를 써서 뇌를 개선하는 방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뇌를 많이 쓰는 거다. 스도쿠나 낱말 퍼즐들을 풀고 대화시 그사람 이름을 앞뒤로 계속 넣어가면서 사람 이름을 기억해서 해마의 크기를 증가시킨다. 슈퍼에서 장을 보면서도 계산대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갈 때 보아두거나 없으면 지어내서라도 외워두고 나올때 다시 기억해내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절대적으로 뇌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속독을 강조한다. 소리를 머리속으로 내지 말고 빠르게 펜으로 밑줄을 긋듯 옮겨 가면서 머리로만 읽는 습관을 들이면 뇌기능이 향상된다고 한다. 공감각적인 암기 역시 기억력에 도움이 되고 명상과 복식호흡 긍정적 마인드 저글링 춤 무술 글씨쓰기 서예 등의 활동이 뇌의 각 영역들을 자극한다. 또한 안쓰는 근육을 스트레칭을 해서 풀어주듯 습관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여 뇌신경의 연결을 늘려주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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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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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머리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대체 왜 인간은 이 모양일까. 그리고 저자는 또 왜 이런 식으로 인간을 바라볼까. 피상적인 부분만 봤을 때 아름다울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는 것들, 사람들의 이면에 잘 드러나지 어두운 진실이 있다. 그것들을 포착한 저자의 붓끝은 냉담하지만 집요하다. 마치 전작품을 통해 똑같은 말. 인정해. 인정해. 인간이란 이런 거야. 뭘 기대하지. 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비극적인 결말을 눈꼽만큼의 자비도 없이 냉소적으로 차갑게 그려낸 소설들이 플래너리 오커너에 실린 작품들의 특징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어보였다. 등장인물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독자 개개인이 등장인물들의 삶에 스스로를 투영해보기를 원한 듯하다. 소설집인데, 장편소설처럼 한편 한편을 더 읽을 수록 작가가 구축해가는 차갑고 어두운 세계관 속으로 누적되어, 처음에는 아리송하던 단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안개가 걷히듯 가시권이 넓어지면서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매료되는 지점을 만난다.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세계 각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지만, 내겐 생소했다.내게는 생소한데(생소한게 뭐 자랑이라고), 그녀의 <단편소설전집>은 전미도서상 6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왕중왕으로 꼽힌 작품이기란다.  중요한 건 1946년 첫작품 <제라늄> 발표후 5년만에 루프스 진단, 1962년까지 12년동안 루프스를 앓으면서 미국 남부 시골에서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서서히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들을 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절망적 삶 자체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투병의 잔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울근불근한 근육을 가진 마초같은 남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난다.  


시대 배경이 1946년부터 1962년으로, 역사가 기억하기로는 한창 흑백분리 철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였으나, 그녀가 그린 남부 시골의 모습은 흑과 백은 다르다는 뿌리박힌 인습이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우세했다. 거의 모든 소설 속 미국 남부 등장인물들의 흑인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흑인 멸시 사상은 뿌리깊은 당대의 사회적 의식 구조를 그대로 발가벗겨 보여준다. 그들의 눈에 흑인들은 개개인의 이름이나 개별 인격을 가진 개체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검둥이들'이다. 그들은 대개 비슷하게 생겼으며, 좀도둑이고, 게으르고, 따라서 흥분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잘 다루어야 하는 대상들이다. 이런 '검둥이들'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의식은 특히 <추방자>에서 두드러진다. 



읽다보니 불편한 소설들이 편해졌는데, 그 이유는 소설들이 보여준 규칙성 때문이었다. 무수히 많은 단편들이 플래너리 오코너가 구축한 어떤 질서에 가지런히 배열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독자로서, 누군가가 죽거나 끔찍한 일을 당할 지 미리 안다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용이하다. 누가 죽을까, 왜 죽을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에 집중함으로써 죽음이 불러오는 끔찍함과 감정적 충격이 상대적으로 마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집에 실린  거의 모든 소설은 기승전엿으로 끝난다. 어느 하나 따뜻한 결말이 안도와 연결되는 경우는 없다. 누군가 죽거나 엿먹는다. 처참한 죽음 같은 빅엿이다. 서사가 매우 긴 장편 속 한 사람의 죽음이 그 긴 서사를 모두 설명한다면 그 죽음은 매우 무겁고 크고 고통스럽지만, 30여편의 많은 소설 대부분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면 개별적 죽음들의 무게는 독자로서는 그리 무겁지 않다. 그래서 그 상징성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죽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죽음은 갑작스런 방식으로 매우 짧게 오기 때문이다. 조마조마조마가 시작되는 지점은 거의 마지막 페이지이고 그것이 끝나면 단칼에 벤다. 등장인물들은 죽음이 오는 순간 그 짧은 순간 착각을 알고  진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찰라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매번 똑같은 결론이라면 재미없을까. 그렇지 않다. 농도가 짙고 밀도가 높다. 에밀졸라라면 수십페이지에 걸쳐서 썼을 내용을 한 줄, 한 문단으로 표현하고 과감히 생략되어 있어서, 단편이지만 굵직굵직한 서사들을 만난다. 그런 서사가 끝나는 지점은 비극. 결국은 비극적으로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결론을 맺는다. <추방자>에서 매킨타이어 부인에게는 자신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폴랜드인이고 백인 고용인에겐 자신의 직업을 위협하는 경쟁자였고, 게으른 검둥이들에겐 자신들의 좀도둑질을 주인에게 일러바치는 인간이었던 죄없는 유태인이 그 고생끝에 수용소를 탈출해서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죽을 힘을 다해 살다가 그 세사람의 무언의 공모로 트럭터에 깔려 죽는 장면을 처리하는 저자의 시선은 무관심에 가까운 서늘함과 차가움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억울한 자들과 죽는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동정하는 것은 차라리 무지한 인습과 그 인습과 싸우는 절망적 개체들이다. 그녀는 그들을 차갑게 동정한다. 


모든 '검둥이'들에 대해서도, 또 그 어떤 선의의 피해자들에게도 그들 삶의 따뜻했던 부분을 일부라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완벽한 무관심, 차가운 외면. 21세기 우리들의 사회가 서로에게 보내는 그 차가운 시선 말이다. 작품집이 발표 순서대로 되어 있다면 초기작이 특히 차갑고 어려운데, 이녹과 헤이즐 모츠가 나오는 연작 소설로 보이는 몇 개의 소설, 그 중에서도 <감자깍는 칼>과 <공원의 중심>은 그 죽음의 의미는 커녕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녹은 헤이즐을 쫓아다니고, 헤이즐은 이녹에게 어떤 정보를 캐내려다가 안되니 돌을 던져 죽여버리고, <칠면조>에서 소년은 소설의 서사를 채우는 총맞은 칠면조잡기에 성공하지만, 가는 길에 일을 당하고,  <황혼의 대적>은 104세 노인이 62세 딸의 대학졸업식에서 죽고 <좋은 사람은 드물다>는 세가족의 휴가길에서  탈주범들에게 몰살당하고, <숲의 전망>에서는 거울처럼 닮은 어린 손녀를 노인이 목을 조르고 모리를 돌덩이에 찧어죽이고, <그린리프>에서는 소의 뿔이 농장주 부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서 죽인다. 죽지 않는 경우라도 '내 다리 돌려놔'라는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헛간 이층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른 채 '시골 사람은 좋은 사람들이야'라는 환상을 주문처럼 외우는 엄마가 <좋은 시골 사람들>을 통해 편견을 조롱한다. 


<불속의 원>은 평화로운 농장에 불청객인 세 검둥이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며 제집처럼 행동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선한 인간의 악한 속성과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새로운 가치관과 낡은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코프 부인은 매사에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며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막상 몰상식하고 무례한 아이들의 방문과 요구에 당황함을 넘어서 불쾌하고 공격적인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은 천천히 가시화되어 가고, 그 농장이 자신의 농장이라고 다짐하듯 되뇌이는 흑인 아이들의 내면과,  뒷배경은 자세하게 나타나있지 않지만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흑인 멸시의 구가치관이 인간의 권리에 대해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흑인들의 새가치관과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사회상을 포착했다. 


<깊은 오한>을 읽을 때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품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작가 자신과는 달리, 작품 속의 남자는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합당하게, 온당한 결과로, 인생의 선물로 오고 있'던 죽음이 멀리 달아나버리는 것은 실패한 예술가에게 비극적 죽음으로 메꾸었을 한줌 남은 자존심마저 앗아간다. 병명 또한 교육받은그가 흑인 일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제스처로 젖소에서 바로 짠 멸균되지 않은 생우유를 흑인들의 거부로 결국 혼자서 다 마신 것의 결과로 생긴  파상열이라는 사실이 유머스럽다.  


'그 애는 앞으로 여기서 50년동안 장식품으로 살아갈거에요(p501)


냉소적인 누나의 예언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을 쓰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다시 시골로 내려와 새로운 가치관과 진보된 생각을 가진 고학력의 자신과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병과 함께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 작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행히 작가는 죽고 나서 더 많은 상을 받기는 했지만 죽기 전부터 이런 저런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 병을 알고, 죽음을 향해 귀향하던 그녀의 심정은 이런 <깊은 오한>의 주인공 에스버리가 느꼈던, 소통되지 않는 벽들 속에 감금된 깊은 절망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비극적이지만 그 중 유머러스하게 희화화한 이 작품이 주목되는 이유는 그런 이유들이다.


종교적인 색채도 오코너 문학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녀는 기독교도가 우세한 지역의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 종교적인 색체라는 것이 종교를 옹호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적 혹은 카톨릭적 종교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그런 사람들을 보는 비종교인에 대한 시선 같은 것들이다. 소설 속에는 광적인 신도들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백그라운드로 등장한다. 특히 <강>은 특히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단순하게 그 종교를 까는 건지 빠는 건지 구분할 수 없게 종교의 복잡한 속성을 매우 매우 너무나 안타깝고 비극적으로 그렸다. 6세 아이에게 갑작스레 다가온 종교적 세계가 강은 그를 영원하고 생명이 넘치는 세계로 데려다 줄 것으로 믿게하는 과정이 보여주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소년이 경험하는 것들은 푸른색 실크처럼 정교하고 직조되었다. 


가장 좋은 소설을 손에 꼽기 어렵게 좋은 소설이 많았지만 그 중 <추방자>가 서사의 구조나 밀도로 볼때  장편소설같은 서사적 힘을 가진 소설로, 다른 소설에 비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도 이해하기 쉬운 소설이었다. 길이도 꽤 길고 흡입력이 있었다. 내용도 메시지도 애매모호한 작품집의 초반 작품과 달리,  마음을 후벼파며 느낌으로 전달되는 뭔가를 붙잡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결국, 이런 거다. 작가는 우리가 노출된 환경 속에서 '인습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냐' 라고 말한다. 여자(매킨타이어 부인)는 그 검둥이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의 예쁜 유태인 백인 여자 아이가 촌각을 다투는 살육의 현장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과는 상관 없는 검둥이와 결혼하는 일임을 몰랐을 리 없다. 중요한 건 이거다.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사고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의 헛점을 덮는 방식으로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킨타이어 부인이 순진해서, 폴란드인이 자신의 사촌을 살리려고 '검둥이'와 결혼시키려는 의도의 영어를 이해 못해서, 수용소의 실상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읽어보니 매킨타이어 부인은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관심은 이제 그 누구의 죽음도 아니다. 단지 그녀를 붙잡은 뿌리깊은 인습, 검둥이가 백인과 섞이는 꼴은 볼 수 없다는 그 대단한 신념이다. 


이 불쌍한 아이를 여기 데려와 그 반푼이에 좀도둑에 더러운 검둥이하고 결혼시키겠다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다니 자네가 사람이야 괴물이야 301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가 어떻게 순진한 처녀를 여기 데려와서 그런 것하고 결혼을 시키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도저히 303


나는 이 세상을 향해 책임이 없어 303


그 사람은 외부인이고 여기 질서를 파괴하고 있어요 313


그녀는 이제 그 유대인들이 그쪽 세계에서 학살을 당하건 말건 상관없다. 아마도 애초에 그녀가 그 폴랜드인을 초청해,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했던 이유가 그녀가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TV에서 본 그 끔찍하고 참혹한 유대인 학살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흑과 백이 구분되고, 둘이 결코 섞이지 않는 사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당연한 규칙이고 질서였던 60년대의 미국 남부 백인들에게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흑인과 결혼하려 했던 '불경스러운' 발상 자체가 아마도 그들 사회에 이미 자리잡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할 미덕이었는지 모른다. 그 시대 그 공간 속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으므로, 이 건너편 세상, 건너편 시간에서 그들을, 그러니까 그런 역사를 비난한들 의미없다. 매킨타이어 부인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게 옳은 거였으니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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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2-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가 아니라 질투 아냐요? ㅋㅋ 갑자기 이 글이 핫에 떠서 부랴부랴 오자 고쳤는데 그래도 한바가지 있네요. 심심하믄 오자랑 비문이나 좀 고쳐주지. 쪽팔리지 않게. 해마가 없어도 단순노동은 잘한다던데

CREBBP 2015-02-13 22:12   좋아요 1 | URL
댓글은 왜 원하는 위치에 안달리느냐고요

만병통치약 2015-03-0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축하합니다. 축하하러 왔는데 뻘 댓글들이 있어 삭제했습니다. ㅋㅋㅋ

CREBBP 2015-03-06 14:50   좋아요 0 | URL
난 또 뭔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았자나요

만병통치약 2015-03-06 14:52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in.co.kr/proposeBook/7409313

CREBBP 2015-03-06 14:57   좋아요 0 | URL
우왕 감사해요~~야호 신난다
 
고양이인 척 호랑이
버드폴더 글.그림 / 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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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호랑이는 외모적으로 비슷하다.  같은 과다. 진짜 같은 과. 찾아 보니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고양이아과이고, 호랑이는 고양이과의 표범아과 속이다.  육식성이 강하고 호랑이와 재규어를 제외하고는 물을 싫어한다는 특징이 있다. 




저자 버드폴더는 필명이다. 영어로 된 이름이라 외국 저자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트위터로 연재했던 그림 동화를 묶어 책으로 냈다. 동화책이라고 하기엔 두께가 두툼하고 양장이지만, 주로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호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있다고 하는데, 야생 피싱고양이으로 저렇게 생겼다고 한다. 


호랑이는 자신이 고양이인줄 알고, 고양이는 자신이 호랑이인줄 안다. 호랑이가 고양이로 알게 되는 건, 숲속에 버려진 아기 호랑이를 고양이인줄 알고 할머니가 데려와서 고양이로 키우면서부터다. 호랑이는 자신이 고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로운 날들도 잠시, 호랑이는 성장하고  호랑이의 신체적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고양이인줄 알고 살았는데, 호랑이처럼 변해가는 호랑이는, 그대로 고양이인채로 살고 싶다. 날카로운 발톱과 찌를듯한 송곳니가 부담스럽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지만, 호랑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서커스 단의 놀이개가 되거나, 동물원에 갇히는 것 뿐이다. 호랑이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대로 고양이이길 원한다. 



그러던 중, 호랑이처럼 생긴 고양이를 만난다. 처음 만남은 어색하게 시작되지만, 둘은 곧 친하게 되고, 둘 사이의 우정은 계속된다. 


트위터는 140자의 짧은 글을 통해 빠른 속도로 새로운 컨텐츠들과 정보들을 세상과 세상 사이를 통과시키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게 한다. 트위터의 리트윗 기능의 전파력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크다. 버드폴더라는 필명을 지닌 저자는 일러스트를 전공하고, 자신의 작품을 조금씩 조금씩 트위터를 이용해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그것이 퍼져 하나의 책이 되었다. 연재하던 시점의 트윗 글은 사라져서 찾을 수 없었지만, 작가로서, 그리고 사업가로서 트위터와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잘 활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트위터를 살펴보니, 애완 고양이와 길냥이들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 있었다. 


무섭고 험악하게만 알고 있는 호랑이 새끼가 따스한 할머니의 보호 아래 애완 고양이처럼 순해지고, 야성적 본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호랑이의 마음이 정말로 따뜻하게 전해지는 시작부터, 고양이를 만나고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잔잔하고 푸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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