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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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읽었을 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너무 허접하게 숙제하듯 쓴 것 같다.  지평을 읽고 나니,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애정이 생겨서, 주말에 다시 읽었다. 지평이 좋아서 파트릭 모디아노가 좋아졌는데, 사실 지평보다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더 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현재는 1965년이고 기억을 되찾은 기의 기억이 끝나는 곳은 1943년. 그리고 기가 기억을 상실한 시점은 10년전이다.  앞프스의 눈밭에서 연인을 잃고. 모든 재산을 잃고, 희망을 잃은 상태에서 살아왔을, 흥신소에서 일하기 전 12년이 소설 전체에서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그 알려지지 않은 간격동안에도 그는 연기처럼 잠시 머물다 흔적도 없이 흩어진 어떤 누구였을까. 무엇을 했을까.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기억상실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다시 따져보니 그게 비어 있다.  그 일과 기억 상실 사이에 있는 공백이 의미하는 건 뭘까. 전쟁은 끝났고 아마도 연인은 죽었거나 실종되었겠고 그 이후부터 기억을 잃었을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 기껏해야 쉬이 지워져버리는 연기처럼 수초도 머물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을테다.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 어둠속에 비친 환한 실루엣. 수초 후엔 바람이 흩어 놓을 모래 위의 발자국. 선탠을 즐기던 부자들의 모든 사진 한 귀퉁이에 한결같이  찍혀있던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변의 사나이.


그리고 그가 기억을 찾아 떠난 길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그처럼 존재감없는 사람들이다. 그 여정 속에 그가 만난 사람들은 어쩌면 페드로이자 지미이자 맥케부아이자 여러 사람으로 불렸을 자신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이 작은 조연들은 기만큼이나  적막하고 쓸끌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곁을 스치는 풍경같은 무심히 잊혀질 존재들이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외로운 자들이고, 그들을 파트릭 모디아노는 한명씩 한명씩 기의 기억 찾기 여정 속에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천장이 낮아 누워서 얘기해야 편한 스피오겔, 한 때 미국 시민권을 위해 결혼한 게이의 법적 남편이었고, 지금은 30년 어린 아내가 파티를 하는 동안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바에서 연주하는 한 때의 피아니스트.  공탁에 넘어간 귀족의  헛간을 30여년간 홀로 지키며 기억 속을 살고 있는 영지관리인. 드니즈와 함께 살던 집에서 그 오래된 인테리어를 전혀 바꾸지 않고 박제처럼 홀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 수십년전 드니즈가 모델이었던 무크 잡지를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드니즈의 어릴 적 담배 심부름을 하러 가던 가게의 주인, 극도의 불안 증세를 가진 그녀를 찍은 사진작가와 그녀 위층에 살던 사내를 죽였다고 믿는 푸른기사의 환영처럼 남겨진 목소리, 살해당한  그녀의 사진작가. 그 중 일부는 작은 서사적 실마리도 되지 못한 채 목적 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있다. 축복받고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결혼식날 혼자 남의 차에 웅크려 있다가 기에게 업혀간 신부처럼.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혹시 그가 찾은 기억이 왜곡된 거짓 기억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왜냐하면 그의 과거와의 첫번째 연결 고리가 첨부터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다시 따져보디로 했다. 기억 찾기 여정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소나쉬체. 그는 기를 보고 과거에 알았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연락을 해 달라고 했고 그 일이 직접적으로 자기 과거를 찾는 시작점이 되었을 것이다. 소나쉬체와 그의 친구 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스티오파와 함께 다니던 패거리였거나 카스티유 호텔 손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힌트와 함께 스티오파가 신문에 낸 가족 장례식 소식을 얻는다. 그 식당에서 결혼 파티를 끝낸 후 홀로 남의 차에 홀로 앉아있던 신부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에 또 무엇인가가 머리속에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끝내 모른다.


기는 소나쉬체가 준 신문 정보로 장례식장에 가서 스티오파를 미행해서 자신이 러시아 망명귀족에 대해 기사를 쓴다고 하면서 접근한다. 스티오파가 준 사진들 중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사진속에서 자신이 팔을 얹은 여자에 대한 정보와 사진들을 얻어간다. 사진 속의 여자는  게이 오를로프다. 기는 이제 이 여자의 관계있었던 주변 인물들과 그들의 기록 속의 흔적을 계속 추적해가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잡아간다.


기는 위트가 그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게이의 전남편 윌도 블란트의 이름과 체류번호를 알아내서 찾아간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때 그때 임기응변적으로 거짓말을한다. 소나쉬체에게 자신이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이 안먹혀들어갔으므로, 또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처지를 일일히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거짓말이 더 잘 통한다는 걸 안다.  게이의 전남편 윌도 블란트에게는 자신이 게이의 사촌이라고 말하고, 게이의 남친이었던 하워드 드 뤼즈의 사촌에게 가서는 하워드 가문에 대해 알고 싶다고 얘기해서 자신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리고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가 살던 저택의 영지 관리인에게는 미국에서 하워드와 친구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이제껏 자신이라 믿어왔던 러시아 망명귀족도 게이 오를리프의 연인도 아님을 알게 된다. 대신 사진 속의 다른 쪽에 서 있던 남자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남미에서 왔으며 또한 이름은 페드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거짓말 얘기로 돌아가면, 페드로로 자신의 과거를 급 회항한 기는  이제 페드로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프레디 가족이 남긴 유물 속 사진 뒤에 페드로의 전화번호가 메모된 것을 발견하고 집을 찾아간다. 오래된 집은 그대로 남겨졌고 그 집에 살던 사람이라고 얘기하자 여자가 페드로 면서 쭈뼛거리자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가 메케부아씨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자기의 성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서 들은 건 자신이 드니즈와 연인이었으며 드니즈와 국경을 넘기로 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에게서 받은 정보는 드니즈가 남긴 수첩 속에서 나온  드니즈의 출생증명서와 자신이 므제브 국경을 무사히 넘었을 때 연락책인 올레그 드 브레데의 전화번호다. 이제 드니즈의 출생지로 가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기억하는 남자에게 드니즈에 대한 정보와 그녀가 모델로 실려있는 잡지를 빌려오고, 사진 기자를 찾아간다.


이렇게 하나씩 정보를 찾아내다 끝에 가서 자신을 알아보는 그 시절 친구를 만난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아주 디테일한 기억 회복. 그 아름다운 스위스 국경 마을의 설경 속으로 펼쳐지던 한없이 슬프고 아련한 진짜 이야기 37장을 기억해낸다.


그런데 이 기억은 진짜였을까. 절묘한 타이밍에 경마 기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를 확인시켜주기 전까지는 사실상 그가 그 페드로라는 사실이 왜곡된 뇌의 거짓일 가능성도 높다. 왜냐 하면 처음 그를 알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소나쉬체가 알려준 스피오티오파는 사실상 이 전체 연결 고리에서 거의 접합점을 찾을 수 없고.. 또 거기서 발견한 무수히 많은 옛 러시아 사진들 중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찍어서 찾아가기 시작한 당사자도 사실은 자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또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찍은 것이 실제 자신이라면 이것은 너무 많은 우연의 남발이다. 이 우연의 남발로부터 건져낸 실존이 1943년 사라진 어떤 존재이고, 키와 덩치가 비슷하다는 사실밖에는 사실상 소설속에서 기가 페드로라고 증명된 건 없다. 뒤로 갈수록 그가 찾는 페드로는 점점 뚜렷하게 어떤 한 인물로 모아진다.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이제껏 하나씩 수집해온 정보가 하나의 실존으로 완성되어하는 동안 한 사람의 이미지가 그대로 기억으로 치환되는 왜곡일 수 있다. 만일 그 경마선수가 그를 알아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점점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일까. 모르겠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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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3-05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니까 지평은 2010년에 나왔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1978년에 나온 소설이에요. 아마도 지평은 작가가 많이 힘을 빼고 썼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작가들이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깊어질수록 작품이 좀 단순해지잖아요. 그만큼 단련되고 정제된 언어와 구조를 띤다고 할까요. 기네스님 리뷰를 보니까 왠지 제 취향에는 이 책이 더 맞지 않나 싶어요 재밌어 보여요. 잘 읽었습니다

CREBBP 2016-03-05 17:52   좋아요 1 | URL
딱 맞는 말씀이에요. 힘을 좀 빼고 쓴 소설이 지평이고 그 만큼 완결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읽고 나서 개운한게 대중을 존중한다는 느낌이고 이 소설은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삶을 전쟁터로 여기고 쓴 것 같지요. 그럼에도 간결한 미가 아름답습니다. 리뷰를 오랜만에 제가 다시 봐도 잘 모르는 거 있는데 제3자가 읽으면 어떨지 상상이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