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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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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머리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대체 왜 인간은 이 모양일까. 그리고 저자는 또 왜 이런 식으로 인간을 바라볼까. 피상적인 부분만 봤을 때 아름다울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는 것들, 사람들의 이면에 잘 드러나지 어두운 진실이 있다. 그것들을 포착한 저자의 붓끝은 냉담하지만 집요하다. 마치 전작품을 통해 똑같은 말. 인정해. 인정해. 인간이란 이런 거야. 뭘 기대하지. 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비극적인 결말을 눈꼽만큼의 자비도 없이 냉소적으로 차갑게 그려낸 소설들이 플래너리 오커너에 실린 작품들의 특징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어보였다. 등장인물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는 독자 개개인이 등장인물들의 삶에 스스로를 투영해보기를 원한 듯하다. 소설집인데, 장편소설처럼 한편 한편을 더 읽을 수록 작가가 구축해가는 차갑고 어두운 세계관 속으로 누적되어, 처음에는 아리송하던 단편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안개가 걷히듯 가시권이 넓어지면서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매료되는 지점을 만난다.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세계 각국의 영문학과 커리큘럼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지만, 내겐 생소했다.내게는 생소한데(생소한게 뭐 자랑이라고), 그녀의 <단편소설전집>은 전미도서상 6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왕중왕으로 꼽힌 작품이기란다.  중요한 건 1946년 첫작품 <제라늄> 발표후 5년만에 루프스 진단, 1962년까지 12년동안 루프스를 앓으면서 미국 남부 시골에서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서서히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들을 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녀의 절망적 삶 자체가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투병의 잔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울근불근한 근육을 가진 마초같은 남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난다.  


시대 배경이 1946년부터 1962년으로, 역사가 기억하기로는 한창 흑백분리 철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였으나, 그녀가 그린 남부 시골의 모습은 흑과 백은 다르다는 뿌리박힌 인습이 종교적 신념만큼이나 우세했다. 거의 모든 소설 속 미국 남부 등장인물들의 흑인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흑인 멸시 사상은 뿌리깊은 당대의 사회적 의식 구조를 그대로 발가벗겨 보여준다. 그들의 눈에 흑인들은 개개인의 이름이나 개별 인격을 가진 개체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검둥이들'이다. 그들은 대개 비슷하게 생겼으며, 좀도둑이고, 게으르고, 따라서 흥분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잘 다루어야 하는 대상들이다. 이런 '검둥이들'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의식은 특히 <추방자>에서 두드러진다. 



읽다보니 불편한 소설들이 편해졌는데, 그 이유는 소설들이 보여준 규칙성 때문이었다. 무수히 많은 단편들이 플래너리 오코너가 구축한 어떤 질서에 가지런히 배열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어 독자로서, 누군가가 죽거나 끔찍한 일을 당할 지 미리 안다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용이하다. 누가 죽을까, 왜 죽을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에 집중함으로써 죽음이 불러오는 끔찍함과 감정적 충격이 상대적으로 마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집에 실린  거의 모든 소설은 기승전엿으로 끝난다. 어느 하나 따뜻한 결말이 안도와 연결되는 경우는 없다. 누군가 죽거나 엿먹는다. 처참한 죽음 같은 빅엿이다. 서사가 매우 긴 장편 속 한 사람의 죽음이 그 긴 서사를 모두 설명한다면 그 죽음은 매우 무겁고 크고 고통스럽지만, 30여편의 많은 소설 대부분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나면 개별적 죽음들의 무게는 독자로서는 그리 무겁지 않다. 그래서 그 상징성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죽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죽음은 갑작스런 방식으로 매우 짧게 오기 때문이다. 조마조마조마가 시작되는 지점은 거의 마지막 페이지이고 그것이 끝나면 단칼에 벤다. 등장인물들은 죽음이 오는 순간 그 짧은 순간 착각을 알고  진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찰라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매번 똑같은 결론이라면 재미없을까. 그렇지 않다. 농도가 짙고 밀도가 높다. 에밀졸라라면 수십페이지에 걸쳐서 썼을 내용을 한 줄, 한 문단으로 표현하고 과감히 생략되어 있어서, 단편이지만 굵직굵직한 서사들을 만난다. 그런 서사가 끝나는 지점은 비극. 결국은 비극적으로 아주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결론을 맺는다. <추방자>에서 매킨타이어 부인에게는 자신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폴랜드인이고 백인 고용인에겐 자신의 직업을 위협하는 경쟁자였고, 게으른 검둥이들에겐 자신들의 좀도둑질을 주인에게 일러바치는 인간이었던 죄없는 유태인이 그 고생끝에 수용소를 탈출해서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죽을 힘을 다해 살다가 그 세사람의 무언의 공모로 트럭터에 깔려 죽는 장면을 처리하는 저자의 시선은 무관심에 가까운 서늘함과 차가움이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억울한 자들과 죽는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동정하는 것은 차라리 무지한 인습과 그 인습과 싸우는 절망적 개체들이다. 그녀는 그들을 차갑게 동정한다. 


모든 '검둥이'들에 대해서도, 또 그 어떤 선의의 피해자들에게도 그들 삶의 따뜻했던 부분을 일부라도 노출시키지 않는다. 완벽한 무관심, 차가운 외면. 21세기 우리들의 사회가 서로에게 보내는 그 차가운 시선 말이다. 작품집이 발표 순서대로 되어 있다면 초기작이 특히 차갑고 어려운데, 이녹과 헤이즐 모츠가 나오는 연작 소설로 보이는 몇 개의 소설, 그 중에서도 <감자깍는 칼>과 <공원의 중심>은 그 죽음의 의미는 커녕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녹은 헤이즐을 쫓아다니고, 헤이즐은 이녹에게 어떤 정보를 캐내려다가 안되니 돌을 던져 죽여버리고, <칠면조>에서 소년은 소설의 서사를 채우는 총맞은 칠면조잡기에 성공하지만, 가는 길에 일을 당하고,  <황혼의 대적>은 104세 노인이 62세 딸의 대학졸업식에서 죽고 <좋은 사람은 드물다>는 세가족의 휴가길에서  탈주범들에게 몰살당하고, <숲의 전망>에서는 거울처럼 닮은 어린 손녀를 노인이 목을 조르고 모리를 돌덩이에 찧어죽이고, <그린리프>에서는 소의 뿔이 농장주 부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와서 죽인다. 죽지 않는 경우라도 '내 다리 돌려놔'라는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헛간 이층에 갇혀 있는 것도 모른 채 '시골 사람은 좋은 사람들이야'라는 환상을 주문처럼 외우는 엄마가 <좋은 시골 사람들>을 통해 편견을 조롱한다. 


<불속의 원>은 평화로운 농장에 불청객인 세 검둥이 아이들이 주변을 맴돌며 제집처럼 행동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선한 인간의 악한 속성과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새로운 가치관과 낡은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코프 부인은 매사에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며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막상 몰상식하고 무례한 아이들의 방문과 요구에 당황함을 넘어서 불쾌하고 공격적인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은 천천히 가시화되어 가고, 그 농장이 자신의 농장이라고 다짐하듯 되뇌이는 흑인 아이들의 내면과,  뒷배경은 자세하게 나타나있지 않지만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흑인 멸시의 구가치관이 인간의 권리에 대해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 흑인들의 새가치관과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사회상을 포착했다. 


<깊은 오한>을 읽을 때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품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작가 자신과는 달리, 작품 속의 남자는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합당하게, 온당한 결과로, 인생의 선물로 오고 있'던 죽음이 멀리 달아나버리는 것은 실패한 예술가에게 비극적 죽음으로 메꾸었을 한줌 남은 자존심마저 앗아간다. 병명 또한 교육받은그가 흑인 일꾼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제스처로 젖소에서 바로 짠 멸균되지 않은 생우유를 흑인들의 거부로 결국 혼자서 다 마신 것의 결과로 생긴  파상열이라는 사실이 유머스럽다.  


'그 애는 앞으로 여기서 50년동안 장식품으로 살아갈거에요(p501)


냉소적인 누나의 예언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소설을 쓰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다시 시골로 내려와 새로운 가치관과 진보된 생각을 가진 고학력의 자신과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병과 함께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 작가 자신의 일부가 투영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행히 작가는 죽고 나서 더 많은 상을 받기는 했지만 죽기 전부터 이런 저런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 병을 알고, 죽음을 향해 귀향하던 그녀의 심정은 이런 <깊은 오한>의 주인공 에스버리가 느꼈던, 소통되지 않는 벽들 속에 감금된 깊은 절망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비극적이지만 그 중 유머러스하게 희화화한 이 작품이 주목되는 이유는 그런 이유들이다.


종교적인 색채도 오코너 문학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녀는 기독교도가 우세한 지역의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 종교적인 색체라는 것이 종교를 옹호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적 혹은 카톨릭적 종교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그런 사람들을 보는 비종교인에 대한 시선 같은 것들이다. 소설 속에는 광적인 신도들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백그라운드로 등장한다. 특히 <강>은 특히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단순하게 그 종교를 까는 건지 빠는 건지 구분할 수 없게 종교의 복잡한 속성을 매우 매우 너무나 안타깝고 비극적으로 그렸다. 6세 아이에게 갑작스레 다가온 종교적 세계가 강은 그를 영원하고 생명이 넘치는 세계로 데려다 줄 것으로 믿게하는 과정이 보여주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 그리고 소년이 경험하는 것들은 푸른색 실크처럼 정교하고 직조되었다. 


가장 좋은 소설을 손에 꼽기 어렵게 좋은 소설이 많았지만 그 중 <추방자>가 서사의 구조나 밀도로 볼때  장편소설같은 서사적 힘을 가진 소설로, 다른 소설에 비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도 이해하기 쉬운 소설이었다. 길이도 꽤 길고 흡입력이 있었다. 내용도 메시지도 애매모호한 작품집의 초반 작품과 달리,  마음을 후벼파며 느낌으로 전달되는 뭔가를 붙잡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결국, 이런 거다. 작가는 우리가 노출된 환경 속에서 '인습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냐' 라고 말한다. 여자(매킨타이어 부인)는 그 검둥이가 가지고 있던 사진 속의 예쁜 유태인 백인 여자 아이가 촌각을 다투는 살육의 현장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자신과는 상관 없는 검둥이와 결혼하는 일임을 몰랐을 리 없다. 중요한 건 이거다.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사고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신의 헛점을 덮는 방식으로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킨타이어 부인이 순진해서, 폴란드인이 자신의 사촌을 살리려고 '검둥이'와 결혼시키려는 의도의 영어를 이해 못해서, 수용소의 실상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읽어보니 매킨타이어 부인은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관심은 이제 그 누구의 죽음도 아니다. 단지 그녀를 붙잡은 뿌리깊은 인습, 검둥이가 백인과 섞이는 꼴은 볼 수 없다는 그 대단한 신념이다. 


이 불쌍한 아이를 여기 데려와 그 반푼이에 좀도둑에 더러운 검둥이하고 결혼시키겠다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다니 자네가 사람이야 괴물이야 301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가 어떻게 순진한 처녀를 여기 데려와서 그런 것하고 결혼을 시키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어 도저히 303


나는 이 세상을 향해 책임이 없어 303


그 사람은 외부인이고 여기 질서를 파괴하고 있어요 313


그녀는 이제 그 유대인들이 그쪽 세계에서 학살을 당하건 말건 상관없다. 아마도 애초에 그녀가 그 폴랜드인을 초청해, 일자리를 제공하고자 했던 이유가 그녀가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TV에서 본 그 끔찍하고 참혹한 유대인 학살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흑과 백이 구분되고, 둘이 결코 섞이지 않는 사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당연한 규칙이고 질서였던 60년대의 미국 남부 백인들에게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흑인과 결혼하려 했던 '불경스러운' 발상 자체가 아마도 그들 사회에 이미 자리잡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저항해야 할 미덕이었는지 모른다. 그 시대 그 공간 속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으므로, 이 건너편 세상, 건너편 시간에서 그들을, 그러니까 그런 역사를 비난한들 의미없다. 매킨타이어 부인이 알고 있는 세계는 그게 옳은 거였으니까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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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2-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가 아니라 질투 아냐요? ㅋㅋ 갑자기 이 글이 핫에 떠서 부랴부랴 오자 고쳤는데 그래도 한바가지 있네요. 심심하믄 오자랑 비문이나 좀 고쳐주지. 쪽팔리지 않게. 해마가 없어도 단순노동은 잘한다던데

CREBBP 2015-02-13 22:12   좋아요 1 | URL
댓글은 왜 원하는 위치에 안달리느냐고요

만병통치약 2015-03-06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축하합니다. 축하하러 왔는데 뻘 댓글들이 있어 삭제했습니다. ㅋㅋㅋ

CREBBP 2015-03-06 14:50   좋아요 0 | URL
난 또 뭔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았자나요

만병통치약 2015-03-06 14:52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in.co.kr/proposeBook/7409313

CREBBP 2015-03-06 14:57   좋아요 0 | URL
우왕 감사해요~~야호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