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삼촌 브루스 리 2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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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들이 나와서 의리를 이야기하고, 조악한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들이 몇년 전까지만 해도 판을 쳤었다.  폭력이 생활 수단이 되는 것을 묵인하는 사회 구조를 또다시 영화와 문학에서 묵인한다는 것이 이 부조리한 사회를 묵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이 소설도 깡패들이 나온다. 마초적이다. 힘 자랑을 한다. 개인에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 이상의 힘이 약자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나 소설 속의 폭력은 그 폭력의 힘으로 엄청난 양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거대한 서사의 흐름 속에서 폭력이 실제로 존재하는 깡패들의 폭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싸울 대상도 되지 않는 권력과, 그 권력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엄청난 바퀴라는 것을 시시각각 환기시켜준다. 술술 읽힌다. 


1편에서 생의 엄청난 굴곡을 경험했던 삼촌은 드디어 좀 잘 되나 싶었는데 산넘어 산, 강넘어 강이라고, 이제는 아예 살인 누명까지 뒤집어 쓴다. 그 누명을 혼자서 뒤집어 쓴 것은 바로 그 망할 놈의 사랑 때문이다. 삼촌은 사라진 연인(희망사항) 원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원정이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1편에서 계속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마치 머리가 나쁜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근거도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중국집 여사장을 만나서 가게와 집을 상속받는 것은 너무나도 억지스러웠지만, 그것으로 인해 결국 젊었을 때 저질러 놓은 아들과 그 아들을 버린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토끼가 저지른 살인죄를 우연히 술마시고 횡설수설하는 삼촌에게서 알게된 '나'가, 그 사실을 이용하여 종태와 토끼와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 부분은 눈을 뗄 수 없게 흥미진진하다. 종태에게 닥친 최후는 처음부터 불운했던 종태를 설명하는 작가의 한 방식으로 해석하겠다. 


민주화 운동에 자신을 바치던 첫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던 정치적 야망이 뚜렸했던 선배를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나'를 찾았다. 그들의 하룻밤과 첫사랑의 끝은 90년대 민주화 운동에 몸바친 젊은 사랑들의 초상화다. 그 얼마나 공허한 싸움이었나. 그러나 그렇게라도 천천히 역사는 흘러갔고, 개밥에 도토리가 된 X투사들은 정렬을 쏟을 대상을 잃었다.


지겹도록, 온몸을 바쳐서 멍들고 찢기고 투옥되고 상처받으며 사랑한 삼촌은, 결국 온몸을 다치고 찢기고 그 예쁜 얼굴마저 칼로 그어져 상처나 버려진 여배우와 인생의 맨 끄트머리에서 함께 남은 여정을 가게 된다. 아무리 깡패들 나오는 소설이라지만 감격의 눈물이 안나올 수 없었다. 근래 읽은 소설중 몰입도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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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0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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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0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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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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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1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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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1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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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5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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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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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문맥을 파악하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어떤 과거에 어떤 지역에 발음하기도 어려운 어떤 왕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어떤 지역을 정복하여, 이름만 아는 어떤 제도를 시행했다는 식의 역사는 학생들에게 나열적 지식이라는 한계에 가두지만, 이름은 잘 모르는 어떤 왕이 어떤 이유로 무엇을 했는데, 그것이 전인류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왕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어지고, 그 왕이 이룬 업적에 대한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저자 앙드레 모루아는 자국의 역사를 예리하게 통찰하는 식견을 반할만큼 센스있는 문학적 표현으로 완성시켰다.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프랑스 역사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야망과 반전과 배신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토록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갖는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 그렇듯 수많은 스토리를 담은 까닭은 유럽이라는 대륙에서 차지한 지형적 위치도 한 몫 하는 것 같은데, 이를 이해하려면 태고적에 지금 프랑스라 불리우는 지역들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기 시작했는지를 아는 일부터가 시작이다.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 책은 1958년 파리에서 첫 출간된 프랑스인들을 위한 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기초 지식은 '국민적'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으리라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국내 역사서들이 세종대왕을 평가할 때 그는 훈민정음을 창조한 왕이다 라고 따로 언급하지 않고, 그것을 만든 배경이라든가 역사적 의의에 대해 주로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의 가장 매력은 각 장의 부분 부분에 기억하고 적어놓고 싶은 수많은 명언에 해당하는 평가들과 통찰을 한도 끝도 없이 쏟아내는 점이다. 역사책이니만큼 순서대로 진행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역사 서술에 철학적 문학적 평가가 함께 등장하다보니, 내 지식의 결함으로 인해 시대와 인물과 지명들이 종종 혼동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위키백과와 지도 이미지등을 뒤져가며 읽어야 해서 읽는 데 오래(한 달) 걸렸다. 


우리가 학교에서 국내 역사를 배울 때에도 가장 최근인 조선 500년의 역사에 대해 가장 많이 배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역사를 이야기하는 850쪽에 이르는 두꺼운 이 책에서 10C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오직 80여쪽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실 그보다도 더 적은 수십쪽에 불과한데,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그 기원을 어디부터 보아야할 지 애미할만큼 유럽 내에서의 각 왕국의 힘과 국경선의 지각변동은 수시로 크게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전부터 앙드레 모루아를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우연히 미리보기에서 '프랑스 인종이란 것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p22)'라는 구절에서 강한 끌림을 느껴서 읽게 된 이 책에서 그렇다면 프랑스인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내게 인종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프랑스인이라면 유럽이라는 공동체 속에서도 그 정체성이 굉장히 돋보이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 정체성이라는 것을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볼 때, 현재의 위치는 계속해서 그의 선조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저자는 '역사는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연구해 미래에 영향을 줄 인자를 기록하는 일(823)'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는 끊임없이 흘러 역사가 되는 현재를 설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그의 선조들이 스스로 선택해온 역사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 


여러 부족들이 뭉쳤다 흩어지고 침략과 합병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왔던 유럽대륙의 한복판에서 차츰차츰 자연적으로 굳어지는 경계선을 만들어가면서 오랜 기간동안 형성된 국가 단위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했을 때 언제부터를 프랑스의 역사라고 보느냐에 따라 그 기원을 어떻게 보느냐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의 프랑스 국경선 내의 지역에는 기원전 10세기경 리구리아인과 이베이라인의 후손들이 살았고, 이후 켈트 문명이 유입되는데, 여기에서 다시 앙드레 모루아는 '사실 켈트라는 민족 단위가 정말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23)'고 말한다. 켈트는 켈트족이라는 인종이 아니라, 켈트어와 철기 무기를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문명 속에서 동질성을 찾을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에는 켈트족이 북쪽 지방에 사는 희고 키크고 금발인 야만족을 통칭한다고 적고 있다. 한편 로마인은  현대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에 사는 켈트족을 골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프랑스를 다루는  이 책에서 '켈트 = 골'이고, 결국 프랑스 인(종)이라는 것은 그  전부터 살고 있던 리구리아인과 이베리아인에 켈트족인 골족이 합쳐살다가 로마 정복으로 갈로-로마인이 되었고, 이후 3세기 후 로마의 힘이 약해지면서 침입하기 시작한 게르만족이 점령하고 정착하여 갈로-로마인의 문화에 흡수된 다민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히틀러가 주장하던 아리안인을 포함하여 순수 혈통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라는 생각이다.


갈로-로마인을 접수한 게르만족은 포악하고 간교하며 잔인한 야만인으로 '동일 혈통에 속하는 사람들의 무질서한 집단(41)'이며, 가령 동고트, 서고트, 앵글로색슨-튜턴, 반달 등을 포함한다.  여러 부족들이 무질서하게 왕국을 수립하였고, 북부 골 지방 역시 프랑크족에게 점령당하는데, 골 지방에서는 클로비스(466-511)이 골지방의 모든 게르만족을 제압해 골 지방의 지역적 통일을 달성했다. 그들은 당연히 이교도였지만 갈로-로마인 여성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라틴어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해 주교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부터 로마 집정관이라는 칭호를 승낙받음으로써 왕권의 영속성을 확보(p45)한다. 저자는 오귀스탱 티에리가 1세기 전에 쓴 역사 저술서를 이렇게 비판한다. 


자유주의자인 티에리는 자신을 갈로-로마인의 후손으로 믿고 싶어하는 프랑스의 일반 민중을 프랑크족 후손인 이기적인 귀족계급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것이다. 갈로-로마인의 대지주들은 중신, 특히 메로빙거 왕의 주위를 둘러싼 주교들과 함께 지냈다(p47) 


갈로-로마인들의 대지주는 게르만의 군단 간부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합쳐져서 투지 귀족과 무사 귀급이 형성되고, 왕가는 터키의 할렘과 노예시장을 방불케 할만큼 타락했고 음모와 불화가 끊임없었지만, 교회 세력은 점점 커지고 금욕과 복종 노동을 가르친 수도원은 신기한 매력이 있어서 야만적 사회를 교화시켰다. 아무튼 '게르만 족의 침략으로 인한 로마제국 멸망과 행정조직 해체는 무서운 진공상태를 형성했고, 그 공간은 주교제도, 봉건제도, 군주제도가 서서히 메워나갔다(p51).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의 역사에서 기원부터 14세기 중세까지의 를 1장에서 170여 쪽에 걸쳐 다루고, 이후 2장에서는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해당되는 시기인 15~ 16세기를 다루고, 3장은 루이 14세에 그 절정을 달린 17~18세기의 절대왕정의 시대를 다룬다. 4장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시작되어 혁명과 제정 공화국을 반복했던 열정과 어리석음이 교차하던 시대를 통찰하며 100여년에 걸친 유혈혁명과 역사적 의의, 그 속의 숱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그후 근대사는 5장에서 체제동요의 시대에서 혼란의 시대로 라는 제목으로 1815년~1875년의 불안하고 다양했던 정치 체제를 다루고, 6장에서 제3공화국의 수립과 양차 대전을 거쳐 당시의 현재인 번영된 프랑스 조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어느 장 할 것 없이 모두 재미있었고, 흥미로왔는데, 역시나 대혁명 시기의 프랑스가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며 조금씩 진전시킨 공화정과 좀비처럼 끝없이 부활되는 왕정 및 제정의 분열된 상황이 계속되는 과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각의 역사적 사건과 의의를 저술한 저자의 통찰은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프랑스 혁명은 폭동이 아니라 목가적인 분위기로 시작되었다'로 시작되는 4장 프랑스 혁명은 숱한 피를 뿌려가며 성공과 실패를 되풀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류사의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음이 틀림없는 사건이다.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던 사회 불안과 반동에 대해 충분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도 보인다. 준비되지 않은 혁명이었던 것이다. 민중은 너무 쉽게 함락된 바스티유 사건 이후 민중의 힘을 알았고 '그 날의 사건은 프랑스인과 세계인의 눈에 상징적인 업적으로 길이 남았다. 


전국민이 봉건적 권리와 특권 폐지, 과세에 대한 의결권과 재정감사권, 검열제도 폐지를 원했다. 이러한 조건이 관철되었다면 아마 프랑스 군주제의 황금시대가 다시 열렸을 것이다.(467)


장 폴 마라는 전국이 공포 상태에 놓이도록 귀족과 성직자 학살을 선동했다. 모두가 재판관을 자칭했고 모두가 유혈을 즐겼다(464)


공포정치가 공화국을 구제했다는 것은 사실인가? (...) 애국적인 장군을 단두대로 처형한 것은 범죄인 동시에 커다란 과오였다. 하지만 당시는 잔인성을 인격의 미덕으로 간주하던 시기였다.(...) 


파리에서 약 2,800명 지방에서 1만4천명이 처형되고(..) 처형된 사람들은 대부분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였다. 


롤랑부인은 말했다.  "민중이 빵을 요구하면 시체를 주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시기가 오고야 말았다"


에베르가 죽자 이번에는 당통의 차례였다. (...) (당통은) 권태감을 느끼며 과거에 대한 회환을 되씹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단두대에오르는 편이 낫다(...) 그리고 나는 이제 사람에게 신물이 난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냐는 초병의 검문에 그들은(노동자들) "텅빈 배때기다"라고 대답했다. 혁명에서 이득을 본 신흥부호들의 사치스런 생활, 연회와 무도회, 호화 의상을 입은 파리의 부인들을 보고 노동자들은 한층 더 궁핍함과 비참함을 느꼈다. 텅빈 배때기들은 썩은 황금 배때기가 더욱더 살이 찌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상표는 바뀌어도 내용물은 동일하다는 것이 통일의 비결이다(...)

통령을 창설한 혁명력 제 8년 헌법은 독재적이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다수로 승인받았다.

"이제 일반 대중은 의회에도 정부에도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바꿔말해 프랑스는 귀족 계급만 바꾸었을 뿐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통령정부는 선언했다. "시민여러분! 혁명은 애초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혁명은 완성되었습니다. "

이것은 10년전 미라보가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선언은 할 수 있었던 일과 정확히 동일했다. 


국민은 보나파르트의 추억과 대혁명의 추억을 하나로 결부시킨다. 그리고 보나파르트파의 자코뱅당은 하나가 되어 반대당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마침내 1830년의 황제의 환영이 부르봉 왕가를 추방한다(p546)


혁명과 제정은 구체제 종말이라는 동일한 사건의 양면이다. 보나파르트의 독재는 열월 사건 이후 정치적 무정부 상태가 빚어낸 불가피한 소산이었다. (...) 영국 군주제처럼 봉건 제도에서 민주제도로, 특권에서 평등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지배했다면 프랑스와 세게는 좀 더 평온했을 것이고.(p552)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하지만 수많은 나라들의 각축전인 유럽에서 산맥과 바다, 강들이 이루는 자연적인 국경 내에 위치한 프랑스가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루어 중앙집권적인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전쟁과 흥망성쇠를 경험해야 했다. 이 책은 프랑스라는 추상적인 집단이 주인공이 되어 이제는 과거가 된 책의 출간 시기인 20세기 중반까지의 역사를 거대한 이야기로 담아낸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야기속에는 침략 전쟁, 왕위쟁탈을 위한 내전, 사상과 이념의 유혈 충돌, 그 속에서 꽃핀 빛나는 문화, 애국심, 종교를 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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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박도봉의 현장 인문학
김종록.박도봉 지음 / 김영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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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일손이 모자라는 곳이 있다. 중소기업이 그렇고, 제조업이 그렇다. 먼저 제조업을 생각해보자. 제조업 인력은 해외에서 조달한다. 공장을 밖에다가 세우기도 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오기도 한다. 이것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일하러 오는건가. 아니다. 기업이 기대하는 '저렴한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측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수출 위주의 국가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가격으로 물건을 팔려면 국내의 청년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 불균형에 대해, 고성장 시대에 청년기를 보낸 기득층은 '편한 일만 찾으려는 요즘 젊은이들' 탓만 한다.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비록 쉽게 공무원이 되었지만 어찌되었던 시간만 무사히 보내면 성과에 관계없이 근속년수에 비례해서 차곡차곡 월급이 오르던 공무원들이, 공기업 직원들이, 교수들이, 그 기득층들이 직접 물건 만드는 곳에서 땀흘려 보았느냐 말이다.

 

좋은 시절 만나, 걱정 없이 젊음을 마감하고 은퇴해 고액의 연금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논의에서 시대를 잘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고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그들의 그 안정된 수입이 왕족처럼 떠받들던 70년대 우상의 딸에게서 나온거라고 여겨지더라도 그냥 그걸 속으로 생각하고 있길 바란다. 그들의 잣대를 현대의 청춘에게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 그들도 딸이 있고 아들이 있고, 딸들의 딸이 있고 딸들의 아들 아들의 딸 아들의 아들이 있으므로 그 아이들의 미래가 남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2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으로 갔다고 치자. 그들 세대의 평균 나이는 90이 넘을 터인데, 공장에서 몸을 혹사당하면서 남은 인생을 거기에 걸 수 있을까. 국제적 경쟁 구조가 바뀌어 버리면 쌓아놓은 기술이 무용지물이 된다. 망하고 흥하고는 시간이 결정한다. 그렇기에 골수만 빼먹고 버려지는 제조업 현장이라는 이미지가 부당하기만 한 건 아니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제조업 자체가 비전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근거없는 비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제조업 근무 경험이 어른들은 일자리가 넘쳐나는데 편한 일만 찾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해보자. 제조업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제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이런 시대에 제조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주목해볼 만 하다. 70년대라면, 80년대라면 모를까, 아직까지 제조업으로 성공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가 비록 흑수저로 태어나 지방대를 졸업한 그저 그런 청춘의 시작이 80년대였다 할지라도 IMF를 이겨내고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값싼 중국 제조업 홍수를 경험하고, 그대로 제조업으로 세계 속에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는 하는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무일푼 기름밥 열처리공에서 1조매출 흑자 기업을 일군 알루코그룹 CEO 박도봉. 그는 말한다. 현장으로 가라. 현장에 답이 있다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열정과 노하우를 응축시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조금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희망의 목소리를 주려면 성공한 사람의 자기자랑식의 자기계발서는 답이 아니다. 이 책은 학자이자, 작가인 김종록이 알루코 회장(?) 박도봉에게 질문하고 답하면서 그 치열한 삶의 족적들을 따라가며 가치와 의미를 담아내었다. 김종록 작가의 이름이 눈에 익어 이력을 살펴보니 얼마 전에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저서를 썼던 작가이다. 그 이전에 쓴 <소설풍수>는 밀리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나는 읽어보지 못했다. 때로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가 있다. 뭔가가 몹시 혼동흐러울 때, 잘 모를 때 내가 가끔 쓰는 방법은 질문해보는 것이다. 대상은 누구가 되어도 좋다. 누구에게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답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묻는 과정 속에는 목적이 포함되고, 그 목적이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답이 생길 수도 있다. 누군가가 없다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하면서 답을 구하다보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김종록 작가가 묻는데 그 물음은 간단하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철학, 역사, 예술,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지식들이 함께 있다. 대답하는 사람은 질문을 통해 돌아온 삶을 정리하고, 중요한 것이,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도봉 회장은 일단 와이프를 잘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자기 집 식구들 동전 한 푼 안보태주고 반대할 때, 아내의 뚝심있는 결단과 지지는 그에게 가장 힘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 아이를 키우면서 직원들 밥을 해주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사업자금을 구하러 다니면서 사업을 함께 일구었다. 이런 일은 절대적인 신뢰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아내의 직장 경력이 그러한 용기 있는 가치 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듯 싶다. 어쨌든 신뢰한 건 막연한 기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보여주는 행동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이라고 하면, 지는 해가 연상되지만, 박도봉 회장의 성공담은 우리나라 제조업이 나아갈 길, 더 나아가 길잃은 청춘들에게 제시하는 작은 희망의 등불이기도 하다. 세상은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기술은 계속 정교하고 복잡하고 발전하고 있는데, 그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면 시장은 세계 전체가 되고,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다소 뻔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부딪히고 깨달은 디테일한 경험담들은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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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세끼 by 이밥차 2 - 완벽한 레시피로 다시 만나는 삼시세끼 by 이밥차 2
이밥차 요리연구소.tvN 삼시세끼 제작팀 공동 기획 엮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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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끼니는 닥쳐온 끼니를 해결할 수 없지만, 바로 앞에 지나간 끼니의 메뉴는 닥쳐온 끼니의 메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이를 어기게 되면 입맛을 잃어 다이어트 효과가 있게 될 지도 모르겠으나, 식사 담당이 비난을 면치 못한다. 하루 세 번 닥치는 끼니의 종류를 결정하는 일은 평생 경력의 9단 주부의 경험으로도 쉽지 않다. 매일 먹는 점심 흔하고 흔한 길바닥의 음식점을 고르기조차 그렇게 힘든데, 집에서만 구성원 제각각 다 다르고, 유독 집에서만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가족들의 식단을 세 번 결정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삼시세끼를 즐겨본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하루 종일 밥 하고 먹고 밥하고 먹고 하는 그 진부해 빠진 흔하디 흔한 일상을 왜 넋놓고 보는 걸까. 출연자들의 입담이 재치있거나 억지 웃음을 강요하는 요란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도 아니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요리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호화로운 요리 프로그램도 아니고, 가장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공개하는 방송도 아닌데, 그저 하루 무사히 세 끼의 끼니를 때우기 위헤 네 식구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매번의 식사 때마다 앞마당에 심어 놓은 고추를 따고 상추를 씻고 물고기를 잡아다가 나무에 불을 지펴 음식을 해야 하는 요리 방식이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같은 건 마음이고 다른 건 방법이다. 삼시세끼가 훈훈한 건 요리를 매개로 가족 단위의 구성체가 하나가 되는 그 모습, 점점 멀어져가는 온가족이 밥상에 모여 세끼를 해결했던 풍경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먹는 것을 준비하는 마음, 준비해준 것들을 함께 먹는 것의 따스함을 공유하는 거다. 식재료에 대한 제약 때문에, 카메라 바깥에서라면 간단히 슈퍼 마켓에서 사서 해결했을 모든 것들을 하나씩 다 만들어서 먹는 모습은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 공산품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져서 고추장과 김치 뿐만 아니라 마요네즈, 케찹, 튀김가루, 요구르트 같은 부재료들을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막상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해내는 모습은 하나의 챌린지 프로그램으로서도 기능한다. 


연기가 아닌 요리에서는 평범하기만 한 남자들이(물론 차승원은 예외다) 모여 끼니를 궁리하는 프로그램에서 만든 먹거리가 대단한 것일 리가 없다. 바로 그 점, 누구나 언제나 따라할 수 있는 누구든 먹어본 음식, 누구든 만들줄 아는 음식을 만들기에 그들이 제대로 하는지,  저렇게 해도 맛이 나는지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도 방송이 많아지니까 메뉴도 다채로와졌고, 제작진과 출판사에서는 소개된 메뉴들에 대한 제대로된 레서피를 개발해서 이번이 벌써 두번째인 책을 내었다. 


TV에서 본 것도 있고 안본것도 있는데, 의외로 빵류를 많이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빵을 만들려면 여러가지 도구도 많이 필요하고 정확한 계량과 오븐과 장비도 필요한데, 척박한(?) 환경에서 많이도 만들었다. 어려운 빵 말고, 집에 있는 도구로, 집에 있는 시설로 쉽게 만드는 방법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주 간편한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날의 끼니로라도 그것을 만들어낼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면 음식은 없다. 오늘 저녁은 뭐 해먹지? 고민고민하다가 또다시 김치 찌개, 또다시 생선구이.. 이렇게 쳇바퀴 돌듯 돌지 않고, 아무데나 펼치면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집에 있는 재료로 뚝딱뚝딱 생각지도 않았지만 누구나 먹어보았던 흔하고 친근한 요리들을 만들 수 있다. 계량된 레서피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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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남자는 무적이다
후쿠모토 요코 지음, 김윤희 옮김 / 오브제(다산북스)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했다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 김훈, <칼의 노래> 중


예전부터,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그 말을 어디서 듣고 와서는 불쾌해했다.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 하나 자기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무능한 퇴직 남편들에 대한 더 심한 농담들도 많다. 평생 가장으로 식구들을 먹여살리느라 밥을 직접 지어먹을 시간이 없었을 뿐이라고 억울해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평소 차려주는 밥상에서 숟가락만 들 줄 아는 남자는, 전업주부 아내가 거울처럼 닦고 가꾸어놓은 부엌의 식기들과 정리해놓은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스스로 요리를 한다는 게 자칫 아내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쓸데 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남자의 요리를 막을 권리는 누구도 없다. 


우리집에 사는 어떤 남자는 생각이 남다르다. 남자의 독립과 자유는 요리할 줄 아는 정도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 같다. 남자가 요리를 하면, 여자는 자유롭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냉장고 정리 차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냉장고에서 오래된 야채가 물이 질질 나오는 상태가 되거나 안먹는 반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소파위에 오줌싼 강아지처럼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냉장고 문을 열고 씩씩거리는 남자를 피해다니게 된다. 반면 밖에 나가 노는 측면에서 보면 여자는 자유롭다. 여자들이 어디 놀러갈 때 가장 부담되는 건 집에 있는 남자들 끼니인 경우가 많다. 요리를 잘하는 남자가 집에 있으면, 남자가 집을 몇일 비우는 동안 오히려 집에 있는 여자가 끼니를 굶게 되더란 말이다. 


우리 집에 사는 남자를 기준으로, 그리고 삼시세끼의 길다란 남자 차승원을 기준으로 만든 책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이탈리아나 중식이나 하는 완전 전문화된 요리책이다. 반면 이 책은 요리의 필요성도 모르고, 요리를 전혀 할 줄도 모르고, 요리에 관심도 없는 사람을 위해 요리의 필요성에 대해 쓴 책이다. 요리는 즐겁다, 요리는 필요하다, 요리를 할 줄 알면 여러가지 좋은 점이 많아, 이런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 권에 걸쳐 써놨는데, 형광펜으로 중간중간에 밑줄까지 쫙쫙 그어져있다. 뒤편에 레서피가 몇 개 있는데 그건 매우 유용하다. 저자에게 서민 교수의 글쓰기 책을 권하고 싶다. 내용이 있는 책을 쓰란 말이다.  어쨌든, 요리가 무서워서 혹은 와이푸가 무서워서 끼니 때마다 사먹는 영식이가 되지 말고 신선한 재료로 스스로 만든 음식으로, 당당한 삼식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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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1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나는 거 만들어 주는 사람 싫어할리가 없겠죠..요리는 못하고 음식은 약간 하는 편인데 좋아해주니 신나서 더하게 되더군요 ..ㅎㅎㅎㅎ물론 자뻑도 좀 있어요 ㅋ~

CREBBP 2016-07-15 13:47   좋아요 1 | URL
요리하는 남자는 자뻑 자격이 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