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부처럼 맛집만 모아놓은 목록이 한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보다 훨씬 유익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맛집이란 게 뭔가? 맛집이라는 말이 어디서 유래된 건지 모르겠지만 정의는 애매하다. 맛있으면 맛집인가? 티브이에 나왔으면 맛집인가? 오래된 노포가 맛집인가 ? 블로그 포스트가 많으면 맛집인가? 맛집이던 아니던 먹거리 엑스파일 착한 식당이나 비슷한 류에 뽑혔다면야 가리지 않고 들어가겠지만, 한시간씩 기다릴만한 정성은 없다. 579개의 맛집 정보를 제공하는 이 책이 휴대폰에 있으면 사정은 다르다. 음식을 고르고, 책을 펼치고 몇페이지 남짓한 해당 요리의 맛집 정보를 바탕으로 가까운 집을 찾아가면 된다. 아쉬운 것은 지방의 음식점이 서울 수도권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는 거다 579개의 식당 중 광주의 식당은 겨우 서너곳 밖에 없다. 고로 순수하게 가까운 곳 중 맛있는 걸 먹고자 할 때는 무용지물이다. 전남권으로 확장해봐도 그리 많지 않다. 제주도도 다르지 않다.

책을 구입할 때의 기대와는 달리 여행다닐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값진 정보가 있다. 그리고 재밌다. 저자는 미식가로, 수도 없이 식당을 다니며 맛을 탐구했고 수많은 미식가들과 어울려 정보를 나눴기에 미식가들의 기준에 맞는 진짜 음식점들, 원재료의 맛으로 맛을 내는 식당들을 잘 알고 있다. 거기서도 가장 맛있다고 음 이건 진짜야 하는 집들만 꼽았다. 양념맛이 재료맛을 덮는 그악한 음식들은 아웃이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족발을 먹고 싶다면 이 책을 뒤지면 된다. 진짜 깊은 국물 맛이 뭔지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을 뒤지면 된다. 음식에 대한 사색적이고 산문적 문체는 덤. 국수가 땡길 때 맛있는 국수의 기준은 다르다. 면빨이 쫄깃쫄깃한지 야들야들한지 국물이 매운지, 맑은지, 담백한지, 식당 주인의 인상에서부터, 그 식당가면 어떤 연령층의 손님들이 어떤 말을 묻는지 까지 메주알고주알 정보가 있다. 한줄 한줄 유익하고 실용적이다. 소개하는 식당 메뉴는 우리가 자주 먹는 서민적 음식들 위주다. 식당들의 요리 특색을 알 수 있어 입맛에 맞는 곳을 찾아가면 되는다.

수도권에 살면 유리하겠다. 춘천 막국수는 한때 메밀이 많이 나는 고장 사람들의 소울 푸드였지만 춘천가면 사먹는 먹거리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그악한‘ 음식을 찾는 외지인의 입맛에 맞게 강한 양념 범벅이 되었다. 메밀의 순하고 밋밋한 하지만 춘천 사람들은, 그리고 미식가들은 아는 메밀 특유의 구수한 맛은 그 맛을 아직까지도 제공하고 있는 한적한 시골쯤 가야 한다. 그 시골집이 입소문을 타서 며느리에 딸들이 분점을 낸 서울 식당들이 위주이긴 하지만, 서울 사람들에겐 희소식이다. 춘천 가면 막국수 먹을 집을 여기서 골라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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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1-0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제 기억력을 믿을 만한게 못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분 글을 읽다가, 어떤 설렁탕 집을 소개하며,
처음엔 소금과 파만 넣어한 반 정도 먹다가,
반을 넘어가는 지점에서 깍두기 국물을 넣어 먹으라고 자상하게 소개해 주셨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글을 참 맛깔나게 쓰셨던 걸로~!^^

CREBBP 2017-01-13 12:58   좋아요 0 | URL
확실히 글재주가 있으신 분이더라구요. 하긴 맛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도 일종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구냥 맛있다 짜다 말고는 맛을 평가하는 언어가 참으로 빈약하던데, 책한권 가득 맛에 대한 단어로 메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 같습니다. 이북을 휴대폰에 넣어다니니 편하더라구요.
 

배는 누었다. 선택은 두 가지다. 빨리 해체해서 버릴 것인가. 구조해서 활용할 것인가. 시간이 무한한가. 한 번뿐인 인생이지만 쪼개고 또 쪼개면 인생이 유년,청년,장년, 노년기로, 그것이 다시 10년 단위 인생으로,1년으로, 한달로, 하루로, 1시간으로, 10분으로 1분으로 1초로 무한히 쪼개지므로,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한을 인생의 무한으로 환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길은 무수히 많다. 길이 많다는 건 길의 개수가 많다는 게 아니라 선택의 순간이 많다는 거다. 무수히 많지만 한 순간에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둘 중 하나, 0과 1, 한다와 하지 않는다, 참과 거짓 , 온/오프. 무수히 많은 찰라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고냐 스톱냐를 결정하며 길을 걸어간다. 평생토록 인간을 괴롭히는 결정이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길이 많은 건, 그 많은 살아가는 많은 순간동안이 그 순간순간을 이루는 모든 시간이 알게 모르게 선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많은 순간과 그많은 양자택일의 조합은 무한하다. 컴퓨터와 인간이 다를 게 없다. 0과 1로 이루어진 무한한 세계(어쩌면), 그것이 인생이다. 고스톱 게임은 숨쉬기를 껐을 때에야 끝난다.

선택은 언제나 직관이 한다. 직관은 유전자에 박혀진 코드들의 어떤 조합이 그동안 살아온 생, 순간순간들이 선택해서 만들어낸 삶의 경험과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또다른 순간적인 선택이다. 여기서 살아남을 것인가. 이 말은 또다른 무수한 말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함께 썩을 것인가. 여기서 내 젊음을 탕진할 것인가. 여기서 이대로 소모될 것인가. 배가 왜 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회사는 배가 눕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회사라는 것. 막 진수를 마친 새 배가 그대로 한쪽 면을 물에 잠그는 것을 묵도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서른을 넘은 젊은이는, 이제 청춘이랄 수도 없는 남자는, 희망 없는 잡지사 기자 생활을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와 새로운 길이라고 도전했던 이 중국 내 한국 조선사의 말단 직원은 배를 만들어 보기도 전에 배가 눕는것을 본다. 누운 배는 이제 그의 일이되었다. 보험사와 협상을 한다. 가능하지 않았던 일을 가능하게 한 팀장의 추진력과 능력을 배운다. 배는 누웠지만, 거짓은 진실이 되어 보험사에서 전액 보상을 받고 그 누구도 책임을 캐지 않는다. 무엇이 배를 눕혔는가는 관심대상이 아니다. 배가 누울 수 밖에 없는 조직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미 누운 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있을 뿐이다.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해체해서 구할 수 있는 부품과 고철을 처리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러나 공동체의 결정은 공동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모습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신처럼 군림하는 어떤 힘에게서 나온다. 그것은 회장이다. 회장의 말은 진리다. 작은 블록 회사에서 시작해서 굴지의 조선사를 일군 회장은 전설처럼 누운배여 일어나라 했고, 기적처럼 배가 일어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했으므로 회장은 또다시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1여년 바닷물에 몸을 잠긴 채 누워있던 반쪽이 말짱했다면 말이다. 기적처럼 배를 움직여 누워 있던 배를 일으켜세웠으나 진실의 한쪽이 썩은것임이 드러났을 때, 신은 아무말도 었다.

회사 생활을 하려면 여러가지 규칙을 배우게 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조직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차곡 차곡 올라간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배워야 하나. 자기개발서들이 알려주는 것은 천하에 아무 걸림이 없이 완전히 신이 된 회장급의 인물이거나 능력에 따라 진급이 어느정도 보장되는 말단급 사원들에게는 대체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인생을, 성공을 스스로 정의내려야 하고 많은 변수들의 어떤 항을 선택해서 얼만큼의 에너지를 쏟을까의 문제가 개입된다. 공동체 입장에서 봤을 때 회사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주인공은 두 가지의 큰 흐름 속에 선택에 직면한다. 사장의 두 팔인 무능과 탐욕과 부패의 상징인 임원들과 결별한 팀장은 그 어려운 때 누운배의 보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커다란 업적을 만들어내지만, 무능한 임원들보다 능력이 뛰어났기에 업적을 가로채이고 진급에서조차 누락되고, 회사를 나간다. 채권단에서 선정한 새로운 사장 황사장은 탁월한 작업능력과 끊임없는 혁신, 불타는 열정으로 이 썩은 조직과 싸워 통채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회사를 조금씩 변화시켜나가지만, 그의 영향력이 신보다 강하면 안되는 거였다는 교훈을 남기고 초라하게 떠난다.

주인공의 갈등은 여기에 이다. 처음부터 엉망진창인 회사에서 팀장의 일하는 방식을 흠모하였지만, 힘있는 임원들에게 붙어먹지 않는 것에 불안과 불만을 함께 느낀다. 팀장의 탁월한 업무 능력에서 스펀지같이 많은 것을 빨아들이며 일을 배우고 멘토처럼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회장으로부터 탄력있는 힘으로 탄탄한 가림막이 되고 승진과 보상이 뒤따르는 저쪽 편의 안락함이 필요함을 느끼는거다. 황사장의 혁신적인 관리로 변화하는 회사를 지켜보며 한동안 황사장은 인생의 멘토로, 스승으로, 본받고 싶은 인물이지만 그(황사장)의 순수한 열정이, 조직에 대한 헌신이 오히려 그의 인생을 실패로 이끄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이, 이 썩은 조직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나태하고 방만한 임원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전 인생을 통해 틈틈히 황사장과 같은 열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끊임없이 배우지만, 그것은 이상화된 사회, 당연히 우리의 이성이 그렇게 굴러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황사장과 팀장 같은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그런 사회에서나 가능하다. 물에 잠긴 반쪽은, 차라리 물에 잠겼을 때가 나았다. 그 처참하게 썩어 흉칙한 몰골을 밖으로 그대로 드러내 보였을 때, 그것을 안보았다고 못보았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우리 속에 군림하는 신과 같은 어떤 힘은 힘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 우리 사회의 반쪽,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그 반쪽, 뜯어 내어 분해하고 고철로라도 팔아 치워 없애야 할 썩어빠진 반쪽이 여전히 필요하다. 사회에 맞지도 않는 이상화된 자기계발서보다는 조직의 인간 패턴을 다루고 실리를 쫓는 방법을 신랄하게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책을 오히려 청년들의 썩은 사회 적응용 자기계발서로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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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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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기억나지는 않지만, 둘러앉은 그룹에는 누군가 무서운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 있고, 또 간이 콩알만해져서 조금만 무서워도 소리를 꽥꽥 지르며 놀라는 아이가 있고, 긴장이 한창 고조될 때 일부러 괴상한 소리를 갑자기 내서 단체로 사람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짖꿎은 아이도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무서운 이야기들이 사라졌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돌아가며 각자의 이야기를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말하고, 듣는 사람들은 믿어야 할 지 말아야할 지 모르게 오싹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두런두런 공포 이야기의 시간을 갖던 것과 같은 부류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깜깜한 밤 폐가에 모이는데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둠 속에서 각자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돌아가면서 말한다. 그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긴장을 고조시키고 가뜩이나 믿어지지 않는 괴상하고 오싹한 스토리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는 목적이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에 익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점,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실을 전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 수 있겠고, 또한 이러한 오밤의 스토리텔링 시간이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완결된 별개의 스토리라는 점에서 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인물들이 같은 공간 상에서 서로 대화하고, 또 전체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주인공이 등장하므로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액자의 맨 앞 프레임의 프롤로그에서 한 소년이 가족과 캠핑갔다가 갑자기 물이 불어 가족을 잃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도란도란 둘러 앉아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즐기던 그 어린 시절 그 시간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그게 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 때문이었던 것처럼, 밍밍하게 말하면 강가에 캠핑갔다가 비와서 부모가 죽었다 라고 아무 감흥도 없이 말해서는 무서운 이야기는 커녕 별 주목도 받지 못할 널리고 널린 사건 사고 소식에 불과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말하는 방식, 말과 말 사이의 간격, 단어의 선택, 등등 긴장감있게 풀어내는 말재주꾼이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한 밤의 집중 호우와, 혀를 넘름거리며 사람을 잡아먹을 듯 세차게 요동치는 강물을 헤치며 아슬아슬 아이를 데리고 강건너 피난처로 향하는 장면을 너무나도 긴장감있게 묘사한 덕에 처음부터 독자를 끌어들여 금새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밤의 이야기꾼들은 무엇이냐. 취업난 속에 어렵게 입사한 잡지사에서 취재가서 만나게 된 이야기꾼들로, 자신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괴이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요즘도 가끔 괴상한 누가 무얼 어떻게 했다는 둥 하는 끔찍하고 이상한 루머가 돌기도 하고 그러는데 대체적으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부터 그 이상한 잡지사에 별 애정도 없던 주인공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도 혼란스러워한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혹은 신고해야 할지. 거기에는 화자가 생각하기에 살인자라 판단되는 사람도 있고 정신병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취재차 온 화자에게로 관심이 쏠리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때 그 폭풍우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던 이제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그 어둡고 무서웠던 밤, 그리고 죽은 엄마와 아빠가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까지도..피비린내가 물씬 풍기기도 하고, 먹먹하고 슬픈 이야기도 있고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들에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실감나게 무섭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능있는 이야기꾼의 생명이 살아있고,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각자의 이야기 하나 하나도 모두 개성있고 재미있었지만 전체를 하나로 이어가는 화자의 역할도 훌륭했다. 끝까지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부정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마는데, 그로써 우리 모두는 각자 부서져가는 폐가의 깊은 어둠속에서만 밝힐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혹은 숨겨진 기이하고 잔혹한 스토리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잠재해 있어서 깨닫지 못하는 동안 뇌 속 어디엔가 숨어있다가 폐가에 들어가 이야기꾼들을 만나면 술술 벗겨져 나오고, 그것이 다시 또 이야기가 된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들의 천국이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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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내 삶은 내가 만드는 이야기지만, 책 속에는 내가 되지 못한, 혹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인, 하지만 내가 이 짧은 생애 동안 현실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내가 있다. 현실의 나는 나를 현실화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숨쉬고 살아있게 하기 위해, 나를 더 축소시키도록 지시한다. 내가 물고 태어난 숫가락의 재질과,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아주 작은 영역의 사람들을 떠나면 나의 생은 위태로와진다.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아주 작디 작은 세계에서 생을 보내는 일이 생을 지키는 일이지만, 그 작은 세계에 난 세계 문학이라는 창은 제약도 없는 시공간을 넘는 거대한 세계 속에 서 생을 더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것 역시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지만, 읽고 싶은 책을 다 못읽고 죽는 것이 억울한 것 못지 않게, 짧은 인생 그 자체의 리얼한 세계를 사는 일도 중요하다. 스스로 경험하고 살이 닿고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웃음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몸을 움직여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잠잘 것을 그러한 노동을 하는 것, 그런 현실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읽고 싶은 책을 살 수는 있다.  읽지 못해도 꽂아만 두어도 괜찮겠다, 언젠가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난 창을 활짝 열어두기 때문이다.  꽂아만 두어도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위안이 되겠다 라고 생각하려면 누군가가 권위 있는 사람이 그렇다 라고 말해주면 더욱 위안이 되겠다.


책을 구매하는 행위는 다만 서점 주인들과 저자들을 ¸ 먹여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책을 소유하는 일(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그 자신의 기쁨과 그 자신의 윤리 규범을 갖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머니 사정이 지극히 빠듯한 상황에서도 가장 저렴한 보급판들을 이용하고, 많은 도서 목록들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온갖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영리하고 끈질기며 재치있게 점차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기쁨이고 매혹적인...


그렇다. 내가 먹는 것보다 읽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 냉장고에서 뭔가가 자꾸 쌓여가는 것보다는 책장에 뭔가가 쌓이는 게 더 좋다면 그 기쁨을 가져다 주는 서점 주인과 저자들을 좀 먹여살리는 일도 나의 기쁨 아니겠는가. 이제껏 비싸네 어쩌네 불평불판만 많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전환할 수도 있다. 무슨 책을 꽂아둘까. 언제라도 읽을 수 있게, 또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리스트를 만들고 그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 일. 그것을 헤세와 함께 해보자. 이 책은 헤세가 '나만의 도서관'에 꽂아놓을 책들의 목록을 만든다. 나만의 도서관에서 빠질 수 없는 책, 꼭 반드시 꽂아놓아야 할 책들을 태고적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해세가 살던 동시대 이전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오면서 목록을 작성한다.  






























헤세와 함께 만드는 나만의 도서관에 반드시 꽂아놓을 책들은 시대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인도 신화와 장자 싯다르타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  에코가 <책의 우주>에서 문학이 특히 풍부한 나라로 프랑스, 러시아, 또 하나는 영국이었던가 독일이었던가 아무튼 또 한나라를 뽑았는데, 독일이야 헤세가 자국 사람이니까 많이 언급했을테지만 역시 프랑스와 러시아 쪽에서 리스트가 많다.  고대 희극에서 비롯해서 중세를 빼뜨리지 않고 동서양의 문물을 교차시키며 어머 이건 꼭 사야돼과의  많은 작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빠르게 열거해가는 책이기에, 여기에 일일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읽은 작가 중 볼테르와 발자크 등도 언급했고, 특히 최고의 찬사가 함께 한 작가와 작품으로 신랄한 풍자와 냉소로 빚어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웅장하고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작품의 하나로서' 고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기억에 남는다.  걸리버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의 천부적 시인'이며 '위대한 정신, 신랄하고 통렬한 유모, 고독한 천재성은 그의 온갖 변덕스러운 기행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으며,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왕왕 설교조와 개혁정신으로 인하여 잊혀지기도' 했지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 민화집은 리스트에서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도 그런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특히 안나 카레리나는 가장 아름다운 러시아어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이렇게 목록을 작성해 나가다가 독일 문학 쪽으로 가서 다소 길어지는데, 그러다가 헤세는 이렇게 완성해 놓은 목록들을 되풀이 관찰하고 조사해보니 리스트가 주관적이며,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보석함과 같으며 훌륭한 작품이 누락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시대의 주옥같은 작품이 망라되어 있고, 그 작품들의 훌륭함과 객관적 가치면에서 이 수집물들을 크게 능가하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길은 얼마든지 있다. 각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이곳까지 인도한 그 길을 따라, 각자의 도서관(목록)을 만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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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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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은 개별적이다. 영혼이 서로 만나 함께하고 싶어서 따라죽으면, 그래서 죽음으로 함께가 되리라는 믿음은 죽을 작정을 해서 죽는 그 순간기까지만 유효하다. 산 자에게 죽음 이후는 같아 보이지만, 죽은 자에게 동시성의 두 죽음은 함께 시작한 평행선일 뿐, 죽음이 만남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자,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 속에 속한 모든 자들을 같은 장소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연기처럼 흩어진 형체없는 어떤 실체가 죽음이라는 세계 속에서 죽은자들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혹 그럴까? 어쩌면 그럴지도.


사랑하는 구가 길바닥에서 죽자, 담은 따라 죽는 대신, 구를 꼭꼭 씹어 먹는다. 먹으면 만나질까? 구의 죽은 머리카락, 손톱, 살점을 뜯어 먹으면 소화되어 담의 살이 피와 살이 섞이면 그 몸속에서 구를 느낄 수 있을까. 구가 담을 먹은 이유는 또 있다.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들이, 그 빚쟁이들이 그를 찾지 못하도록,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하도록 구를 죽지 않은 것으로 해야 했다. 그들은 구를 죽였지만 구가 죽은 것을 모른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맞다가, 바스라지도록 계단을 구르고 뭉개지도록 차에 받쳐 너덜너덜 길바닥에 쓰러지고, 그렇게 끝내 자신은 한 번도 만저보지도 못한 부모의 빚에 깔려 희망없는 어둠속에서만 보냈던 푸른 청춘의 주검을 확인한 사람은 담이다. 담은 그들이 구에게서 내장을 파내 팔을 거라고 생각한다. 담은 구가 죽은 것을 모르게 해야 그들이 계속해서 구를 찾아 시간을 허비할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는 구가 한 번도 만져보지도 못한 부모 빚 때문에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할 돈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개고생을 하는데, 그러다가 힘들어서 담과 함께 도피 생활을 시작하자, 어디든 찾아가서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끝내는 그를 죽음에까지 몰고 간다. 법이, 약자에게서라면 남아있는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한 법이, 실제로 자식에게 빚을 전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법이라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끄트머리의 아주 희미한 빛도 내어주지 않았고, 구는 자신이 법적으로는 갚지 않아도 되는 부모의 빚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빚을 회피할 방법이 없다.  자식에게 빚을 전가할 수 없는 법이 유효한 곳은 돈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아도는 사람들만을 향해 환히 비추는 밝고 화려하고 넘치게 풍족한 곳이다. 구는 그곳에 없다. 구는 구가 속한 곳에 있다. 구는 왜 살아있는 부모의 빚에 쫓겨야 했을까. 사회는 왜 그런 불합리를 내버려두는 것일까. 언제가 되어야 우리 사회는 이런 소설을 읽으며, 뭐 이렇게 비현실적인 내용인거야? 하며 책을 내던질 수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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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12-2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REBBP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CREBBP 2016-12-23 22:21   좋아요 1 | URL
오 즐거운 크리스마스 선물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