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졸업 - 소설가 8인의 학교 연대기
장강명 외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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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날기를 시작한 너희들을 응원하며

다행히 졸업 - 장강명의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

 

1990년대에도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침 자율학습을 하기 위해 720분까지 등교를 하고,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면서 장난 삼아 선생님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던 적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만, 학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로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 시절은 도시락과 입시를 준비한다는 위세로 가장 배부르고 당당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엄마는 딸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겠다고 3년 내내 4교시가 끝나기 20분 전 똑같은 시간에 경비실에 도시락을 맡겨 놓고 가셨다. 그 속에는 컵라면이나 떡볶이 등을 사먹을 수 있는 1000(그때는 육개장 컵라면이 300, 떡볶이 1인분이 500원이었다.)도 함께 들어 있었다. 도시락을 가지러 갔던 경비실에는 내 도시락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도시락도 키 재기를 하듯 함께 놓여 있었다. 경비 아저씨께 엄마 고생 시키지 말고 네가 아침에 들고 와.” 라는 호통을 3년 동안 들으면서도 당연한 듯 당당하게 먹었던 도시락 때문에 나는 무언가 충만하게 채워진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집과 학교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나는 그런 도시락을 먹으며  몸도 마음도 함께 성장했고 자기 밥벌이를 감당하는 어른이 되었다.

 

  청소년들에게 밥(급식)은 몸은 물론이고 정서적 성장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바빠졌다. 맞벌이 가정이 다수를 이루는 현재 대한민국의 초··고등학교 점심시간은 도시락이 아닌 급식을 먹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른 아침 자녀들의 도시락을 싸지 않는 것만으로도 바쁜 주부들의 일손은 크게 줄어들었고, 학생들은 도시락보다 영양소가 고루 들어있는 급식을 먹으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장강명의 소설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바로 학교 급식 비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사립 인문계 세영고 재단은 18000만원어치의 식비를 빼돌렸다. 그 결과 학생들은 낙후된 급식실에서 턱없이 낮은 질의 급식을 배식 받는다. 그것마저도 재료 부족으로 반찬이 금방 떨어져 뒤에 먹는 학년들은 맨 밥을 먹을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배식하는 파란 셔츠의 무서운 형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다. 이때 학교 급식 비리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한 '삐라 삼총사'가 등장한다. 시사토론 동아리 회원인 김기준, 성제문, 우주원 세 명의 학생들은 급식비리에 대한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돌리게 되면서 재단과 교무 교감, 같은 동아리 회원이자 학교 수학선생님의 아들인 호웅이를 대표로 하는 반대 측 사람들과 대립한다. 학생들의 투쟁은 책임자들의 자리만 바뀌는 것으로 끝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급급한 재단은 눈속임으로 당장의 문제만 해결할 뿐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학부모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되니까 참고 학교 밖에서 다른 것을 사먹으라며 돈을 더 쥐어주면서 학교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니 급식을 먹는 당사자인 학생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밥은 매우 중요하니까. 급식을 먹고 불의한 상황을 견뎌야할 대상은 자신들이며, 그들은 아직 날기를 포기하지 않은 새들이니까

 

  ≪한국이 싫어서, 댓글 부대등 사회성 짙은 소설을 써온 기자출신의 소설가 장강명씨의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는 취재를 통해 보여준 우리 교육현장의 모습과 작가적 상상이 잘 어우러져있다. 내용의 흐름이 건조한 부분에서는 주원이의 족보 없는 희한한 욕이 웃음을 주고, 자칫 작위적으로 흐를 수 있는 부분에서는 기준이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행동이, 제문이의 갈등과 성장, 호웅이의 변명과 눈물이 독자로 하여금 함께 반성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

그 최초의 토론으로부터 팔 개월이 흘러, 지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게 새들에게 일상적인 일은 아닐 거라고. 비행에 최적화된 기관이 있다고 해서, 또 자주 날아다닌다고 해서, 새들이 비행에 별 감흥을 못 느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 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걸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그것은 사람의 잠재력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실장과 학생교감은 날지 않은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적이 언제일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46~47

 

  학생들의 꾸준한 노력에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행동이 날기를 원하는 새의 날갯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제문이의 내적 성장은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제문이가 날기를 잊었거나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는 비둘기라고 말했던 행정실장과 학생교감, 재단 사람들을 내 식으로 말한다면 학창시절 부모님이 싸주신 따뜻했던 도시락을 먹어보지 못했거나 그 온기를 잊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청소년시절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 무언가에 굶주려 있었던 시기였다. 청소년들은 커다란 허기를 수많은 것들로 채우면서 기성세대가 되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청소년들도 무언가를 채우면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어른들이 될 것이다. 삐라 삼총사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 음식을 사먹겠다는 친구들에게 보건실 뒤에 있는 담으로 가면 수학선생님이 잡지 않는 다고 말한 뒤 울음을 터트리는 호웅이가, 없어서 못 먹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모든 학생들이 훨훨 잘 날 수 있도록 어른들의 부끄러운 이기심을 지우고, 최고로 좋은 양질의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정착시켜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만 뒤룩뒤룩 찐 비둘기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될테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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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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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제 15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첫 문장부터 눈길을 끈다. 자정 무렵 나를 찾아온 그는 3년 전 죽은 예전 직장 동료였던 임 선배의 혼이다. 작품의 현재축은 매우 짧다. 자정 무렵부터 새벽 어느 시점까지이며, ‘를 찾아온 임 선배의 혼과 현재 쓰다가 멈춘 광대극 노힐부득달달박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차를 대접해야 할까? 하지만 죽은 사람이 차를 마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를 끓이는 동안 그를 혼자 두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그의 얼굴을 건너다 봤다.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든 이유가 있겠지, 죽은 지 삼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올 때에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p.11

 

 

  작가는 처음부터 그가 죽은 영혼임을 밝히며 시간과 상황을 초월하여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런데도 혼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 읽는 이도 쉽게 몰입하게 된다. 우리 또한 그럴 수도 있다는 것처럼. ‘임 선배’, ‘경주언니는 감포 바닷가의 콘도로 떠난 회사 수련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부당하게 퇴사한 동료의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경주 언니가 던진 맥주를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움직이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로 신입이었던 가 마치 증인처럼 끼어서 

끝까지 함께 있게 된다.

  작가는 임 선배와 경주 언니를 통해 부당해고출근투쟁’, ‘천막농성의 현실 위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의 세계를 덧입혔다. 눈보라 치는 밤, 깊은 산속 각자의 암자에서 혼자 살아가는 두 스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게 찾아온 젊은 여자. 그녀는 관음보살이었으며, 두 스님은 차례로 황금 부처가 된다는 내용이었지만, ‘는 그것을 이어가지 못하고 광대극을 멈춘 채 글을 쓰지 못한다.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강 작가의 이 작품은 <소년이 온다>의 연장선 위에 있다. 5·18 광주,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죽은 소년의 혼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는 죽은 임 선배의 혼이 직접 찾아와 와 대화를 나누며 진행된다. 한국적인 정서를 잘 녹이면서도 설화의 내용을 작가만의 시점으로 바꾸고 새롭게 재창조해 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작품을 쓰면서 고민하고 애쓴 작가만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함께 있어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젊은 승려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답한다.

그건 안 된단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소녀는 나무 욕조의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다. 그 눈송이들을 커다랗게 확대한, 눈의 결정 모양을 한 빛무늬가 무대 뒤편 검은 벽에 하 얗게 비쳐 있다.

그 결정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승려가 묻는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 41~42

 

 

  소설 속 는 희곡의 끝을 다르게 바꾸었다. 희곡얘기를 더 해달라는 선배의 말에 쓰다가 멈춘 장면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자신이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녀가 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젖은 옷에서, 팔뚝과 종아리에서 쉬지 않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머리 위에 쌓인 눈만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무대 앞 객석을 향해 한 발씩 다가오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p. 44~45

 

 

 바로 이 장면이 작품 속 의 고백이자 작가의 고백이다. 그 깨달음과 울림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이며,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찰나의 순간 깨달음을 얻고 영원한 극락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황금 부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럴 수가 없어 더 참담하다.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시간 밖의 시간이고, 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우리이자 현재의 우리이며, 미래의 또 우리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과연 평화를 소망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 헤어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 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

                                                                                                                                                         p. 52

 

 

  작가의 말처럼 현실의 삶과 죽음은 간결하고 냉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고, 멀리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고민처럼 우리도 고통 바깥에 서서 괴로워한다. 우리들의 이 고통은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동안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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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 봉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희곡선집
채만식 지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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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의 희곡 제목은 <심청전>이 아니라 <심 봉사>이다. 딸 청이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효를 다하는 대상인 심 봉사를 제목으로 삼은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분수를 알고 허황된 꿈과 생각을 버리고 살았다면 딸을 잃은 불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 봉사는 탁발승에 말에 혹하여 당장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겠다고 약속하고 뒤늦게 후회한다. 그의 한숨이 어린 심청의 마음을 자극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감출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많은 곡식을 장 승상 부인에게 얻어 왔다는 청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재물을 뺑덕어미에게 다 빼앗기면서까지 그녀를 의지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하고 있지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결국 심청이의 효심 때문에 눈을 뜨지만 그는 다시 자신의 손으로 두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된다.

 

심 봉사: (자기 손가락으로 두 눈을 칵 찌르면서 엎드러진다.) 아이구 이놈의 눈구먹! 딸을 잡어먹은 놈의 눈구먹! 아주 눈알맹이째 빠져 바려라.(마디마디 사무치 게 흐느껴 운다. ) 아이구우 아이구우

 

 자기가 자기의 눈을 찌르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작가는 심 봉사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며, 1930년대 무능력한 지식인들, 조선의 많은 사람들을 묶어 버린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상을 보여준다. 현실속에서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진 불행한 심청은 살아 날 수 없었다. 작가는 심청을 죽음에서 건져내지 않음으로써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눈 먼 아버지를 살뜰하게 챙기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주려는 심청의 마음은 대견하기도 하다. 그러나 효라는 커다란 윤리의 강요 속에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위로해야 할 몽은사 스님들과 부처님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야만 눈을 뜨게 해준다고 말한다. 종교적 자비와는 거리가 먼 재물에 대한 탐심이 가득하다. 장사를 하러 떠나는 길, 무사귀환을 빌기 위해 어린 여자 아이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상인들의 생각은 자신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을 잊은 인간들이 때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불행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의 모습이라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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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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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힘없이 써내려간 김중혁의 네 번째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속에는 사람과 사람이 맺어놓은 관계가 있고, 그들이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으며 주어진 상황과 시간, 공간이 모두 다를지라도 한 번 맺어진 관계는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더 확장되어지고 깊어진다. 김중혁의 네 번째 소설집이자 첫 번째 연애소설집이라고 말한 이 여덟 편의 소설은 공감과 소통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파괴되는지 3인칭 시점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거리를 두며 관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김중혁의 소설이 갖는 매력이다.

 

  사라진 포르노 여배우 송미를 찾아가 진지하게 설득하는 차양준의 모습과 정액을 얼굴에 뒤집어 쓴 뒤 눈물을 감추고 환하게 웃어주는 송미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 속에서 진실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 속 상황이든 현실의 상황이든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상황엔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송미씨와 제가 하는 대화에도 어떤 의미가 있겠죠.” (상황과 비율, p.22) 그 진심이 각자의 삶에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픽포켓>은 실종된 여가수 기민지를 찾아 부산으로 떠난 호준과 우영으로부터 시작된다.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 골목 풍경은 각기 다르게 살아온 기민지-호준과 우영- 송진구를 통해 연결되고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우리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공간속에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상은 사람들이 모르고 맺어 놓은 관계 덩어리이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우리가 맺어 놓은 관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모든 창문에는 비밀이 있었고, 기민지는 그 비밀이 늘 부러웠다. 비밀을 가질 수만 있다면 누군가 바깥에서 자신의 창문으로 돌을 던져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벽을 쌓는 것보다 창문을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다.(픽포켓, p.87)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주로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규호와 정윤이 관객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가짜 팔로 하는 포옹, p.96) 알콜 중독에 빠진 규호의 말에 외롭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보인다.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으나 안길 수 없는 인생이 서글프다.

 

  그밖에도 <뱀들이 있어><종이 위의 욕조>, <보트가 있는 곳>, <힘과 가속도의 법칙> 속에도 아슬아슬하고 약해 보이는 그래서 더 조심히 다루고 신경 써야할 사람들의 관계와 사랑이 펼쳐진다. 특히 김중혁은 이번 소설집을 통해 다소 남성 중심의 관점이 두드러지기는 하나 남녀의 관계 맺기에 대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요요>는 관계를 부수고, 고리를 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차선재와 장수영과의 관계와 시간이 나타난다. 차선재는 자신의 시간을 생각했다. 모든 게 아득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아깝던 젊은 시절들은 이제 너무 멀어서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그 시간들을 통과해왔는지, 어떻게 11초를 지나왔는지 놀라웠다. 지나간 시간들이 쌓여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그 11초가 어떤 의미들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요요, p.299) 차선재의 시간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에 장수영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차선재를 떠나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런 두 사람의 시간은 흘러갔고, 20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 갈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타인과 맺은 관계와 사랑을 통해 만들어지고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란 배경과 지금 서 있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달라지는 것 같고 멀리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요요처럼 다시 돌아오고 반복된다.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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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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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고,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다고 말이다.(p.227) 소라, 나나, 나기의 삶이 황정은 작가의 건조하고 차가운 문체 속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다.

 

 남편의 죽음으로 삶을 포기한 엄마 애자씨, 그녀의 방치로 인해 시들어버릴 줄 알았던 소라와 나나는 도깨비집 나기의 엄마인 순자씨의 밥을 먹으며 다시 피어난다. 소라, 소라는 하나뿐인 부족의 하나뿐인 족장이다. 그래서 아버지 금주씨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 애자씨가 자신과 동생 나나를 돌보지 않아도 혼자서 자신의 부족을 잘 이끌어 나간다. 그런 소라가 동맹을 맺고 연합을 이루는 부족은 동생 나나와 친구 나기이다. 그들과의 소통이 소라의 세상이다. 소라는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었다. 멸종해 버릴 부족으로 말이다. 그런 소라에게 순자씨는 먹이고 삶을 나누어 주었다.

 

도시락이되 웬만해서는 어김없는 도시락.

그것을 맛본 경험이, 그런 것을 꾸준하게 맛볼 기회가 나나와 내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요즘도 골똘하게 생각해볼 때가 있다.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가정하고 생각해보는 것은 조금 두렵다. 순자씨는 그 도시락으로 나나와 내 뼈를 키웠으니까. 그게 빠져나간 뼈란 보잘것없을 것이다. 구조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허전하고 보잘것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단하지 않아? 보잘것없을 게 뻔한 것을 보잘것없지는 않도록 길러낸 것(p.44)

 

멸종 위기의 부족, 소라를 지켜준 것은 사람을 먹이고 키워보았던 그녀의 손맛이었다.

 

 나나는 앞으로도 뒤로도 아름답다는 이름을 가졌다. 언니 소라는 애자씨가 되지 않기 위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나나는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모세씨의 아기를 가졌다. 그러나 타인 중 순자씨와 나기 오라버니에게만 열어 주었던 자신의 우주를 끝내 모세씨와 공유할 수 없어 그와 헤어지려 한다. 아기와 함께 그를 따라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리웠던 순자씨와 소라, 나기 오라버니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립고 즐겁고 애틋하고 두렵고 외롭고 미안하고 기쁜 마음이 뒤섞여 엉망진창인 세계로 말이다.

 

 나기는 소라와 나나의 다른 모습이다. 또 끈질기고 집요하게 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기는 소라와 나나,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게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인물이다. 고등학교 시절 폭력을 당하고 친한 친구에게 배신을 당해도 자신만의 사람을 간직하며 살아간다.

 

 소라와 나나, 나기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애자씨와 금주씨, 순자씨 모두의 삶을 돌아보면 시시하고 초라하고 무의미했다. 그런 그들이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공감해주고 손잡아 주는 체온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찮다고 여기며 살아갈지라도 사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며 버티게 해 주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삶은 계속 이어진다.

 

 물기를 쏙 빼버린 건조한 문장 속에서 고리처럼 이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의 우주를 보았다. 그 속에서 부유하며 길을 잃고 방황해도 다시 돌아올 곳이 있어서 안심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소재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작가 황정은은 하찮음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하나의 질문과 하나의 단어, 도시락이나 만두 등과 같은 평범하지만 결코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음식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소설을 이어간 작가의 저력이 돋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하찮은 삶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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