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제 15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첫 문장부터 눈길을 끈다. 자정 무렵 나를 찾아온 그는 3년 전 죽은 예전 직장 동료였던 임 선배의 혼이다. 작품의 현재축은 매우 짧다. 자정 무렵부터 새벽 어느 시점까지이며, ‘를 찾아온 임 선배의 혼과 현재 쓰다가 멈춘 광대극 노힐부득달달박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차를 대접해야 할까? 하지만 죽은 사람이 차를 마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를 끓이는 동안 그를 혼자 두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서서 잠자코 그의 얼굴을 건너다 봤다.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든 이유가 있겠지, 죽은 지 삼 년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 올 때에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p.11

 

 

  작가는 처음부터 그가 죽은 영혼임을 밝히며 시간과 상황을 초월하여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런데도 혼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워 읽는 이도 쉽게 몰입하게 된다. 우리 또한 그럴 수도 있다는 것처럼. ‘임 선배’, ‘경주언니는 감포 바닷가의 콘도로 떠난 회사 수련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부당하게 퇴사한 동료의 문제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경주 언니가 던진 맥주를 온 몸에 뒤집어 쓴 채 움직이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로 신입이었던 가 마치 증인처럼 끼어서 

끝까지 함께 있게 된다.

  작가는 임 선배와 경주 언니를 통해 부당해고출근투쟁’, ‘천막농성의 현실 위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의 세계를 덧입혔다. 눈보라 치는 밤, 깊은 산속 각자의 암자에서 혼자 살아가는 두 스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게 찾아온 젊은 여자. 그녀는 관음보살이었으며, 두 스님은 차례로 황금 부처가 된다는 내용이었지만, ‘는 그것을 이어가지 못하고 광대극을 멈춘 채 글을 쓰지 못한다.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강 작가의 이 작품은 <소년이 온다>의 연장선 위에 있다. 5·18 광주, 군인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죽은 소년의 혼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는 죽은 임 선배의 혼이 직접 찾아와 와 대화를 나누며 진행된다. 한국적인 정서를 잘 녹이면서도 설화의 내용을 작가만의 시점으로 바꾸고 새롭게 재창조해 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작품을 쓰면서 고민하고 애쓴 작가만의 치열함이 느껴진다.

 

함께 있어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젊은 승려가 멀찍이 떨어져 서서 대답한다.

그건 안 된단다.

제발,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만.

소녀는 나무 욕조의 물속에 들어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리에 쌓인 눈이 녹지 않는 다. 그 눈송이들을 커다랗게 확대한, 눈의 결정 모양을 한 빛무늬가 무대 뒤편 검은 벽에 하 얗게 비쳐 있다.

그 결정들을 홀린 듯 바라보며 승려가 묻는다.

왜 머리 위 눈이 녹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p. 41~42

 

 

  소설 속 는 희곡의 끝을 다르게 바꾸었다. 희곡얘기를 더 해달라는 선배의 말에 쓰다가 멈춘 장면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자신이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녀가 물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젖은 옷에서, 팔뚝과 종아리에서 쉬지 않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머리 위에 쌓인 눈만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무대 앞 객석을 향해 한 발씩 다가오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p. 44~45

 

 

 바로 이 장면이 작품 속 의 고백이자 작가의 고백이다. 그 깨달음과 울림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이며,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하다. 찰나의 순간 깨달음을 얻고 영원한 극락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황금 부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럴 수가 없어 더 참담하다.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시간 밖의 시간이고, 그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우리이자 현재의 우리이며, 미래의 또 우리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과연 평화를 소망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 헤어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 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

                                                                                                                                                         p. 52

 

 

  작가의 말처럼 현실의 삶과 죽음은 간결하고 냉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나 그것은 불가능해 보이고, 멀리 있어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고민처럼 우리도 고통 바깥에 서서 괴로워한다. 우리들의 이 고통은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동안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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