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 The Fi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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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꿈을 꾼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든, 새로운 미래를 꿈꾸든 말이다. 그것이 힘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부적응과 착각을 일으키는 원인일 수도 있다.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 ‘파이터’는 이런 두 가지의 꿈이 공존한다.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거리가 된 ‘슈가 레이 레너드’와의 과거 한창때의 승부에서 오늘의 즐거움을 찾고 있는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는 그렇게 오늘의 불운을 버티고 산다. 이젠 더 이상 가망 없는 권투선수로서의 재기의 꿈을 갖고 있지만 꿈만 갖고 있을 뿐, 그를 위한 노력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어느 순간 은퇴한 게으른 천재가 되고만 그는 역시나 권투선수가 된 동생 ‘미키(마크 월버그)’의 파이트머니로 먹고 산다. 능력의 비해 어이없는 경기로 매번 당하기만 하는 백업 권투선수 미키는 가족의 경제를 떠받치는 가장이다. 엉망으로 구성된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동생은 밝은 미래를 희생하면서,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싸게 팔면서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영화는 이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형편없을 것만 같은 이 두 형제에겐 그래도 강한 유대가 존재한다. 형은 동생을 위해 일을 하며, 또한 동생을 위해 최선은 아니지만 나름 노력하는 편이다. 동생은 자신의 롤 모델을 형에게서 찾고 있으며, 형의 천재성을 인정해주는 몇 안 되는 가족이다. 이 둘은 어느 면에선 역설이면서 희망이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한 가지의 목표를 위해 뛰는 그런 형제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하다. 이 둘은 배다른 이복형제였고, 어머니 ‘샬린플레밍(에이미 아담스)중심의 모게사회인 것처럼 어머니의 전남편 자식들과 현남편 자식들이 함께 살고 있는 기묘한 가족이다. 나름의 가족사가 있겠지만 어려운 경제살림으로 인해 함께 살게 된 이런 가족형태가 풍요와 안정을 주기는 힘들다. 동생 미키에겐 삶의 짐이며 질곡이고 방해물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고, 암담한 미래를 상징할 뿐이다. 체급도 다른 선수와의 경기는 언제나 고역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얻는 파이트머니는 어머니를 통해 가족의 삶으로 재분배된다. 문제는 이런 생활을 어머니는 계속 유지하길 원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가족 역시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미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계속 일으키는, 성숙하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한 가족과의 삶은 미키의 삶은 물론 마음도 황폐화시키고, 언제나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이탈을 꿈꾸게 만든다.
  영화 ‘파이터’는 이런 류의 가족 스포츠 영화다. 하지만 가족의 아집과 욕심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어느 전도유망한 선수 이야기는 슬픈 우화일 뿐이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야 성공을 할 수 있는 역설적 구성은 확실히 고달픈 우리 모습인지 모른다. 가족에 대한 경제적 책임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힘든 일반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키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가족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하며, 그것이 영화의 흐름상 자연스런 것이며, 그의 새로운 인생의 전기가 된다. 하지만 그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과의 금이 가는 관계를 감내해야만 하는 인간적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선택은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마약을 손대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형 디키는 몰락의 전형이 되 버리듯, 스포츠 채널에서 마약으로 망가진 선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최악을 맞이하고, 그의 현실이 어디에 처해졌는지를 알게 된다. 인생 막장, 그가 경험하고 있는 현주소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 새로운 권투인생을 보여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게으른 자신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전기를 위해 그 역시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모습과 의욕을 동생은 과거의 그로만 생각하고 있기에 거부한다. 그 둘은 어느 순간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를 지탱해주는 마지막 근거를 서로 놓지 못했다. 그것은 서로를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경험이었으며, 현재의 자신을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더 없는 파트너란 인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들의 더욱 깊은 곳엔 가족이란 역설적인 울타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의 의지처인 가족이란 근거를 통해 새롭게 서로를 위한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미약하지만 존재했던 것으로 그들은 힘든 과정을 통과하고 우리가 아는 Happy Ending으로 영화 끝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그 둘 모둔 진정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나이에.
  엉망인 가족으로서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책임과 의무, 그리고 의존이란 묘한 관계 속에서 핏줄이기 때문에 더불어 사는 그들이면서, 그리고 가장 가까우면서도 너무나 쉽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도 사실 가족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강할 것 같지만 연약하기도 하고, 오래 갈 수 없을 것만 같으면서도 질긴 인연으로 묶인 것이 또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기 힘든 것이 또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 노력할 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집단이 또한 가족이기도 하다. 쉽게 상처받지만 또한 쉽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고, 더 없는 원군이 되는 것이 가족이기에 가족은 어렵지만 함께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가족이 비록 작고 연약한 끈으로 지탱하지만 언젠가는 크고 강한 끈으로 변할 수도 있기에 가족은 참 좋은 것이다. 그리고 작은 배려로 큰 것을 가질 수 있기에 가족은 참 소중한 것이다. 쉽게 토라지고 상처를 주는 오늘의 인간관계 속에서, 가족은 좀 더 여유롭게 하면 가슴 속에 담긴 크나큰 Trauma를 어렵지 않게 삭제시킬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존재다. 이런 것을 알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이 영화를 통해 불현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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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피쉬2 - Jungle Fis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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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편일률적인 청소년 영화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괜히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야기엔 낭만과 순수,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 등이 연상됐다.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청소년 영화엔 그렇게 제작되는 것이 좋아 보였다. 아마도 청소년이라면 어른들의 그늘진 마음이 결코 투영되어서도 안 되고, 그런 것을 알기엔 어린 것 아닐까 하는 정도의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아니면 그들이 결코 인생에 있어 쓴 맛을 나중에 확인해야지 지금은 아니란 생각도 하고 있었을 것 같고, 아니면 어른이라서 좀 창피하단 생각이 들 것도 같고, 아니면 그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불행한 인간사를 모를 것이란 생각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글피쉬2’는 나의 편견을 여지없이 파괴해 버렸다.
  솔직히 형편없었다. 고등학교 학생들의 서사에 맞춰 연기자들은 고등학교 학생이거나 조금 높은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연기력은 아직 미숙했고, 흡인력은 떨어졌다. 우울한 얼굴들은 있었지만 좀 어설펐다는 것이 솔직한 평이다. 그리고 영상이나 구성 역시 아쉬움이 짙게 느껴졌다. 극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고, 갑작스런 전환에 당혹스러웠고, 여러 가지 면에서 어설펐다. 아마도 연기자만큼 감독이나 제작진 역시 신인이었던 것 같다. 영화 상에서 말이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깊이 몰입하게 됐다. 그것은 영화 속에 보이는 고등학교의 현실 때문이었다. 과한 표현이나 과한 사건, 그리고 과한 따돌림 등이 있었겠지만 본질적으로 언론에서 이미 듣거나 봤던 내용과 유사했다. 정글피쉬란 어휘 자체를, 영화를 보고 인터넷 사전으로 찾을 만큼, 영화는 어른인 나에게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영화 속에서 봤던 사회가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일치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철저하게 경쟁으로만 내몰린 한국사회는 인간미를 상실했다. 아니 어쩌면 한국사회는 일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부터 언제나 불법적인 거래가 판쳤는지 모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란 거대한 파괴적 회오리 앞에서 한국 사회는 승자독식사회로 길들여졌고,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걸쳐 퍼졌다. 그래서 거친 경쟁 앞에서 편법과 불법이 동원되는 것이 일상화됐고, 그런 내용은 연일 언론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것도 넘치게 말이다. 도덕성이나 인간미란 단어가 과연 한국사회에 존재하긴 한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엉망인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 한국사회에 포함되어 있는 학교라도 열외가 될 리 없다. 정글피쉬란 의미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물고기를 비유한 것이라면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세상에 사는 것이 세상에 사는 것이 만족스러워서 사는 것이 아님을 정글피쉬란 단어로 기막히게 표현한 것이다.
  불법과 편법이 넘쳤다. 특히 학생들의 윤리적 교육을 담당해야 할 고등학교가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탐욕의 그물망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영화 속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조차 탐욕으로 물들게 했다. 자연스레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은 학생들을 ‘왕따’시키고, 그런 학생들을 삭제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정입학 학생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는 학생을 죽음으로 모는 장면은 결코 과하게 보이지 않아 보였다. 정말 지금 어느 고등학교에서 벌어질 것만 같은 슬픈 사연이었다. 
 

 

   친구란 것이 허황된 인간관계 같아 보였다. 경쟁과 비리 앞에 친구는 부차적인 존재였다. 영화는 의문의 죽음을 찾는 이들의 힘든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고교생의 정직함을 외면하고 자살로까지 이끈 이 역시 바로 친구였던 학생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부정입학으로 장사를 한 학교가 부적격자로 낙인 찍힌 학생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배제시키는지 영화는 현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학교의 목적이 학생의 소외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입시학교란 이미지를 얻기 위한 나름의 비책임이 분명하다. 그래야 돈을 버니까.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현실의 학생들의 고충과 고민, 그리고 그들의 우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과한 몸짓 같지만 다소 과했을 뿐, 그다지 비현실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 사회를 고칠 수 있으리라 다짐하는 장면에서 어른으로서 착잡함과 함께 오늘을 사는 비애감도 느꼈다. 학교를 벗어난다고 그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더 거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곧 부정직한 사회의 본질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슬프다. 속편이 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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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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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노리개로 전락한 인간군상이 소통부족으로 인해 서로 협력했던 인간관계가 어느 순간 서로의 불신 속에 내몰리는 것을 보면서, 영화의 모습은 현대인의 실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불신 속에 허우적거리면서 칼질을 하는 모습은 감독의 의도처럼 몸부림을 뿐이었다. 엉망으로 살게 된 인간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과거의 모습들은 시대적 배경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 대단하지 않았다.
  제목을 보고 많은 이들이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겠지만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을 영화에서 그렇게 만끽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심리 영화를 고려하면, 외관상의 폭력보다 더 무서운 공포를 느낄 것이다. 같은 동료끼리 서로 죽여야 하는 기막힌 운명 앞에 인간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를 이 영화를 통해 뼈저리게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 혈투다.
  비운의 조선의 왕인 광해군 때의 역사적 사례를 갖고 만든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이들은 파멸로 가게 된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주연이 아닌 이들도 역사적으로 파멸하게 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인조반정 후 북인은 소북이든 대북이든 모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들이다. 심지어 광해군 역시 종이나 조를 붙이지 못한 왕으로 남겨진 것을 보면 이 영화는 비극적 인물들로만 구성된 매우 무서운 공포물이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영화.

 

 

  소통부족이 영화 속에서 가득했다. 불신이 가득했지만 어쨌든 ‘헌명(박희순)’과 ‘도영(진구)’는 친구였다. 이미 개죽음이 될 운명 속에서도 서로 힘을 합쳐 오랑캐군을 상대로 싸웠고, 조선군의 궤멸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헌명은 부축 속에서 객잔으로까지 간 그들은 그때까지 친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름다울 것만 같던 과거의 원인들이 그들을 갈라놓고 만다.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그들의 관계는 엉망진창이 됐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서로 칼부림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친구였기에 가능할 수도 있었던 소통기회가 전혀 일어나지 못했단 점이다. 과거의 친한 관계라는 허명 뒤에 담긴 당쟁의 편가르기와, 사랑과 시기라는 인간의 본성 앞에, 가식적으로 쌓인 누더기 같은 친구관계였는지 모른다. 단지 어렵게 사는 자신을 키워준 감사함이 친구라는 가식적인 관계를 그나마 지탱해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의미를 통해 덮어버리며 만든 친구관계는 진흙 위에 쌓은 공든 탑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좋은 관계 뒤에 숨죽여 있던, 과거에 쌓였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묘한 불운들이 겹쳐지면서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관계로까지 악화되고 말았다. 마치 지금의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소통부족에 의한 파멸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조선이란 과거를 빌린 현대극으로 발전한다.
  이런 양반들의 인간적인 반목 속에서 영화는 시대적 문제제기를 더한다. 전장에서 도망친 조선군 ‘두수(고창석)’의 사연은 민초들의 비극을 대변한다. 마치 오늘의 서민으로 투영되면서 그가 겪었던 억울한 이유는 영화를 단순한 소통부족이 아닌 서민의 우울한 자화상을 또한 겸하게 된다. 객잔이란 단순한 공간 속에 벌어지는 사건과 사연은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구성과 각본 속에서 말이다.  

 

 

  영화는 전쟁터란 현실 속에서 과거를 투영하는 역순행적 구조를 갖고 있다. 차디찬 백설의 배경 이 잿빛의 세상으로 비춰지면서 그 속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은 처량하고 냉랭했다. 객관적 시각을 위해 어두운 듯한 앵글 속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인간적 불신이 보였다. 그와 대비되는 과거의 장면은 한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과거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듯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결과를 입증시키는 과거의 모습은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에서도 위험한 정치적 도박이 보이기 시작했고 출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보였으며, 친구라고 하기엔 상처투성이의 말투와 경험이 있었다. 아름다운 과거 역시 전쟁터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든 이때든 인간관계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매우 인상적인 영화였다. 영화의 각본은 물론 찍어낸 영상들은 냉정한 관조를 이끌어내듯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영화 ‘The Road’에서 허무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했던 영상이 이 영화에서도 적절히 사용된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하는 감독의 의도를 독백을 듣듯 이끌어내고 있다. 아니면 세상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통을 위한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도 많이 들었다. 주요 연기자 세 명이 보여주는 시너지효과 역시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고창석과 박휘순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진구의 거듭된 성장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그의 미래가 기대될 정도다. 영화 ‘마더’에서의 특유의 냉소적인 연기가 이 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한 것 같다. 이런 연기자와 함께 감독 박훈정의 존재는 ‘황해’의 나홍진 감독처럼 매우 부각되는 존재다. 나 감독과 마찬가지로 박 감독이 잿빛으로 장식된 비극적인 세상을 비슷하게 담아낸 수작들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에서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다음 작품이 매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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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36의 기적 - Paris 36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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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련한 옛추억만을 담을 것 같은 영화는 이상하게도 시대상을 분명히 드러내며 시작한다. 추억 속의 세상이 마냥 행복한 그 시절은 아닌 것을 보여주려던 것 같았다. 1936년은 전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밀어닥친 시대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힘든 시대였고, 그 후 몇 년 후 독일의 침공으로 2차 대전이 시작될 때쯤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프랑스 역시 격렬한 정치적 변화를 겪는 시기였고 좌우의 대립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좌파 정권인 블룸 정부가 우파를 누르고 정치권력을 갖게 된 시기이다. 좌파 정권이 최초로 정권을 잡았던 시기라면 거의 다 사회적으로 좌우의 충돌이 만연됐고 정권에 대한 권위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파와 그에 대해 정치적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우파를 비판하는 좌우의 대립이 심각한 시기였다.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하지만 그런 시대가 결코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만 하는 시간, 바로 그 때가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이다.
  시작부터 보인 어느 피의자 심문은 어느 중년 남자의 불행까지 가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오는 과거의 회상장면에서의 1936년 벽두부터 터진 자살사건을 시작으로 영화는 어는 험난한 인생을 가야 할 가장을 보여준다. ‘피구알(제라르 쥐노)’은 자신이 일했던 샹소니아 극장이 폐쇄되면서 직장을 잃게 됐고, 불륜으로 도망친 아내가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서 혼자 남게 됐다. 그는 소외됐고, 외롭게 됐으며, 미래는 더욱 암울하게 됐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난한 자들이 나온다. 그들 중 좌파 신념을 목숨처럼 소중히 하는 ‘밀루(클로비스 코리니악)’와 3류를 넘어 4류로까지 하락하고 있던 성대모사를 하는 ‘재키 (카 므라)’가 있다. 그들은 시대 정신에 민감한 자와 그런 이데올로기에 상관 없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가기만을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구성된 자들이다. 그냥 서민들이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시공간 속에 살면서,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그나마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샹소니아 극장의 폐쇄는 많은 이들이 경험한 절망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런 절망을 부둥켜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국 최악을 맞이할 뿐이란 사실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다. 새로운 극장 주인의 음험한 호의 덕분에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지만 관객이 아는 동화로 그들의 순식간의 성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연이은 파산과 동료들의 반목, 그리고 떠나가는 동료들과 남게 된 동료들간의 서글픈 인간관계들이 영화 중반을 가득 메운다. 그나마 갖고 있는 것들이 모두 날라갈 때, 그 시점에서 다시금 새로운 동료애가 나오고 관객들에게 모욕만 받았던 삼류 성대모사꾼이 새로운 모습으로 인기를 얻는 장면에서 영화는 동화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작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매력적인 성공담은 모든 이들을 훈훈하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런 동화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슬픈 마지막과 함께, 1945년으로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리고 보게 되는 새로운 시작과 활력으로 영화는 그래도 희망이란 단서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비극과 동화를 교묘한 장치를 통해 연결하는 모험은 영화의 내용을 울고 웃는 장면으로 계속 이어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볼 수 있었던 2차 대전 전후에 벌어진 프랑스의 역사가 보였고, 당시 사람들의 희망과 불운을 봤고, 그리고 새로운 출발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기가 묘하게 유추된다. 과거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겹치는 것은 아마도 그때나 이때나 사는 과정도 비슷하고, 당시의 고민이 오늘의 고민과 다르지 않고, 그때의 희망이 지금에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도전이 엿보인다.
  그렇다. 쉬운 것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오늘의 현대인이 지상낙원에 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환상이다. 그런 환상을 꿈꾸며 현실을 사는 것은 현실부정일 뿐이다. 영화는 삶의 부침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고 있을 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고, 또 새로운 활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오늘에도 통하며, 힘든 현실 속에서 결코 외면해선 안 되는 그나마 갖고 있는 행복이다. 희망을 꿈꿀 때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삶이 우릴 속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꿈 같은 밤의 장면이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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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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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란 현상은 하나인데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은 각자 다양한 이익을 위해 참여하기에 복잡한내면을 갖고 있다. 목표야 전쟁의 승리겠지만 승리에 대한 각자의 목표는 상이하고 종종 상충적이다. 영화 '평양성'은 삼국통일 전쟁을 통해 그들만의 공통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세력들이 한 팀이 되어, 이기려는 것이 바로 전쟁이고, 전쟁 속에 담긴 다양한 이익세력들의 복잡한 이익구조와 그들간의 관계, 그리고 그 진행 등을 통해 전쟁의 속성과 국가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공동체적이기보단 개인주의에 집중하고 또한 국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뉴앙스도 묘하게 풍긴다. 즉 국가가 과연 필요할까 하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캐릭터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수십 년간 벌어진 고구려 멸망 과정을 작은 시골 마을 같은 평양성 세트에서 보여주려다 보니 짧고 굵게 표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미 잘 알려진 실존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단편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리석은 모습들로 채워졌다. 특히 고구려의 인물들이 그렇다. 고구려를 패망으로 이끈 인물들이라서 그렇겠지만 배신자 남생(윤재문)에 어수룩한 동생 남산(강하늘)은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얼마나 수준 이하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고구려를 위해 끝까지 저항한 남건(류승룡)은 끝까지 고구려를 지켰던 이유로 오늘날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을 보면 영화는 코디미라도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성을 목표로 한 작품임도 밝힌다. 대놓고 말이다. 아마도 3백만 정도의 관객을 목표로 하는 영화 정도.
 

  

   하지만 고구려 지배층 뿐만 아니라 김유신(정진영) 등을 포함한 나라의 우두머리들만을 찍기 위해 이 영화가 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갖고 있는 사욕으로 인해 고생하고 위험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국민을 희생시키고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확대하려는 지배층의 탐욕은 영화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보다 더욱더 집권층에 의해 이용되고 배신당하며, 결국 희생될 수밖에 없는 백성이란 하류층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그들의 편에 서서 영화를 이끌어간다. 이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전도사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전쟁은 목숨을 거는 도박판이 된다. 그 속에서 백성들은 그 도박판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신들이 원해서 성사된 도박은 아니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역설과 모순의 장, 그런 장소에서 영화는 두 가지의 선택을 지닌 두 명의 신라군에 주목한다 (고구려는 공격당하는 입장에서 지배층이든 백성이든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하나는 백제민이었지만 자국의 붕괴로 억지로 전장에 끌려온 거시기(이문식)과 또 하나는 전쟁 참여로 인생의 대박을 노리는 문디(이광수)가 그들이다. 목숨을 걸어야만 살 수 있는 역설의 현장에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게 된다. 전혀 다른 방식과 목표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하나로 귀결될 뿐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있는지에 대해,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의문이 들게 된다. 특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하는 곳까지 이르게 되는 문제의식이, 바로 감독이 원하는 지향점이다.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 승리에 따르는 배상을 요구하는 신라군의 모습과, 그런 그들과 협상을 결말짓는 김유신의 비열한 모습은 전쟁에 담겨 있는 정글의 법칙을 절감하게 된다. 어차피 전쟁에서의 승리는 희생을 전제로 할 것이고 그게 자기 아닌 백성이라면, 한 번 해볼만한 도박이라는 지배층의 생각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나 보다. 삼국통일이란 가치는 후대가 만든 가치관일 뿐 당시의 사람들에겐 그리 큰 가치는 아니다. 당시의 사람은 당시 사람이고 후대는 후대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라가 필요 없어졌다. 아니 그냥 수단으로 전락했단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언제부터인지 정부는 매우 중요하며, 국가를 지탱하는 힘으로써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정의됐다. 그런데, 영화 ‘평양성’에서의 정부는 없으면 좋은 기관으로 전락했다. 도리어 자국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렇고 그런 기관, 영화는 조금 묘한 구석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일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말이다. 이준익 감독의 결론은 자연스레 무정부주의로 결론을 맺는다. 신라, 고구려, 그리고 당의 권력이 못 미치는 삼수갑산으로 도망가는 거시기의 선택이 이 영화의 논지일 것 같다. 정부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집권층의 폭력성을 보여주다 보니 결국 그에 대한 마지막은 국가권력이 전혀 없는 곳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비록 고부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장면에서 인생에서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한다 정도의 견해가 나타나지만 최종적으로 정부는 악으로 결론이 난다. 
 

 

   의도야 어떻든 정부의 가치가 하락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이 갈망하는 염원일지 모르겠다. 통제하기엔 너무 막무가내인 정권의 속성은 어쩌면 국민들을 탈민주화시키는 가장 큰 원흉일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에서 볼 수 있는 기만적인 정권의 행태는 기막힐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많은 국민들이 염원했고, 정부 통제를 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실효적이지 못했는지 ‘평양성’같은 영화까지 나왔나 보다. 바로 21세기도 벌썬 1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다.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권의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막는 것은 결국 백성이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것이라면 다들 도망가서 살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될까? 결국 그곳에서도 강도는 있게 마련이고 약하지만 독립적 권력 집단도 있게 마련이다. 영화는 묘하게도 퇴영적 방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신라도 나쁘고, 고구려도 나쁘고, 당도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 무릉도원이 있다는 식의 결론은 솔직히 퇴폐적 낭만주의 결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비판하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권력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전작이었던 ‘황산벌’이 영화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막았던 것 같다. 다소 무리한 코믹 설정은 웃다가 좀 억지란 설정이 들어 웃다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편하게 느껴진 대중화장실의 장면은 과거의 해학에서 빌렸을지 모르겠지만 세련되지 않으면 어떻게 이상하게 변질되는지 확인하는 장면이 된 것 같다. 많은 구도 속에서 섬세하게 처리되지 못한 설정이나 억지스런 캐릭터 설정 역시 조금 그랬다. 그나마 연기자들의 연기력을 어떻게든 극복된 것 같지만 캐릭터 설정이 다소 억지스러웠던 것은 매우 아쉽다. 영화의 코믹한 대중성을 위해 그렇게 했단 생각도 들지만 기대치에 못미치는 것은 보는 관객이나 만든 제작진이나 아쉽게 마련일 것이다. 다음 전쟁영화가 될 매초성 전쟁이 잘 만들어졌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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