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란 현상은 하나인데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은 각자 다양한 이익을 위해 참여하기에 복잡한내면을 갖고 있다. 목표야 전쟁의 승리겠지만 승리에 대한 각자의 목표는 상이하고 종종 상충적이다. 영화 '평양성'은 삼국통일 전쟁을 통해 그들만의 공통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세력들이 한 팀이 되어, 이기려는 것이 바로 전쟁이고, 전쟁 속에 담긴 다양한 이익세력들의 복잡한 이익구조와 그들간의 관계, 그리고 그 진행 등을 통해 전쟁의 속성과 국가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공동체적이기보단 개인주의에 집중하고 또한 국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뉴앙스도 묘하게 풍긴다. 즉 국가가 과연 필요할까 하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캐릭터들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수십 년간 벌어진 고구려 멸망 과정을 작은 시골 마을 같은 평양성 세트에서 보여주려다 보니 짧고 굵게 표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이미 잘 알려진 실존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단편적이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리석은 모습들로 채워졌다. 특히 고구려의 인물들이 그렇다. 고구려를 패망으로 이끈 인물들이라서 그렇겠지만 배신자 남생(윤재문)에 어수룩한 동생 남산(강하늘)은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얼마나 수준 이하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고구려를 위해 끝까지 저항한 남건(류승룡)은 끝까지 고구려를 지켰던 이유로 오늘날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것을 보면 영화는 코디미라도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성을 목표로 한 작품임도 밝힌다. 대놓고 말이다. 아마도 3백만 정도의 관객을 목표로 하는 영화 정도.
하지만 고구려 지배층 뿐만 아니라 김유신(정진영) 등을 포함한 나라의 우두머리들만을 찍기 위해 이 영화가 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갖고 있는 사욕으로 인해 고생하고 위험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국민을 희생시키고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고 확대하려는 지배층의 탐욕은 영화 속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보다 더욱더 집권층에 의해 이용되고 배신당하며, 결국 희생될 수밖에 없는 백성이란 하류층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그들의 편에 서서 영화를 이끌어간다. 이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전도사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전쟁은 목숨을 거는 도박판이 된다. 그 속에서 백성들은 그 도박판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자신들이 원해서 성사된 도박은 아니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역설과 모순의 장, 그런 장소에서 영화는 두 가지의 선택을 지닌 두 명의 신라군에 주목한다 (고구려는 공격당하는 입장에서 지배층이든 백성이든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하나는 백제민이었지만 자국의 붕괴로 억지로 전장에 끌려온 거시기(이문식)과 또 하나는 전쟁 참여로 인생의 대박을 노리는 문디(이광수)가 그들이다. 목숨을 걸어야만 살 수 있는 역설의 현장에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게 된다. 전혀 다른 방식과 목표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하나로 귀결될 뿐이다. 살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있는지에 대해,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의문이 들게 된다. 특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하는 곳까지 이르게 되는 문제의식이, 바로 감독이 원하는 지향점이다.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 승리에 따르는 배상을 요구하는 신라군의 모습과, 그런 그들과 협상을 결말짓는 김유신의 비열한 모습은 전쟁에 담겨 있는 정글의 법칙을 절감하게 된다. 어차피 전쟁에서의 승리는 희생을 전제로 할 것이고 그게 자기 아닌 백성이라면, 한 번 해볼만한 도박이라는 지배층의 생각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나 보다. 삼국통일이란 가치는 후대가 만든 가치관일 뿐 당시의 사람들에겐 그리 큰 가치는 아니다. 당시의 사람은 당시 사람이고 후대는 후대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라가 필요 없어졌다. 아니 그냥 수단으로 전락했단 표현이 더 적절하다. 언제부터인지 정부는 매우 중요하며, 국가를 지탱하는 힘으로써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정의됐다. 그런데, 영화 ‘평양성’에서의 정부는 없으면 좋은 기관으로 전락했다. 도리어 자국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렇고 그런 기관, 영화는 조금 묘한 구석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일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말이다. 이준익 감독의 결론은 자연스레 무정부주의로 결론을 맺는다. 신라, 고구려, 그리고 당의 권력이 못 미치는 삼수갑산으로 도망가는 거시기의 선택이 이 영화의 논지일 것 같다. 정부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집권층의 폭력성을 보여주다 보니 결국 그에 대한 마지막은 국가권력이 전혀 없는 곳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비록 고부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장면에서 인생에서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한다 정도의 견해가 나타나지만 최종적으로 정부는 악으로 결론이 난다.
의도야 어떻든 정부의 가치가 하락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이 갈망하는 염원일지 모르겠다. 통제하기엔 너무 막무가내인 정권의 속성은 어쩌면 국민들을 탈민주화시키는 가장 큰 원흉일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에서 볼 수 있는 기만적인 정권의 행태는 기막힐 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많은 국민들이 염원했고, 정부 통제를 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실효적이지 못했는지 ‘평양성’같은 영화까지 나왔나 보다. 바로 21세기도 벌썬 1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다.
국민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권의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막는 것은 결국 백성이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것이라면 다들 도망가서 살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될까? 결국 그곳에서도 강도는 있게 마련이고 약하지만 독립적 권력 집단도 있게 마련이다. 영화는 묘하게도 퇴영적 방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신라도 나쁘고, 고구려도 나쁘고, 당도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 무릉도원이 있다는 식의 결론은 솔직히 퇴폐적 낭만주의 결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비판하려면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권력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전작이었던 ‘황산벌’이 영화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막았던 것 같다. 다소 무리한 코믹 설정은 웃다가 좀 억지란 설정이 들어 웃다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편하게 느껴진 대중화장실의 장면은 과거의 해학에서 빌렸을지 모르겠지만 세련되지 않으면 어떻게 이상하게 변질되는지 확인하는 장면이 된 것 같다. 많은 구도 속에서 섬세하게 처리되지 못한 설정이나 억지스런 캐릭터 설정 역시 조금 그랬다. 그나마 연기자들의 연기력을 어떻게든 극복된 것 같지만 캐릭터 설정이 다소 억지스러웠던 것은 매우 아쉽다. 영화의 코믹한 대중성을 위해 그렇게 했단 생각도 들지만 기대치에 못미치는 것은 보는 관객이나 만든 제작진이나 아쉽게 마련일 것이다. 다음 전쟁영화가 될 매초성 전쟁이 잘 만들어졌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