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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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50만 포로들의 분노를 담고 있다.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영화 속에선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와 왕, 그리고 집권층은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당했다. 무엇보다 정부와 집권층은 자신들의 책임은 방관한 채, 곤란에 처한 백성들 보고 각자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고만 했다. 무시하기엔 결코 작지 않은 숫자인 50만 포로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적지 않지만 당시엔 굉장한 인구숫자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던 조선정부를 보면서 50만 포로의 고난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무책임한 정부,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인조반정 때인데 차라리 매우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든다. 정부의 그렇게 역설하는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극단적인 경쟁은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축소되는 복지예산이나 서민들을 위한 공적 영역을 보면 이 영화, 왠지 모르게 시대를 초월한 상황과 분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제목에 ‘최종병기’란 단어가 들어갔는지 모른다. 최종이란 어휘는 더 이상 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활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써서 백성들이 각자 알아서 생존하란 이야기처럼 들린다. 영화 ‘활’은 무책임하고 무례한 정부에 의해 비참한 현실을 당한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시작부터 불운한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최종병기: 활’은 어쩌면 주인공과 백성들의 불운을 암시하는 듯 하다. 인조반정이란 음울한 역사적 사건으로 시작된 이 영화는 당시의 극우보수층이라 할 수 있는 서인이 국제적으로 세련된 외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광해군을 몰아내면서 조선은 위태로운 친명대청 강경책을 시작하게 된 때를 역사적 배경으로 담고 있다. 영화는 언젠가 있을 전쟁을 의미하는 ‘9년’이란 발언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지만 역적집안으로 몰린 어느 남매의 불운한 미래를 암시한다.
  역적이란 주홍글씨는 ‘남이’와 ‘자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역적으로 분류되는 순간, 그들이 품을 희망은 무가치한 것이며, 언제나 숨어 살며 자신들을 드러낼 수 없기에,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자신들을 결코 꿈꿀 수 없다. 양반으로서 과거를 쳐서 입신양명할 수 없었고, 누구나 다 하는 결혼을 통해 가족을 형성하는 기쁨조차, 상대 가문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에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살아 있지만, 결코 알려져선 안 되는 사람들이었고, 어쩌면 이미 죽은 사람들로 기억될 이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비극인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잠깐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도 순식간이었고, 그들에게 행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잠깐의 행복도 놓치는 그 순간을 단순한 운으로 돌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올바른 토론과 상대를 인정하는 자세가 없었던 조선정부와 기득권의 편협한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국토를 결코 지킬 수 없으면서도 각종 특혜를 챙긴 기득권들의 무책임이 남매의 불행을 이끈 가장 큰 원인이었고, 이런 문제가 결코 남이와 자인에게만 덮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영화는 처음의 두 남매의 개인적이 불행을 넘어 청나라 장수와 남이의 불꽃 튀는 활싸움을 보여준다. 그들이 돌아오는 과정에서의 액션이 이 영화의 볼거리다. 특히 활이란 소재로 영화의 극적 재미를 이끄는 아이디어는 매우 색달랐고, 영화를 보면서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적일 것만 같은 무기 활이 액션과 상황에 따라 더없이 활력이 넘치고 Speedy한 매력을 갖고 있음을 이번에야 알았다. 순간성의 상징인 활은 지금까지 많은 액션영화에서도 사용하지 못했고 사용하기도 쉽지 않은 무기다. 아마도 무기로서의 활력이 덜한 것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을 ‘최종병기: 활’은 멋지게 깨고 있다. 쫓고 쫓기는 긴장감 속에서 한 번에 모든 것을 거는 활의 매력은 지금까지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거리감을 상쇄시키는 활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함은 물론 상대의 위치가 어디이든 언제나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무서운 무기다. 또한 박해일과 류승룡의 뛰어난 연기력이 이런 극적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확실히 연기자가 왜 중요한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런 멋진 장면들이 있지만 영화는 불운한 조선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들려주고 보여주는 50만 포로들의 운명은 활을 통해 살린 사람이 얼마가 되든 결국 개인적인 모험담일 뿐, 모든 이들을 위한 활동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비호를 받지 못한 국민들의 불행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책임을 방기하고 모른 채 하는 정부와 기득권들의 만행이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가장 믿음직한 존재가 되지 못한 정부와 과연 과거에만 있었는가 하는 점을 되새긴다면 이 영화, 너무 우울하고 그 비판정신이 무척 가슴 아프다. 그래도 이 영화는 희망을 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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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 질풍전 극장판 4 : 더 로스트 타워 - Naruto Shippuden the Lost T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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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상이란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만화 치고는 너무 무거운 주제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아톰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인간공동체에 이방인이라 할 로봇이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벌어질 갈등과 공존, 그리고 그 근본인 차이가 차별이 될 수 있는 위험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방인이 한국이란 공동체 내로 급격히 진입하는 것을 본다면 ‘아톰’의 선견지명이 한층 두드러져 보인다. 이런 전통을 갖고 있는 일본 만화영화는 사회적 담론을 제시하는 수준 높은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고 있는데 ‘나루토’ 역시 이런 범주에 당연히 드는 영화다.
  나루토는 일본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시리즈물이다. 자신의 몸 속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괴물 ‘구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시작부터 태생부터 불편한 운명을 짊어진 그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그런 구미를 지니고 사는 존재인 ‘인주력’이 되면서 겪는 그의 성장 중의 고통은 고아라는 상황과 함께 모든 이들이 멀리 하는 왕따로서의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주인공이었기에 그런 험난한 과정을 이겨낸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세상에 반항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악화된 관계를 좀 더 좋은 관계로 만들기 위한 그의 헌신은 분명 비현실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성장을 통해 그의 주변이 바뀌고 심지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얻게 된 증오, 분노로 얼룩진 닌자 세계의 모든 것들이 변한다는 설정은 억지스럽지만 뭔가를 느끼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 나루토 영화의 핵심은 성장통이다. 성장통은 청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느끼게 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고통이다. 나루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기도 한 이 성장통은 자신의 가치가 관계 속에서 평가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일본이 갖고 있는 전통이자 관습이며, 그들이 갖고 있는 시시비비의 근간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위기로 인해 개인주의가 범람하는 이 때, 매우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이며, 그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하고, 그것이 힘들고 귀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피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는 과거에 있었던 공동체적 가치관이자 자유주의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임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나와 타인을 위해 가장 의미 있는 의식이란 점을 생각하면 자유와 책임은 사실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것이며, 이런 점을 나루토는 밝히고 있다.
  나루토에게 책임감의 가치와 그를 위한 불의 의지를 전수받는 이는 세상 물정 모르고 살면서 악인에게 조종당하는 공주다. 그 공주가 자신의 나라가 겪는 위험을 목도할 때, 공주에 걸맞은 책임자가 되기 위해선 과거와 다른 용기와 책임을 지는 자세가 요구되며,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대단한 모험과 새로운 각오가 필요하다. 특히 친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내용은 다소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뭔가 강한 호소력은 있어 보인다. 오늘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상황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공주를 어른으로 키워내는 역할은 담당하는 나루토는 어쩌면 자신의 성장통을 통해 얻게 된 세상의 이치를 갖고 있다. 힘들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느낄 때 어른이 되며, 또한 친구와 동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할 책임이라는 것을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나루토 영화는 오늘의 반성을 담고 있는지 모른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때, 타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망각하며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서로 간섭 안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생활방식으로 정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은 일본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도시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들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 때, 나루토의 외침은 이상하게 힘이 있다.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 부족하면서 생기는 고통은 자못 크다. 혼자 살면서 우린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되며, 과연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더 좋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런 점에서 나의 행복은 타인과 공동체에 기댈 수밖에 없으며, 더불어 살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나루토는 그런 고민을 해결하고 다 자란 어른으로서의 인간인 것 같다. 우리 모두가 나루토라면 세상은 더욱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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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목장의 결투 - Gunfight at the O.K. Cor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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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하게 본 OK 목장의 혈투는 어느 순간 갖던 서부영화의 편견을 무너뜨렸다. 언제나 의미 없는 총질을 하며, 사람의 목숨이 파리목숨으로 다뤄지는 마카로니 웨스턴 무비에 너무 익숙해서인지 모든 서부영화가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카로니 웨스턴 무비 이전의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서부영화에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고민,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이 있었다.
  1957년 작품인 ‘OK 목장의 혈투’는 고전이다. 다 그렇게 안다. 하지만 왜 이 영화가 고전인지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과거 어느 때쯤 봤을 법도 하지만 이번에 봤던 이 영화는 전혀 새로운 영화로 다가왔다. 내용은 뻔했다. 가족을 위한 일종의 복수극 정도. 그러나 그 복수극의 과정은 결코 복수극 정도로만 평가할 수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엔 인간 그 자체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갈등은 사회적 가치와 인간적 본능 간의 치열한 긴장이다. 빌 와이어트는 사회적 정의를 그 어떤 것보다 소중히 아는 보안관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을 약속했으면서도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당을 응징하기 위해 포기했으며, 악당이 아무리 강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걸고 공동체의 안녕과 정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이런 캐릭터는 오늘의 영화에선 보기 힘들다. 사회적 가치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먼저 고려하는 캐릭터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것이 대세인 요즘이다. 그런 점에서 빌 와이어트는 너무 고전이며, 오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현실적이다.
  또한 남자의 모습 역시 달랐다. 여자의 순종적인 모습 이전에 남자들은 강한 책임감을 갖고 모든 것을 대했다. 그들은 어쩌면 현재의 우리가 꿈꾸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끈끈한 인간애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그리고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현재의 우리가 보면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늘의 영화에선 사라진 인간미가 도처에 있었다.
  이런 인간에게 인간적 충격을 안긴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동생의 비극적인 살해다. 공동체적 가치를 가장 우선했던 그도 결국 인간임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는 사회적 정의와 가치를 수호하는, 그래서 인간적인 고뇌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는 보안관의 직위를 버리고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쳐 복수를 하는 형, 빌 와이어트가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인간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관찰을 하게 된다. 가족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이야기하고, 개인적 복수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믿고 있던 가치관을 깨야 하는 상황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공동묘지는 인간으로서 완벽할 수 없고, 언젠가는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상징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보안관으로서가 아닌 와이어트 가문의 한 일원으로 결투에 참가하게 된 빌 와이어트의 운명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가문과 가문의 대결이 벌어진 O.K 목장은 그래서 인간의 나약함이 한껏 드러난 불운의 장소다. 그곳에서 누군 죽었으며, 누군 복수했다. 하지만 그 복수는 어딘지 모르게 통쾌하지 않았고, 어느 가슴 한 편에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 같은 우울함이 산재하다. 복수를 위해 누굴 죽여야 한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가 정당한 법이나 일반적 가치관이 아닌 감정에 따른 결과이며, 그 과정에서 결코 죽이고 싶지 않은 이까지 죽여야 하는 불운은 이 영화의 우울한 인간미를 드러낸다. 또한 이 지점을 영화는 냉정하고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어쩌면 공동체적 가치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결국 본능을 갖고 있는 인간이 사회적 가치를, 그리고 공정한 사회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 주는 것이며, 술주정뱅이이자 살인자로서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닥 할리데이의 도움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려 한 것 같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인생의 우울한 측면을 느끼게 한다. 즉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세상과의 치열한 타협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이 영화를 고전으로 만든 원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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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 The Front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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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고 싶지 않았다. 전쟁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는 군인들이 말이다. 어쩌면 죽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군인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자기 의사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큰 의미가 있는 전쟁도 아니었다. 동부전선의 애록고개라는 치열한 군사 고지 위에서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남들이 만든 환경과 적개심으로 인해 서로 싸우도록 강요 받았고, 군인이긴 하지만 목숨을 걸라고 요구 받았다. 마치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친구끼리 싸워야 했던 로마의 검투사들마냥 그들은 작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야말로 개죽음하고 있었다. 남이 만든 싸움터에서 억지로 하는 싸움, 그런 곳에서 살고자 하는 발버둥, 영화는 그 어떤 잔인한 공포영화보도 무서웠다.
  전쟁하겠냐고 누군가 묻지도 않은 전쟁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지, 이념을 위해, 그리고 조국을 위해 몸바쳐 싸울 것을 다짐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불분명한 이념의 논쟁은 사실 실제 생활과 거리가 멀었고, 왜 계속 자신들을 개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그 이유도 알지 못했다. 조만간 정전이든 뭐든 전쟁은 끝날 것이라고는 달콤한 이야기만 나오지만 그 조만간은 어느 순간 무려 3년이란 시간이 됐고 더 갈 기세였다. 지금 살아 숨쉬고 있지만 그 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불안한 상황이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후방에 있으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의 수많은 정치적 수 싸움으로 인해 기약 없는 정전의 약속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희생자수의 증가와 의미 없는 살인과 공포가 애록고지란 곳에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됐다. 그 속에서 왜 싸우는지 이유를 잊게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웠으리라. 그리고 그런 전쟁 속에서 인간이었던 군인들이 점점 인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인기계가 됐다. 그리고 이번에 살았지만 다음 살 수 있을지 모를 긴장조차도 초월한 채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친구의 죽음조차도 무미건조하게 상대할 수 있는 그런 무신경한 인간들로 바뀐 지 꽤 오래 됐다.
  이런 곳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리라. 지옥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이 자신의 환경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모를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잔인해지고 무신경해져 버린 그런 인간이 됐을 때, 그들은 괴물이 됐고, 누군가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그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 된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언젠가 죽을 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못하면서 나도 다음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불안한 삶이 일상화된 곳, 그런 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문제는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벗어날 길이 전혀 없을 때, 인성은 사라지고 괴물만 존재하는, 진정한 지옥이 탄생하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이미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인간들은 죽어가는 주인공의 독백 속에 지옥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그래서였을까? 중위 김수혁(고수)의 슬픔을 넘어 비극의 절정을 형상화한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마지막 이상향인 어머니의 품조차 잊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있었다. 정말 참혹한 곳이었다. 
 

 

  전쟁에서 이긴다고 그래서 생존했다 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 전쟁 중에 낭만이 생겼던 것 같다. 아마도 가상현실이겠지만 적군끼리 서로 편지와 물품을 교류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 남한의 군대만이 비슷한 고충을 갖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북한군 역시 이 지긋지긋하고 공포스런 전쟁에서 승리보단 생존이 우선인 상황이 전개됐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군대는 서로를 잘 아는 동포였고, 서로간에 인간미도, 우정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상대편이지만 부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부탁을 잘 처리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싸우도록 만든 것은 사실 그들 자신이 아니었고 남이 그렇게 강요해서 한 것일 뿐이다.
  어떻든 그들은 그래도 서로 싸웠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는 더욱 슬프게 했다. 포항에서 자기들만 살겠다는 충동 속에서 벌어진 사건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그리고 생전 보지도 못한 여인을 사랑한 남자에게 다가온 슬픈 인간관계는 그 많은 사랑이야기보다 더욱 슬펐다. 그것을 알면서도 전쟁에서 총과 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불운한 인간관계, 동료보다 상부지시에 따라야 할 것을 요구하는 상관에게 했던 부하들의 반항, 그러면서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괴로운 군인들의 처절한 몸부림, 이 모든 것들이 애록고지 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특히 왜 자신의 부대가 악어부대인지를 설명하면서 승리보다 생존을 더 강조하는 대위 신일영(이제훈)의 마지막 연설은 전쟁이 얼마나 추악하고 무서우며,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가련한지를 실감나게 보여줬다. 전쟁은 인간의 목숨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따뜻한 인성도 앗아감을 너무 슬프게 보여줬다. 
 

 

  누구에게나 불행이 닥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볼 수 없이 당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비극적인 것이다. 내몰린다는 것은 환경에 좌절하는 인간의 가장 나약함을 의미한다. 감독 장훈은 이런 음울한 모습들을 매우 냉정하고 담담하게 앵글에 담고 있었다. 실제 전투인양 벌어지는 고지전투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느 전쟁장면보다 현실적이었다.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은 너무 사실적이었다. 종종 전쟁영화에서 볼 수 있는 낭만적 개성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현실에서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것 같다. 이런 것 덕분에 영화는 더욱 인간미의 가치를 잘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영화가 보여준 또 다른 가치다. 고수와 신하균은 이미 검증됐고 뛰어났지만 이번 영화에서 그들의 가치는 더욱 빛났다. 특히 인간성이 파괴됐으면서도 동료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이중적 성격을 한 몸에 갖고 있는 김수혁 중위 역을 맡은 고수는 전쟁영화 캐릭터에서 새로운 고전을 만들었다. 향후 김수혁이란 캐릭터는 한국영화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적 트라우마를 간직하는 대위 신일영 역을 맡은 이제훈은 앞으로 많은 이들이 눈여겨봐야 할 최고의 수확이 될 것이다. 고독과 강인함을 동시에 갖춘 그의 연기력은 이 영화의 가치를 역시나 한 단계 높여줬다 할 수 있다. 여기에 전쟁터에서 어느 한 남자의 낭만을 만들어줬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공포를 만들었던 2초의 김옥빈 역시 그녀의 매력을 잘 살린 연기자로서 남게 될 것이다. 이 영화 거꾸로 봐도 감동받을 만큼 한국의 고전이 될 것임이 분명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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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 Taipei Ex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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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참 갑갑하다. 어느 순간 그렇게 느껴졌다. 잠깐이었지만 힘겹게 살면서도 도시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감정보다 왠지 모를 답답함과 구속,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 속에 파묻혀서 즐거운 나날들보단 하루 생계에 힘겨워 하거나, 아니면 미래의 번영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노동자로서만 남게 됐다.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모험이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런 모험 속에서 인간적 매력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힘든 일을 저기서 또다시 할 뿐, 그 속에선 뭔가 새롭고 활력 있는, 그래서 즐거운 나날을 만들 수 없을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 그런 갑갑함을 날려 버린다.
  영화, 뻔하다면 뻔하다. 어느 철모르는 자매 둘이 대만의 타이페이에 카페를 연다. 아마도 도심 속의 카페에 대한 이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도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 커피와 멋진 인테리어를 통해 많은 돈을 축적하려는 사람들은 많다. 이들 역시 비슷한 동기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회사생활에 힘들어한, 어떤 면에선 사회 부적응자들일 수 있을 것이며, 또 다른 면에선 쉽게 뭔가를 해보려는 얄팍한 그 무언가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시작은 좀 엉망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것에서 색다른 변화로 그들의 카페와 그 분위기, 심지어 손님들의 기대치까지 바뀐다. 나중엔 그 곳의 주인들은 물론,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조차 말이다.  

 

 


  이런 영화 속에 매우 영리한 매력이 있다. 중국 특유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오감으로 관객들을 유혹한다.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와 커피는 미각은 물론 후각을 자극하며, 영화 속의 감미로운 노래들은 청각에 색다른 매력을 준다. 여기에 여자 주인공들의 멋진 외모는 당연하겠지만 영화 속에서 이야기 하나하나와 관계된 그림들은 마치 어느 전시회의 그림들을 보는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촉각만 예외인 듯 하지만 영화 속의 물물교환 상품들을 만지고 싶은 느낌은 촉각의 유혹을 갖고 있으리라.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 풍부하다. 그리고, 그 속에 듬뿍 담겨 있는 솔직한 인간미들은 은은히 진행되는 영화에 어떤 활력을 제공한다.
  정직하고 솔직했고 객관적이었다. 그래서 공감이 쉽게 이루어진 것 같다. 어렵지 않을 것만 같은 문제에 영화 출연진들과 다른 일반인들의 선택과 그 이유를 들려주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백미다. 소소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의 삶에 가장 행복한 것들을 만들어주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영화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한 번은 생각해 봄 직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들려주고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우리가 어디에 있고, 그 속에서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생각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힘은 이런 것들보다 주인공들의 의미심장한 연기와 대화, 그리고 그녀들의 이야기다.  

 

 


  공감 가는 현실 속에서도 영화 주인공인 두얼과 그녀의 여동생 창얼에겐 낭만이 존재한다.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동경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꿈 많은 이 두 어른들을 위한 동화들은 현실 속에서 아늑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를 애달픈 흔적을 만들어간다. 잠시나마 아늑함을 주지만 이야기는 또 다른 아쉬움을 만들며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동경을 만들어 나간다. 현재의 나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저 먼 곳에서 있을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평범한 여자 두얼이 색다른 인생을 꿈꾸게 된 것이다. 카페 주인은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거짓말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의 두얼이 돼가고 있고, 또한 될 그녀는 우리 도시인들이 꿈꾸는 그런 모습의 도시인이다. 낭만을 그리워하는 도시인들이 감히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에서 이제 그 색다른 낭만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것, 정말 부러웠다.  

 

 


  이야기는 소통이며,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이루어지는 만남과 친근함, 그리고 그, 혹은 그녀로 향하는 어떤 묘한 이끌림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예상되고, 또한 그러게 되길 바라게 만든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카페를 통해 물물교환하는 것은 단순히 물건만이 아니라 이야기이며, 관계이며, 그리고 갈구다. 색다른 만남뿐만 아니라 자신과 무엇인가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는 그를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행복으로 향하는 가장 가벼우면서도 중요한 첫걸음일 것이다. 비록 낭만이고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그렇게 끝나는 것이 무척 고마웠다.
  물물교환, 경제학원론을 찾아본다면 물건과의 단순 교류라고 표현될 것 같다. 하지만 인간적인 만남 속에서 뭔가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굳이 형체를 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좋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통해 뭔가 변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도시 속의 활력을 이끌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타이페이 카페에서 그렇게 물물교환하고 싶다. 그래서 좀 더 바뀐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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