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뛴다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진부한 결말이었다. 이전에 어디에선가 본 듯한 스토리였기 때문이며, 가족드라마와 같은 감동 역시 과거 어느 순간에 본 것이고 그때도 감동했을 것이다. 확실히 새로운 결말은 없었고, 또한 역겨운 결말로 최근 각광받는 영화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결말만이라면 영화에 대한 인상은 그리 깊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는 결말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엔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의외의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화면 가득히 존재했다.
  수많은 차들이 부딪치는 강력한 장면들은 아니었지만 영화 내내, 긴박한 긴장감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미가 숨어있었다. 이 영화는 심장 이식에 통해 확인하게 되는 가족의 사랑이야기를 배경으로 빠른 전개와 긴장감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그런 전개와 긴장감, 스릴, 그리고 서스펜스 등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왜 그렇게 조화를 이룰까? 그것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경쟁구도를 갖고 있는 것이며, 제로섬 게임과도 같은 이기기 위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영화 속의 두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보호하고 살리고자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사랑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진다면 논리적 모순이 있는 이야기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상대의 것을 뺏어야지만 자신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제로섬 게임을 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생존경쟁이 어느 노인의 심장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 되고 만 것이다. 관객 누구나 그들의 행동을 다 이해할 것이고, 그들을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동정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어느 아들과 어느 엄마의 치열한 싸움은 영화 곳곳을 수놓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격렬한 투쟁은 뛰어난 두 남녀 배우의 힘입어 점입가경이 되어 가고 있다.  

  


  동네 양아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휘도(박해일)’의 인간적인 변화는 이 영화가 왜 거칠어져 가는지의 이유를 들려준다. 모성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이 어머니의 사랑과 고통을 목도하면서 변하게 되고, 한 때 가장 학대했던 아들이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면서 소통부재에 의해 고민했던 어느 모자의 슬픈 이야기를 보게 된다. 언제나 상대에 대해 무지한 채, 자신만이 생각한 틀 속에서 상대를 가혹하게만 다루는 오늘의 우리들이 보인다고 할까?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가해자들의 참회와 눈물을, 휘도를 통해 본다면 과한 억측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듯한 영어학원 선생 ‘연희(김윤진)’은 자식의 생명을 위해 자신이 믿고 있던 종교의 가르침조차 지켜내지 못한다. 믿고는 있지만 결코 따르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누구나 공감하듯 모성으로서의 거친 본능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나 보다. 종교보다 앞선 본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하지만 서글픈 한 인간의 몸부림이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모습에 울었고, 또한 스스로를 자학하고 파멸하면서 울었다. 그러나 울었지만 또한 검투사처럼 싸웠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일이 진척될 때, 그녀는 어쩌면 포장된 이면의 본능을 꺼내면서 그 어떤 방해물과도 싸울 용기를 내면서 자신의 본능을 거침없이 발휘했다. 슬픔 앞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그녀는 싸움닭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둘은 충돌하게 되며, 영화는 그 충돌을 결코 우아하지 않게 형상화한다. 아니 매우 거칠게 묘사한다. 누군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든, 누군 우아한 귀족처럼 종교인으로 생활하든, 핏줄에 대한 쟁점에선 둘 다 맹렬하게 사투한다. 그들 앞에 의학적 합리성이든, 인간적 도덕이든, 혹은 법적 논리든 그 무엇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말이다. 마지막 순간, 한 인간의 고통이 끝난 이후, 베푸는 것과 감사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병원에서 몽둥이를 들었던 손을 풀었을 때, 영화는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종결된다.
  공감했다. 이전의 영화처럼 어느 희생을 아름답게 포장하면서 사랑과 화해를 이끄는 것보다 영화 속에서 보인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줄달음치는 모습이 정말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거친 싸움의 과정에서 도리어 난 가슴이 뛰었고, 가족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된 것 같았다. 그건 솔직함이야말로 인간의 정서를 울리는 가장 큰 힘이 여서일 것이다. 여간 해선 흠 있는 연기력을 선보이지 못하는(?) 배우인 김윤진과 박해일의 연기력이 앞서의 느낌을 얻도록 했는지 모르겠다. 계속 해서 그들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흠을 찾도록 하겠다. 억지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뛰어난 각본, 신인이기에 함부로 도전하는 윤재근 감독의 색다른 도전 역시 즐거웠다. 새해부터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러브 - G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 시작을 어느 중학교 투수의 실패로부터 했던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어려움을 딛고 새롭게 출발하는 캔디형 영화임을 쉽게 알려준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뻔한 스토리를 벗어나지 않고 열심히 살자라는 교훈을 가르쳐주듯 진행됐다. 이런 영화의 흥행코드는 기존의 것을 답습했다고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며, 또한 과거의 어느 영화와 너무 흡사해서 참신한 것이 없다고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즉 뻔한 설정이다.
  그저 그런 감동적인 영화, 아마 이 영하에 매겨질 촌평이 이럴 것만 같다. 하긴 이 영화는 새로운 시도를 위한 독립영화가 아닌 관객 천만을 목적으로 한 상업영화다. 감독 역시 은근히 그런 의도를 비췄고, 사실 제작하는 사람들 입장에서야 흥행이 중요한 것이지 역사적으로 남을 위대하지만 저주받은 관객동원을 한 영화는 다른 제작사가 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관객 역시 그냥 그런 영화지만 Killing time 용 영화가 좋지, 복잡하고 어려운 성찰의 영화는 현실 생활도 복잡하고 어려운 판에 괜한 고생만 주는 영화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글러브란 영화는 제작사와 관객 모두에게 환영 받음직한 영화다. 제작사야 돈 벌어서 좋고, 관객이야 현실의 각박함을 잊고 너도 열심히 살면 뭐가 될 수 있다는 낭만적인 세상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으니까. 최소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픈 관객이라면 손에 핏줄이 터져도 열심히 던져서 뭔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성심학교 투수가 자신의 롤 모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주인공인 청주 성심 학교 학생들 역시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이 영화를 통해 표현할 수 있어 좋다. 관계자들 모두가 좋은게 좋은 영화, 곧 글러브다.   

 

 

  하지만 뻔한 구성에 뻔한 감동,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다. 그렇다고 어떤 창조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충 보면 다음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있는 영화다. 심형래 감독 작품처럼 말이다. 이렇게 평한다면 좋은 영화는 못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다음 이야기가 대충 그려지는 영화는 그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창조적이지도 못한 영화라는 평가. 그러나 이 영화는 확실히 좋은 영화이고 볼 만한 것들로 채워진 대중적인 영화다. 특히 힘들어서 죽을까 하는 자살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게 된 지금 말이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더욱 좋은 특성을 갖고 제작됐기에 더욱 그렇다.
  힘들다. 그래서 다 그만 두려고만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뉴스가 최소한 한 편씩은 방송되고, 그 사연 역시 기구하다. 고독사, 아마도 올해 가장 유행될 이 어휘는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니, 88만원 세대니 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들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그래서 지금은 살만한 세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이런 불행한 공동체 일원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위험 사회이고 더욱 위험해지고 있다. 우린 그런 시공간에서 살고 있다. 누군가가 보듬어주지 못해서 언젠가는 불편한 진실의 주인공이 되고 말 사람들을 표현하는 이런 말들 속엔 기가 막힌 세상을 살고 있는 이들의 아픔이 전해져 온다. 즉 지금은 힘든 세상이다.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결코 살아가기엔 힘든 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된 자들이 나온다. 프로야구에서 엉망으로 산 어느 퇴물 투수가 어쩌면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의 학교인 충주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코치가 되기 위해 온다. 야구 배트를 함부로 휘둘러 상해를 입힌 그가 이미지 관리를 위해 건성으로라도 자원봉사 비슷하게 하기 위해 그가 온 것뿐이다. 언젠가 떠날 것이고, 대충 할 수 있는 그저 그런 나쁜 선수다. 그의 학생이 될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은 어쩌면 의욕적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청각장애인들이다. 불쌍하게 봐주거나, 아니면 무시당하는 두 가지 밖엔 안 봐주는 그런 학생들은 노력을 해도 이미 가련하게 보여주는 그 순간, 이미 최선을 다해 살고자 하는 의지는 무너진다. 이미 무너진 몸에 무너져버리고 마는 정신력, 그들이 처한 위기의 실체다.
  망가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무너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인간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고독사의 본질은 일한 육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버려져서 더 이상 기사회생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자들로 대변되는 인간들의 모임과 그들의 재생, 그리고 그들의 모험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뻔한 용기란 비판에서 벗어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으로 다가선다.  
 

 

 

  영화는 보는 관객들 중 상당수는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일 것이다. 마음 편히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선가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직장이나 학교에서 좌절을 맛 봤던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욱 힘든 육체적 어려움을 견디면서 전국대회 1승이라도 한 번 거두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육체적으로 건강하지만 정신적으로 불구가 된 자들이 사실 이 사회에 많기 때문이며, 고독사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일 것이다.
  용기,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한 세상 속에서 우린 산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상대의 용기까지 빼앗아야 마음이 편한 세상, 그래서 잔인하게만 변하는 인성이 가득한 세상. 그런 곳에서 삶의 방향은커녕 지금의 안락도 결코 안락으로 느낄 수 업는, 불안함이 가득한 세상에서 용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용기가 없으니 희망이 설 자리도 없어져간다. 그리고 방황하는 정신 속에서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마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글러브는 정신적 혼란을 치료하는 좋은 약인 셈이다. Glove 속에 담긴 Love는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Love를 통해 힘을 얻고 또한 미래의 자양분인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영화다. 좀 뻔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충주성심학교 야구부가 꼭 1승을 얻길 빈다. 그 승리는 그들만의 승리가 아닌, 사회의 소외된 자들의 승리가 될 수 있는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심 야구부, 파이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로우 고스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옆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하고 기댈 사람들이.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알아채지 못하고 있기에 세상은 거칠게만 느끼고 또한 불행만 느끼고, 그래서 떠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Loser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래서인지 주인공은 죽기 위해 살고 있다.
  자살, 어느덧 자연스레 듣게 되는 이 단어는 거의 매일 듣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의 매일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들린다. 유명인의 자살이 화재거리라서 크게 회자되지만 이름 모를 어느 누군가의 자살은 거의 매일 있는 다반사의 시대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기 쉬운 슬픈 내용이어서인지 방송매체의 발전에 기인한 이 슬픈 현실은 차라리 방송 없는 곳이 더욱 행복한 세상이란 착각까지 들도록 한다. 방송 없는 곳이 낭만적인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 그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소통부재가 차라리 행복의 조건인지 모르겠다.
  사회의 Loser들이 살기엔 이 세상은 각박하고 외롭다. 자살하겠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워 보인 세상은 사실 그렇게 척박한 현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단 의미이고, 자신이 필요로 한 사람도 없단 의미이다. 그냥 사라져도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는 세상은 모두에게 삶의 진미를 느끼도록 하지 못한다. 생명은 귀하지만 Loser의 생활이 정말 그만큼 귀할까?란 질문이 자연스레 나오게 된다. [헬로우 고스트]란 영화는 바로 이런 물음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귀신이 존재한다. 그것도 바로 그의 옆에 말이다. 한국적 사고를 통해 상상된 이 구조에서 출발한 이 영화에서, 죽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외롭고 불쌍한 남자 ‘상만(차태현)’에게 뜻하지 않게 귀신이 더부살이하겠다고 온 것이다. 즉 변태귀신, 꼴초귀신, 울보귀신, 초딩귀신. 울기만 하면서 소원을 들어달라는 유일한 홍일점 귀신이 함께 살자고 한다.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영화는 그들과 헤어지기 위한 상만의 의지와 계획으로 시작된다. 혼자여서 죽고 싶었던 상만이 그들과 헤어지기 위해 자신의 자살의 시간을 좀 더 지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상만의 몸을 통해 들어주면서 알게 되는, 그들이 왜 상만에게 왔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게 된다. 그 속엔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서사가 있다. 어지간히 냉혹한 관객이 아니라면 어느 순간 촉촉히 젖는 눈시울을 느낄 만한 전개다.
  영화는 곳곳에 웃음을 장치하면서 극을 진행한다. 귀신과 헤어지기 위해 고스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는 미션에 따라 상만은 귀찮은 함께 살기를 하게 된다. 귀신이 원하는 것은 왜 이리도 상만에겐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심지어 상만에겐 부적격한 것들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하지만 고스트들의 꿈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함께 사는 가치와 동료애도 느끼고, 함께 사는 온기도 동시에 누리게 된다. 그리고 고스트들이 아닌 현실의 여인에게 느끼는 동질감과 사랑은 확실히 진부해 보이는 설정이지만 어느 순간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확실히 고전적인 방법이 진부하긴 해도 효과는 만점인 법인가 보다. 진부한 것을 함부로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영화의 공간엔 호스피스 병동이 있다. 그곳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들어가면 결코 살아서 나오기 힘든 것이다.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일 뿐, 인간세상에서 기적을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공간인 것이다. 문제는 그곳으로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역시 무섭긴 마찬가지다. 인간들의 소통부재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과 외면 받는 고통 앞에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은 것이다. 임종은 결국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시간일 뿐이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죽은 자 취급하는 세상의 세태는 많이 익숙해진 모습임에도 슬프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귀신이라도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자들에게 기댈 수 없다면 귀신이라도 나타나 가족애를 확인시키고 남과 더불어 사는 가치와 행복을 만끽하도록 해주었으며 하는 바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비현실적 동화를 사용해서 현실의 풍자로 돌변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의 가치를 너무 쉽게 회복하지 못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애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귀신이라도 괜찮다는 역설, 죽은 자들이 다시 우리 곁에 와야 하는 억지스런 이유인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됐으면 말이다. 추운 날씨에 마음까지 추워져선 안 되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칸 - The Americ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킬러의 영화다. 킬러의 국적은 미국. 그래서 제목이 The American이다. 하지만 미국과 관련된 것은 국적 빼곤 찾을 수 없다. 영화의 배경은 유럽이다. 쫓기는 미국인 킬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찾아가고 있는 킬러다. 청부를 받고 누군가를 죽이는 그는 역시 그를 노리는 어느 누군가에게 쫓기는 입장이기도 한 것이다. 청부를 받으면서 또한 노군가의 청부에 의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시달리는 그,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고독하다.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설정은 우아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의 성공은 결국 그를 노리는 사람들의 숫자를 불리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에게 타인은 경계의 대상이며, 불신의 대상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죽이기에 고통 받는 것보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는 사실에 더 두려운 킬러는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위협이 된다고 느낄 때, 주저하지 않고 그는 총구를 겨누며,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위협의 희생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협하면서도 하루하루 위협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영화 속의 킬러의 삶의 모습이다.   

  그에게 살인을 의뢰하거나 살인과 관련된 일을 맡기는 청부인과 미국인 킬러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선 기본적은 신뢰가 필요하다. 일방적이지만 악어의 공격은 결코 없을 것이란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관계이고, 그것을 통해 서로 공생하는 그런 관계다. 하지만 영화 속의 청부인과 킬러의 관계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필요에 의해 만든 관계인 이상, 그 필요는 언제든지 휴지조각처럼 바뀌게 될, 너무 허약한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믿지 못하는 불신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청부인이 준 모바일 폰을 버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오직 공중전화로만 소통되는 그런 관계가 된다. 마치 나에게 청부를 하지만 동시에 나를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호란 것 자체가 없는 그들의 관계는 청부하면서도 상대의 사악한 마음을 읽어내야 하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보호하지도 보호하려고도 않는다. 언젠가는 파멸된 위기일 뿐이다. 마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처럼 말이다. 깊은 불신 속에서 억지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킬러에게 인간관계는 위험하다. 어느 순간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눌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아주 깊은 산골로 간다. 스웨덴에서도 그랬고 이탈리아에서도 그랬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망이기도 하다. 그래도 또 다시 숨어살아야 하는 인간의 비애가 그의 도피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킬러는 조용하기만 한 산의 어느 오두막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또 다른 킬러들을 죽여야 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죽이기조차 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비록 슬펐겠지만 말이다. 인간의 애정에 마음을 쏟았을 경우의 사태를 그는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인성의 가치를 알지만 결코 기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철학자처럼 말이다.  

  그에게도 낭만이 있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한 있지만 자신 없는 미래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이 사치였는지 모른다. 그가 은퇴하려 했지만 필요가치로 인해 판단되는 상황에서 모든 상황은 그가 원하는 낭만으로 갈 수 없도록 이끈다. 그나마 갖고 있는 행복의 끈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선 너무 사치스런 것인지 모른다. 인간이 갖고 있는 관계로 인해 갖게 되는 인생을 새롭게 바꾸려는 것이 결국 사치인 셈이다. 그는 어디로 가든 영원히 쫓겨 다닐 것이고, 그래서 그의 국적인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의 삶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 것 같다. 그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비극, 어쩌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경쟁은 곧 우리 모두가 청부대상일 수 있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스트 갓파더 - The Last Godfat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무거운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는 심형래 표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들 역시 그렇게 알고 봤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명작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나, 훈훈한 감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탐탁지 않을 수 있겠지만 Killing time으로, 그리고 코미디 영화론 제격이다.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 그게 바로 한국감독인 심형래 영화다.
  심형래, 매우 독특한 감독이다. 코미디언이면서 공룡 같은 괴수영화만을 고집했던 감독이다. 그의 창작이유는 솔직히 기억하기 힘들 만큼 특별한 구석은 없다.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의 산물 정도일 것이다.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처럼 코미디와 폭력물에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이는 그런 감독도 또한 배우도 아니다. 그는 언제나 심형래일 뿐이며, 그걸 아는 관객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황해’나 ‘심장이 뛴다’와 같은 인간의 성찰 문제나 사회의 쟁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나마 논쟁이라면 전작보다 좋은 작품이 나오냐 아니냐 하는데 이것 역시 과연 심형래 감독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의 영화에서 출연진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몰입하면서 만든 작품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각본이란 면에서도 그렇다. 코미디가 언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만들 필요가 있을까? 코미디는 전체 스토리를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 장면에서의 즐거움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The War’에선 CG가 어느 정도 됐느냐 하는 것으로 논쟁이 일었다. 이 영화는 코미디언인 만든 영화지만 분명 코미디는 아니다. 그렇다고 멜로 영화나 현실주의 영화도 아닌, 역시나 시간 때우기용 영화다. 미국 관객들을 겨냥한 작품이든 한국인을 겨냥한 것이든 말이다. 그 속에서 잠시나마 인생의 고달픔을 잊으면 되는 그런 영화다. 아니면 억지로라도 만들 수도 있는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을 위해 만든 영화이거나 할 것이다.
  과연 ‘라스트 갓파더’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이 영화 역시 킬링 타임용 영화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대목이나 방학특수를 이용해서 투자한 돈을 회수하려는 영화다. 그 속에 심형래표 영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영화는 즐거움 이외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의 전작과 비교해서 잘됐네 아니네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의 영화는 그런 것을 별개로 해둘 정도로 그냥 오락물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즐거웠을까 하는 문제만 고려하면 된다. 이것만 고려한다면 그의 영화 ‘라스트 갓파더’는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우선 고민거리가 없다. 매 장면마다 쏟아지는 그의 변치 않는 심형래표 액션은 정말 재미있었다.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코미디가 새로운 창작을 통해 관객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이든 아니면 어떤 작품을 패러디하든 상관없다. 사실 코미디 자체가 누구 것을 베껴서 웃음코드를 찾는 것, 아닐까? 또한 아이들이라도 웃기게 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어른들이 웃는 코미디가 성인용 빼곤 특별하게 달리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라도 어린이와 웃음을 공유하는 것이고, 차라리 어릴 때의 향수를 자극할 수도 있다. 심형래를 즐겼던 세대들이 오늘의 40-50대를 포함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영화 마케팅 때문일 가능성이 많겠지만 최근 그가 나온 TV 프로그램에서 그의 역량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는 아직도 현재의 세대에 통하고 있는 것이다. 질에 대한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은 지금도 웃기고 우리는 그의 방식에 익숙해있다. 그는 아직도 심형래인 것이다.
  영화 마케팅에서 애국주의 편승이란 문제점이야,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영화라면 그런 것이라도 이용할 것이고, 그것은 심형래 감독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보인 그 수많은 성조기들을 보면서 단순히 충성을 위해 영화에 배치한 것만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다 알 것이다.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인을 감안해서 만든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 미국인 감독이 연출한 작품에서 ‘원더걸스’가 노래 부른다면 그것이 좀 이상할 것이다. 한국감독인 심형래 감독의 애절한 조국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미국인만을 타깃으로 삼지 않고 그 속엔 한국인도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모습은 지금도 각종 매체에서 성공한 한국인들이라면 나오는 것이다. 심지어 대담 프로그램이나 성공 스토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인의 로망에도 있을 것인데 그것으로 심형래 감독을 비판한다는 것은 사실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라스트 갓파더’를 보면서 관객들이 잊곤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심형래란 코디미언이 감독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감독 이전에 코미디언이란 사실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이번 영화를 만들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영화 외적인 요소다. 전작들과 비교해서 여러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거야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로 겪는 문제다. 심형래이기에 그런 문제가 주가 되면 곤란하다. 얼마나 많은 감독들이 멋진 작품 이후 형편없는 작품을 만들었던가를 생각하면 말이다. 어마어마한 거장들도 하기 마련인 문제를 심형래이기에 비판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심형래 감독은 성공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는 분명 노력하고 있는 감독이며, 그의 작품이 매번 성장만 할 수는 없어도 그는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영화감독이다. 그의 작품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멜로나 엽기적인 공포와 폭력으로 가득 찬 액션을 기대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감독이기에 그의 영화에는 한국에 대한 관련이 없을 수가 없다.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성공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게 또한 마케팅 아닐까?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것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생존전략일 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심형래 감독이 자기만의 색깔로 만든 영화이고, 관객의 취향에 상관없이 그의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들어서면 심형래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그 속에서 그냥 웃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