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 Moneyb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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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부족한 가난한 프로야구구단이 돈을 물쓰듯 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생존은 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명제이기에, 야구단 명맥은 유지해야 할 것이고,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 전개됐다. 바로 그런 힘든 상황이 통념을 깨고 발산의 전환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세상에 외친다. 당신들이 운영하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도 있고,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주인공은 언제나 이러니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종종 푸념에 가까운 하소연일 수 있지마, 그러나 뭔가 색다른 일이 벌어지고 상식으로만 생각하는 방식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얻는 경우는 야구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인간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경우는 이 세상 주변에 허다하고 그런 것들 재미있고 유익한 미담이 된다. 그런 방식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란 프로야구구단에서 벌어진다.
  어른이 되고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스탠포드 대학’이란 명문대학야구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고교 졸업 후 ‘뉴욕 메츠’란 프로야구팀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했다가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느낀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된 Loser인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저렴한 구단의 단장으로 취임하는 것은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형편없는 구단에서 단장으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이력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썩 유쾌한 출발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시작이 엉망이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야구 인생의 마지막도 버림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를 구제할 인물이 전혀 예상 외의 곳에서 나온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가서 선수 trade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피터 브랜드(요나 힐)’를 알게 됐고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가 오게 된다. 가난한 구단의 신임 단장은 남들이 하지 않았던 피터 브랜드의 철저한 계산에 따른 선수기용방식을 따르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문을 연다는 점에서 빌리 빈 단장은 혁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빌리 빈이 채택한 방식은 매우 잔인한 것이다. 인간의 경험이나 감에 기초하지 않고 지금까지 모아온 정보를 근거로 선수들의 출루율이나 장타율 등 매우 복잡하면서도 철저한 수리적 정보에 기초해서 저렴한 구단운영비용으로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고 선수단을 구성하고 팀을 운용하는 것이다. 군살을 제거하면서 조직을 이기기 위한 목적에 부합되도록 재탄생 시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상 외의 높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선수의 인간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적 승리의 기적 같은 것들은 애초에 기대지도 않았다. 선수들은 로봇처럼 움직이는 기계이며,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에 기대지 않고 그들이 만들었던 경험을 수리적으로 처리하면서 만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유명 선수들을 팔아 치우고 만든 좀 이상한 팀이 됐다. 나중에 선수들 중 가장 스타성이 높은 선수까지 팔아버리면서 자신의 팀을 구성하기조차 한다. 감독의 팀이 아닌 단장의 팀이 된 것이다. 

  이런 팀이 처음부터 잘 운영됐을 리가 없다. 우선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왜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오랜 경험을 왜 무시되고 있는지에 대한 항변과 도전이 일상화됐고, 단장은 자신의 운영철학과 방식을 결국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 과정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줄거리이며, 그 속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빌리 빈 단장의 모습이 형상화된다.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악담하기에 바빴고 그의 실패를 점쳤거나 소원했다.
  실제의 일이 성공했으니까 그런 모습이 우아하게 보일 수 있지, 이런 상황이 초래됐다면 그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독선과 아집으로 뭉친 인간이란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사실 영화 속의 주인공의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고 결국 외롭고 고달픈 단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경기 결과에 목매인 단장이고 보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남들이 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소외됐고 희생됐고, 또한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떨어지면서 그 속에서 엄청난 울분을 갖게 됐을 것이다. 영화 속 긴장은 흥미진진한 야구 경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란 이런 복잡하고 긴장된 인간관계를 통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야구팀은 정말 조연인 팀이다. 그들의 승수가 어떤 수준인지 분명하지 않게 묘사되고 있으며, 그들의 활약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들의 성과를 한 순간의 진땀 나는 승부로 알 수 있을 뿐이다. 영화의 중심은 야구가 아니라 야구를 운영하는 단장에게 쏠려있는 것이며, 그의 동선이 영화의 주된 포커스다.
  이런 과정 속에서의 빌리 빈 단장의 운영방식은 매우 계산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는 있는 반전이 일어난다. 계산적일 것만 같은 그가 가장 계산적이어야 할 순간에 가장 인간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실제 인물과 실화를 근거로 만든 영화이기에 믿어야 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반전에 묘한 느낌을 얻는다. 어쩌면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과연 빌리 빈 단장이 꿈꾸는 것은 비인간적인 세상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욕구를 지닌 인간이었을 뿐이다. 힘들게 살다 보니 세상 사는 방법이 거칠어졌을 뿐, 그도 욕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일 뿐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갑작스레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며,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임이 밝혀진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결국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가여운 현대인일 뿐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즉 강요당한 것이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라는 가난한 구단이 생존하기 위해선 저렴한 운영비용으로 뭔가를 이뤄야 한다. 마치 학벌에서 밀리거나 자본력이 부족한 20대가 냉혹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는 단순한 기적 같은 인생 성공기를 담은 영화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라는 냉혹한 진리를 갖고 있는 미국 신자유주의 이념이 강조된 영화가 된다. 용기를 가지란 말 속엔 누군가를 밀어내야 성공하니 최선을 다하란 신자유주의 가치가 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불운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인생 성공기이자 불행한 인생을 사는 현대인의 한 일면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끝난 이를 통해 보여준 영화다.
  하지만 씁쓸했다. 그가 잔인한 수학적 방법으로 성공했지만 마지막에서 그 역시 평범한 욕구와 꿈을 갖고 비합리적인 세계관을 갖고 산 인물일 뿐이며, 그 지점에서 관객이나 빌리 빈이나 같은 인물로 수렴된다. 현대를 살면서 가혹하지만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들의 꿈은 그래도 이상적이며, 남과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향하는 그런 삶이다. 안 되는 것을 소원하면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꿈과 반대되는 생활을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투영된 것이다. 빌리 딘 단장의 꿈이 언젠가 이뤄졌으면 한다. 왜냐 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의 간절한 소망이 남의 일 같지 않으며, 그것이 바로 나의 꿈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의 마지막 선택은 좋아 보였고, 그렇게라도 사는 그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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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전쟁 - Immortal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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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영문제목이 ‘the immortals’였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세도 아닌 고대 그리스 시대 이전의 시대에 살았다던 죽지 않은 이들, 즉 신들(Greek Gods)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런데 보통 인간이 알고 있는 죽지 않을 것만 같은 신들이 사실을 죽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모든 것을 시작한다. 그리고 신들 사이에서도 죽고 죽이는 관계가 있었으며, 그것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못된 인간 하나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게 되고, 그런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상한 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좀 이상한 구성을 띄게 됐다. 신들이 자신의 위험을 인간에게 맡겼단 점이다. 자신의 안위를 직접 지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상하게 인간의 문제로 귀착되면서 인간들이 해결했으면 하는 스토리를 갖게 된 것이다. 왜 신들이 자신의 안위를 인간에게 맡겼는지는 영화를 보면서도 도통 모르겠다. 정말 인간이 보는 영화라서 인간이 주인공이 되고, 그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영화 흥행이 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래도 인간이 주인공이니 가장 큰 비중이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서로 싸우는 상황은 확실히 인간은 인간끼리, 신들은 신끼리 싸웠다. 이제 신들도 서로 싸우면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전개됐고 신도 인간들처럼 죽는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됐다. 
 

 

  영화 ‘300’을 만든 이들이 제작에 참여해서인지 전투장면이나 액션을 확실히 남달랐다. 무척 잔인한 장면들이 자주 나와서 어린 학생들에겐 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흥행카드는 액션이다. 다만 그것 빼고 영화의 다른 흥행코드는 그다지 눈에 띠지 않는다. 아마도 흥행을 너무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단 사실 정도에 인간의 우수성을 찾아야 할까? 하지만 조금 비틀어서 본다면 영화 속의 인간의 모습은 물론 신의 모습은 불행한 인간사의 한 단면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분법적 구도야, 이런 영화를 만들 때, 반드시 갖춰야 할 구성이다. 서로 싸우는 존재라면 한 쪽은 무조건 사악한 악당이어야 그들의 패망으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악한 자들의 붕괴로 인한 쾌감이다. 문제는 그 악당도 사실 나름의 이유로 인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가족이 죽었을 때, 왜 신은 나 몰라라 했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인간은 사악한 악당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죽음을 신의 선택이나 나름대로 좋은 쪽으로 해석함으로써 마음씨 좋은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당 하이페리온(미키 루크)과 주인공 테세우스(헨리 카빌)가 갈린 기준점도 바로 이점이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서 자신이 한 때 믿었던 신들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하이페리온이 나쁜 악당으로 나오는 이유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들먹이면서 그렇다고 다른 타인들에게도 많은 민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망한다고 다른 집에 불을 지르는 것이 결코 좋을 수는 없기 때문이며, 결국 또 다른 원한만 초래하면서, 모든 이들의 불행을 야기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태인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분노를 터뜨리기 보다 좀 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힘으로 발전시킨 테세우스의 선택이야말로 세상이 가장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테세우스가 영화 속 주인공으로 선택된 이유인 것이다. 제우스란 신은 그런 테세우스를 좋아했고, 그를 지원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신들을 위협하는 세력을 막는 작업을 인간에게 왜 맡겼는지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은 못 될 것이지만 말이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불행을 왜 줬는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많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매우 기대된다. 왜 신은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에겐 불행을 주는지 모든 이들이 궁금하다. 기독교계에서 나름의 이유를 들고 합리화시켰지만 개인적으로 솔직히 아직도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 고민을 이 영화는 다시 들췄다. 그렇다고 속 시원한 답이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신으로 되는 과정을 보면서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와 상상으로 신을 만들었다면 결국 신도 인간처럼 행동할 것이고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영화 속의 옳고 그름은 분명 타당하다. 자기의 분노를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짓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분명 귀담아 들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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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2012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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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안 있어 2012년이 시작된다.
  세상의 종말론은 무수히 많은 예언서에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특히 서양 종교에선 세상의 종말론이 대세인 듯 하다.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 등이 거의 모두가 최후란 말을 즐겨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생겼는지 모르겠다. 특히 기독교에서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 역시 세상이 무너질 때 거론된 최후의 생존 수단이었고, 지금도 이 이야기는 크게 회자된다. 그래서인지 멸망의 시기를 다룬 영화 ‘2012’에서 인류가 선택한 최후의 대안으로 역시나 선택된다. 특히 생존수단만이 아니라 그곳에 누가 타느냐 역시 선택의 대상이고 보면 선택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미래를 다룬 영화지만 오늘의 우리가 보는 현재의 영화다. 만약 인류가 생존한다면 그래서 10년 이상이라도 지구가 더 버틴다면 2012년이란 시간과 그 때를 두고 나온 예언들이나 다양한 과학 이론들이 틀렸다고 조롱 당하겠지만 특정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옳은 예언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사실 실익은 거의 없다. 그런 거 입증하려고 큰 돈 들여서 블록 버스터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행을 위한 것이 제일 큰 목적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뭔가가 있어야 영화 볼 맛이 나는 것이다. 이 영화, 그런 점에서 뭔가가 있다.  

 

 


  노아의 방주와 같은 것을 그대로 본 딴 것들이 있어 과거를 소재로 끌어당긴 것들은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는 오늘을 다룬 작품이다. 그 이유는 영화 캐릭터들이 바로 우리들의 이웃과도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며, 노아의 방주 탑승객을 태우는 것을 결정하는 주체인 정부와 권력층들이 매우 현대적인 권력층과 기득권층을 꼭 빼 닮았다는 점이다. 창세기 때의 노아는 고뇌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줬지만 오늘날의 노아인 정부는 그런 고민은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아 보였다.
  현실은 그랬다. 주인공들은 이혼가정이었고 함께 도망가는 이들은 전남편과 이후의 남편이 함께 노력해서 가족을 구원한다. 정말 이보다 더욱 현실적인 가족도 없을 것이다. 이혼이 대세인 사회적 분위기는 한국보다 미국이 앞섰다. 아무리 영화가 동화 같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현실감을 느낄 수 없기에 이런 가족을 구상했을 것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비현실이야말로 영화가 만드는 기본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현실에 더해서 집권세력들이 주축이 된 정부의 행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할 때, 결국 그들은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만행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변화는 있었고 미국 영화 특유의 해피엔딩 종결이 있었지만 그 마지막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아무래도 현실적이었다. 거짓말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내부적으론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우리를 위해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동화에서 있을 법한 현실을 다시금 되새겨 준다.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건이 이를 증명한다. 
 

 

  영화는 자연재해로부터 도망가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보여준다. 특히 무관심 받는 타인이 됐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의미를 그대로 해석한다면 결국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의 엄연한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즉 희생되고 싶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를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것은 정부의 속성이 무엇이고, 기득권층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회비판영화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도모할 때, 어떻게 해야 그것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선 믿지 말라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런 내용이 세상이 무너질 때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2012’의 진정한 메시지인지 모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또한 더불어 사는 용기를 내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그렇다고 안 냈을 때의 인간적 고민과 사회적 충격이 얼마나 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자신만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은 분명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수도 아니며, 엄연히 합리적 판단이란 미명 하에 자행된 살인이기 때문이다. 왜 자신들이 생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뭐가 자신과 그들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인지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나를 희생하면서 가족을 살렸던 부모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자녀들 역시 부모만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 생존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고 그냥 덮고 다음을 살기엔 그다지 편안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살 것인지 아니면 뭔가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미덕이다. 그것이 없다면 인류의 생존은 언제나 우아하지 못할 것이며, 살아있는 자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이 영화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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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경찰 - The Bad Lieutenant: Port of Call - New Orl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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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미국 영화는 거의 해피엔딩이다. 이전에는 탕아가 됐다가 다시 돌아오는 가족의 구성원이나 열심히 살다 위기에 빠지는 이들도 구원의 손길을 주는 영화들로 가득차더니 이젠 소위 부정부패로 치달은 경찰까지도 그런 행운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부정부패한 마약중독자 경찰에게도 내린 예외 없는 법칙이다. 한국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행운아라 할지 아니면 사회가 이젠 그렇게까지 갔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결말은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어느 순간 평범한 연기자가 되어 버린 니콜라스 케이지의 회심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배역을 맡았으니 말이다. 통속물이라 할 것들에 출연하다 보니 그가 오스카 상 수상자란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렇게 되기까지 말 못할 사연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다양한 연기변신을 추구하는 것이 연기자의 사명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겐 매우 안 좋았던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안타까움을 이번에는 조금 날릴 수 있을 것은 같다.  

 

 

  착한 경찰이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악질로 변해간다. 하지만 그 변화는 한 개인의 변질이 아닌 미국 사회 전체의 변화였는지 모른다. 시작은 미국의 사회를 엄청난 충격으로 몰아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피해로부터 시작된다. 9.11 테러 이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이 폭풍우 한방으로 미국 사회의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충격을 말할 수 없이 컸었나 보다. 그 이후부터 착한 경찰 한 명이 우연한 선의의 행동 하나로 인해 변하는 광경을 통해 그 충격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짤막한 시간 경과를 알려줌으로써 생략시킨다. 참 편하긴 하다. 하지만 그 감춰진 시간은 매우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전환의 시작부터 이상한 짓을 하는 미국 뉴올리언스 형사 맥도나 (니콜라스 케이지)는 그런 불편한 변화 결과를 제대로 보여준다.
  착했던 그가 변했다. 뭔지 모르게 쾡한 표정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언제나 구부정한 모습으로 걸어간다. 이미 몸과 마음을 삐뚤어질 때로 삐뚤어져 있었다. 그는 몇 년 사이에 변한 것이다. 그런 몸과 마음을 갖고 있기에 세상을 보는 인식이 그리 건전한 것은 아니리라. 그래서 어느 순간 불법이 삶을 위한 정당한 방법으로 인식됐고 법을 수호하란 경찰이 법을 등에 업고 기막힌 일들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자주 언론에 언급되는 부정부패 경찰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선 못할 짓이 없었다. 경찰이 된 이유는 그의 마음이나 뇌 어디엔가엔 있었겠지만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이미 마약에 중독이 되어 버린 그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경찰이라면 사회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지만 그럴 생각은 이제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사건들은 거의 파국이었고 엉망진창이었고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최악이 되어 간다. 
 

 

  그런데 미국 영화의 자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친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반전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한국영화라면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멋진 행운들이 거짓말처럼 하루에 다 터진다. 영화는 사실을 빙자한 거짓말이란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한 방들이 연이어 터졌다. 그런데 그런 장면들이 영 가슴을 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영화를 만든 모든 이들이 가슴을 울리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영화는 소위 반어법을 구사한 것이다.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럴 상황도 아니다. 이미 몸과 마음은 그의 한 번의 기이한 구원으로 변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 영화의 예사로운 구성이 돋보인다. 물고기도 생각이 있을까 하는 선문답에 대해 미국 뉴올리언스 형사 맥도나는 고민만 하고 있다. 마치 미국인 모두가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투로 말이다. 지금까지의 행운이 영원할 리가 없고, 어쩌면 영화에서 형상화되지 않은 이후의 시간에 맥도나는 비극을 맞을 지 모른다. 그게 옳고 그르든 간에 사실이 될 것이다. 대가는 치르는 법이니까. 언제나 이야기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좋은 쪽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행운은 그냥 한 번의 Lucky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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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어 - War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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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산산조각이 된 상태였다. 아버지 한 명에 형제 둘은 함께 살지 않았고 공간적 거리 이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음이 말이다. 소위 막장가족이다. 가족은 같은 공간에 살면서 가장 친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너무나 빈번한 기회를 공유한 집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 상처를 입히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울한 강을 건널 경우 거의 원수에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런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족이 영화 ‘워리어’에 담겨 있다.
  미국식 가족영화는 언제나 서로의 앙금을 갖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엔 화해하는 그런 진부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이 영화 역시 격투기란 화려한 액션을 통해 볼거리를 만들어주면서도 가족이란 혈연공동체를 통해 감동을 전해준다. 이제 너무나 많이, 그리고 대충 상황판단도 할 수 있기에 이젠 식상하다. 그런데 그런 식상함을 관객들은 보고 싶나 보다. 계속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뒤엔 어쩌면 관객들이 현재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지지부진한 인간관계가 이어지는 가족을 갖고 있기에 관객들이 영화 속의 결말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을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가족은 피폐해지고 파괴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 형 브렌든 콘론(조엘 에저튼)이 처한 신용불량자 신세는 사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어엿한 가장이지만 그것도 능력이 되고 수입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대출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집에서 내쫓길 상황에 몰리는 장면은 우리 이웃에서 평범하게 일어나는 오늘의 모습이다. 그나마 브렌든 콘론은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 물리선생이면서도 격투기 시합에 나선다. 동네 격투기 시합으로 징계를 먹었지만 사실 별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큰 시합에 출전, 어려운 가족의 살림에 보탬이 되려 한다.  


 

 

 

  동생 토미 리어든/콘론(톰 하디)은 형과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다. 아버지와 형이 자신을 버렸기에 그는 아버지 성인 콘론을 버리고 결혼하기 전의 어머니 성이었던 리어든을 사용한다. 그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 했고 그와의 악연이라 여긴 아버지와 형의 인연을 끊었다. 그가 생각한 가족은 해병대였고, 그곳의 군 동료였다. 새로운 인연을 통해 그는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털어내려 했고, 자신의 임무를 만들려 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동료애는 누구보다 절실했고 또한 강하게 됐다. 혈연이 아닌 직업을 통해 맺어진 사회적 관계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그는 어쩌면 이 시대의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새롭지만 그곳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현대적 인간의 비애를 그는 몸으로, 그리고 주먹으로 날 것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달랐다. 그는 가장이란 의무감을 내팽개쳤고, 그래서 그는 가족의 모든 비극을 만든 장본인이 됐다. 콘론 형제의 아버지, 패디 콘론(닉 놀테)는 가족을 버렸고 그에 대한 대가를 영화 속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가족의 비극의 시작점이 된 그는 책임을 포기했고 그래서 혈연이 파기됐고 그럼으로써 깊은 고독과 슬픔, 그리고 죄책감으로 빠져들었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자식들이 경멸하고 또한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기피인물이 됐다. 가족이 단순히 혈연으로만 맺어진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혈연이지만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태는 오늘의 우리들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인지 모르겠다. 
 

 

 

  이런 그들이 한 곳에서 모였다. 정말 기이한 우연이다. 천하무적일 것만 같던 상대선수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지면서 두 형제가 결승에서 만난다는 설정은 아무리 좋게 봐도 솔직히 삼류영화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삼류 스토리가 없다면 영화의 극적 즐거움은 반감되리라. 그리고 영화는 어떻든 좋게 끝나야 하니까,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다. 마지막의 두 형제의 피가 터지는 5회 라운드 경기는 사실 슬펐다. 끝까지 싸우려 했던 동생의 모습은 분명 증오로 가득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 속에 분명 과거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버림받았던 것에 대한 울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분노가 사리지는 장면은 다소 아쉬운 듯 하다. 하지만 사각이 아닌 팔각의 링 위에서의 해결은 난투극 속에서도 분명 한가지는 보여줬다. 화해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 활용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우린 함께 있을 수 있는 가족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남은 아니란 사실 말이다.
  서로 아프고 또한 가족이라도 상처를 쉽게 줄 수 있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고 있다. 비극이다. 같은 DNA를 공유하면서 함께 살았기에 서로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등을 돌린 채 그 어떤 이들보다 더욱 혐오하고 원망하는 사이로 변질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런 우울한 모습을 영화 ‘워리어’가 기반으로 한다. 다만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현실과 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많은 이들이 봤으면 한다. 식상하지만 말이다. 혹시 알게 될 지 누가 알겠는가? 가족이란 좋은 것이고 화해하기 참 쉬운 관계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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