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개 - Poo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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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는 그렇게 살아갔다. 벙어리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오직 말이 아닌 행동만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말은 언제나 거짓말을 잉태하고 상대를 속이는 법이다.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그렇게 비겁했다. 남한을 지키는 국정원이든, 북한에서 온 간첩이든, 국가를 온몸으로 지키는 그들은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으며, 비겁하기까지 했다. 그들 특유의 직업세계에서 비롯됐든, 분명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짓들이 그들 세계에 남발됐고, 그런 것에 기반해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한 외교관계는 대충 엉망이 될 것임을 짐작하게 만든다. 우린 그런 인간들의 보호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간들, 언제나 행동보다 말이 앞섰고, 말 정말 많았다.
  말이 필요 없단 이야기 같다. 아니면 말 많은 인간들은 사람처럼 대할 필요가 없단 뜻일 것도 같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만 할 뿐, 그에 대한 대가도 없었고, 도리어 처벌하려고까지 했다. 합법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피해를 입히지 않은 그는 어느 순간 양쪽에서 다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그를 향해 언제나 물었던 질문, 넌 누구 편이냐, 이 슬픈 질문은 그를 위험인물로 만들고 말았다. 그는 일종의 범법자가 된 것이다. ‘풍산개’란 별명은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모르지만 모두 그를 개처럼 다루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지만 그냥 사용하다 버릴 도구처럼 그를 상대했고, 인간이기보단 개처럼 그를 다뤘다. 그의 분노에도 그들을 아랑곳없이 마음껏 다루려 했다. 그의 인간적 고뇌는 철저히 무시된 채 말이다. 그래서 그는 화났다. 당연하지만.
  그런 첩보원들은 지금의 남북한처럼 긴장만 잉태했고 악화시켰다. 영화 속에 드러난 그들의 본색이란 것은 사실 적 아니면 아군이었고, 그래서 풍산개의 월담 행위를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따져서 판단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면 좋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 그가 누구 편이냐라는 그들의 태생적 사고인 아군과 적군 구별하기로 그를 상대했다. 그래도 그가 필요했나 보다. 그래서 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만 하려 했고, 그 이후에도 그를 억압만 하려 했다. 풍산개는 사실 도망갈 곳이 없게 됐다. 
 

 

  풍산개, 월담하면서 남북한을 오고 간 그의 행동이 법에 저촉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의 그의 행동은 정부와 첩보기관이 해주지 못한 이산가족 연결 등을 대행해주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 정부보다 더욱 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이념과 긴장으로 인해 정작 해줘야 할 것을 해주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남북한의 아픔은 언제나 넘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그는 한국의 바람을 만들어주는 천사인지 모르겠다. 잘 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눈감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녹녹할까?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고, 특히 김기덕 감독의 세계관이 만든 세상 한복판에 있는 풍산개의 운명은 결코 행복할 리가 없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세계는 언제나 파멸적이고 비극이기 때문이고, 심지어 비인간적 세상의 잔인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그래도 마지막엔 인간미로 끝나지만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인간미를 비웃듯 언제나 참혹했고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끝났고, 폭력적이었다. 관객들 중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서 좋게 끝난 것을 본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절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제작을 발판 삼아 감독으로 뛰어든 전재홍 감독 역시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듯 하다. 영화 곳곳에 감지된 김기덕 분위기는 이 둘의 가까운 인맥은 물론 매우 세상에 대한 어떤 인식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들은 어느 면에서 서로인 것이다.  
 

 

  영화 속에 제대로 된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남북한의 첩보원들은 사심 가득한 정신자세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기 바빴고, 각 인물들의 캐릭터들은 거의 정신병자에 가까울 만큼 신경질적이고 불안에 떨었다. 상황을 봐선 그럴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도가 심했다. 그냥 정신 없이 헤매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고마운 줄 모르고, 의심하며, 또한 정당한 대가보단 상대를 옥죄어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 했다. 그나마 착한 캐릭터들은 무참히 희생된다. 김기덕 감독이 조준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부는 물론, 가진 자들의 폭력성, 언제나 위험하고 편협하다. 말만 많았지 제대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곤 거의 없는 그런 사회의 1%가 갖고 있는 무가치성과 폭력성을 효과적이지만 과격하게 형상화하고, 비판한다. 말 그대로 김기덕 식 방법이며, 정말 김기덕 표 영화다.
  사실 이 작품 이전에도 언제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세계는 엉망진창이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세상에 빗대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참혹할 필요가 있는지 사실 모르겠다. 현실을 가장한 상상물인 그의 영화는 옛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세계에서 영화에서 나온 인물들이 바뀌었을 뿐, 사실 캐릭터의 변화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건 그가 만든 세상이 김기덕이란 사람의 시선을 통해 나왔기에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만드는 것은 분명 특정한 계열로 흐르게 마련이고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언제나 제한되고 종종 편협할 수 있는 세계관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난 그의 세상에 시간을 구태여 내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봤다. 
 

 

  그나마 그가 갖고 있는 사회성은 무척 인상 깊다. 윤계상이란, 조만간 최고의 반열에 설 날이 얼마 안 남은 연기자를 통해 그는 세상에 깊이 있는 각성을 요구한다. 그의 연출과 제작 방식이 괴이하고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운 괴기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인권적 측면은 거의 무시한다. 그의 작품에 인간다움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과도한 인상에 짓눌려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열악한 사정을 고려해보면 나름 잘 만든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울림이 강한 영화들을 만든다. 그의 방법이 과격하지만, 그는 분명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들을 들려주고 보여준다. 누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들을 향해, 그는 사회성 짙은 폭력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번 영화 역시 그런 것이다. 언젠가 그가 담아낸 폭력성과 비극이 줄어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강렬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매우 그런 것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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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3 - Transformers: Dark of th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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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가치관이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개인주의가 너무 심하니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 그저 그런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구를 지키는 영화라면, 주인공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과감성도 좀 보여주고, 모든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애인에게 통사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Old한 것인지, 아니면 동양에서는 그렇지만 서양하곤 질적으로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세대차? 아무튼 영화 속에서 본 세계는 정말 이질적이었고, 솔직히 불안하기만 하다.
  영화 속 주인공인 샘 윗위키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철없는 고교생에서 어느 순간 명문대대학에 들어갔고, 나중엔 실업자 신세로 직장을 구하는 소시민이 된다. 그래도 과거의 화려한 명성, 즉 지구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으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그런데 이 친구, 수상하다. 과거의 여자로부터 차이고, 현재의 여자의 구애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심지어 지구가 위기에 처했어도 여자를 위한 마음이 너무 앞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이 여자를 구하러 간다. 그 친구들 역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 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여기에 국가 위기 상황에서 자기 여자를 일에 끌어들이는 행위는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없다. 여자친구에게 과시하려고 하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이 영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학생들 여름방학이란 특수가 아니면 인기 끌기 참 힘들 영화다. 아무래도 사회생활로 세상 이치에 조금씩 접근하는 어른들이 보기엔 정말 동화다. 하지만 동화 속엔 비논리적이지만 사랑을 잘 마무리해주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러나 트랜스포머는 그런 것도 없고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씁쓸한 것은 도대체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더욱 강해지고 숫자도 많아진 디셉티콘에 대항하는 존재들은 단순한 무력으로야 단연 오토콘들이다. 하지만 지구를 지키는 정신은 역시 샘 윗위키가 지구를 대표해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친구, 자기 애인에 정신이 팔려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있다. 부모의 조언이란 것도 영 이상하다. 지구가 위기인데 여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조언은 아무리 좋게 들어도 우선 순위가 문제 있는 조언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연적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라니 그를 처단해야 할 이유 하나 정도는 지구를 위해서도 그리고 한 여자를 갖고 사랑싸움을 그에게도 다행히 존재한다. 그러나 결국 연적 하나를 제거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냥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일 뿐이다. 어쩌면 자신을 버린 전 애인과 현 애인이 과연 뭐가 다를까 하는 의심이 드는 구석도 매우 많은데, 요새 미국은 그런 불안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뭐든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좀 불안하다. 
 

 

 

  영화에서 정말 지구를 지키는 것은 외계인 손님이랄 수 있는 오토콘들이었다. 그들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오토콘의 리더는 언제나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고, 또한 제2의 고향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종종 그들은 지구만을 지키지 않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미국을 지키고 있고, 미국만을 지키고 있다. 테러에 대한 핵무기의 위기 등을 잠재우기 위해 이란을 공격하는 장면은 이해하겠다. 하지만 만약 미국이 원유 확보를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는 부분이 있다면 오토콘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하다. 과연 미국을 위해 그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을 설까? 아니면 부당한 전쟁이라면서 미국에 반격을 가할까? 영화 속에선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않다. 미국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치부하니까 말이다. 미국의 편향된 사고방식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장면이다.
  그렇다.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미국이다. 미국의 편협 된 사고가 넘쳐 흐르고 그들의 가치관이 또한 가득하다. 그리고 미국의 현재를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이제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 자체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반박이 되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그래도 사랑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한 마지막 음악시기인 90년대 음악과는 다르게 솔직을 넘어 무례한 표현으로 가득한 현 아이돌 음악의 본류인 곳이다. 그래서인가? 영화는 세상을 조롱하는 것으로 가득 차다. 그 중심은 바로 20대의 젊은이들이다. 젊은이 태반이 실업인 상황에서 과연 사회는 그런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좀 이상한 방법으로 질문하고 있다. 지구를 위해 열심히 목숨을 바친 명문대 젊은이에게 사회가 해준 것이라곤 수 없는 낙방 속에 마침내 우편배달을 담당하는 직업이었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88만원 세대의 불만이 이 영화에도 가득했다. 사실 오늘의 20대들이 국제적으로 공통적인 고민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래서일까? 주인공 샘 윗위키에겐 사회적 사명감도 없었고, 오늘을 힘들게 사는 한 불쌍한 젊은이다. 지금까지의 스파이더 맨의 파커도 삼촌의 사명감 한 마디에 정의로운 편에 서지만 그의 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커와 윗위키는 다른 것이 별로 없는 오늘의 20대를 상징하는 캐릭터들이고, 미국 사회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실체들이다. 즉 왜 젊은이들이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가를 되묻고 있는 존재들이다.
  윗위키란 캐릭터는 어쩌면 포스트 모던이즘에서의 전형적이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패기도 없고, 하루하루의 생존에 치이며, 아버지로부터 기껏 공부시켰는데 일자리도 못 얻었다고 핀잔을 듣고 있는 그저 그런 친구다. 요새 이렇게 안 사는 젊은이들이 있을까? 하지만 지구를 지키기 위한 영화라면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으면 한다. 영화도 동화라면 세상의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더욱 두드러지게 해야 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것도 Old하고 구태의연한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줄어든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지금의 20대도 미래엔 40대, 50대, 심지어 100대가 될 것이다. 각 세대에 서로 주고 받으며, 또한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함께 공존하는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서로를 위한 삶이 그래도 낫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 만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그게 참 필요한 시점이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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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The Lincoln Law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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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세상을 현실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이 늘었다. 어쩌면 어른이 다 됐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법정에서 피해자와 피고인을 사이에 두고 법정 공방을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판결하는 법조인들이 한 때 정의롭고 우아해 보인 적이 있었다. 마치 이슬만 마시고 사는 여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연들을 겪으면서 그들 역시 일반인과 똑같이 직장인일 뿐이며, 경제적 문제를 안고 살며, 직장을 벗어난 가정에서도 역시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현대인이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됐다.
  잘 사는 부유함을 상징하는 링컨 자동차,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지만 그래도 아직도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제유적인 산물이다. 그것을 몰고 다니는 변호사라면 당연히 상당한 부를 갖고 있는 변호사임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협심 있는 변호를 맡았다면 미국이나 한국에선 좀체 몰기 힘든 그런 자동차다. 따라서 링컨차를 몰고 다닌다는 의미는 확대해석은 금물이겠지만 그래도 속물적인 변호사일 가능성을 크게 내비치고 있고, 영화 자체에서도 그렇게 의협심이 있는 인물로도 나오지 않는다. 평범하다고 하기엔 차라리 장사수완이 좋고 고객관리를 잘 하면서도, 제대로 가격을 후려치는 그런 변호사다. 
 

 

  이런 캐릭터에게도 양심이 있는 모습을 첨가시킨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봤다. 하지만 마지막 양심이랄까? 이전 사건 수임에서 의뢰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전제 하에 변호를 담당했던 사건과 유사한 사건을 의뢰 받은 변호사는 일종의 개과천선을 위한 자리를 얻게 된다. 그때의 범인이 제 발로 찾아와 사건을 의뢰하면서 링컨차 변호사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특유의 배짱과 모략으로 멋지게 넘어간다.
  이 영화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도 않고, 사회적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 변호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도 아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변호사의 모험기 정도? 그의 모략의 진수를 보여주는 속물 변호사의 한 때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미국사회, 아니 그것을 넘어 미국과 비슷해져 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법을 통해 돈 벌고 있는 속세의 인물의 세상에 대한 처신법 정도.
  여기서부터일까? 왠지 모르게 이 인물에 대해 정이 간다. 그리고 그는 어떻든 성공신화를 쓰고 있지 않은가? 그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면서 Role Model인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가파른 영향으로 인해 쓰디쓴 세상살이 속에서 생존의 법칙을 잘 이해해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젠 위기가 10대부터 80대까지 일반화되고 있다. 배트맨도 스파이더맨도, 심지어 한국의 영웅, 홍길동도 영화나 동화 같은 비현실속에서나 존재하게 된 이 시점에서 또한 더 이상 따뜻한 인간미를 갖고 있는 춘향이를 기대할 수 없음을 모든 이는 알고 있다. 결국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인간관계만 넘치고 있는 오늘날,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들에게 링컨차를 타고 다니는 변호사는 우리가 꿈꾸는 성공철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는 어떤 면에서 사건만 치고 다니는 악당보다 더한 악당이다. 그는 알면서도 살인범을 풀어줬으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옭아맨 위험의 사슬을 슬기롭게 풀어나간다. 그는 손해 본 것이 없으며, 도리어 그 일로 엄청난 돈을 번다. 일거양득이라고 할까? 아니면 위기 속에서도 기막힌 전략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이라고 할까? 어떤 수식어라도 그의 활약은 사회를 위한 미담은 아니더라도 생존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겐 단비 같은 존재다. 어떻게 살 수 있을까에대 한 멋진 답변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쓰다. 성공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비록 거짓된 스토리 상에서의 캐릭터지만 사회정의보다 현실에서 잘 버티는 인간이 얼마나 우아하게 포장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좋다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나쁘다고 돌을 던질 필요도 없는 그런 변호사, 우리는 그가 펼치는 속물주의에 열광하기보단 세상을 살아가는 그의 영악함을 더욱 닮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모습은 소외의 위험에 처하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가련한 자들의 우울한 이상향을 보여주며, 그리고 역설적으로 약하기만 해서 위험에 자주 노출되고, 또한 그런 위험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 참 우울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위기가 본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며, 그래서 힘들게 살면서 추구하고 있는 속물적 이상향이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고민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화의 여운은 아마도 이게 가장 클 것만 같다. 그래서 참 슬프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도 그처럼 멋지게 살고 싶은데 그러기 참 힘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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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랜턴: 반지의 선택 - Green Lan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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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점점 경쟁이 치열하고 살기 어려워서인지 천하무적일 것 같은 초인간들이 세상의 쓴맛을 느끼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사회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그들의 작업에 심한 피로감을 느끼거나 회의를 느끼는 상황이 영화 속에서 보이고, 자신의 경제적 문제에 시달리는 영웅들이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하늘에 살던 신들이 지상의 인간으로 변하면서 겪는 고충이랄까? 이런 류의 초인간적인 영웅들은 분명 인간적이고 바로 옆에 있는 우리들 같다.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고민들을 듬뿍 갖고 있는 이들의 활약을 보면서 어느 순간 관객들이 현재 겪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또한 초인간들의 영웅 영화에서 느끼게 됐다.
  초인간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들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인간들의 고민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과 다른 가치관과 확고부동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대단한 괴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통해 현실의 괴로움을 날려 버리는 즐거운 시간도 갖게 된다. 하지만 인간에 보다 접근한 영웅들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면서 이런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갔던 극장에서 고민만 잔뜩 갖고 오는 꼴이다. 그런 영화관람이 너무 흔해진 지금, 시름을 달래기 위해 갔던 극장의 영화들이 도리어 시름만 계속 주고 있는 상황이다.  

 

 


  좀 재미없어졌다. 고민을 위해 극장에 갈 영화들은 솔직히 많다. 하지만 고민을 날려 버리고 단순한 재미를 위해 갈 극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초인간적인 영웅영화에서 삶을 성찰하게 되고, 사회의 모순이 고발되며, 영화 속 악당들도 자신들의 악행이 다 이유가 있게 됐다. 과연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문제까지 영웅영화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배트맨은 주인공 자체가 고민의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스파이더맨은 평범한 그들처럼 학교와 생존에 부대끼면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명문 Columbia University에 다니는 수재이지만 삶의 질곡에선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을 짊어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의협심을 발휘하는 DNA 돌연변이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삼촌에게 받은 영향이 깊긴 하지만 그래도 안쓰러울 뿐이다. 솔직히 그들의 노력으로 세상이 바뀔지 의문이 될 만큼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탄생하는 악당들은 끝이 없다. 즉 사회의 만행에 대한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린랜턴은 그래서 반갑다. 사회적 냉대를 받은 친구가 악당이 되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선악의 분명한 구분 속에서 정의로운 활동이 멋있어 보인다. 인생의 실패자일 것만 같은 이가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도 얻는 것은 분명 동화 같은 비현실성이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그런 모습이다. 또한 여타 행성들 속에서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용기의 가치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모습은 분명 인간의 한계와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의성도 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의 노력과 용기,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인 셈이다.  

 

 


  뻔하다는 비판, 이 영화는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배트맨과 같은 영웅영화로 진화한 현대의 관객들이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과거가 과연 오늘의 가치를 상실할까? 그리고 단순한 영웅 이야기가 과연 배트맨보다 무의미할까? 고민 속에서 내린 결론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호하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고민의 시간 속에 파 뭍인 현대인들에 있어 과연 자신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기회가 더없이 반가울 수 있다. 그린랜턴은 그런 영화다. 과감하게 성찰을 삭제하면서도 분명하게 가치 있는 인간의 자세를 보이고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는 영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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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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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 때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이었지만 공고화됐다고 하기엔 너무 열악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이었던 민정당의 독재권력이 물러났지만 사회 곳곳에 극우단체들과 반민주세력이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 세력으로 건재했고, 독재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던 기대가 무너진 시대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했던 여러 양심선언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용기로 한국 사회의 선진화가 이루어졌지만 양심선언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기에 당시엔 두려움이 교차됐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두웠던 시절이었다.
양심선언이란 것 자체가 그 시절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사회의 제도와 법으로는 결코 올바른 사회질서를 구축할 수 없기에 개인의 입장에선 최후의 수단일 수밖에 없는 양심선언은 거대세력에 당당히 맞서야 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의 공포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양심선언을 보호해줘야 할 이들에게도 똑 같은 용기를 요구한다. 이렇듯 위험한 일을 한 이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모비딕’이다.  

 

 


영화는 이미 15년도 더 된 과거의 시간을 배경을 들여다본다. 우아하지 못했던 그 시절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특히 거대세력으로 인해 한국사회가 움직인다는 음모론으로 오늘의 한국사회의 면모를 살피고 진단하는 특색 있는 현실고발의 영화다. 정부 위의 정부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는 현실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국민들의 이해와는 다르게 진행되는 정치를 보면서 국민들은 좌절하고 분노하게 되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은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는 1994년이나 오늘이나 그다지 차이를 볼 수 없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물론 여당과 야당도 어떻게 못하는 사회의 부를 독점하는 세력들의 음모와 획책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사건과 희생, 그리고 한국의 우울한 자화상이 영화 속에서 매우 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정부 위의 세력이 가장 잘 사용하는 전략이 사실 왜곡이자 축소다. 그래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진실입니까?’ 라는 이 당돌한 질문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무거운 논제였다. 한국사회를 자신의 이익으로 이끌려고 하는 권력집단이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에까지 그 힘을 미치고 있으며, 진실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진실 역시 왜곡시키는 장면에서 심각한 우울을 경험가게 됐다. 심지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임무를 지닌 언론사 역시 그런 상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스토리는 그래서 공포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소설 ‘모비딕’에서의 이야기들은 영화 ‘모비딕’의 기본 전제까지 만들고 말았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진실들이 있으며, 그것은 모두가 알아야 할 것들이지만 그것을 막는 세력으로 인해 잘못 알려짐으로써 사회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연기자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캐릭터들과 관계들을 통해 관객들이 볼 수 있는 현실과 그 위기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반국민들의 위기를 쉽게 만들어내는 음해세력들의 실상이 가상현실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민주주의의 현위치를 보여주게 되며,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실감하게 하는 효과를 갖추게 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평범한 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음해세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선 다행한 일이지만 과연 그런 세력이 현존할지 잘 판단이 안 선다. 그것은 곧 1994년의 위기가 과연 2011년에 해소됐는가 하는 질문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아마도 답변에선 긍정적일 것 같지 않다. 왜냐 하면 지금도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내부고발자의 문제는 지금도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부 위에 있는 세력에서만이 아니라 정부기관과 그 산하기관은 물론 현재의 모든 기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해와 만행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내부고발자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그들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은 아직 요원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들을, 한국사회는 아직 보호해주지 못하는 미개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해피엔딩이 그래서 반갑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열망이 영화 속에서라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어쩌면 후속편을 제작하기 위해 그런 세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르겠고, 또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 그런 구성을 띄게 됐는지 모르겠다. 우악스런 현실 앞에 압도되어서 허우적거리는 인물보다 그래도 일을 잘 해결해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들을 보고 싶은 것이 관객이고 바로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은 물론, 희망도 품고, 또한 용기를 낼 수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보는 내내 재미있었고, 즐거웠고, 미처 몰랐던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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