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고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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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의 첫 영화 나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요즘 아이돌 가수 치고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외도를 안 하는 것이 인기 없다는 반증일 상황이니 인기 있는 윤하라면 당연히 영화든 드라마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드라마에 나왔는데 챙겨보지 못한 내가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영화에서 연기하는 윤하는 처음이다. 그런데 주인공도 아니고 하니 윤하의 연기력을 따지거나 비중을 따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노래 부르는 가수 중심이 아닌 위기에 빠진 한국 서민들의 현실과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난다는 환타지물이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보는 관객들에겐 다행인 마지막이다. 사실 보기도 전에 영화 포스터나 기타 등등의 사전제작물들을 본다면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끝나는 것이 당연한 공식처럼 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최근 영화 감상법에서 마지막까지 가는 과정 자체가 좋은 그림이 되야 하고, 좋은 서사가 되어야 하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 수 있는 배경도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세상과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은 너무 슬펐다. 남의 일이라고 하기엔 등장인물들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같았고, 그들의 사연 역시 시대가 그래서인지 있을 법한 사건들이었다.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을 극적으로 해피엔딩해야 하기에 결국 모두가 행복하도록 끝을 맺었다.
  영화 속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연이 현실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힘들었던 그들이 성공하는 장면들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성공 다음의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왜 이리 건너 뛰었을까? 어쩌면 극작가나 감독도 어떻게 해야 그들이 극적으로 성공할지 방법을 모를 것이다. 신이 아니라면 1년 만에 금나와라 뚝딱 하는 마법을 어떻게 해야 부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보기는 좋았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날 때의 아픔을 이미 관객들은 알고 있었고, 그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 역시 관객들 중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현실에서의 희생양이 된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유야 어떻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서로 보기 좋을 뿐이다.  

 

 
  감정이입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성공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즐거운 이유가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뒷받침된 배경은 사실 암담한 것들이다. 영화는 잔인한 자본주의 관계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보험이란 것은 좋게 말하면 위기일 때, 고통의 양을 줄이거나 삭제해주는 서비스를 해주는 대행업인데, 문제는 이들이 돈 버는 방식이다. 자신의 고유업무라면 누군가의 고통을 누구보다 먼저 챙겨줘야 하지만 민간업자들이 맡고 있는 이런 대행사인 보험사들은 돈 준 피보험자들이 사고 안 나길 바라고 있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사고 안 나길 빌면서 그 차익으로 생활하고 돈 버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고객들이 사고 안 나길 빌고, 그러기에 사고 나지 않을 사람들, 즉 잘 사는 사람들이나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한다. 그러니 오늘 내일 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을 생각도 없고, 자살할지 모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을 리도 없다. 잔인한 자본주의의 생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이 바로 보험사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바보 같은 보험영업인이 언제 죽을지, 아니 조만간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유치하고 만다. 이유는 뻔했다. 실적위주의 세상이다 보니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실적이 있어야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고 좋은 성적도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세상으로 진입한다.
  보험사 영업이란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직업이다. 결코 천사일 리가 없는 어느 보험 영업사원이 자신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천사로 변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선의, 이런 역설로 인해, 생활고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어리석은 탐욕이 천사로서의 역할을 한 이 아이러니를 담은 영화, 정말 신선한 신데렐라 이야기다. 그것도 무려 네 명이나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결코 자본주의의 선의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도리어 비판한다. 그들을 살린 것은 결코 자본주의의 혜택이 아닌, 그나마 어쩔 수 없는 선의라고 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뛴 보험사 영업 사원 덕분이다. 그 영업 사원 역시 자본주의 앞에서 허덕이며 사는 어느 빈곤층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어떻든 천사는 될 수 없는 이념일 뿐이다.
  힘든 사람들끼리의 연대? 그럴지 모르겠다. 의도하지 않은 선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들고, 외롭고, 비참해도, 죽어야 돈 버는 보험사기 앞에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는 많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고, 관계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만들어서 행복해할 사람은 사실 없지 않을까? 산다면 어떤 기회가 있을지 누가 알까?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있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포기하지 않을 때 작은 것이라도 있을 수 있다. 포기하지 않을 때 기댈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아갈 이유는 있을 것이다. 죽으면 그마저도 포기해야 하니까. 

  

 

  윤하의 연기력은 좋은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니 영화에서의 노래 부르는 모습도 좋았다. 어쩌면 뛰어난 연기자 윤하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류승범의 연기력은 분명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 최고의 양아치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했고 코믹연기에서도 나름 입지를 구축한 그가 이번 주인공 역에서 역시나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다. 그는 코믹과 우수를 동시에 겸비한 몇 안 되는 한국 연기자이다. 역설적인 두 개의 불협화음이 공존하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그러기에 이번 영화가 그 덕분에 더욱 잘 빛이 난 것 같다. 사악한 자본주의 전도사란 악당이 어쩔 수 없이 착해야 하는 천사가 되는 과정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과연 그란 생각이 든다. ‘주먹이 운다’에서의 강렬한 인상이 코믹과 함께 승화한 그런 연기력이었다. 앞으로 그의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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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 백 - The way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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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먼지 모르겠다. 시베리아에서부터 인도까지 6,500km라는 거리 말이다. 인간의 한계처럼 경험하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감각적인 한계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여지없이 발생했다.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를 보게 되면서 멀고 험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화려하기 그지 없는, 그리고 잊기 힘든 멋진 여행 코스가 될 수도 있지만 탈주여행을 하는 도망자들에겐 그런 생각은 사치다. 목숨을 건 사투 속에서 마지막까지 위험에 처하면서도 끝까지 도망해야 하는 여행은 결코 낭만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여정을 담은 이 영화 ‘웨이백’은 그렇게 위기에 처한 이들의 각별한 사연이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베리아 수용소로 간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고 기막힌 것이다. 범행으로 인해 갇힌 것이기보단 정치적 이유로 그들이 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보면서 정치적 패배자의 말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당쟁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은 그들의 범행이기 이전에 서로간의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달랐다는 이유로 범죄인이 되고 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다면, 소련의 시베리아 수용소 역시 그런 이유로 가게 됐음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억울함이며, 자유를 빼앗긴 불필요한 이유인 것이며, 그래서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는 그래서 떠나야 할 장소며, 자유의 가치를 알기에 목숨을 각오하며, 탈출해야 할 장소인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어느 인간의 외침이 생각나는 장소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련과 히틀러 독일의 침략으로 점령된 폴란드는 슬픈 역사의 희생양으로 기억된다. 그런 폴란드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박탈을 쉽게 당할 것이며, ‘’야누스(짐 스터게스)가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소련의 점령에 위험인물로 여겨졌기에 인간이 살기 힘든 최악의 조건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지만 거기엔 자신이 사랑했고 믿었던 아내의 밀고가 있었다. 가장 사랑한 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내의 입장을 이해했고, 자신의 영원한 아내로 생각했고, 그가 어쩌면 힘든 여정을 버틴 힘이 된다.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의 연약한 믿음이 그를 강하게 만든 힘인 것이다. 그녀를 만나야겠단 의욕, 그것이 이 영화 서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영화 속엔 야누스만 있지는 않는다. 그와 함께 도망한 이들은 각자의 사연과 용기로 힘든 여정을 하게 되며, 이들의 복잡하고 힘든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행은 명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행되지 않고, 위험과 막연한 목적지에 대한 어려운 선택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간의 불신이 있기도 했으며, 상대를 희생해야 내가 살 수 있단 위험한 고려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선 흔한 생각들이며, 인간의 한계로 자주 지적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인물들은 그런 것들을 어렵게라도 극복하면서 탈주의 여정을 계속 진행한다. 그런 가운데 싹트는 믿음과 인간미, 그리고 결코 서로를 버리지 않은 어려운 결단들로 인해 영화는 강한 감동을 주게 된다.
  가는 과정은 그들이 걷는 과정만큼 어려웠다. 그런 여행엔 언제나 슬픔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다른 선택을 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만남 뒤에 이어지는 헤어짐은 뭔지 모를 숙연함을 자아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별은 확실히 슬픈 과정임이 드러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그런 아픈 사연 속에서도 마지막으로 일궈내는 탈주자들의 성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안도감을 줬을 것이다. 비록 그런 성공 뒤에 숨겨진 사연들 역시 애달픔을 주긴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러나 인도로의 여행만이 주인공의 여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끝없는 역사라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세상의 변화가 있었으며, 그런 분주한 변화 속에서 주인공 야누스의 여정을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을 마지막으로 끝내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인간으로서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지막 여정은 바로 인간관계의 회복임을 영화 마지막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화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도망자들이 걷고 있는 풍광이 더없이 아름다웠고, 추운 겨울 산에서부터 더욱 사막의 모습은 분명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매력을 보여줬다. 영화의 서사를 외면한 채 봤다면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자연환경에 인간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된다. 불신으로 가득했던 처음의 탈주자들의 모임이 믿음과 희생으로 가득한 참다운 인간집단으로 변모하는 것은 여행에서의 자연의 화려한 모습들만큼 반가웠다.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로 보였다. 미국인 정치범인 스미스(에드 해리스)가 ‘여기서 친절은 널 죽게 만들 거야!’라는 냉소 섞인 이야기는 탈주범들이 여행하는 내내 그들을 괴롭힌 엄연한 현명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희망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열망에 다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욕이 그들을 함께 하도록 했고, 영화는 그런 믿음으로 인해 도망가는 여정에서 강한 결속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어쩌면 관객들이 보고 싶었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The Way Back’이 실화에 근거한 영화란 것이 매우 반가웠고 고마웠다.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이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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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칸 - My Name Is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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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협할 수 없다는 맹신과 보복을 해야 한다는 분노가 결합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영화 ‘내 이름은 칸’은 그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다. 나도 선입견으로 세상을 보나 보다. 영화가 시작될 때, 이 영화가 인도영화란 것을 처음 알았다. 언뜻 편견 때문에 과도한 표현력으로 인해 몰입을 방해하고 작품을 제작하는 수준도 열악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선입견들은 깨지고 말았다.
  미국의 머나먼 길을 걸어가면서 대통령을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좀 기이한 이야기의 시작은 충분히 관객을 흡수하는 도입부였다. 그것도 자폐증 환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미국에선 비주류인 어느 남자가 그렇다는 것은 이 영화가 담을 주제가 평범하지 않을 것 임도 암시한다. 사회적 소수자의 모습과 그 인간적 고통, 흔한 소재이고 흔한 주제이겠지만 그 흔한 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의 흔한 약점과 병폐는 영화에서 다시 한 번 고스란히 재생되는 것이다.
  IQ 168이면서도 자신이 자폐증인지도 모르고 보낸 어린 시절은 리즈완 칸(샤룩 칸)에겐 이중적인 인생을 살도록 만들었다. 천재였지만 인도교육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육기관 밖에서 특별하게 교육받아야 했다. 유별난 관심을 받은 덕에 자신을 개발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가족 내에서의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 사연도 있었다. 이런 내적 갈등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은 평등하고 차별되어선 안 된다는 신념을 이어받은 주인공 칸에게 인도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빈번한 물리적 충돌의 장으로서 종교적 고민을 태생적으로 주고 있는 외부적 환경이다. 믿음이 폭력으로 인해 복수심을 일으키면서 종교에서 가르치는 자비와 헌신은 결코 자리할 수 없는 종교적 분쟁은 이슬람교도인 그를 힘든 선택으로만 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결코 순탄할 수 없는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숙명을 갖고 태어난 듯, 그는 그의 주변과 충돌해야 했고 언제나 희생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그를 지탱하도록 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신념이다.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 종교를 상징하는 옷을 넘어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은 평등하기에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믿음은 그의 삶을 지탱하고 언제나 자신의 인생관이 되어 자신의 인간관계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이런 믿음을 다시 시험하게 된다. 9.11 테러로 인해 모든 이들이 자신의 종교와 사상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미국조차 종교와 이념에 대한 흑백논리로 물들고 말았다. 그 속에서 이슬람인으로 산다는 것은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교집단이란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사회적 소수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은 편견에 폭력이 더하면 어떻게 되는 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비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물리적 폭력으로 인해 그는 무너졌다. 그래서 그는 길을 걷는다.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란 말을 미국 대통령에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려는 사연이 무엇이든 문제는 그것조차도 하기 힘들어졌다. 그는 미국 내에서 건실하게 사회를 위해 봉사했고, 나름의 시민의식을 갖고 사회의 고민을 함께 하려 했지만 미국의 집권세력이나 행정부는 그를 미국의 적으로만 생각했다. 또한 기독교 모임을 통해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선기금 마련에서 비기독교들에겐 봉사를 하면서도 미국 내에 있는 비기독교도들에겐 가혹한 미국의 이중적 잣대와 위선을 폭로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더욱 심화된 문제제기를 한다.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체성이 옳은지 틀린 지는 모르겠다. ‘히잡’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낼지언정 불법은 아닌 것이며, 그런 것의 표출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에서 허락한 자유권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르기에 틀렸다고 규정하고, 종교적으로 같은 인간들에 의해 폭력을 당했다고, 모든 종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불법이다.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일순간 다르기에 틀렸다고 규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결국 편협한 복수심에 의해 태생된 것이고, 무분별한 감정 폭발일 뿐이다. 그런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이들이 다시 복수를 품게 되는 악순환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공정성을 상실한 무책임한 폭력은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 사회적 타당성으로, 그리고 개별적 문제로 봐야 할 사안을 극단적으로 일반화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에 대해 너희들이, 혹은 우리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것은 결국 미국이, 그리고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이 싫어하고 증오하는 파시즘이고 전체주의다.  
 

 

  타당성 있는 법의 목적은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모든 이들이 처벌이나 집행에 긍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동안 미국은 그러지를 못했다. 최소한 다른 이들에게 공정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은 탈선이 자주 진행된 시기다. 그런 시간 속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걷고 있는 칸은 분명 한 명의 이슬람교도로서, 미국 시민으로서, 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인물만이 아닌, 모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로서 일반화된다. 그리고 그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자신의 목표가 꼭 성공되길 관람객 모두가 빌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길이 너무 멀기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이 꼭 승리하길 원하고, 그런 사회가 승리하길 바라는 이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참 고마운 영화다. 소수자도 비기독교인도, 그리고 우리와 다른 이들도 틀리다는 편견을 받지 않고 사는 그런 사회가 바로 모든 이들이 염원하는 사회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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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 - The 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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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의지와는 정반대인 세상에서의 몸부림, 그 속에 빚어진 예기치 않은 범죄와 희생은 한 인간을 바닥으로만 밀어 내고 말았다. 그 속의 죄책감,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엔 너무 큰 희생. 그것들이 진행되는 곳은 세계적인 도시인 Boston의 뒷골목인 Charlestown이다.
  못 사는 동네, Charlestown, 한 때는 그곳에 따뜻한 동료애도 있었고 Community 의식도 있었다. 비록 밑바닥 깡패와 같은 인간관계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래도 멋있어 보였다.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그런 관계. 그것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침탈에 보호받을 수 있는 집단의식. 내용이야 어떻든 좋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것에 의지할 수 밖에도 없었고.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엔 그것마저도 사라진 그렇고 그런 도시가 된 Charlestown. 그곳은 가난이 지배하고, 과거의 악연을 재생산하는 사회의 Loser들이 모인 동네로 전락했다. 그런 도시 출신들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었나 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범죄자로까지 떨어진 4명의 젊은이들은 건강한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었다.

 
  자신의 불행한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들은 고용된 전문은행털이범들이었다. 고용됐지만 결코 사퇴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그들이 턴 은행에서 그들은 은행직원들을 협박하지만 그들을 부리는 범죄의 우두머리는 은행털이를 그만 두려는 은행 강도단의 리더 ‘더그(벤 애플렉)’에게 협박으로 화답한다. 건강한 미래를 포기하라는 위협은 그의 미래의 행복도 앗아갈 기세였다. 결국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된 상태에서, 더그는 자신의 위기뿐만 아니라 그가 아끼는 인물들의 위기를 피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피해자였던 여자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신의 이력과 환경 때문에 오래 갈 수 없었다. 결국 사랑도 그의 인생엔 사치였는지 모른다. 자신이 그녀의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언젠가는 폭로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처한 환경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강도로서의 그의 상품가치를 위해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악용할 의지가 있는 그의 의뢰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뻔한 구도를 가졌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 더그의 죄의식은 무척 가슴이 아픈 내용이었다. 현재를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Charlestown과의 지독한 악연은 그가 지내는 시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부모의 불행한 과거 속에서 자란 그는 결국 아버지의 과거의 악연으로 인해 삶의 불행한 질곡을 다시 잇게 됐고, 벗어나려고 하지만 협박만이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현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할 수 없는 그의 Charlestown에서의 삶은 과거야 어찌 됐든 불행, 그 자체다. 그의 은행강도 혐의로 그를 계속 쫓아오고 있는 FBI 형사는 Charlestown의 변형된 악연일 뿐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알면서도 저지른 은행강도에 대해 살아 있든, 죽든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란 고민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더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은 이미 불행했었고 그런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었다. 친구를 위해 희생했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동료, 젬(제레미 레너)의 요구는 더 이상 도망갈 출구가 없는 가련한 Charlestown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는 건강한 미래를 꿈꿀 수도 없었으며, 강도하다 경찰에 걸리면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감방에 가고 싶지 않은, 오늘만을 사는 젊은이다. 그에게 죄의식이 있든 없든 그것이 인생을 사는데 기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더그와 같은 시공간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 엮인 더그의 미래 역시 어느 순간 젬과 닮아 갔으며,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젬과 같은 인생을 사는 위기에 직면한다. 최소한의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조차 거세된 채, 이번 은행털이가 성공하면 다음 은행털이를 계획하는 범죄인일 뿐이다.
  타인을 희생해야만 자신의 현실이 유지되는 모순 섞인 비극은 더그의 죄의식으로 자리잡으면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런 인생을 피하기 위해선 젬처럼 인성이 마비되던가, 아니면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위험한 것이지만 그래도 오직 두 가지만의 선택사항으로 몰리는 더그의 선택은,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의 미래를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더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영화는 무거운 폭력 속에서도 서정적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서정성이 더그의 불행을 제거해주진 않는다. 그 속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 평생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야 할 운명을 순순히 받아 들인다. Charlestown을 저주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의 부모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순순히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는 비극의 대명사인 오이디프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니 방법은 달랐을 뿐이리라. 그의 마지막 선행은 오이디프스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포기했음은 분명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인생에 대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나마 마지막에 보인 인간미는 중요해 보인다. 즉, 묵직한 주제의식에서도 인간미는 분명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 결코 피하지 않으려 한 주인공 더그의 모습은 묘한 인상을 주었다. 범죄자인 그를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됐고 그를 위한 변명을 위주로 영화는 진행됐지만 더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결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 남부의 어느 호숫가에서 죽든 살든,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악연 깃든 숙명 속에서 살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를 인생의 쓴맛을 느끼게 만들었다. 시작이 무엇이든 그런 운명 앞에 나약해지고 무너져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슬펐다. 그리고 살아가는 배경 앞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도록 하는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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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틀리 - Beas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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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화 같은 이야기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돈이나 외모보다 내적인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정말 오랜 만에 보는 낭만적 영화다. 뛰어난 외모들을 갖춘 고등학교 학생들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동화를 즐기는 이들을 타깃으로 삼은 영화 같기도 하다. 비현실적이고 외모보단 내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영화는 동화 같은 이야기긴 해도 많이들 좋아하는 영화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의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과도하게 비현실적으로 간다면 확실한 것은 비판대상이지 그리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집단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황해’나 ‘혈투’와 같은 인간의 본질과 솔직함 등을 표현한 작품들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영화 ‘비스틀리’는 그런 영화 범주엔 속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환타지 멜로물에 속하는 것이니까.
  시작부터 영화는 대놓고 예쁜 외모 찬미로 시작한다. 학생회장 선거에서 후보자 ‘카일(알렉스 페티퍼)’은 공약 같은 것으로 득표전략을 세우지도 않았다. 명문대를 가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외모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거에 나섰다. 그리고 이겼다. 정말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몰라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확실히 예외적인 경우고, 아마도 Fantasy 영화임을 알게 해주는 장치다. 그리고 그의 선거 상대가 ‘켄드라(메리-케이트 올슨)’라는 마녀다. 선거에서 진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됐고, 그게 맞았다. 외모만을 최고로 여기는 것에 저주를 내릴 마녀, 그리고 그런 저주가 왔다. 흉한 외모로 카일을 변하게 만들었고, 흉한 외모를 벗어나기 위해선 특정 기간 내에 진정한 사랑을 얻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수여 받는다. 
 

 

  여기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우리가 아는 현대판 ‘미녀와 야수’가 전개된다. 이제 문제해결을 위해선 외모나 재력보다 인간미를 우선하는 여자를 만나야 하며, 기존에 사귀었던 여자의 속물근성과 변심이 이어져야 한다. 당연히 카일은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 그것도 자신의 선거참모였던 친구와 놀아나는 것을 봤고, 그들이 나눈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절망이다. 이런 그를 구제해주는 여자가 단지 한 번 만났는데도 큰 호감을 갖고 있었던 ‘린디(바네사 허진스)’가 나타나며 이제 그녀는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의 미녀처럼 그의 집에 살게 되며, 그의 보호를 받고, 그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다. 그녀를 위해 그가 하는 행동들은 바로 여자가 꿈꾸는 것들이다. 그 유명한 키다리 아저씨처럼 흉측한 모습의 카일은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유명 상표의 핸드백이나 귀금속이 계속 공급되지만 관객을 포함한 모든 이의 기대처럼 그녀는 그런 것들을 거부한다. 그것에 관심이 갔더라면 그녀 역시 속물근성의 저렴한 여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찾아오는 사랑의 확인을 위한 사태들과 사연들이 전개된다. 
  바네사 허진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정말 예쁘다. 어쩌면 영화는 남자들을 위한 환타지물이기도 하다. 저런 매력적인 여자와 함께 하고, 자신의 조건이 아닌 내적인 마음으로도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 그것은 분명 남자들의 로망인 것이다. 알고 보면 ‘Beastly’란 영화는 남녀 모든 이들을 향한 로망 환타지 영화다. 잠깐이나마, 그리고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매우 좋았다. 그리고 한 가지 잊고 살았던 인간관계의 핵심도 다시 한 번 돼내었다. 사람은 마음으로 사귀어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평범한 핵심 말이다. 
  

   

  영화는 어쩌면 고차원적인 사고와 분별력을 요구하지 않고, 뻔한 미인과 미남의 나열일 수 있는 영화다. 그냥 대중성을 위한 멜로물 정도. 그러나 작은 것도 확대해석하고 유추해야 하는 것이 예술을 관람하는 태도이고, 그렇게 해야 복된 시간을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는 뻔하지만 뻔한 것 너머의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들로 가득 찼다. 동화 속에서 교훈을 귀담아 듣고 배웠지만 어느 순간 어른이 된 인간은 그런 교훈보다 격렬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해져만 갔다. 한 번 야수로 돌변한 후, 다시는 원래의 착한 심성으로 돌아온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그것이 어른이고 무서운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이 동화 같은 영화가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반갑기도 했다. 우린 얼마나 순수한 어린 모습을 담고 있을까 하는 자성 말이다. 변해서 좋았다면 모르지만 너무 나쁘게 변한 것만 같다.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는 것을 나쁘게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가벼운 눈짓 하나만으로도 이 커다란 세상을 떠받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났다. 나도 그 때가 좋았다는 식의 타성과 체념을 그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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